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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단편소설] 불화살
[이광복 단편소설] 불화살
불화살
이광복
나는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에 들어가 많은 것을 배웠다. 보고 듣고 읽는 것 모두가 새로웠다. 1학년을 거쳐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새 담임은 송창근 선생님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체격이 석대한 데다 목소리까지 우렁우렁한 분이었다. 인품이 고매했던 선생님의 이마 한복판에는 부처님 백호처럼 큰 사마귀 하나가 툭 불거져 있었다. 우리 학급은 1분단부터 4분단까지 4개 분단으로 편성돼 있었다. 내 자리는 2분단 중간쯤에 있었다.
한편, 나는 그때까지도 내 출생과 ‘입양의 비밀’을 모르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아직 천륜에 관한 개념이 없었다. 나는 당초 작은집인 친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어머니 젖을 떼자마자 후사를 두지 못한 큰집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로 출계한 몸이었다. 무후로 끝나게 된 종가의 종통을 잇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유습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나는 (큰)아버지 내외분이 친부모님인 줄 알고 자랐다. 따라서 내게는 아버지 두 분, 어머니 두 분이 계셨다. 나는 (큰)아버지 내외분에게 ‘큰’ 자를 붙이지 않고 그냥 아버지 어머니라 불렀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친가 아버지 어머니의 호칭도 아버지 어머니였다. 우리 고향에서는 통상 아버지를 ‘아부지’로, 어머니를 ‘엄니’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아부지’ ‘엄니’가 우리 고장의 ‘표준말’인 셈이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국민학교 입학 전 (큰)아버지로부터 한글과 천자문을 배운 뒤 우리 집으로 마실 오신 동네 어른들에게 얘기책을 읽어드리곤 했지만, 집안이 워낙 빈한한 터라 책을 사 보기는커녕 학업에 꼭 필요한 연필과 공책 등 필수 학용품을 조달하기도 버거운 실정이었다. 소설이든 위인전이든 만화든 뭐든 마음 놓고 책을 사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헛된 소망이었다.
학교의 장서(藏書)도 열악했다. 우리 학교는 갓 개교한 신설 교육 기관으로서 이제 막 교사를 증축해 나가고 있었다. 전교생이 종종 대지 확장 작업에 동원되었고, 우리는 산기슭에서 파낸 흙을 운동장으로 실어 날랐다. 교실 자체가 부족하여 별도의 도서실을 개설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물론 서가나 책장조차 없었다. 그 대신 교무실에서 가까운, 복도 창틀 아래 신발장 좌우 군데군데 여남은 권의 책들이 들쭉날쭉 비치돼 있었다. 일부 고학년 교실에는 명목상의 학급 문고가 따로 있었지만, 여기 이 책들은 학년이나 학급을 초월한 전교생 공용 도서인 셈이었다.
검정색 철끈을 모서리에 꿰어 못에 걸어 놓은 책들. 누구든지 희망자가 자율적으로 가져다 읽고 본래의 위치에 되돌려 놓는 구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책들 중에는 위인전과 만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책이 보물처럼 귀하던 시절이었다. 책의 지질이나 인쇄 상태도 좋지 않았다.
복도 창틀 위 높은 곳에는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누나… 등등 애국지사들의 흑백 사진이 일렬횡대로 걸려 있었다. 나는 일찍 한자를 배워 ‘의사(義士)’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내 또래의 동무들 대부분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의사(醫師)’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 의사들을 내과 의사, 외과 의사, 치과 의사 등으로 오인한 나머지 독립운동가가 거의 모두 의료계 출신인 것으로 확신하는 친구들까지 있었다. 우리는 복도를 통행할 때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었다.
나는 곶감 빼먹듯 복도의 책들을 한 권 한 권 솔래솔래 가져다가 차례차례 독파했다. 기뻤다. 책을 읽고 새로운 사실을 터득할 때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책 속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놀라운 서사들이 있었다. 나는 독서를 통해 계백과 김유신과 세종대왕과 이순신과 한석봉처럼 만고 청사에 길이 빛나는 위인들을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7월 초순경이었던가,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소년 소녀 갈릴레오 갈릴레이 위인전을 뽑아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특이한 인물 이름에 호기심이 발동해 별 생각 없이 덥석 잡아들었던 것인데 본문 내용이 너무 힘겨워 도무지 땅띔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룻강아지 범 만난 형세라고나 할까, 책이라면 무조건 좋아한 나머지 뭐 모르고 겁도 없이 잘못 덤볐다가 외통으로 걸려든 것이었다.
그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중에서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즉 태양 주위로 지구가 돌고 지구 주위로 달이 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뭐가 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구가 둥글고 돌기까지 한다면 모든 사물이 똑바로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건물이든 사람이든 금세 미끄러지고 쏟아져서 허공으로 날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백보를 양보하여 만약 지구가 돈다면 집에서 학교까지, 학교에서 집까지 수시로 방향이 달라지면서 위치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동서남북은 변함이 없고 집과 학교 또한 언제나 똑같은 위치에 있었다. 지구가 돈다는 명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수백 번 생각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아 나중에는 아예 내 머리가 헤까닥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숙맥이거나 아니면 갈릴레이가 엉터리 사기꾼이거나 둘 중의 한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중도에 그 책을 덮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이론에 궁금증이 자꾸만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문제의 책을 억지로 물고 늘어지며 완독했다. 갈릴레이는 재판정을 나오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결말이었다. 훗날 그 독백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창작하여 덧붙인 군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사족을 갈릴레이가 직접 한 말인 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나는 명색이 급장(지금의 반장)이었다. 더군다나 입학 이후 그때까지 줄곧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난데없이 갈릴레이라는 복병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콱 막힐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된통 쪽팔리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 앞에서 내 밑천이 들통 날까 봐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괴로워했다. 실토하건대 문제가 이렇듯 심각해질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그 위인전을 뽑아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난감했다. 나는 (큰)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천자문을 공부할 때 하늘천(天) 따지(地) 검을현(玄) 누를황(黃) 집우(宇) 집주(宙) 넓을홍(洪) 거칠황(荒)…을 달달 외웠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글자를 깨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천지현황’과 ‘우주홍황’에 담긴 뜻, 천지만물과 우주 운행의 심오한 철리를 통찰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갈릴레이 위인전을 다 읽었으면서도 그의 학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본질을 꿰뚫지 못한 채 수박 겉만 핥은 꼴이었다.
