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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의 개관(槪觀)과 중심사상
거룩하신 삼보(三寶)와 진여(眞如)께 귀의하옵니다.
바야흐로 어느새 얼어붙었던 대지가 생명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도 건강하시고 늘 평안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보살님 그리고 신장님들의 가피(加被)와
가호(加護)가 함께 하시어 늘 행복하시길 바라옵니다. 화창한 봄날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셔서
불교공부를 해주시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늘 이와 같이 변하지 마시고 물러나지 않는
신심(信心)을 이어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마 오늘 왕림해 주시고 설법을 들으시는 분은 그 복이 배가되고
지혜의 밝은 빛이 함께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어느 종교든 믿음은 중요한 종교의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믿음은 대단히 중요한 신행(信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대상을 잘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각각의 경전마다 강조하는 점이 달리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을
깊이 숙고하여 들어가 보면 상통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승기신론}에서는 불(佛)·법(法)·승(僧)과 진여(眞如)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네 가지를 믿어야 할까요?
이를 잘 이해하면서 깨쳐 가는 것이 본 논의 공부라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달에는 귀경송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대승기신론}의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발기서(發起序)-논(論)의 체(體)를 정립함
論曰 有法能起摩訶衍信根 是故應說.
논왈 유법능기마하연신근 시고응설
說有五分 云何爲五 一者因緣分 二者立義分
설유오분 운하위오 일자인연분 이자입의분
三者解釋分 四者修行信心分 五者勸修利益分
[번역] 논하기를, 존재하는 법이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신근(信根)을 잘 일으키기 때문에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논설함에 다섯 가지 구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해설] 여기서 마명보살은 이 논을 지어야하는 당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법이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논을 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법(法, dharma)이란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 등의 법을 말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법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임지자성(任持自性)이라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기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각각의 개인이나 동물과 식물, 다구(茶具)와 화로(火爐)가 있다면 그 특유한 자기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존재들은 각기 각각의 생명의 법칙이 있으며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는 어머니,
선생님은 선생님, 각 직장인은 각 직장의 역할과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마하연(摩訶衍)은 범어 마하야나(Mahayana)를 음사(音辭)한 말입니다.
마하(摩訶, Maha)는 대(大)로 절대적으로 크다는 뜻이고
연(衍, yana)은 승(乘)으로 수레·탈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승은 자기 혼자만 깨달으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과 함께 고통이 없는 안락한 세상에 이르고자 하는
진리의 말씀 또는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향인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하신지
600년경에 대승을 지향하는 자가 드물고 자기 중심적이고 현학적이며 전문적인 불교를 개탄하여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
도록 하기 위하여 본 논을 지어야 하겠다는 당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에 논하려는 부분을 총괄하여
다섯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서분(序分)인 서론에 해당하고 다음부터는 정종분(正宗分)인 본론에 들어갑니다.
2. 인연분(因緣分)-논을 짓는 근본적 이유를 밝힘
初說因緣分 問曰 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 是因緣有八種 云何爲八
초설인연분 문왈 유아인연이조차론 답왈 시인연유팔종 운하위팔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일자인연총상 소위위령중생리일체고득구경락 비구세간명리공경고
[번역] 처음에 인연분(因緣分)을 설한다.
<묻는다> “어떤 인연이 있어 이 논을 지었는가?”
