김송배가 만난 문인들 / 12
금리 이창년 시인
김 송 배
금리(錦里) 이창년(李昌年) 시인은 나의 고향 경상남도 합천 삼가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대구로 나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문학 창작 교육을 받은 우리 문단의 신사이며 재원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중반쯤 ‘보리수시낭송회’에서였다. 당시의 시낭송회는 음향시설도 없는 다방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런대로 멋이 있고 낭만이 넘쳤다. 또한 문학 지망생들과 독자들이 많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황금찬, 최은하, 박현령 시인이 주축이 되어 매월 개최하는데 우리 문단에서 가장 오래된 시낭송모임이어서 초대시인도 많았다. 여기에서 이창년 시인과 통성명을 한 결과 고향 선배 시인임을 알고 무척 기뻤다. 그도 좋은 후배 하나 만났다며 한국 문단과 등단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박목월 시인이 주재하는 『심상』지에 등단을 희망하고 있으며 열심히 시 창작 공부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열심히 해서 꼭 성취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깔끔한 외모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어떤 사업체를 크게 경영하여 재산도 많이 모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가가 아닌 천성적인 시인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고 있었다.
내가 등단한 후 그에게 등단 잡지를 한 권 보냈더니 이제는 정식 시인 자격으로 어떤 낭송 모임에 초대해서 자작시를 낭송하게 하고 뒤풀이 장소에서 일일이 소개하는 자상함도 잊지 않았다.
그후 우리는 문단의 문학심포지엄이나 기타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나는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특히 술자리에 동석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의 호탕한 성품은 좌중을 휘어잡고 시 이론, 노래, 음담패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빈 술잔에 / 간헐적으로 발자국 소리 / 뚝뚝 떨어지고 있다 / 풀숲엔 밤이슬 촉촉하고 / 벌레 울음조차 / 멈추네 / 곧 침몰할 정적마저 / 해풍에 흔들리고 있다 / 어느 포구의 추억으로 / 낡은 거룻배 삐걱거리고 있다 / 나의 빈 술잔에
그의 작품「나의 빈 술잔에」(1991. 10. ‘河洛圖書’ 발행 제3시집『나의 빈 술잔에』수록)서 보는 바와 같이 ‘빈 술잔’에서도 인생문제와 연결하여 형상화하는 서정적 이미지가 그의 풍모와 함께 잔잔하게 풍긴다.
그를 요즘 문단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라고 부른다. 그가 기업을 경영할 당시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나 그가 통풍(痛風)으로 고생할 때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항상 동안(童顔)의 웃음을 잃지 않는다.
또한 그는 문우들과 선후배를 구분하지 않고 잘 어울려서 사귀고 술을 마신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문우들이 많다. 그가 주재하는 ‘이한세상’이라는 동인들도 그의 해학(諧謔)적 입담과 더불어 포용의 정으로 끌어안는다.
이 ‘이한세상’ 동인은 이창년에서 ‘이’를, 엄한정에서 ‘한’을, 변세화에서 ‘세’를, 그리고 송상욱에서 ‘상’으로 각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뽑아내어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이창년, 엄한정, 정송전, 이상규, 최재환, 변세화, 강우석, 황송문, 임상덕, 정명섭 시인들이 합류하여 동인지 제10집(2008)을 간행하고 상호 친목과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그는 첫 시집『바람의 門』(1980. 문예원) 발간 이후『겨울나비』『나의 빈 술잔에』『아침이슬 저녁노을』『너가 울메 나는 산이 되리』『동짓달 아흐레달』『미워할 수 없는 사람아』등을 상재했으며 에세이집『간이역』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문단활동에서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맥문학가협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거나 현재 재임 중에 있으며 한국문인산악회 문학상, 서포문학상, 한맥문학대상을 수상하였다.
이창년의 「진달래꽃 따먹고」는 자연 풍경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다. ‘꽃’이라는 상관물이 단순한 서경(敍景)의 재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인의 전조나 심리상태와 암시가 있어서 분위기, 느낌, 간정 등의 뉘앙스를 환기시키는 일종의 협의의 서정성을 추구하는 서경시라고 할 수 있다-중략- 이창년은 그 자연 속에 자아를 동질적으로 합일시켜서 진달래꽃‘과 더불어 존재하는 자아를 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어서 ‘진달래꽃은 진작에 피었지만’ 또는 ‘진달래꽃은 진작에 시들었지만’ ‘백년’ ‘천년’의 시간성은 바로 미적정서로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중략- 이창년은 ‘아무렴 어떠랴’라는 초월이 주관과 객관이 처음부터 미분화되어 있어서 ‘꽃’과의 공존이라는 대명제를 주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어느 문학지에 발표한 작품「진달래꽃 따먹고」에 대해서 내가 쓴 월평의 일부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평가한데 대해서 묵묵부답이었다. 못마땅해서 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묵언(黙言)은 바로 긍정이며 수용이라며 ‘언제 한 잔 빨자’(그는 술 한 잔 먹자는 말을 이처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와 나는 날을 잡아서 인사동 술집 ‘순풍에 돛을 달고’(여기가 그의 단골집이었다)에서 만났다. 문단 이야기, 고향 이야기 등을 섞어서 취하도록 마시면서 내린 결론은 그의 작품 전체에 대한 ‘이창년론’을 내가 쓴다는 것이었다.
또 언젠가는 고향 합천문인협회에서 출향문인을 초청해서 문학강연과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그와 내가 초청을 받고 동행했다. 행사가 끝난 후 해인사관광호텔에 투숙했는데 오랜만에 고향에 왔으니 자신의 생가(합천군 삼가면 금리)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선산에 들려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읍내에서 합류하여 상경길에 올랐다. 직행버스가 없어서 대구로 나가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도 그의 에세이집『간이역』에 수록된 글들을 들려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달플 때도 있었고 즐거울 때도 있었다. 질퍽이는 늪에서 부초잡고 허우적거리기도 하였고 눈부신 태양아래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인생이란 궤도 위를 시름시름 달리면서 낯선 간이역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스쳐간 한적한 간이역의 풍경이 선연히 떠오르며 지금은 그리움이 되었다.
그의 넋두리처럼 들렸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이젠 고희를 넘어선 세월 앞에 서 있다. 은발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고 눌러쓴 모자가 그의 인생과 시의 연륜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형님, 언제 한 잔 빱시다.’ ‘좋지’라는 그의 낭만적인 대답은 그의 변함없는 성품으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