그렇다고 어영부영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저 맹랑한 갈릴레이 때문에 하루 이틀 골머리를 앓은 것이 아니었다. 남들도 다 알다시피 나는 본디 집요한 기질을 타고났다. 난해한 문제일수록 끝까지 파고들어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정답을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논제를 자력으로 끝장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 불가해한 책을 복도 제자리에 반납한 뒤에도 속으로 끙끙 앓으며 부대끼다가 수업 시간이 아닌 쉬는 시간을 이용해 선생님께 직접 질문하기로 작정했다. 망설이던 끝에 내가 말했다.
“선생님, 한 가지 여쭤 봐두 되나유.”
“뭔데?”
“지구가 돌아유?”
“그럼! 지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돌고 있단다.”
“정말로유?”
“물론이지. 윤복아,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니?”
선생님은 내 질문을 의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2학년에게는 생소한, 아직 교과 과목에 태양계 관련 주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의 경우 갈릴레이의 ‘갈’ 자와 태양계의 ‘태’ 자는 물론 천동설이나 지동설은 더욱 더 잘 모를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갈릴레이 위인전을 읽었는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유.”
“그건 고학년도 이해하기 어렵지. 넌 아직 저학년이잖아. 이따가 수업 전부 마치고 종례 후 교무실로 오거라. 선생님이 잘 가르쳐 줄게. 알았지?”
“예.”
그날 방과후 3분단 급우들만 남아 교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선생님께서 기다리는 교무실로 향했다. 마침 갑자기 나타난 땅벌 한 마리가 내 이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선생님 책상 위에는 15도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5대양 6대주가 여러 색깔로 알록달록 표시된 지구본이 준비돼 있었다. 나는 동그란 걸상에 다소곳이 앉았다. 선생님이 몸소 지구본을 살살 돌리면서 말했다.
“윤복아. 내 말 잘 들어라. 여기 이 지구는 이렇게 돌아. 이걸 자전이라고 해. 알았지?”
“예.”
지구가 돈다는 것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자전이라는 한자어의 뜻만은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똑바로 대답했다. 교무실을 드나들던 몇몇 고학년 선배들이 선생님과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 선생님이 창 밖 하늘 저 멀리 엇비스듬하게 동동 떠 있는 태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태양이 있잖니? 이 지구가 태양을 향해 이렇게 돌고 있는 거야. 이걸 공전이라고 말하지.”
선생님은 태양을 겨냥하면서 지구본을 번쩍 들어 올려 슬슬 돌렸다. 공전의 뜻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 주위로 돈다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학습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탓이었다. 그 대신 연두색으로 그려진 한반도가 얼른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여기가 곧 우리나라라는 것을 제꺼덕 알아차렸다. 한반도 주변에는 중국과 일본도 그려져 있었다. 내가 물었다.
“그럼 달은 어떻게 되는 거지유?”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지. 지구는 태양을 돌고 달은 이렇게 지구를 도는 거야.”
선생님은 일단 지구본을 내려놓은 뒤 푸석한 갱지에 연필로 원형의 태양을 표시한 다음 타원형으로 지구의 궤도를 주욱 그렸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지구 주위에 달의 행로를 명시했다. 태양과 맞물린 지구가 납작하면서도 둥그런 고리나 사슬로 테를 두른 것 같았다. 그래도 설명이 부족했다고 판단했던지 선생님은 지구본을 다시 번쩍 들고는 다른 한 손으로 저쪽 태양과 이쪽 지구본 사이의 운행을 시연했다.
선생님의 강의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나는 짐짓 선생님께 섣불리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마치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이는 꼬락서니가 되고 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계속 이대로 나가다가는 진도가 최종적으로 어디까지 치달을지 알 수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아직은 긴가민가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잘 새기고 곱씹으면 언젠가는 갈릴레이의 견해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씩 풀릴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내게 거짓말을 하실 리 만무했다. 내가 말했다.
“그렇구먼유.”
“오늘 당장 이해를 못해도 괜찮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더 자세히 배울 테니까.”
선생님은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나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 지구본에 나타난 한반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소비에트 연방이나 캐나다나 중국이나 아메리카 합중국보다 월등히 적었다. 그래서 대내외적으로 우리나라를 약소국이라고 지칭하는 모양이었다. 최소한 오스트레일리아나 인도 정도만 되어도 좋으련만 우리나라 영토의 면적이 거기에 훨씬 못 미쳐 무척 안타까웠다.
