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는 보수파, 중도파, 급진파들이 상존하면서 도전과 응전이라는 갈등을 겪으며 발전하여 왔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에서 재세례파는 급진적 종교개혁을 주장하면서 루터, 츠빙글리, 칼빈으로부터도 배척을 받고 도시에서 추방을 당하여 전 유럽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재세례파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다. 온건주의자들부터 과격한 열광주의자 및 신령주의자들까지 다양했다. 재세례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과격한 열광주의자들 및 신령주의자들로 인한 것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주류 종교개혁자들도 교황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과격하고 불순한 세력으로 비쳤다. 하지만 종교개혁 전체 시각으로 보면 중도파에 속했다. 역사의 변혁 과정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라며, 급격한 변화에 대한 불안함과 거부감이 있다. 따라서 중도파들에게 주도권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급진파들은 주류 세력이 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나 소수파로 존재하지만 시대를 앞서는 이들의 주장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방향을 제시한다.
오피츠 교수도 아래에서 이러한 맥락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열정이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동력을 주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그들의 열정과 실천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종교개혁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한다.
1523년 4월 28일 취리히 남동쪽의 한 농촌 마을 뷔티콘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 사제가 교회의 회중들을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했습니다. 츠빙글리와 그의 동료들이 사제의 결혼을 교회 차원에서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한 지 일 년 만에, 뷔티콘 마을 사제 빌헬름 로이블린(Wilhelm Reublin)이 이를 실천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에 동참했습니다. 일 년 뒤에 츠빙글리도 결혼합니다. 시의회는 이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이블린은 성인숭배를 폐지하는 일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일,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 모두 같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슈베르첸바흐(Schwerzenbach)에서 그는 농부를 수탈하는 토지 관리인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고, 1525년에는 츠빙글리와 공개적으로 유아세례에 관해 논쟁했습니다. 취리히가 그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미 그는 급진적인 태도로 인해 바젤에서 추방당한 바 있습니다. 할라우에서도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곳의 거의 모든 거주민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곧 피신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찾은 두 지역 스트라스부르(Strassburg)와 에슬링엔(Esslingen)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에 쫓기며, 여러 번 찾아온 죽음의 위기로부터 간신히 벗어나고, 온 몸으로 고문과 투옥을 견디어 내야 했던 로이블린의 곁에는 그러나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오늘날 체코의 땅, 모라비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사랑과 완전한 공동소유로 표현되는 자그마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곧 문제가 생겼습니다. 독재적 태도가 있던 공동체 지도자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이 그가 사유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24개의 금덩이를 발견하자, 공동체는 그를 추방하였습니다. 결국 로이블린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와 거의 동년배였고,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랫동안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벗과 개혁의 동지들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 했던 반면, 그는 장수했습니다. 나중에 로이블린은 처음 지녔던 모습으로 다소간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는 1525년 취리히 재세례파와의 논쟁에서 알게 된 하인리히 불링거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링거 종교개혁의 매개자로 활동하며 취리히와 모라비아의 관계를 구축합니다.
로이블린의 말년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말하듯, 그는 그저 유토피아주의자였고, 변덕스런 이상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의 이상은 매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가들 없이 종교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바젤에서 외콜람파드가,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이룬 과업은 어쨌든 로이블린 덕분이기도 한 것입니다.
페터 오피츠·정미현·한스 스투룹 지음, 정미현 옮김,『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얼마나 알고 계셨나요?』(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20), pp.19~20.
첫댓글 인용문 이전 도입부에서 재세례파를 급진파, 카톨릭을 보수파, 종교개혁자들을 중도파로 표현한 것은 조금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정통 진리와 교리에 대한 보존과 고수하는 것(보수적 입장)은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었고요. 카톨리과 재세례파는 서로 대립했지만, 칭의 구원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재세례파는 개혁을 급진적으로 하려 했다는 평가 못지 않게 정통 진리와 교리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평가를 받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재세례파의 영혼수면설은 육체가 아닌 영혼이 잠을 잔다고 주장하여 현대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영혼이 멸절할 수 있다고 어거지 쓰는 주장의 어머니 교리가 됩니다.
재세례파 급진개혁의 낭만성을 음미하는 것보다 그들이 카톨릭 못지 않은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 이단들에게 근원적 에너지를 직접이든 간접이든 제공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힙니다.
