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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10차 / 전남 순천
1. 일 시 : 2010. 11. 14(일)
2. 시 간 : 무양청사 / 6시 출발
3. 장 소 : 조계산 / 선암사 / 송광사 /순천만
4. 테마여행 일정
◇등산코스 : 선암사 - 작은굴목재-연산봉-송광굴목재 - 송광사 /7.4km / 4시간정도
◇문화탐방 : 선암사 / 송광사 / 순천만
◇별미탐방 : 순천 강변장어구이(짱뚱어 전골) / 전남 순천시 대대동 594 /전화 061-742-4233
5. 여행길라잡이
가. 선암사 : 선암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가을날의 선암사는 남도 단풍의 명소인 장성 백양사보다 전체적인 풍경과 정취는 뛰어나는 이야기가 있고 선암사는 국보가 없지만 절집의 그윽한 운치와 고풍스러움은 국보급이 되고도 남는 절이다.
백제 때 아도화상과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도선설이 유력하다. 선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한 분은 고려시대 고승인 대각국사 의천이다. 지금 남아 있는 대웅전 기단과 돌계단이 그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여졌다 하는데 신선이 내려올 만큼 풍광이 좋다.
보물 제 400호로 지정된 무지개 모양의 승선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홍예교이다. 조선시대 호암대사가 백일기도를 하다 관세음보살을 만나고 나서 원통전을 세운 후 절 입구에 승선교를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나.선암사는 ‘3無 사찰’이다.
▷사천왕문이 없다. 조계산 주봉이 장군봉이므로 호법신인 사천왕상이 필요 없다.
▷대웅전 기둥에 주련이 없다. 개구즉착(開口卽錯)--입을 열면 틀리다. 깨달으면 말이 없다. 주련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글씨를 쓴 판자를 말한다.
▷어간문(대웅전 정중앙의 출입문)이 없다.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통과 할 수 있으므로 어간문이 필요가 없다.
다.진입영역의 답사 포인트
▷ 입구의 진입로
계곡과 함께하는 길로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목련, 앵두, 철쭉, 영산홍, 동백 등의 꽃길이다. 활엽수림으로 단풍도 절경이다.
▷ 부도밭
측백나무에 싸여있고 부도 11기, 비석 8기. 부도는 팔각 원당형, 사사자형 부도는 1928년에 세워진 화산대사의 부도, 방향이 다른 비석 1기는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자형 석조물은 구례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8호), 제천 빈신사지 4사자석탑(보물 제94호) 등이 있다.
▷ 장승
지금 서 있는 목장승은 1987년(정묘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남자 여자가 아니라 두 장승 모두 남자상이란 점이 특이하다.
방생정계--이곳부터는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호법선신--불법을 수호하고 성불하게 돕는 착한 신 1904년(갑진년) 목장승
함양 벽송사 목장승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장승이다.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어 오랜 세월을 견디어 냈다. 지금은 설선당에 옮겨 보관 중이고 장승의 위치와 명문이 지금의 것과는 반대이다.
▷ 작은 무지개다리와 승선교(보물 제400호, 큰 무지개다리)
작은 무지개다리에 들어서야 승선교의 둥근 원을 볼 수 있고 물에 비친 승선교의 완전한 원안에 강선루가 들어온다. 승선교는 우리나라 무지개다리 중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다는 평을 듣는다. 홍예석 중간에 이무기돌을 돌출시켜 장식효과에 재해를 막는 효과를 더했다.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선녀와 인연이 많은 듯 선녀가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선경이 떠오른다.
▷ 강선루
2층 팔작지붕누각, 다리 하나가 계곡에 빠져있다. 강선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흐르는 계곡물에 두 다리가 잇달아 있어 운치가 더 있다.
▷삼인당(三印塘)
길다란 둥근 타원형의 못 가운데 알 모양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 모양의 섬은 자각자리(自覺自利), 긴 타원형의 못은 각타이타(覺他利他)를 의미한다.
삼인당의 삼인(三印)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이라는 삼법인을 말한다.
*경내 연못은 설선당 서쪽의 쌍지, 삼성각 가는 계단 옆의 방지(옆에 누운 적송도 볼거리), 창파당 앞의 연못, 일주문 왼쪽의 작은 폭포 연못에 물이 모여 인공수로를 따라 삼인당으로 흐른다.
▷ 야생차밭
삼인당과 일주문 사이에 측백나무, 전나무와 같이 키 큰 나무 아래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야생차밭이 있다. 가을과 겨울사이에는 정갈하고 향기 좋은 차꽃이 핀다.
경내 뒤편(원통전과 장경각 사이의 쪽문 밖)의 산비탈에는 더 큰 차밭이 있고 은행나무가 볼거리이다.