내 적성은 어쩌면 과학이 아닌 지리에 더 가까운지도 몰랐다.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었다고나 할까, 선생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는 동안 태양계보다는 지구본의 지도에 부쩍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이었다. 갈릴레이에 발목 잡혀 끌탕을 하면서도 지구본에 나타난 세계 각국의 위치만큼은 대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큰)어머니는 뜰팡에 앉아 싱싱한 열무를 다듬고 있었다. 밭에서 갓 뽑아온, 뿌리에 덕지덕지 흙이 매달린 열무의 이파리에는 숭얼숭얼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었다. 열무 사이에는 더러 바랭이와 방동사니 같은 잡풀 나부랭이도 뒤섞여 있었다. 저녁에는 새로 담근 맛깔스런 열무김치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책가방을 내려놓으며 (큰)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니, 학교 댕겨왔어유. 그런디 지구는 태양을 돌고 달은 지구를 돈대유.”
“그게 뭔 말이여?”
“지구 있잖어유. 지구가 태양을 돈대유. 달은 지구를 돌구유.”
“지구가 뭔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 말이어유.”
“그럼 땅덩어리라구 하지 왜 지구라구 하는 겨?”
“참, 엄니두…”
“그건 그렇구, 땅덩어리가 돌면 우리가 어떻게 살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어떤 미친놈이 그런 헛소리를 하구 댕긴댜? 참, 나…”
어이가 없었다. 갈릴레이와 우리 선생님은 당신의 일언지하에 ‘미친놈’이 되고 말았다. 황당했다. 내 딴에는 새로 배운 태양과 지구와 달의 관계가 하도 신비로워서 (큰)어머니에게 슬쩍 운을 뗀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새까맣게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공명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관련자들을 사그리 미친놈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고귀한 견해를 일거에 ‘헛소리’로 깔아뭉갰다.
그 말을 시작한 나 또한 단박에 미친놈의 하수인 또는 똘마니로 전락했다. 하기야 당신은 낫 놓고 ‘ㄱ’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고, 사실인즉 그런 당신에게 말을 꺼낸 내 불찰이 컸다. 그럴 줄 알았으면 애당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는데 괜히 말을 건네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후회막급이었다. 김이 새고 정나미가 확 떨어져서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물었다.
“그럼 엄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아세유?”
“뭐라구?”
“갈릴레이 아시느냐구유.”
“그게 뭔디?”
(큰)어머니는 갈릴레이를 사람이 아닌 무슨 물건 정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마 카스텔라나 캐러멜이나 초콜릿과 유사한, 서양 사람들이 들여온 모종의 과자류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잘 모르긴 해도 우리 동네의 다른 어머니들 또한 대개 그럴 것이었다. 내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거 봐유. 갈릴레이가 누구인지두 모르시면서 무턱대고 미친놈이라고 하면 되나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했건만,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차가운 언사로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 주는지 몰랐다. 울고 싶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분이 잡쳐서 입을 굳게 다물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나의 내면에서는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본래 성정이 곱고 잔정이 많은 어른이었다. 당신 스스로가 아주 어려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딱한 사람들을 보면 작으나마 뭐라도 도움을 주곤 했다. 힘이 장사여서 논일이든 밭일이든 못하는 것이 없었고, 특히 바느질 솜씨가 워낙 뛰어나 ‘바느질 여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밖에도 당신 특유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당신 나름의 사고 체계와 옹고집이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당신은 평생 그 고질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간혹 불쑥불쑥 토해내시는 박정한 말씀들이 내 염장을 질렀고,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저항의 씨앗이 되어 막심한 불효의 거목으로 쑥쑥 자라났다. 나는 생래적으로 반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해 질 무렵이었다. 나는 울분을 삭히다 못해 굴렁쇠를 굴리며 친가로 내려갔다. 굴렁쇠는 자전거 바퀴 림(rim)이었다. 림이란 튜브와 고무 타이어를 끼워 두르는 금속제의 둥근 테를 의미했다. 그것은 (큰)아버지께서 부여인가 논산인가 어느 자전거포에서 구해 오신 소중한 물건이었다. 나는 동네 고샅길을 뛰어다닐 때마다 서너 뼘 길이의 곧은 막대기로 굴렁쇠를 굴렸다. 길가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반겨주었다.
“아이고, 우리 윤복이 어서 오너라.”
“엄니, 안녕하셨어유?”
“그럼.”
그때 마침 밀짚모자를 쓰신, 지게에 싱싱한 풀을 한 짐 가득 짊어진 아버지께서 샘과 이어진 삼거리 길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에 작은 암거가 있었고, 콘크리트 관로 수멍으로는 짜잘짜잘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발 한 발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바지게 밖으로 늘어져 나온 풀잎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인사했다.
“아부지, 풀 벼 오세유?”
“그랴. 오늘도 학교 가서 공부 잘 하고 왔냐?”
‘벼’는 ‘베어’를, ‘그랴’는 ‘그래’의 우리 고장 ‘표준말’이었다. 아버지는 풀을 두엄자리에 부린 뒤 지게를 벗어 헛간에 세웠다. 그러고 나서 일부 흩어진 풀들을 낫으로 주섬주섬 걷어 올려 두엄더미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버지께서 손대는 일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두엄무더기가 마치 나무나 돌을 깎아 켜켜이 쌓아올린 구조물처럼 완전무결했다. 밀짚모자를 벗은 당신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친가에서 저녁밥을 먹고 하룻밤 묵었다. 열무김치고 뭐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친가는 언제나 편안했다. 무슨 말을 하든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동생들도 잘 따라주었다. 톡 까놓고 말하자면 친가는 (큰)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마다 찾아가는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내게는 그런 친가가 있어 행복했다.
