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할까, 밀가루로 할까, 나는 아직 헤매고 있었다.”
일본 골판지의 생명의 아버지 이노우에 사다지로의 “나의 이력서(일본 경제신문 1959년 6월 28일)”는 그런 글로 시작하고 있다. 생각에 잠긴 이노우에는 무녀의 노파에 어느 쪽을 선택할까 물어 “그 밖에는 안된다, 안된다, 종이면 종이의 일은 입판(立板)의 물이 아니다” 라고 말해 골판지를 만들기를 결의하였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여 국산 제1호 골판지를 완성시킨 것이 1909년 가을이었다.
생가는 현재의 효고현 히메지시 요베구 카미요베. 1882년 8월 16일 반슈 평야에 흐르는 이보카와에 가까운 100호 정도의 한촌에서 농업을 운영하는 하세가와 가의 3남으로 태어나 2세 때에 먼 친척인 이노우에가의 사적(死籍) 상속인이 되었다. 고등 소학교를 나오자마자 코베의 상가(商家) 자코세이(座古淸)에 견습생 봉공(奉公)으로 나갔다가, 본공선을 전전하다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꿈이 깨져 귀국하였다. 그 사이 근무하였던 일은 두 손이 벅찰 정도로 바로 유전의 전반생을 거쳐서 서두의 무녀의 고자질로 이어졌다. -> 이 밑줄 부분은 해석이 좀 이상하였고, 한국말로 정확한 해석이 불가하였습니다.
골판지를 완성시켜 아침 일찍부터 주문을 받거나 고객사로의 납품에 돌고, 밤에는 늦게까지 풀과 땀투성이가 되어 작업을 하는 등 분투 노력을 계속한 결과, 골판지은 주문은 계속 증가하여 동경전기(東京電氣, 현 토시바)의 Mazda 램프나 Noritake(상품명)의 수출용 도자기에도 사용되었다. 타이쇼우(大正) 시대 말기에는 골판지 상자는 동부에서는 “Mazda 램프 상자”, 서부에서는 “복조(福助, 타비(足袋), 일본식 버선의 상자” 라고 애칭 되었고, 신문의 경제란에 “종이상자가 목상자보다 강하다”라고 보도되는 등 그 평가는 착실히 높아졌다.
일본의 골판지 산업의 선구자로 되어, 간란신고(艱難辛苦, 곤란을 만나 힘들고 괴로운 생각을 하는 것)을 극복하여 크게 만개한 이노우에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부르고, 1959년 “유전(流轉, 아사히 방송, 나츠메 슌지, 夏目俊二 주연)”, 1963년 “킨토마(きんとま) 일대(아사히 방송 모리시게 히사야, 森繁久彌 주연)”으로 2번에 걸쳐 TV 드라마화 되었다.
킨토마(きんとま): きん(金), と(&), ま(間), 금과 시간이라는 뜻. 이노우에의 경영 철학, gold and timing
#마쯔다램프 #노리타케 #간란신고 #유전 #킨토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