▷ 해우소
해천당 옆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이다. 크고 깊은데다가 냄새도 없고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丁’자형 건물로 많은 사람을 수용하도록 2열로 배치되었다. 가장 안쪽에 앉아 벽면을 보면 바깥 숲속의 경관이 들어온다.
옛날 표기법의 ‘뒤 ㅅ간’을 ‘깐뒤’라고 장난스럽게도 부른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
라.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국보 42호 /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신라의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불감은 모두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의 작은 방에는 각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은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2줄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에는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쪽 방에는 실천을 통해 자비를 나타낸다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동자상이, 오른쪽에는 사자상이 서 있다. 왼쪽 방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문수보살은 사자가 새겨져 있는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보살의 좌우에는 동자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세부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국보 43호 고려고종제서 (高麗高宗制書)
이 문서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제2세 진각국사 혜감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 제서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을 나타낸 홍, 황, 백색 등의 무늬가 있는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전체문장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아 귀중하다.
◇ 국보 56호/칭 송광사국사전 (松廣寺國師殿)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 보물 263호 / 송광사 하사당 (松廣寺下舍堂)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선사가 처음 세웠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져 고려 중기 보조국사가 제자들에게 당부하여 다시 지었다. 지금의 절은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그 중 스님들이 생활하던 하사당은 대웅전 뒤 한층 높은 곳에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왼쪽 2칸이 툇마루를 갖춘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장식을 겸하는 간결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부엌 지붕 위로 네모 구멍을 내고 조그만 환기구를 만들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 스님들이 생활하는 승방(僧房) 건축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보물 302호 / 송광사약사전(松廣寺藥師殿)
약사전은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서, 규모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앞면·옆면이 모두 1칸으로 간결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 있는 우리나라 법당 중 가장 작은 이 약사전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의 건물로 추정한다.
◇보물 303호 / 송광사영산전 (松廣寺靈山殿)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기법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좁은 자리에 아담한 규모로 세운 소박한 건물이다.
◇ 보물 1043호 / 송광사십육조사진영 (松廣寺十六祖師眞影)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에 활약한 16명의 고승들의 초상화로 모두 16점이다. 보조국사의 초상화는 가로 77.4㎝, 세로 134.8㎝로 16점 모두 규모나 제작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7명이 중앙을 바라보며 있고 오른쪽에 8명이 중앙을 바라보며 있다. 보조국사는 녹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모습이다. 옷자락은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의 농담으로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을 보여준다.
정조 4년(1780)에 안치된 이 초상화들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중기 불교 초상화의 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보물 90호 / 송광사대반열반경소 (松廣寺大般涅槃經疏)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열반을 다루고 있는 경전으로, 중생들에게 열반을 종교적·철학적으로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담무참(曇無嘴)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당나라 법보(法寶)가 주석을 붙인 것으로, 권9와 10이 한 책으로 되어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세로 35.5㎝, 가로 32.7㎝이다.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속장경을 보고 다시 새긴 것인데, 속장경은 고려 숙종 4년(1099)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 온 불경을 흥왕사에서 간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이 속장경이 아니고 속장경을 보고 다시 새겼다는 사실은 체재가 두루마리 형식을 따르나 책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종이의 질이 조선 초기의 것이란 점이다. 또한 같은 절에 보관되어 온『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끝에 속장경을 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어 그 확증을 굳혀 준다. 원본 맨 뒤에 있는 기록을 보면 장모(蔣모)가 목판의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으며, 글씨는 당시 유행한 구양순의 서풍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만큼 원판 못지않게 정성들여 불경을 새겼으며, 불교경전으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판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보물 134호 / 경질 (經帙)
두루마리로 나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불교 공예품이다.
가느다란 대나무 조각을 색실로 엮어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끝단에는 삼각형의 비단 베를 붙여 끈을 달아 경전을 말아 두게 하였다. 대쪽은 색실로 엮어 꽃무늬를 넣었고, 둘레는 비단을 두르고 그 안에 종이를 발랐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한 편이지만 여러 가지 색실로 나타낸 문양은 아직도 정교하며 잘 남아 있다.
비록 낡아서 그 형체만 남아 있지만,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유물로 그 가치가 높다.
◇ 보물 175호 / 송광사경패 (松廣寺經牌)
경패는 원래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내용을 표기하는데 달아서 사용하던 것인데, 송광사에 전해내려오는 경패는 총 43개이다.