<답한다> “이 인연에 여덟 가지가 있는데,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의 총상(總相)이다.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속의 명리(名利)와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설] 앞에서 본론의 차례를 열거하였고 여기서부터는 정종분(正宗分)으로, 먼저 논을 짓는 인연(因緣)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인연의 총상(總相)을 밝혔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법들 중에 하나가 인연입니다. 모든 존재는 근본적인 원인(原因, hetu)이 되는 것 또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있는데 쉽게 말해서 씨앗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씨앗이 발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조연(助緣, pratyaya) 또는 짝이 되는 반연(攀緣)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설일체유부나
{구사론}에서는
능작인·
구유인·
동류인·
상응인·
변행인·
이숙인 등의 6인(因)과
인연·
증상연·
등무간연·
소연연 등의 4연(緣)으로 말하였고,
대승에서는
묘각(妙覺)의 원인이 되는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등을
불과(佛果)에 이르는 인(因)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 종자만으로는 생장할 수 없고 이를 도와서 길러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고통을 멸하고 즐거움을 얻도록 부처님들과 보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논을 짓는 동기와 목적이라고 밝혔습니다. 나아가 수행자나 불자가 가장 간과하기 쉬운 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모든 고통을 여의고 구경에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지 세간의 명리나 영욕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고통을 좋아하고 즐거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각자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궁극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 논을 짓는 제일의 동기이고 목적입니다.
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令諸衆生正解不謬故.
이자위욕해석여래근본지의 령제중생정해불류고.
[번역] 둘째는 여래(如來)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해설] 앞에서는 논을 짓는 이유가 인생의 목적이라면 여기서는 그 목적을 향하여 가는 바른 길을 그르칠까 바서
논을 지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래(如來, tathāgata)는 부처님의 십호(十號) 중 하나로 그 뜻이 매우 깊고도 깊은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如, tatha)는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의미이며 본각(本覺)의 자리를 말하고,
래(來, āgata)는 '오다'의 의미로 거(去, gata)의 반대의 표현이면서 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오는 듯한 여래(如來)이고
가는 듯한 여거(如去)인 것이지 실제로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실제로는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가신 것도 아닌 셈입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진여를 몸으로 삼고 법계(法界)·법성(法性)을 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내어 안락(安樂)을 얻게 하시려고 방편(方便)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가신 것을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석존께서 설하신 8만4천의 온갖 진리의 말씀을 근본 된 본래 뜻,
즉 일체중생을 모든 번뇌와 업장에서 해탈하여 열반의 안락을 얻도록 하기 위한 대승입니다.
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 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삼자위령선근성숙중생 어마하연법감임불퇴신고.
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 修習信心故.
사자위령선근미소중생 수습신심고.
[번역]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의 법을 감당하여 신심(信心)에서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고,
넷째는 선근이 미세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믿음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앞의 두 번째에서는 여래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여 오류(誤謬)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여기서는 중생의 근기가 훌륭한 사람으로 하여금 대승을 감당하여 믿는 자로 하여금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논을 짓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착한 근본이 성숙되어 능력이 출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근본 품성이 착하여 선근이 성숙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와는 반대의 중생이 대승에 믿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아는 것을 표현하여 똑똑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아는 것은 본래 텅 빈 것으로 그 실상은 모르는 것이 되고 맙니다.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은 자기관념의 소산에 불과하고
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믿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근이 성숙되지 못하고 알음알이에 빠진 망심(妄心)의 분별에 휘둘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 믿음을
내도록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 자세하게 논의 될 것입니다.
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善護其心 遠離癡慢出邪網故.
오자위시방편소악업장선호기심 원리치만출사망고.
六者爲示修習止觀 對治凡夫二乘心過故.
육자위시수습지관 대치범부이승심과고.
七者爲示專念方便 生於佛前必定不退信心故.
칠자위시전념방편 생어불전필정불퇴신심고.
[번역] 다섯째는 방편(方便)을 보여서 악업(惡業)의 장애를 없애어 그 마음을 잘 호위하고,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어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고,
여섯째는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수습함을 보이어 범부와 이승(二乘)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염불에 전일(專一)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 왕생(往生)하여
반드시 절대로 신심에서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해설] 앞에서는 선근이 성숙한 자와 미약한 자의 대승에 대한 신심(信心)을 증장(增長)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여러 방편을 제시하여 근기가 아주 박약한 자로 하여금 악업(惡業)의 장애를 소멸하고자한다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본격적으로 지관(止觀)의 수행을 닦는 범부와 이승의 허물을 대치시키고,
근기가 아주 미약하여 도저히 지관수행도 할 수 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논을 지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방편(方便)은 범어 우빠야까우살리야(upāya-kausalya)의 번역어로
교묘하고 훌륭한 교화수단을 의미하는 말로모든 존재의 능력과 품성에 따라 그 방법을 달리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편은 곧 적절하고 올바른 교화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역량에 따라 8만4천의 방편을 내 놓으셨습니다.
