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십일조와 헌물은 돈이 아니라 아들 된 나를 의미한다.
나. 여우의 굴과 공중의 새는 모두 비유로서 공간 세상에 사는 들짐승이 아니다.
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근본(베레쉬트, 엔 아르케)에서 나왔다.
2. 본론
가. 십일조와 헌물은 돈이 아니라 아들 된 나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일조와 헌물은 성경의 대 주제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가 돈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삼으셔서 구원받았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이들은 거짓말로 속이는 자들이다.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이다.
인생은 돈만 있으면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하다고 한다. 즐기는 것은 능력만 되면 최대한 즐긴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 하고 권세를 잡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과 거꾸로 가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코스모스, 몸과 마음)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였고, 이 세상에는 행복이 없다고 하는 이 말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평생 감옥 살이 하면서 자기 취향대로 꾸며 놓고 최신 가구도 들여놓고 한다. 행복감에 젖어 자랑하면서 산다. 안 그러면 우울증에 걸린다.
그런데 아무리 새로운 것으로 치장해도 여전히 감옥은 감옥이다. 인생들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랑스러움에 목말라한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삶의 희망을 소유한다.
이 상태가 애굽의 상태로서 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나. 여우의 굴과 공중의 새는 모두 비유로서 공간 세상에 사는 들짐승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바른 번역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 여우들도 굴들이 있고, 그리고 그 공중의 그 새들도 거처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그 머리를 둘 곳이 없다.)
여기 등장하고 있는 여우 굴, 공중의 새는 모두 파라볼레(비유) 이며, 공간 세상에 사는 실제 들짐승들이 아니다. 내면에서의 심리 현상을 가리킨다. ‘인자’로 오역한 ‘그 사람의 그 아들(호 휘오스 투 안드루프)’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다. 속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속사람으로부터 나온 그 사람의 그 아들이다.
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근본(베레쉬트, 엔 아르케)에서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종)의 모습으로 일시적으로 오셨다. 우리가 육신으로 보는 육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람의 그 아들(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 아니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하나님(근본)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근본(아르케)에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안식하실 곳은 내면의 몸 된 성전이며, 몸과 마음 세상(코스모스)이 아니다.
코스모스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할 안식처 곧 몸 된 성전이 없다. 하나님은 하늘 성전의 지성소(속사람)에만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집)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성전(집)이 우리 내면에 있다. 하나님은 저 우주에 저 광활한 공간 어디에도 거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의 지성소에만 거하신다.
이 성전이 우리 안에 세워지기를 바라지만, 몸 된 성전이 세워지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가 없다 하신다. 그래서 머리 둘 곳(안식할 곳)이 없다 하였다. 하나님은 속 사람과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쉬실 처소다. 처소인 베레쉬트(엔 아르케, 근본)는 조건지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