표면에 액(額)을 만들어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으며, 가장자리에는 여러 가지 문양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문양은 덩굴무늬, 학무늬 등 각양각색이다. 또 밑으로는 보살, 나한, 신장상 등을 돋을새김하였고, ‘정(貞)’, ‘주(周)’, ‘진(晉)’, ‘하(何)’ 등의 기호가 새겨져 있다. 그 중에는 여러 상 밑에 연꽃대좌 혹은 난간을 표시한 것과, 위에 장막 또는 격자무늬창을 세밀하게 조각한 것, 밑으로 기호자로 연꽃무늬를 새긴 것, 집모양을 조각하여 그 안에 새긴 것 등이 있다. 측면(약 1㎝두께)에는 둥근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세 개는 뚫어새긴 것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조각의 정교함이나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 보물 204호 / 송광사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
(松廣寺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법화경 28품 중에서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송나라 사효(思孝)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쓴 것으로 크기는 세로 26㎝, 가로 35㎝이다. 보문품이란 법화경의 한 부분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구제에 관하여 이야기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판을 새겨 찍어낸 것으로,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속장경(續藏經)을 원본으로 삼았다. 다른 책과는 달리 내용을 도표식으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각 행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고 문장간에 경계선이 없다.
책 끝에는 고려 숙종 4년(1099)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조 7년(1461)에 간행된『송광사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와 새긴 솜씨, 종이질 등이 같아 세조 때 다시 펴낸 것이 확실하다.
◇ 보물 205호 / 송광사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松廣寺大乘阿毗達磨雜集論疏)
불경은 크게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三藏)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론(論)’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가리킨다. 아비달마집론은 부처님의 열반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여기에 안혜(安慧)가 해설을 붙이고 현장(玄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아비달마잡집론이라 한다.
이 책은 아비달마잡집론에 신라의 현범(玄範)이 다시 해설을 붙인 것으로, 전체 16권 중 권13과 권14를 각기 1책으로 묶은 것이다. 책의 끝에 고려 선종 10년(1093)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원래 고려속장경의 하나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속장경을 원본으로 하여 다시 목판에 새긴 후 찍어낸 것이다.
◇ 보물 206호 / 송광사 묘법연화경찬 (松廣寺妙法蓮華經纘述)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고려속장경을 원본으로 다시 찍은 것 가운데 하나로,『법화경』에 대한 당나라 혜정(慧淨)의 주석서 10권 가운데 권 제1, 2를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었으며,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각 권의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헌종 1년(1095)에 남궁예가 글을 써서 처음 간행한 것을,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찍은 것 가운데 일부가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보물 207호 / 송광사금강반야경소개현초 (松廣寺金剛般若經疏開玄초)
금강반야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계종의 근본 경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해 공철(公哲)이 쉽게 풀이한 것을 나중에 지온(志온)이 보충한 것으로 ‘개현초(開玄초)’에 관한 7권 중 권4-6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진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6㎝, 가로 35㎝이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온 불경을 토대로 만든 속장경(續藏經)을 보고 조선 세조 7년(1461)에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다시 새겨 펴낸 것이다.
각 권의 끝 부분에 글씨를 쓴 사람들과 교정을 본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펴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송광사에 보존된 여러 속장경이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고 간경도감에서 속장경을 보고 다시 새겨 펴낸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라. 송광사 3대명물
※ 비사리 구시
옛날 옛적에 승주 땅 어느 고을에 할머니가 살았다. 일찍 남편을 여읜 할머니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큰소리 한 번 나지 않을 정도로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는데 가끔 송광사에 들러 불공을 드리는 것이 일이었다. 가고 오는 데만 족히 반나절이 걸리는 데도 할머니는 송광사에 들러 불공드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70이 되었는데도 할머니는 매우 정정하여 다들 처녀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그 할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숨졌다. 너무도 조용히 숨졌기에 자식들은 처음엔 할머니가 숨진 지도 몰랐다.
죽은 할머니는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죽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궁금해서 앞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염라대왕이 재판을 한다는 것이었다. 염라대왕이 승주 송광사를 무척 좋아하여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거의 염라대왕 앞에 이르자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이 가운데 누가 승주 송광사를 가본 적이 있느냐? 가본 사람이 있으면 살려주리라.” 그랬더니 너도나도 가보았다고 염라대왕 앞에 나섰다.
염라대왕이 맨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정말로 송광사에 가보았느냐?” 하고 물으니, “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비사리 구시 길이가 얼마며 높이나 폭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자 가본 적이 없는지라 우물쭈물 엉터리 대답을 하였다. 염라대왕이 크게 노하여 지옥으로 보냈다. 그 다음, 또 그 다음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역시 염라대왕이 비사리 구시의 길이, 높이, 너비를 물으니 할머니가 답하기를 “살아생전 해마다 초파일에도 가보고 보조국사님 제삿날도 가보고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구시를 보고도 재보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더니 염라대왕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크게 칭찬하며 좀 더 살다 오라 하였다.