날이 밝자 아침밥까지 먹었다. 아직 (큰)어머니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덜 풀렸지만, 부랴부랴 윗집으로 가서 책가방을 챙겨 들고 학교로 향했다. (큰)어머니한테 들은 ‘미친놈’이란 막말이 지워지지 않아 기분이 매우 찝찝했다. 날씨가 무더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학교생활은 항상 즐겁고 흡족했다.
여름 방학 때였다. 뒤꼍 화단에 노란 원추리꽃과 붉은 참나리꽃이 피어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도 꽃이 피어나다니, 식물은 빈부를 차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했고, 말랭이 쥐엄나무에서는 매미들이 귀청 따갑도록 시끌짝하게 합창하고 있었다. 맴맴 맴맴 맴맴… 쏴르쏴르 쏴르 쏴르… 저쪽 당산의 뻐꾸기가 뻐꾹뻐꾹 시를 읊으면 이쪽 시루봉의 꾀꼬리가 꾀꼴꾀꼴 노래로 화답했다.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냘 모리 팥거리 좀 댕겨오자.”
‘냘 모리’는 ‘내일 모레’였다. 내일은 8월 3일 논산 장날이었고, 모레는 그 다음날인 8월 4일 화요일이었다. 음력으로는 7월 초하루였다. 내가 물었다.
“팥거리라구 하셨슈?”
“그려. 두계 말이다.”
‘팥거리’는 ‘팥[豆]갈[磨]이’ 즉 논산군(지금의 논산시) 두마면(나중에 계룡시로 편입)을 의미했다. 두마면에 두계리가 있었다. 거기 당신의 남동생 강기석씨 일가가 살고 있었다. (큰)어머니의 친정이었다. 나는 당신의 소생이 아닌 양자인 터라 그곳을 외갓집이라고 딱 부러지게 특정할 수는 없었다. 그 집 역시 무척 가난했다. 친가 어머니의 친정, 즉 부여군 세도면에 있던 내 본래의 외갓집은 아주 오래 전 전북 익산군(지금의 익산시) 망성면으로 솔가했다. 그곳에 혈육상의 진짜 외삼촌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나는 (큰)아버지 내외분의 말씀을 좇아 강기석씨를 그냥 ‘아저씨’라고 불렀다. 무난한 호칭이었다. 강씨 아저씨 쪽에서 종종 서신이 왔다. 수취인은 당연히 (큰)아버지였다. 강씨 아저씨의 서찰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가장 모범적인 격식과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 서한을 통해 은연중 편지 작성 요령을 곁눈질할 수 있었다. 그분은 먼저 이쪽의 안부를 여쭙고 또한 당신 일가의 최근 소식을 자세히 전했다. 필체도 단정했다. (큰)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문맹자 천지였던 그때 그 시절 그분은 일찍이 한학에 눈떠 적어도 『통감(通監)』까지 읽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큰)아버지 내외분의 뜻을 받들어 몇 차례 강씨 아저씨 앞으로 (큰)아버지 명의의 답신을 썼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곳 주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강씨 아저씨가 어린 막내아들 승수를 데리고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귀한 손님들이었다. 청년 시절 해소를 호되게 앓아 목이 쉬어버린 강씨 아저씨는 참 공손한 분이었다. (큰)아버지에게 ‘매형’이라 부르고 (큰)어머니에게 ‘누님’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공경하는 범절이 곡진했다. 내가 (큰)어머니에게 물었다.
“두계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돼유?”
“아마 한 칠십 리는 될 거여.”
“그렇게나 멀어유?”
“멀지. 논산에서 부적 연산 개태사를 거쳐야 하니께.”
“그럼 어떻게 가유?”
“그건 걱정하지 말어. 차 타면 됭께. 니가 태어나기 전, 나는 거기까지 걸어 갔다가 하룻밤 자구 다시 걸어온 적두 있다. 이번에는 버스 타구 기차 타구 그렇게 갈 겨. 냘은 논산 장날잉께 버스가 미어터질 것 같어. 그래서 고생 좀 덜 할라구 일부러 냘 모리로 날을 잡았당께. 그러구 7월 초닷새날 네 증조할머니 제사 지내구 나면 곧 칠석이잖어. 그렁께 냘 모리가 딱 좋아.”
(큰)어머니는 역시 치밀했다. 친정에 가는 날을 아무렇게나 설렁설렁 대충대충 눈깜땡깜으로 택일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께서 바느질할 때 한 땀 한 땀 완벽하게 호아 나가듯이 정확하게 앞뒤를 재어 결정한 것이었다. 우선 내 방학을 참작했고, 할머니 제삿날과 칠석과 논산 장날까지를 감안하여 가장 합리적인 날짜를 잡은 것이었다. 그런 어른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갈릴레이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배척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틀 뒤, 즉 8월 4일 아침나절이었다. 나는 (큰)어머니를 따라 잿무덤부리 신작로로 나갔다. 흰 치마저고리 차림의 (큰)어머니는 작은 보퉁이를 머리에 이었고, 쑥색 반바지에 반팔 셔츠를 걸친 나는 가벼운 책가방을 들고 있었다. 당신은 팔뚝의 끔찍한 화상 상흔을 감추려고 항상 긴팔 옷을 입었다. 한여름에도 몸을 씻을 때 이외에는 그 어마어마한 상흔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길가 버즘나무의 무성한 가지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논에서는 벼들이 짙푸르게 자라고 있었지만, 저 넓고 기름진 들판에 우리 논은 단 한 마지기도 없었다.