가톨릭을 보수파라고 한 이유는 16세기 당시 정치 사회 종교적 관점에서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급진파와 가톨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연착륙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므로 중도파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진리 고수 차원에서는 가톨릭이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진리에서 이탈해버렸으나 권세를 누리고 있었죠. 개혁주의자들은 가톨릭의 교리와 정치행태의 부패성을 심각하게 느끼고 이전 교부들의 신학과 문헌에 주목했기 때문에 건전 교리를 많이 확립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급진주의자들은 행동과 실천에 주력했기 때문에 신학적인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교리적인 오류들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코람데오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천주교는 성직매매로 인해서 신학에 무지하고 신앙이 없는 자들이 사제가 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루터 조차도 자신이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에야 신학공부를 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실제 학문에서 당시 상황의 천주교 신학을 비판하고 로마 카톨릭 성립 이전 교부들의 원본 신학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천주교가 종교권력을 움켜진 의미에서는 보수일지라도, 성경 본문과 기독교 근본 진리를 부여잡은 것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이 보수입니다. 초신자들이 이 점을 알기 바라는 마음에서 추가 댓글 남깁니다.
@장코뱅 두 분의 댓글에서 좋은 지식을 얻습니다.
@에이프릴 공감합니다.
다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섭리하는 역사 속에서, 비록 좌파나 급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라도 종교개혁의 역동성을 빚어내는 변수로 작용했다는 점에 한정해서는 재세례파의 역할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재세례파 초기 지도자들 중 일부를 가르치고 교제했지만 더 이상의 교제를 포기하였는데, 재세례파는 끝내 언약신학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츠빙글리의 언약신학은 후대의 칼빈주의를 더 풍성하게 해주었고요.
재세례파에 대힌 낭만적, 긍정적 이해를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열정이 신학적 오류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신령주의나 과격파가 아닌 온건 재세례파조차도 칭의 구원론 또는(의의) 전가 개념 구워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두 본성 등에서도 그렇고요. 이러한 영향은 지방교회나 극단적 세대주의가 계승하여 현대에서 재현하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오류가 있는 경우, 미성숙한 경우, 정확히 모르는 경우들이... 열정과 결합하면 예상하지 못한 퇴행과 파괴와 혼돈으로 갑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혁명의 이벤트를 관찰하고 교회사에 관심이 많았던 일인으로서 제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인정하는 겸손과 신중함에서, 실패한 것이 재세례파와 급진세력의 약점과 한계이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좋은 댓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코람데오 네, 공감합니다.
외콜람파디우스가 맞는 표기입니다. 장로제를 창시한 성구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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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독일어: Johannes Oekolampadius, 1482년 ~ 1531년 11월 24일)는 팔츠 선제후국 출신의 개혁전통에 속한 독일 종교개혁가이다. 츠빙글리와 함께 마르부르크 회의 참석하였교 성찬논쟁에서 루터의 문자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츠빙글리의 신학의 견해를 따랐다. 스위스 개혁교회의 감독인 개혁교회 회장을 하였다. 그는 바인스베르크에서 출생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튀빙겐 대학교, 바젤 대학에서 수학하고 신학박사학위 취득(1518)후 바젤 대학교 신학 교수 등을 지내며 츠빙글리와 함께 스위스 종교개혁 수행에 전력했다. 1523년에는 바젤 복음주의교회의 개혁의 발단이 된 성서강해(이사야서)를 발표했으며, 1530년 획기적인 교회규정(장로제)를 창시했다. 그의 아내는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는 내조의 삶을 통해 그의 종교개혁을 도왔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D%95%98%EB%84%A4%EC%8A%A4_%EC%99%B8%
이분도 개혁주의, 좁게는 장로교회의 조상이 되는 분이군요. 존경합니다.
원글자가 로이블린에 대해서 내린 묘사와 평가는 신박합니다. 나머지 2명의 급진인물과 구별되는 부분을 보여준 글은 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위스 신학자이니 재세례파 관련 사료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겠지요.
@코람데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유토피아주의를 쉽게 이야기하면 이상주의자인데, 이런 분들이 있어야만 현실에 대힌 성찰과 역동적인 변화의 재촉이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