즉, 성문승의 능력자에게는 사제(四諦)를 가르치시고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연각승에게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설하셨으며,
일체법이 무자성(無自性)이므로 일체가 공(空)하다는 입장에서
대승을 지향하는 자에게는 육바라밀과 십바라밀로 인도하셨습니다.
나아가 일반 재가불자에게는 예배와 참회·삼론(三論, 보시·지계·생천) 등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러한 방편은 모두 삼독(三毒)과 교만과 사악한 악업(惡業)을 벗어나도록 한 것이기에
마명보살도 논을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에 지관(止觀)은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anā)을 합한 합성어입니다.
지(止)는
산란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켜 망념(妄念)을 쉬게 하는 것이요,
관(觀)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수행의 방편은 초기에는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념처(四念處)로 대표되며,
나아가서 37조도품(助道品)으로 종합되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능엄경}의 수능엄엄삼매를 비롯한 반야공관의 108삼매와 사심사관(四尋思觀)의
유식관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지관의 수행은 중국에 이르러 {안반수의경}과 {좌선삼매경}·{능가경} 등에
이어 반야공관을 거쳐 천태대사의 소지관과 마하지관으로 정리되고 중당(中唐) 이후에 조사선의 전성기를
맞아 간화선과 묵조선·염불선 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관의 수행법은 불교수행의 요체로서 매우
중요한 수행법입니다. 특히 지관은 어는 한 가지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지관쌍수(止觀雙修)를 수행해야 한다고
역대 조사들께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논이 {기신론}입니다.
그 다음에 위의 지관에 대한 수행이 용이하지 못하거나 신심이 아주 미약한 중생을 위해서 용이한 방편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관수행을 비롯한 간경(看經) 등 각종 바라밀수행은 쉽지 않는 난행도(難行道)이기 때문에 이행도(易行道)로서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생각하여 염함으로써 서방극락정토세계에 왕생하여 성불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칭명염불(稱名念佛)을 함으로써 무량수·무량광불의 원력에 호응해서 성불할 수 있는 불퇴전(不退轉)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행도의 방편을 제시하고자 논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가 상근과 중근을 위한 것이라면 일곱 번째는 하근기를 위한 방편인 것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有如是等因緣 所以造論.
팔자위시이익권수행고 유여시등인연 소이조론.
[번역]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고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지은 것이다.”
[해설]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의 수행의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장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은 실상은 이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은 모두 본각(本覺)의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탈한 것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각은 본래 깨치든 깨치지 않든 그 자리 그대로입니다.
다만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불각(不覺)으로부터 벗어나
시각(始覺)을 거쳐 상사각(相似覺)과 수분각(隨分覺)을 지나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러 보니
그것이 시각이요 구경각(究竟覺)이며 본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본전을 잃어버렸다가 찾는 결과입니다.
그래도 수행의 이익이 있다고 권해야 중생들이 말을 들을 것이기에 논을 짓는 이유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여덟 가지 이유로 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발기서(發起序)와 인연분(因緣分)은 논을 짓는 이유를 밝히면서 본론의 내용을 총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달에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한 번 좀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공부든지 그 흐름을 먼저 파악하고 공부하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렵더라도 참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공부는 어렵게 해야 남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불교공부를 하는 분들이 쉽게 해달라는 악습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부는 어렵게 해야 이해가 쉬워지고 반야의 지혜가 밝아집니다.