얼마 후 버스가 뿌연 흙먼지를 이끌고 나타났다. 차량 번호는 ‘충남 영 438’이었다. 버스의 옆구리에는 ‘한흥여객’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했다. ‘大韓旅客株式會社’의 ‘충남 영 319’와 더불어 눈에 익은 친근한 정기 노선버스였다. 당시 부여와 논산 방면을 왕복 운행하는 노선버스 중에는 ‘충남 영 51’ ‘충남 영 52’도 있었다. 나는 동무들과 잿무덤부리에서 어울려 노는 동안 우리 동네 신작로를 내왕하는 버스들의 차량 번호를 유심히 눈여겨보곤 했던 것이다.
(큰)어머니가 손을 들자 버스가 멈추었고, 출입문을 연 조수가 숙련된 동작으로 자갈길에 나비처럼 사뿐히 내렸다. 흙먼지가 매콤한 냄새를 풍기며 달려들어 버스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조수에게 손바닥에 쥐고 있던 지전부터 건넸다. 당신과 나의 승차 요금이었다. ‘대인’인 당신은 전액이었고, ‘소인’인 나는 반액 할인 요금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금을 면제 받는 ‘유아’였는데, 어느덧 소인이 되어 대인의 반액을 지불하게 된 것이었다.
(큰)어머니와 나는 논산 차부, 즉 시외버스합동정류소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대전행, 이리행, 공주행, 부여행 등 여러 도시를 운행하는 노선버스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조수들이 버스 앞에 서서 “노성 상월 화마루 계룡…” 행선지를 줄줄이 주워섬기며 승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또 어떤 조수는 후진하는 버스 옆에서 “빠꾸, 빠꾸, 오라잇!”을 외치면서 운전수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큰)어머니와 나는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논산역으로 갔다. 역전 광장 느티나무 그늘 밑에서는 지게꾼 서넛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표소 창구 위에 둥근 벽시계가 있었고, 오른쪽 개찰구 상단 벽면에는 상행선 하행선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큰)어머니가 두계행 차표 두 장을 샀다. 당신 차표가 대인용 온표인 반면, 내 차표는 그보다 작은 소인용 반표였다. 약간 도톰하고 갸름한, 푸르스름한 색상의 직사각형 차표 표면에는 두 역명 ‘논산’과 ‘두계’ 사이에 ‘↔’로 양방향 화살표가 인쇄돼 있었다.
(큰)어머니와 나는 대합실 강생회 매점 맞은편 팥죽색 긴 의자에 앉아 상행선 기차를 기다렸다. ‘ㄱ' 자로 꺾어진 벽 쪽 긴 의자에도 대인들 몇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소인, 즉 어린이는 나 한 사람이었다. 제복 입은 역무원이 개찰구로 나와 플랫폼 출입 통제 칸막이를 열고 개찰을 시작했다. (큰)어머니와 내가 빳빳한 차표를 내밀자 역무원이 펜치로 콕 찍어 한 부분을 삭둑 도려냈다.
(큰)어머니와 나는 몇 가닥의 철길을 가로질러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우리 뒤 몇 사람이 줄을 서서 개찰을 받았고, 그들 또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반질반질한 선로에 부딪친 햇빛이 눈부시도록 반사되었고, 역사 건너편 연변에는 측백나무 울타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너머 넓은 들에서는 각종 농작물이 검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흰색 페인트 역명판에는 ‘논산’이라는, 검은색 붓글씨로 크게 쓴 현지 역명 좌우에 이웃 역명인 ‘부황’과 ‘채운’이 약간 작은 글씨로 명시돼 있었다. 역명은 모두 종서였고, ‘부황’ 밑에는 ‘←’로, ‘채운’ 밑에는 ‘→’로 기차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부황은 상행선 역이었고, 채운은 하행선 역이었다. 플랫폼에는 잘게 바순, 밤톨처럼 자잘한 잔돌들이 깔려 있었다.
마침내 채운역 방면으로부터 육중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들어왔다. 웡 웡 워웡… 칙칙폭폭 칙칙폭폭… 증기 기관차의 앞머리 원통 한복판에는 ‘파시5’ ‘23’이라 쓰여 있었다. 기관차 차종 ‘파시5형’의 일련번호 ‘23호’라는 표시였다. 다른 차종으로는 ‘미카’가 있었다. ‘파시5’ ‘23’의 굴뚝 꼭대기에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치솟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객차들이 길게 연결돼 있었다.
기차가 멈추자 몇몇 승객이 내렸고, (큰)어머니와 나는 승강구 발판을 딛고 객차 안으로 들어섰다. 촌놈이 머리 털 나고 처음 타보는 기차. 객차 안은 헐렁했고, 여기저기 빈자리가 많았다. (큰)어머니와 나는 고운 솜털이 보송보송한, 무슨 재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간 매끈매끈하면서도 내구성 높은 초록색 원단으로 덧씌운 푹신한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어떤 승객은 한 가족인 듯 앞쪽 정방향 의자를 180도 뒤로 돌려 또 다른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일행 네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경이로웠다.
위로 절반쯤 들어 올린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논산역을 떠난 기차가 부황역 연산역 광석역을 지나는 동안 이제까지 구경하지 못했던 낯선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연산역에는 증기 기관차에 물을 공급해 주는 급수탑이 있었다.
감색 제복에 빨간 완장을 착용한 여객전무가 승객들의 차표를 한 장 한 장 일일이 검표하면서 펜치로 톡톡 구멍을 뚫었고, 강생회 판매원들은 수시로 통로를 왕래하며 도시락과 담배와 소주와 땅콩과 삶은 달걀과 오징어와 눈깔사탕과 양갱과 엿과 껌과 대중 잡지 따위를 팔았다. 번개처럼 불쑥 나타난 행상들이 철도 승무원들의 눈을 피해 부랴부랴 벼락치기로 김밥을 팔다가 잽싸게 사라지기도 했다. 터널을 지날 때에는 매캐한 석탄 연기가 창문으로 밀려들어와 코를 찔렀다.
