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린 겨울을 죽이는 봄. 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 봄, 분홍빛이 세상을 적시는 봄.
라누아는 곧 봄이 온다며 침대 위를 방방 뛰었다. 아니, 방방 뛰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침대의 용수철이 망가질 정도로 신나게 뛰어댔다. 하여간, 왜 저렇게 봄이 좋은지... 이라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흘러가는 계절이 아닌가. 당연한 계절의 순환. 무슨 일이 있어도 필연적으로 오는 것. 그런 일에 저렇게까지 신나야 하는 건가 싶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라누아는 화를 내면 굉장히 무서웠고,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아서. 좋게 말하면 배려였고, 나쁘게 말하면 귀찮음이었다.
"이라, 넌 안 신나? 봄이 오는 거야, 봄이!"
"글쎄, 장작 패는 게 끝난다는 건 좋네."
그게 뭐야, 이라는 재미없어. 라누아는 짧게 투덜거리곤 살려 달라고 외치는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언제쯤이면 침대 위에서 뛰면 안 된다는 것을 학습할까? 라누아 때문에 라누아 방에는 매해 새로운 침대가 들어와야만 했다. 한 번은 그 돈이 아깝다며 그의 부모님이 성질을 고치겠다는 이유로 침대를 안 사주려고 했다고 하던데... 그 다짐이 한 달을 가지 못했다고, 마을에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라누아가 자기 침대가 없으니 부모님이 사용하는 침대를 다 차지해 버렸다나 뭐라나. 한 달 동안 바닥에서 잠을 잤던 까닭에 몸이 아플 대로 아팠던 부모님이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했었지.
이라는 라누아를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이상한 애긴 해. 이라 또한 그의 성격 때문에 굳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으나, 마을에는 아이들의 수가 너무 적어 또래는 라누아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내 죄지..." 이라가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그리고 그걸 기가 막히게 잘 들어버린 라누아의 말. "아니야, 아무것도."
이라는 라누아의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섰다. 라누아가 침대 위에서 뛰는 바람에 원래 해야만 하는 일들이 50분은 늦어져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라누아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전부 알아 시간이 한참 늦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밤에 겨울 숲으로 들어가 덫들을 확인해 보고 오라는 벌을 내렸겠지. 그 이라도 그 벌은 상당히 꺼려졌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숲을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어쩌면 그 무시무시한 협박 때문에 마을 아이들이 다 착하게 큰 걸지도 모른다.
"왔구나?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을에서 가장 착한 아주머니가 시킨 일은 정말 간단했다. "이 빵들을 이장님께 전해주겠니?" 도중에 라누아가 날개를 다친 새를 구해줘야 한다고 고집부려 원래 도착해야 하는 시간에서 2시간은 훨씬 넘겨버렸음에도 화를 조금도 내지 않는다니. "저러니까 마을에서 착하다고 알려진 거야. 우리 안 혼내셨잖아." 이라는 빵 두 개가 든 종이가방을 한 손에 쥐고, 반대손으로 라누아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으응. 근데 이상해. 왜 우리 둘을 불렀을까? 너 혼자 해도 되잖아."
"네가 하도 사고뭉치니까 내가 없는 동안 또 사고 칠까 봐 그런 거겠지. 집에 있으면 넌 분명 지금도 계속 침대 위에서 뛰고 있었을걸?"
라누아가 눈 사이에 핀 작은 꽃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이장님 댁에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이라는 생각했다. 꽃을 봤으면 새에게 빼앗긴 시간의 곱절을 빼앗겼을 테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이라는 라누아를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이장님, 여기 밀라 아주머니께서 부탁하신 빵이에요." 너무 잘 알아버린 탓에 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라만 잠깐 들어오겠니?"
그러다 라누아가 무슨 일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이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누아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가만히 있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고민 끝에 이장님 집에 들어섰다.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결국은 들어섰겠지. 이라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성격이 썩 좋지 않은... 착한 아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렴."
"저 혼자서 어떻게 마셔요. 밖에서 기다리는데."
"확실하니?"
불길한 기분. 무언가 느껴선 안 될 걸 느낀 것 같아 절로 이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의 감은 꽤 정확한 편이었고, 그도 그걸 알았기에 불안만 커져갔다. 원래라면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연 다음 다시 닫았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예의는 눈 씻고 봐도 안 보일 행동. 이라의 생각과 마음이 너무 크게 어긋나 이제는 알면서도 악을 저지르는 꼴이 되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그마한 발자국들뿐. 분명 라누아의 것일 테지. 눈이 아직 다 덮지 못한 곳에 라누아와 이라가 함께 걸어왔다는 증거가 아직 남아 있었고, 그것과 저 작은 발자국들의 크기가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앞을 볼 수 있는 것들이라면 분명 다 그렇게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저 발자국을 따라가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이상하게 서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괜히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 발자국의 보폭이 중간부터 커졌음에도 그것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밤에는 오겠지. 라누아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돌아왔을 때 혼쭐내주면 되겠다고, 이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라누아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라누아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밤 11시. 자녀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마을을 뛰어다니며 찾는 등의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라누아의 부모를 보았을 때였다. 그냥 자는 거예요? 정말? 애가 들어오지 않는데? 이라의 집은 라누아의 집과 꽤 떨어진 곳에 있어 가로등도 하나 없는 곳을 작은 등불만을 의지해서 걸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잡생각이 떠오르기 아주 좋은 곳이었다.
라누아의 이름은 1월에서 따왔다고 했었지. 자기들은 작명 센스가 없다면서. 그렇다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았으면,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침대를 매년 사줬을까? 솔직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 성격의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어. 아, 그만. 그만 생각하자. 내일 돌아올 수도 있는 거잖아. 라누아는 봄이 좋다고 했다. 그게 오는 것이 기대된다고.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시? ...아니야. 봄이 좋다고 했는데 그렇게 가련한 운명일 리 없어. 이라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이 틀렸기를, 라누아가 도망을 쳐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었기를 바라면서.
봄, 분홍빛이 세상을 적시는 봄. 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 봄, 시린 겨울을 죽이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