3. {대승기신론}의 개관(槪觀)과 중심사상
근본불교를 거쳐
부파불교의 전성기를 지나
초기대승불교를 거쳐서
중기대승불교의 철학으로는 용수(나가르주나)보살과
성데바 이후의 무착(아상가)보살과 세친(바수반두)보살로 대표되는
인도불교로서 중관(Mādhyamika)학파 또는 공론(Śunyatavadhin)사상과
유가학파(Yogacāra) 또는 유식(Vijñāptimātravādhin)학파가 양대 맥을 이루게 됩니다
그 배경은 이미 쇠퇴해진 부파불교의 상좌부와 대중부의 양대파(兩大派)로부터
분화되었던 당시 많은 논사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초기대승시기에 용수보살의 중론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파를 중관학파라 부르고,
중기대승불교시대에 무착보살과 세친보살의 학파를 유가행파라고 일컫습니다.
이 두 학파가 성립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서기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에 중관학파와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중반에 유식학파가 대성합니다.
이 학파들이 성립하기 전 서기 3세기경에 여래장사상이 출현하기 시작해서 5세기까지 발전했는데,
이는 부파불교의 여러 심성설 가운데 대중부의 심정설(心淨說)사상이 발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견의(堅意)의 {입대승론}, 견혜(堅慧)의 {대승법계무차별론}, 마명의 {대승기신론} 등의 논서입니다.
지금 현존하는 많은 자료 중에는 {승만경}·{여래장경}·{부증불감경}·{앙굴마라경}·{대승열반경} 등이 여래장을
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여래장으로서 불성(佛性)의 개념을 나타낸 것이고,
원래 여래(如來)·법성(法性)·진여(眞如)란 개념에서 변천되어 나온 사상입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여래장사상은 유가계통이 성숙하기 전
반야 공관사상을 계승하여 출현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명보살은 용수보살 이전의 마명보살이 아니고
용수보살 이후의 마명보살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단, 이것에 대해선 지난달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저자의 연대에 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명보살의 불교철학과 실천수행은 {대승기신론}의 사상에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본 논서는 불교의 모든 요의(了義)를 포함하고 있고,
절대성인 진여(眞如)와 무한한 묘용(妙用)을 내포하는 동(動)과 정(靜)의 철학사상이며,
여래장으로서 생사와 열반의 원리나 각(覺)과 불각(不覺)의 이치를 일심(一心)의 철학으로 귀납시키고,
또한 난행도(難行道)로서 지관(止觀)의 실천수행을 중요시하면서도 동시에 이행도(易行道)로서
정토(淨土)의 염불왕생으로 회통(會通)시킨 점이 요지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대승기신론}의 전체 내용을
지난달에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그 이어지는 내용을 연계시켜가면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명보살은 논서의 서분(序分)에 해당하는 발기서(發起序)에서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즉 1) 인연분(因緣分), 2) 입의분(立義分), 3) 해석분(解釋分), 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논서의 [인연분(因緣分)]은 통상적으로 경전에서 말하는 유래(由來)를 나타내는 연유(緣由)부분으로
서분(序分)에 해당됨으로 여기에서 귀경송(歸敬頌)을 포함한 발기서는 서분에 해당하고,
[입의분]에서 [수행신심분]까지는 정종분(正宗分)인 본론에 해당하며,
[권수이익분] 역시 통상적으로 경전에서 말하는 본 경의 이익을 열거하여 유통이 되도록 권유하는 부분에
해당됨으로 여기에서는 회향송(回向頌)을 포함해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전통적으로 회향송만을 유통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먼저 인연분(因緣分)에서는 논을 쓰게 된 8가지 이유와 동기를 들어 간결하게 논술하면서 대승의 광대하고
끝없는 사상을 총괄하여 섭렵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부분에 문답형식을 취하여 논을 짓는
이유를 밝히면서 불교의 목적과 논을 짓는 중요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다음에 입의분(立義分)에서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마하연(摩訶衍, Mahayana ; 대승)의 주체이며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의 대승사상을 논설하였습니다.
