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째바암’을 만물로 오역하였으나 ‘째바암’의 원형은 ‘짜바’로서 하나님의 군대를 의미한다.
2) ‘바예쿨루’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온전케(아사)하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 하는 뜻이다.
3) 창세기의 명칭은 오역한데서 잘못 붙여진 이름으로서 바른 명칭은 베레쉬트다.
4) ‘바라’는 시작(처음)의 의미이며, ‘아사’는 완성 또는 나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바라와 아사는 하나다.
5) 우리말 성경은 ‘바라’를 창조하다로 번역하다 보니 아사, 완성이 없는 역사서가 되어 버렸다.
나. 본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 번역이 잘못되었다.
(바에쿨루 핫사마임 베하아래츠 베콜- 째바암)
(바른 번역은 그 하늘들(쌍수, 복수)과 그 땅 모든 째바암이 온전케 이루어졌다(복수)다.)
1) ‘째바암’을 만물로 오역하였으나 ‘째바암’의 원형은 ‘짜바’로서 하나님의 군대를 의미한다.
‘째바암’을 ‘만물’로 번역하고 있으나 오해의 요소가 많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곧 천지 만물로 오해하기가 쉽다.
‘째바암’의 원형은 ‘짜바’에서 유래하였다. ‘짜바’는 (군대 또는 하인들이) 싸우다, 수행하다, 소집하다, 전쟁하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짜바’는 군대를 의미하며, 싸우기 위하여 항상 준비된 군대를 의미하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가? 바로 내 안에 있는 죄와 싸우는 것이다. 겉 사람의 속성인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곧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안에 있는 모든 적들과 싸우는 일을 한다.
계시록에는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세마포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신부(하나)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2) ‘바예쿨루’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온전케(아사)하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 하는 뜻이다.
‘바예쿨루’는 푸알 동사로서 강조 수동태다. ‘온전케 이루었다’다. 창 1:31에 ‘아사(칼 동사 완료)’하셨기 때문이다.
‘바예쿨루’는 접속사 ‘바’(그리고)와 ‘킬라’(마치다. 이루다, 성취하다)다. ‘바예쿨루’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온전케(아사) 하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다. 부족함 없이 온전케 완성되었음을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이 내 안에 온전케 세워졌음을 말씀하고 있다.
세상 학자들은 창 1장을 이(E) 문서(엘로힘 하나님)로 창 2장을 제이(j) 문서(여호와 하나님)로 나눈다. 창 1장과 창 2장 이하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 유명한 학자들은 계속해서 엉뚱한 의미의 말을 떠들어댄다.
3) 창세기의 명칭은 오역한데서 잘못 붙여진 이름으로서 바른 명칭은 베레쉬트다.
성경 첫 장은 ‘창세기’로 오해하여 제목을 잘못 붙여버렸다. ‘창세기’라는 서신은 없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오해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창 1장은 ‘베레쉬트’다.
엘로힘 하나님이 ‘아사(온전케 이루어짐)’하신 이유가 바로 창 1:1에 ‘바라’하였기 때문이다. ‘바라’ 동사와 ‘아사’ 동사는 바로 엘로힘 하나님의 속성이다. 정확히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의 속성들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바라’하시며 ‘아사’가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모든 자녀 마음 안에 하나님의 ‘바라’ 하심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수많은 난관(難關)을 극복해야 한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대로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의 힘든 여정을 이겨내고 가나안 땅(에레츠)까지의 순례의 길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서 인도하심이 ‘바라’이다. 그리고 온전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성전(몸 된 성전)을 세우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과 하나 됨이 ‘아사’다.
4) ‘바라’는 시작(처음)의 의미이며, ‘아사’는 완성 또는 나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바라와 아사는 하나다.
그러므로 ‘바라’와 ‘아사’는 항상 하나이며, 하나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 ‘바라’는 시작, 처음의 의미로 나타나며 나중의 의미로 ‘아사’를 나타낸다. ‘바라’와 ‘아사’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서에 등장하여 계시록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시제가 없다. 모두 내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빛이다.
그 생명의 그 빛이 없으면 우리 안에서 ‘바라’와 ‘아사’의 일이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엘로힘 하나님의 ‘아사’가 내 안에서 일어나면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된다. 내가(비유)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불경에서는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창 1:1에 나오는 ‘바라’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사’와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라’를 ‘창조하다’ ‘만들다’라고 번역하면 안 된다. ‘아사’가 결론이기 때문이다. ‘아사’가 있기까지 끊임없이 ‘바라’하여야 한다. ‘바라’는 항상 ‘아사’를 지향한다. 그리고 ‘바라’는 ‘아사’와 하나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5) 우리말 성경은 ‘바라’를 창조하다로 번역하다 보니 아사, 완성이 없는 역사서가 되어 버렸다.
세상 학자들이 창 1:1에 ‘바라’를 창조하다로 잘못 번역하였다. 그러면 ‘아사’와 연결되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는 단절되고 말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바라’와 ‘아사’와의 관계를 원래 의미에서 벗어나 번역하였다. 이는 바라(개간)와 아사(완성)를 ‘만들다’ ‘창조하다’로 번역하다 보니 그다음 구절부터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 창 1장의 내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창 2장 이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우주 창조, 만물 창조로 오해하여 나온 결과로서 종교인들이 그렇게 잘못 알고 번역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우주는 인간들이 보기에 너무 크고 방대하여 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상이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엘로힘 안에서 ‘바라’하신 것은 반드시 ‘아사’하여 종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사’하게 되면 엘로힘 하나님의 일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며 ‘베레쉬트’만 남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