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黃江』
黃江의 꿈과 역사의식
許 炯 萬
(시인. 목포대학교 교수)
1.
金松培(1943∼ ).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음실골짝(공암리) 출생. 1983년 불혹의 나이에 『心象』신인상에 시「바람」, 「아침정경」, 「밤비 속에서」등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다. 등단 10여 년 동안 시집 『서울허수아비의 手話』 ('86. 모모), 『안개여, 안개꽃이여』 ('88, 거목), 『백지였으면 좋겠다』 ('90, 혜화당), 『黃江』 ('92, 한강), 『혼자 춤추는 異邦人』 ('94, 문단), 시선집『허물벗기 연습』 ('94. 경원) 등을 꾸준히 문단에 내놓음으로써 중견 시인의 위치를 굳히다. 그리하여 제6회 윤동주 문학상도 수상 ('90)하다.
이상이 시인으로서의 金松培의 핵심적인 삶이다. 그동안 많은 평론가·시인들이 金松培 시인의 작품 경향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해온 것을 간추리면 ① 순수서정을 바탕으로 현실과 삶의 고뇌 및 갈등 투영 ② 인간 내면의 가치관과 철학을 연상 작용으로 승화 ③ 향토적인 가락을 현대시에 이입시키는 새로운 시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들은 金松培 시인의 그간의 시적 관심사와 작업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그의 제4시집 『黃江』 중심으로 그의 시적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黃江』은 총 88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집이다. 金松培 시인은 이 연작시를 1990년 11월호 『心象』의 신작특집으로 5편을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한 100편정도 연작으로 써서 시집으로 묶을 생각을 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그 후 1년 뒤 『心象』 1991년 10월호에서 "황강을 소재로 족히 30여 편의 시가 완성"되었다 했고, 그리곤 다시 6개월 후인 1992년 4월, 마침내 88편을 묶어 우리에게 튼실한 한 권의 시집으로 내 보였다. 이처럼 2년여에 걸쳐 몰두한 연작시집『黃江』을 출간한 지 1년이 지나고 『종합문예』지 1993년 3월호에 그는 "본격적인 시창작에 임하지 못하고 뭔가 쫓기는 심정으로 지천명을 넘겼지만 전원적 감상에서 도출된 고향시를 그냥 버리지 못해 『황강』으로 묶어 떠나보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金松培 시인으로 하여금 나이 50을 넘기면서까지 ‘黃江’에 매달리게 했으며, ‘黃江’을 통해 얻어진 고향시를 '그냥 버리지 못'하게 했는가.
이의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黃江의 위치와 실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집 『黃江』의 처음 물줄기부터 저 아래 하류에 이르기까지 金松培 시인의 혼이 함께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백 팔십 리 황강'(49번)은 金松培 시인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 용주면(龍洲面)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르고 흐르는 낙동강 지류이다.
시인은 이 黃江을 자신의 본관인 '의성김씨의 강물' (31번)로 표현함으로써 탯줄이 묻힌 고향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천년을 귓전에 울리는'(1번) '그리움의 노래' (2번)로 간직하고 있는 사향(思鄕)의 실체로 표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서 있더라
쪼무래기 몇
양지쪽에 웅크리고 조잘대던
그 모습까지 그대로 포근하더라
이십 몇 년 만에 안기는
너의 품안은 여전한 온기
반백으로 찾아온 나를
지금도 반갑게 손 내밀더라
-- 「14 ·공암리에서」 일부
경남 합천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황강을 중심으로 그 유역이 삶의 터전으로 발달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삶의 터전 중의 한 곳이 金松培 시인의 고향 용주면 공암리(음실골짝) 이며 이곳에서 그는 낳았고 시오리길을 '무명베 책보따리를 빗겨 짊어지고' ('90, 『龍洲校誌』창간호) 소년 시절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그러기에 서울서 먼지로 떠돌다가 '이십 몇 년 만에' 찾아와 '안기는 품안'은 얼마나 다사로웠을까 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향 떠나간지 이십 몇 해,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변했어도 시인 자신의 유년 시절과 똑같은 또래의 '쪼무래기 몇'에서 그는 '반백'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 아니 간절한 꿈의 원형으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옮겨서 '서대문구 연희동 산82번지' (15번) 에 첫 등지를 틀 때부터 '황강까지 휠휠 날아 올 수' (15번) 있었고, 대학로에 직장을 잡고 대학로에서 온 삶을 부대껴도 '묻어둔 황강의 전설이 조금씩은 풀리리라' (16번) 믿을 뿐 아니라 너무 어두운 서울의 밤에도 '나의 별은 황강의 밤으로 밤마다 낡은 상상력의 비늘을' 세우는 시인으로서의 위치까지 확인할 수가 있는 셈이 된다.
자연을 소재로 쓴 향토적 정서의 시가 한국적 전통의 동일성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金松培 시인의 고향의식은 단순한 시적 소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정신으로까지 승화하고 있음은 본다.
이 점은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시작 노트, 즉 '향수를 느낄 때 마다 한결 푸근해지는 나의 젖줄 황강' (1991. 스포츠서울) '고향에 질펀히 누워있는 黃江은 청순한 서정의 원류' (1991. 『응시』) 등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고향의식의 작업이 단순한 자연적 소재, 향토적 정서에만 머물지 않는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붉은 완장 자위대가 죽창으로 훑고 간 뒤
인민군 소년병들은 감흥시를 따먹고 있었습니다
낙동강 전투가 얼추 끝났다는 전갈을 받고
빨치산 야산대의 기습이 당신을 떨게 하였습니다.
아아 웃동네 김 서방이 끌려가서 죽고
우리 집 씨암소도 질질 끌려가고
숨죽인 채 문구멍으로 들리는 군화 발자국 소리
치맛자락 꼭 붙잡은 나도 떨었습니다.
-- 「3·어린 유월의 기억」 일부
시인의 나이 7살 때쯤 육이오를 겪었을 터이다.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 현장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압축하듯 생생하게 작품화했다.
황강은 이 역사를 '심연' (13번) 깊숙히 간직하며 흘러갔고, 따라서 황강은 곧 '섣달 그믐날 밤 등불 하나 켜들고 섰'는 '어머니' (13번)이자 '살아가는 일들이 허망 뿐 일지라도' (56번) '자, 날아보자' (49번) 소망하는 '영혼' (49번, 56번)에 다름 아니다.
3.
金松培 시인은 '나에게 있어서 시적 출발의 모태는 고향' 이라고 늘 말한다. 그래서 '잠들 수 없는 내 곁에는 언제나 용주의 고향 가는 길과 황강줄기가 질펀이 누워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곤 한다고 덧붙인다. 또 있다. 우리가 金松培 시인의 시세계를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그 자신의 말, '황강은 언제나 나의 육신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리움이 넘쳐서 어머니의 모습으로 회귀'한다는 말에서 '黃江'은 이제 한낱 수많은 강의 이름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점, 시적 출발의 모태일 뿐 아니라 시 그 자체의 전부이며 영혼이라는 점, 그리고 黃江은 시인의 체험이 순수하게 그대로 강의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 함께 숨쉬는 역사적 존재라는 점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확신을 연작 마지막 작품 88번은 다음과 같이 증명해 주고 있다.
어느듯
비 젖는 밤이 십수년을 황강으로
나의 꿈 풀어 보내지만
어둠 속 감추어진 눅눅한 언어가
아름답기만 할 뿐입니다.
밤마다 고요로움 속에 따스한
고향을 찾아가는 일로 살아 갑니다 .
('95.6. 『陜川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