(큰)어머니와 나는 두계역에서 내렸고, 역무원에게 차표를 제출한 뒤 역 출찰구를 벗어났다. 증기 기관차는 쾅 쾅 시쿠당 쾅쾅… 억센 곰배팔로 바퀴를 잡아 돌리면서 원정역을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웡 웡 워엉… 기적을 울릴 때에는 기관차 지붕 꼭대기 분사구에서 허연 수증기가 치익치익 치솟아 하늘로 흩어졌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관차 몸통과 바퀴 쪽으로도 수증기 몇 조각이 풀풀 날아가고 있었다. 둥근 해가 높이 떠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갈릴레이로부터 받은 과제를 풀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송덕비가 서 있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 마을에서도 매미들이 요란뻑적지근한 합창 경연 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큰)어머니와 내가 사립문으로 들어서자 마루에 걸터앉아 할랑할랑 부채질을 하고 있던 강씨 아저씨가 깜짝 놀라 미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굴러 떨어지듯 부리나케 마당으로 달려 내려왔다. 그분이 (큰)어머니에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아이구, 누님! 어서 오세유. 이 더위에 먼 길 오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슈?”
“고생은 무슨… 버스와 기차가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어. 잘 지냈는감?”
“예, 즈희들이야 누님 덕택에 다 잘 지냈슈. 윤복이 너도 어서 오너라. 참 반갑구나.”
‘즈희들’은 ‘저희들’이었다. 허리 구부정한 아주머니가 허둥지둥 부엌에서 나왔고, 해가 저물 때 밖에 나갔던 자제들도 하나 둘 돌아와 (큰)어머니와 나를 반겨주었다. 강씨 아저씨 내외분은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장녀는 이미 출가외인이었고, 그 집에는 어른 두 분과 미혼인 4남 2녀 6남매가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 또는 누나였다. 그중에서 여섯째가 내 동갑이었고, 일곱째이자 막내인 승수만 나보다 서너 살 어려 아직 취학 전에 있었다.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강씨 아저씨 댁에 머물던 2박 3일 동안 낮에는 형들을 따라다니며 놀았다. 밤에는 방학 숙제를 하고 일기도 썼다. 두마국민학교(지금의 두마초등학교) 뒷동산에 올라가면 철길과 기차의 전모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위왕산 뒤쪽에서 기적을 울리며 나타난 기차가 두계천을 따라 두계역 쪽으로 다가왔고, 그 반면 두계역을 벗어난 기차가 시커먼 연기를 뿜어 올리며 두마국민학교 모퉁이를 거쳐 위왕산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 꼬리를 감추기도 했다.
둘째 날 오전 나는 승수를 앞세우고 두계역 일대를 정밀 답사했다. 두계역 앞으로 논산과 대전을 잇는 국도가 지나고 있었다. 그 도로변 방앗간 곁에는 함석으로 덮개를 씌운 펌프 우물이 있었다. 바가지로 마중물을 붓고 손잡이를 아래위로 눌렀다 올렸다 펌프질을 하면 동그란 꼭지 아가리로 샘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신기했다.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와서 양철 물통에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받아가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직까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고 있었는데, 펌프로 물을 좌악좌악 자아올리는 이 동네 주민들은 우리 고장 사람들보다 한 발 먼저 개명한 모양이었다.
(큰)어머니는 두계에서도 날마다 당신 올케를 도와 바느질에 집중했다. 식구들 수만큼 바느질감도 많았다. 당신은 역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달리 말해서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 천하제일 ‘바느질 여왕’이었다. 당신은 미상불 바느질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그해 가을이었다. 남해안에 상륙한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 내륙과 남해안 도서를 휩쓸며 전국을 강타했다. 9월 17일은 음력으로 8월 보름 추석날이었다. 그날 우리 고장에는 사상 유례없는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초가집 지붕이 훌러덩훌러덩 뒤집혀 날아갔다. 감나무 가지가 뚝뚝 부러졌고, 마당에는 조홍감과 땡감이 질펀하게 떨어졌다. 물난리를 만나 벙벙하게 침수된 용보들과 구례들 농경지가 일망무제의 바다를 연상케 했다.
나는 그때쯤 천동설과 지동설의 핵심을 확실히 파악했다. 해법의 비결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틀에 박힌 고정 관념을 허물자 알쏭달쏭했던 태양과 지구와 달의 관계까지 모든 난제가 한꺼번에 확 풀렸다. 낮과 밤의 교차 원리도 극명하게 깨달았다. 잔뜩 밀렸던 숙제를 다 마친 것처럼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나는 숙맥이 아니었고, 갈릴레이 또한 결코 엉터리 사기꾼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학문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 터라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큰)어머니에게는 두 번 다시 갈릴레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열었다가 무슨 면박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국민학교 시절 몇 차례 더 (큰)어머니를 따라 강씨 아저씨 댁을 방문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거의 두계에 갈 기회가 없었다. 그 무렵 광석역은 개태사역으로 역명이 바뀌었다. 강씨 아저씨는 승수를 대동하고 우리 집에 와서 하루나 이틀 유숙하며 (큰)아버지 내외분과 친밀한 우애를 다지곤 했다. 그 어간에 장성한 자제들은 대부분 성혼하여 제금났고, 그 내외분은 미혼인 나머지 두 아들과 함께 두마면을 떠나 양촌면 명암리 보도골 가평이씨 재실 모원재(慕遠齋)로 이사했다. 남의 문중 종산 관리인이 되어 그 종중의 묘소에 딸린 위토를 경작하게 된 것이었다.