일심은 곧 중생심이면서 동시에 여래장으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심이 바로 일체의 모든 법을 총괄하여 포섭하며 이 마음의 바탕으로서 진여의 모습이
바로 대승의 핵심적인 본질임을 나타내고, 그 생멸(生滅)의 현상이 대승의 모습과 작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를 일러 체(體)·상(相)·용(用) 삼대라고 논합니다. 먼저 진여인 마음의 본성은 평등하여 염정불이(染淨不二)이므로 현상계와 본체계, 혹은 세간과 출세간이 불이(不二)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므로 체대(體大)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에 마음의 진여는 무량한 공덕으로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에 상대(相大)라고 하였습니다.
끝으로 마음의 진여는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량한 인과(因果)를 만들어 냄으로
그 작용이 크고 미묘해서 용대(用大)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해석분(解釋分)은 본 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서
종지(宗旨)에 대해 세 가지 주제로써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즉 현시정의(顯示正義)와
대치사집(對治邪執)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입니다.
이 세 부분에서 대승의 법(法)과 의(義)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승기신론}은 중기대승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논서 중의 하나로서 그 사상의 입장이
공사상과 유식사상을 융통하여 포섭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상의 입장이 공사상과 유식사상을 원융(圓融)하게
섭렵한 것입니다.
이러한 여래장은
동(動)과 정(靜),
정(淨)과 염(染)의 원리를 융섭(融攝)하면서
또한 일심의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을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나아가 진여는 불변(不變)이면서 수연(隨緣)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어
동시에 아뢰야식(阿賴耶識, laya-vijñāna) 또는 아리야식(阿梨耶識)으로
진망(眞妄)이 화합한 식(識)으로 삼라만상의 현상을 전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현시정의(顯示正義)에서는
일심(一心)에서 이문(二門)을 전개시킴으로써 대승의 의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이문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에 능히 일체법을 원융(圓融)하게 포섭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일심은 진여문을 열므로 일체법계가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라고 하였습니다.
이 심진여문(心眞如門)은 우주 만물의 본체이며 절대평등하고 무차별한 청정법계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심생멸문(心生滅門)은 차별적이고 상대적인 유위법(有爲法)으로 나고 소멸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생멸심도 역시 여래장을 의지함으로 아뢰야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뢰야식은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를 다 포함하고 있으며,
유루의 종자는 오염성(汚染性)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바로 불각(不覺)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루의 종자는 청정한 본성을 나타냄으로 각(覺)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는 하나가 아닌 불일(不一)이며 둘이 아닌 불이(不二)라고도 하였습니다.
비유하면 여래장의 자성청정심은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일념(一念)이란
무명(無明)의 바람을 일으키기에 불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상(相)은
삼세[三細,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와
육추[六麤,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로 유루의 법계(法界)
혹은 유위법(有爲法)의 현상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래장의 자성청정심은 본래 불변의 진여인 본성이므로 오염되지 않지만
망심(妄心)과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의해 훈습(熏習)됨으로 이를 불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각과 불각은 동질적인 동일체입니다.
그러므로 불각을 시각(始覺)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진여의 훈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훈습(熏習)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염법훈습(染法熏習)과
정법훈습(淨法熏習)입니다.
이 가운데 정법훈습(淨法熏習)에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으로 설명합니다.
자체상훈습은 중생의 자성이 청정한 본성의 진여(眞如)인 자체가
본래 안으로 훈습하는 위력을 갖추고 있어서 정화작용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내인(內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훈력(內熏力)에 의해 중생의 생사유전을 환멸[還滅,
일체 번뇌업장을 소멸하고 자성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정화작용]하여 성불을 할 수 있는 선천적인 본성입니다.
용훈습은 즉 모든 불보살님들은 자비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善根)을 심어 보리를 얻도록 호념(護念)하십니다. 이를 외연(外緣)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훈과 외연에 의한 훈습에 의해 환멸작용을 일으키며 생사문 가운데에서 염법(染法)을 정화시켜 진여를 나타나하게 합니다.