할머니가 눈을 떠보니 아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죽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자 아들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아들을 붙잡고 저승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는 즉시 송광사에 있는 비사리 구시를 재러가자고 하였다.
할머니는 그길로 아들과 함께 자를 들고 송광사에 가서 비사리 구시를 재었다. 아들이 “어머니, 길이가 17자입니다. 그리고 높이는 3자에 너비는 4자입니다.” 하고 가르쳐 드렸다. 하지만 돌아서서 일주문을 나서자마자 할머니가 “아범아, 아까 몇 자 몇 자라고 했느냐?” 하며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들은 명주실을 길이, 높이, 너비만큼 각각 끊어 할머니의 빨간 주머니에 넣어 드리며 “어머니, 나중에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이 물으면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어 ‘길이는 요만큼, 높이는 요만큼, 너비는 요만큼입니다.’ 하고 답하세요.” 하였다.
죽었다 살아 돌아온 할머니는 100살 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에 비사리 구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 후로 한때 이곳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송광사 비사리 구시를 자로 잰 후 실을 끊어 빨간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에 노인들이 많이 찾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비사리 구시는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인데, 약 4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쌍향수, 능견난사와 더불어 송광사 3대 명물 가운데 하나이다.
※능견난사
멀리서 발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몇 명의 스님들이 달려왔다. “아니, 경내에서 뛰지 말라 내 그리 일렀거늘 경거망동하다니 어찌된 일이냐?” 큰 스님의 호통 치는 소리가 절 안팎으로 퍼졌다.
“큰 스님, 이번 초파일에 전하께서 납신답니다. 방금 전갈을 받고 오는 길입니다. 경삽니다. 경사!”
“아무리 전하께서 납신다 해도 호들갑을 떨어서야 되겠느냐? 당장 산중총회를 소집하도록 해라.” 나지막하게 이야기하지만 큰 스님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위엄이 서려 있었다.
조선 숙종 때의 일이다. 무려 46년이라는 재위 기간 동안 숙종은 가끔 사찰을 찾아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사월 초파일 느닷없이 송광사를 찾겠다고 한 것이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에서 임금이 절을 찾는 경우도 드문데다 멀리 전라도 땅까지 온다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정대로 숙종이 행차하였다. 송광사는 물론 일대가 떠들썩하였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임금의 행차이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송광사가 생긴 이래 아무리 사월 초파일이라 해도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처음이었다.
사상 유례 없는 임금의 행차에 송광사는 매우 분주해졌다. 내시와 궁녀들도 북적거렸고 음식을 준비하는 곳에도 궁궐에서 나온 관리들이 감독을 하였다. 큰 스님은 임금의 행차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원감국사가 원나라에서 가져온 바루(바리?놋쇠로 만든 밥그릇)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처음 원나라에서 가져올 때에는 500개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대부분 빼앗아가고 29개만 남아 임란 후에는 사용을 않고 있던 터였다.
수라상을 받은 숙종은 큰 스님으로부터 원감국사의 바루에 대해 듣게 되었다. 송광사 제6대 조사인 원감국사가 중국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는 바루는,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두들겨서 만든 그릇인데도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처럼 일률적으로 만들어져 위로 포개도 맞고 아래로 포개도 그 크기가 딱 들어맞았다.
원감국사의 바루를 본 숙종은 궁으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송광사의 바루가 유명한데, 우리도 그런 그릇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 하명하여 조선 팔도의 유명한 장인들을 불러모았다. 하지만 송광사 바루처럼 만들기는 똑같이 만드는데 두 개 이상을 만들어 포개보니까 한 줄로 포개지지가 않았다.
결국 모두들 포기하고 돌아가자 숙종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구나.” 그래서 숙종은 송광사에 있는 바루에 지금의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쌍향수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에 분포하고 있다.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료로 쓰이거나 정원수, 공원수로 많이 심는 나무이다.
송광사의 곱향나무 쌍향수는 나이가 약 8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0m, 가슴높이 둘레 4.10m, 3.30m이다. 두 그루가 쌍으로 나란히 서 있고 줄기가 몹시 꼬인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한손으로 밀거나 여러 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직이며,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송광사의 곱향나무 쌍향수는 앞에서 설명한 전설과 기이한 모습을 가진 오래된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6. 등산코스
첫댓글 수고 많이 했어요/ 감사 합니다
순천 송광사가 좋다고들 하던데, 많이들 참석해서 좋은 구경 나누어들 가집시다
말로만 듣던 송광사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