각설하고, 나는 근근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강호에 나섰지만 고향에는 이렇다 할 생계 수단이 없어 개나 걸이나 모두 올라가는 서울에 도전장을 내밀고 객지 생활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서 버티다가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이르면 청운의 꿈을 펼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웬걸 몇 해 동안 여기저기 맨땅에 박치기하며 몸을 막 굴린 까닭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골병이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주야장천 팔다리가 쑤시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만 같았다.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지 못했다. 설령 병명을 안다 한들 병원 치료를 받을 입장도 못 되었다. 건강 보험이 도입되기 이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화병까지 들어 불행하게도 꼼짝없이 몸져눕는 신세가 되었다. 꿈을 이루려 했지만, 그 꿈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접은 채 본격적인 투병에 들어갔다.
1974년이었다.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경축 식장에서 재일 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저격했다. 박 대통령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총탄을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육영수 여사는 끝내 절명하고 말았다. 그 며칠 뒤 나는 병든 몸으로 요양 길에 올랐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나 할까, 몸을 돌보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찾아간 곳은 논산군 양촌면 명암리 보도골에 있는 강씨 아저씨 댁이었다. 모원재 우측 묘지 언덕에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었다.
그곳은 절간보다 더 한적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호롱불로 어둠을 밝혔다. 낮에는 책을 읽거나 가만가만 주변을 산책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뒷동산 고압선 철탑 아래로 양촌면과 연산면의 경계가 지나고 있었다. 그곳에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수려했다. 저쪽 또 다른 철탑 근방에 두 지역을 넘어 다니는 여우고개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 두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수는 이곳 모원재 주변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내가 그곳에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큰)어머니는 나를 살려내기 위해 정성을 다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갖가지 약을 구해왔다. 약 중에는 별의별 약이 다 있었다. 워낙 궁핍한지라 돈 주고 약국에서 구입한 양약이 아닌, 당신께서 손수 약초를 뜯어 건조한 명칭조차 알 수 없는 민간 처방 생약들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에는 새 이부자리를 가져다주었다.
몸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신속한 회복이었다. 하루는 승수한테 자전거를 빌려 타고 연산 사거리로 나가 신작로를 따라 개태사까지 왕복한 적도 있었다. 선들바람이 살살 불어오기 시작한 가을에는 산기슭을 펄펄 날아다니며 승수와 함께 상수리 열 가마를 주워 연산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보도골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그해 연말 나는 건강을 되찾아 보무도 당당히 개선장군처럼 재차 상경했다. 그러고는 또 다시 온갖 시련을 겪으며 희망의 고지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내 젊음의 길목에는 험난한 가시덤불과 거대한 걸림돌들이 너무 많았다. 가난이 원수였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의지가지없는 타관에서 맨몸으로 황무지를 개척하여 지평을 넓히기란 지난날 갈릴레이가 가로막았던 그 벽을 넘기보다 수백 수천 배 더 어려웠다. 산 너머 산, 강 건너 강… 대형 악재와 액운과 변고들이 간단없이 따라왔다.
1975년 (큰)아버지, 1977년 아버지, 1979년 어머니께서 이태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 바보처럼 마음씨 착한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아직 최소한의 기반조차 닦지 못해 살인적인 생활고에 시달리며 좌충우돌하던 20대 청년 시절이었다. 가혹한 현실이 얼마나 목덜미를 옥죄던지 곧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큰)어머니가 말랭이 윗집에서 홀로 기거했고, 아랫집에는 차복 아우와 어린 동생들이 올망졸망 힘겹게 살고 있었다. 나는 (큰)어머니에게 매달 약소한 생활비를 보내드렸다. 서글펐다. 나는 그때까지도 (큰)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미친놈’과 ‘헛소리’ 등등 일련의 차가운 구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매몰찬 언설에 풍덩 함몰된 이후 애증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었다.
1986년 가을, 고향의 차복 아우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큰)어머니의 병환이 심각할 만큼 깊어졌다는 것이었다. 병명은 폐암이었다. 나는 급거 고향으로 달려가 당신을 서울 양천구 목동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백약이 무효였다. 이제는 병원에서도 손을 쓰지 못할 만큼 당신의 병세가 막바지 말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방에 몸져누우신, 퉁퉁 부어오른 당신이 가쁜 숨을 헐떡이면서 내게 간신히 말했다.
“며칠… 못… 살… 것… 같구나… 내가… 죽더라도… 잘… 지내거라.”
당신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나로서는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뼈저림 속에서 어금니를 으스러지도록 깨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기 때문이었다. 몹쓸 병마와 사투를 벌이던 당신은 그로부터 열흘 뒤, 정확하게 말하자면 1987년 1월 8일 오전 10시 30분 조용히 운명하셨다. 음력으로는 섣달 초아흐렛날이었다. 향년 77세. 네 분 부모님 중에서 마지막으로 한 많은 일기를 마쳤다. 발인 날 목동을 떠난 영구차가 고향 귀신보 장지를 향해 고속 도로로 질주하는 동안 더께더께 쌓였던 회한들이 북받쳐 나는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차창 밖 산야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탁월한 바느질로 입신의 경지에 오르고서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 한평생 호강 한 번 못해 보고 저 쓰라린 가시밭길을 걷다가 비참하게 이승을 떠나가신 (큰)어머니. 자녀를 생산하지 못해 나를 양자로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워주신 양어머니. 당신께서는 완고한 의식 구조와 무뚝뚝한 언어로 가끔 내 의기를 망가뜨렸지만, 그러나 그 어른이야말로 나를 지성으로 키우고 혼신의 힘으로 가르쳐 주신 망극한 은인이었다. 나는 당신의 은혜에 백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했다.
