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의연한 시조가 너무 많다, 일본의 하이쿠에 비해 시조의 세계화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시조의 운율을 잘 모르고 자수 맞추기에 급급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옛 시조를 중고등 학생 때 많이 봤다면 자연스레 시조 쓰는 법을 배웠을 텐데 음수만 맞추면 시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래가 떨어졌다고 해도 가락은 중요하다
이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창비)
우탁, 「춘산에 눈 녹인 바람」(미래엔) 1262-
이조년, 「이화에 월백하고」(금성) 1268-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며」(비상)
길재, 「오백 년 도읍지를」(미래엔, 지학사)
성삼문, 「수양산 바라보며」(금성, 미래엔, 비상, 해냄)
원천석, 「눈 맞아 휘어진 데를」(비상, 박영사)
정철, 「내 마음 버혀 내어」(비상)
송순, 「십년을 경영하여」(금성, 동아)
홍랑, 「묏버들 갈해 꺾어」(천재, 미래엔, 금성)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천재)
계랑, 「이화우 흩뿌릴 제」(비상)
신흠, 「아침은 비 오더니」(천재)
오경화, 「곡우릉 우는 소리에」(금성)
김천택, 「백구야 말 물어보자」(해냄)
신흠, 「봄이 왔다 하되」(동아)
이밖에 작자 미상의 엇시조와 사설시조가 8편이 실려 있습니다. 연시조는 이현보의 「어부사」와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사라졌고 맹사성의 「강호사시사」가 금성 국어교과서에, 이황의 「도산십이곡」이 천재 문학교과서에 일부 실려 있습니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천재ㆍ미래엔ㆍ지학사 문학교과서에, 「오우가」는 천재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윤선도의 「만흥」이 천재ㆍ동아ㆍ비상ㆍ신사고 문학교과서에, 해냄 국어교과서 등 총 다섯 군데에 실려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자연에 귀의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에 대한 동경이라는 주제가 교과서 편찬자에게 매력적인 주제로 다가온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수한 우리 옛 시조가 교과서에서 대다수 사라지고 만 것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교과서 편찬 작업이 새로 이루
어질 경우, 편집위원 중 한 사람이 이 연재물을 읽기를 고대합니다. 그래서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시간에 학생들이 시조를 배우기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 한 달 동안 왜 이 옛 시조가 우수한 작품인지 논하고자 합니다.
최영 장군의 애국심
녹이 상제綠耳 霜蹄 ᄉᆞᆯ지게 먹여 시냇물에 씨셔 ᄐᆞ고
용천 설악龍泉 雪鍔 들게 ᄀᆞ라 다시 빼혀 두러 메고
장부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젹셔 볼가 ᄒᆞ노라
(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어 타고
용천 설악 들게 갈아 다시 빼어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적셔볼까 하노라)
최영崔瑩은 고려 말의 무장이다. 1359년에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과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에는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충남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이런 명장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으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선 창왕이 즉위한 뒤에 고봉高峰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개경에서 참형을 당했다. 이성계는 전 왕조의 충신을 살려두었다가는 반란의 불씨가 될 수 있기에 제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에서 최영을 신으로 받드는 이유는 한을 품고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녹이綠耳는 날래고 좋은 말이고 상제霜蹄는 굽에 흰 털이 난 좋은 말이다. 주나라의 목왕이 타고 다녔던 말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모두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준마駿馬의 대명사이다. 용천龍泉은 보검의 대명사이다. 설악雪鍔은 날카로운 칼을 이른다. 말을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칼을 잘 들게 갈아 둘러멘다는 것은 전투에 임하는 무장의 자세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임금을 위해 공을 세워보겠다는 각오가 종장에 담겨 있다.
이 시조는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힌 것이다. 나라가 자신에게 위임한 것은 국방이기에 그 임무를 다하겠다는 각오를 이 시조를 통해 밝히고 또한 다지고 있다.
오늘날 ‘애국’이라는 것을 낡은 정서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국방의 의무를 질 필요가 없는 재외동포가 한국군으로 자원입대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애국심 외에 다른 무슨 욕망이 있어서일까? 지금도 육ㆍ해ㆍ공을 지키는 국군이 있어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고 편히 잠들 수 있다. 바로 그것을 학생들에게 말해주는 교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존오의 간신에 대한 증오심
구름이 無心ᄐᆞᆫ 말이 아ᄆᆞ도 虛浪ᄒᆞ다
중천에 떠 이셔 任意로 ᄃᆞᆫ니면서
구ᄐᆞ야 光明ᄒᆞᆫ 날빗ᄎᆞᆯ 따라가며 덥ᄂᆞ니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이존오(李存吾, 1341~1371)는 고려 공민왕 때 우정언右正言이었다. 문서 관리와 자금 관리, 그리고 왕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 조언을 하는 관직이었다. 신돈辛旽에 대해서는 혁명가라는 평가와 요승妖僧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신돈이 왕의 후견인 격으로 권력을 휘둘러 귀족을 배제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펴자 권문세가에서는 강력히 반발한다. 바로 그 권문세가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존오였다. 신돈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극형을 당할 뻔한 것을 이색李穡 등이 옹호하여 좌천되었을 정도로 그 당시 신돈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이 시조는 전체적으로 은유이다. 구름이 중천에 떠 이리저리 오가는 바람에 해를 가려 나무들이 햇빛을 못 받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구름은 당연히 신돈이고 해는 공민왕이다. 좌천은 이존오에게 치명타였다. 어제의 부하에게 오늘은 명령을 받는 신세로의 전락이었다. 이존오는 벼슬을 내놓고 공주 석탄石灘에 가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을 삭히다가 죽었으니 아니 서른 살 때였다.
이존오에게 신돈은 간신배였다. 왕은 신돈에게 가려 왕으로서의 위광도 보여주지 못하고 선정도 베풀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다고 생각해 이런 시조를 썼던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도 독재자 곁에는 아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통치자의 눈을 가리는 행위, 귀를 먹게 하는 행위가 14세기에도 21세기에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국어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