이 진여심은 범부든 성인이든 줄어드는 것도 느는 것도 아니며 본래의 자성이 일체 공덕을 구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량한 공덕의 진여의 체(體)가 드러난 이름을 법신(法身)이라 하고,
드러나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에 대치사집(對治邪執)에서는
범부의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의 이집(二執)을 퇴치하는 것입니다.
인아견(人我見)은 먼저 허공을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이라고 집착하고,
다음 진여법은 공(空)이고 아무 것도 없다고 집착하는 견해도 포함합니다.
이 두 가지 집착은 바로 대승의 진공(眞空)을 잘못 알고 있는 견해입니다.
또한 여래장에 색심법의 차별상이 있다고 보는 견해,
여래장은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보는 견해,
여래장의 자성은 염법(染法)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포함합니다.
이 세 가지 견해는 바로 대승의 묘유(妙有)를 잘못 알고 집착한 것입니다.
법아견(法我見)은 생멸(生滅)하는
오온(五蘊)의 법(法)을 실유(實有) 혹은 실체(實體)로 오인하여 무명을 조장하여 집착한 견해를 말합니다.
세 번째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는 보살의 수행에는 반드시
세 가지 발심(發心)을 해야 한다고 논합니다. 즉,
먼저 십신(十信)과 십주(十住)의 보살단계에서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을 하는 것이고,
다음에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을 성취한 보살은 해행발심(解行發心)이며,
세 번째로 십지(十地)보살이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을 성취하는 것을 증발심(證發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은
십신(十信) 이하의 범부는 삼보(三寶)에 대한 신심(信心)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지관(止觀)의 수행문을 닦아야 한다고 논합니다.
단, 근기(根機)가 낮은 범부중생은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염불수행을 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권수학이익분(勸修學利益分)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어떻게 닦아야만 불법에서 말하는 그런 무량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또 어떻게 대승의 신앙을 닦아야할 것인가를 논제로 삼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법을 닦아
무량한 공덕을 얻게 하고자 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수행을 하여야 무상(無上)의 지혜를 얻어 여래의 법신을 증득(證得)할 수 있다는 것을 논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승기신론}은
크게 이론과 실천수행 두 부분으로써 간결하게 대승의 중심사상을 논술하고 있습니다.
즉 진여의 영원하고 진실한 일심(一心)을 여래장사상을 요체로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를 천명하고 있으며,
그 이론적 기초 위에 실천수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철학의 기본 문제 가운데 본체론(Ontology)의 문제로서
우주 만물의 근원을 중생심(衆生心)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세계로
시작하여 중생을 논한 것이 아니고 중생의 일심으로서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생은 하나하나의 개체이면서 주체적 존재로서 모든 객관세계의 총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를 하나의 총체적 의미로 보고 역시 중생심 가운데 그 의미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중생심의 진여인 주체 혹은 일심을 생명의 궁극적 근원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만물은 최후에 일심(一心)의 진여인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궁극적 의의는 중생심(衆生心)을 수행의 주체로 하여 인간의 욕망을 승화시켜
모든 공덕의 귀결처인 진여의 일심에 나타나게 하며 성불(成佛)의 경지에 오르고 이상적 인격을
완성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래장사상의 특색은
중생의 일상적인 마음을 긍정함으로써
청정(淸淨)하든 부정(不淨)하든 마음의 본 바탕 혹은 본성자체를 긍정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유전을 환멸(還滅)할 수 있는 근거로 본 심성본정(心性本淨)이면서
평상심(平常心)의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중관사상에서 본 현상에 대한 부정(否定)적이고 본체론적인 측면과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현상의 긍정적이고 현상론적인 측면을 아우른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중관의 체(體)와
유식의 상(相)과
여래장의 성(性)을 총합한 것이 {대승기신론}의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