동사무소에 (큰)어머니의 사망 신고를 마치던 날 억장이 무너졌다. 길바닥이 온통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날따라 강풍이 얼마나 살벌하던지 불현듯 국민학교 2학년 때의 태풍 사라호가 떠올랐다. 몇 년 후 강씨 아저씨 내외분이 타계했고, 자제들 또한 진작 강경과 서울과 대전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로써 두계는 물론 보도골과의 발길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세상이 급변했다. 서울에 있던 육군 해군 공군 3군 본부가 계룡산 신도안으로 이전하여 계룡대로 자리매김하면서 2003년 계룡시가 출범했다. 두마면은 계룡시로 편입되었고, 역사를 대대적으로 신축한 두계역은 계룡역으로 재탄생했다.
증기 기관차는 디젤 기관차에 밀려 퇴역했고, 그 뒤를 이어 쏜살같은 축지법으로 전국을 주름잡는 최첨단 전기 기관차가 등장했다. 계룡역이 KTX 고속 열차까지 정차하는 3등급 역으로 격상된 반면, 논산시 관내 개태사역과 부황역은 유명무실한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연산역의 경우 급수탑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최근에는 철도 문화 체험 현장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대전광역시 소재 원정역은 폐역되었다.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각 역의 차표 발권이 온라인 전산망으로 완전 자동화되었다. 승차권의 규격과 용지와 인쇄 방법도 판이해졌다. 개찰구가 철폐되었고, 누구든지 플랫폼을 자율적으로 출입하게 되었다. 차내 검표 역시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 강생회 매점은 홍익회 매장을 거쳐 코레일유통 스토리웨이 편의점으로 변신했다. 역과 역 사이에서 재빨리 타고 내리던 행상들은 한 시대의 일화를 남기고 멀리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듯 흘러간 세월의 길이에 비례하여 애환의 부피도 솜뭉치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날 입때껏 단 하루도 네 분 부모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송창근 선생님도 그리웠다. 과거 열차 편으로 논산역을 거쳐 고향에 오르내릴 때마다 두계역, 아니 계룡역을 지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했다. 연산역을 지날 때에는 당연히 저쪽 여우고개 쪽을 바라보며 보도골에서의 투병 생활을 반추했다. 그러나 천안 논산 간 고속 도로가 개통된 뒤로는 논산행 열차보다는 주로 부여행 고속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엊그제였다. 책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큰)어머니 유품 한 점을 발견했다. 충청남도에서 제작 보급한, (큰)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소지했던 노인 우대증 지갑이었다. 밤색 표지의 군청색 글자들이 희미하게 퇴색돼 있었고, 지갑 안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이 발행한 ‘경로우대증’과 부여군수 명의의 ‘유의사항’ 이외에 당신의 ‘사망진단서’ 두 통이 들어 있었다. 경로우대증과 유의사항은 원본이었고, 당신께서 돌아가신 이후 내가 네 겹으로 접어 끼워 놓은 미농지 사망진단서는 사본이었다.
경로우대증에 부착된 (큰)어머니의 사진을 뵙는 순간 사지가 벌벌 떨리는 미증유의 전율과 함께 왈칵 피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바느질의 전설이자 신화이신 당신과 이렇게 재회했다. 누군가가 내 폐부를 바늘로 쪼아대는 듯했다. 나를 위해 인생의 전부를 희생했던 (큰)어머니. 하지만 나는 당신의 ‘미친놈’ ‘헛소리’ 등등 거칠고 자극적인 말씀에 앙심을 품고는 뻔뻔하게도 오늘 여기까지 살아왔다.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불효자였고, 당신에게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용서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내 골수에는 당신 팔뚝의 화상 상흔보다도 열 배 백 배 더 큰 죄업의 화인이 박혀 있었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응보 앞에서 아무리 뉘우치고 후회한들 부질없는 짓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은밀한 곳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칵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밤 (큰)어머니께서 잠깐 현몽했다. ‘바느질 여왕’의 귀환이었다. 당신께서는 느닷없이 바늘 여러 개를 공중 높이 뿌렸고, 그 바늘들은 순식간에 불화살로 탈바꿈하면서 내게로 휙휙 날아왔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을 때,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직각을 이루며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개의 짧고 굵은 바늘 위로 똑딱 똑딱 길고 가느다란 초침이 돌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얼마 동안 바늘과 불화살의 계시를 따져 보려고 전전반측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길몽인지 흉몽인지 그 꿈을 해몽할 방도가 없었다. 다만, 분명하고 확실한 결론은 나야말로 장차 지옥으로 직행하여 극형에 처해질 최악의 중죄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목이 말랐다. 창문으로 아파트 단지의 보안등 불빛이 뿌옇게 스며들고 있었다. (『스토리문학』2025 상반기호, 통권 제114호)
◆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사)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역임.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사)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소설집『화려한 밀실』『사육제』『겨울여행』『먼 길』『동행』『만물박사(전3권)』『뿌리』 외 다수. 장편소설 『풍랑의 도시』『목신의 마을』『폭설』『겨울무지개』『사랑과 운명』『계백』『황금의 후예』외 다수. 대통령표창(1987·1995),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제28회 국제PEN문학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 제35회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제61회 한국문학상, 제21회 창조문예문학상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