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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럴 것만 같습니다. "뭐 이렇게 글이 길어"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깁니다. 영상을 올려도 한번에 여러 개 올립니다. 그래서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블로그 글을 읽다가 중간에 나갈 것 같습니다. 영상도 보다가 중간에 나갈 것 같고요.
지금부터 십여년 전에 '다음...아고라'가 있었을 때, 글을 올리면 항상 달리는 댓글들이 있었습니다. '이니그마씨는 글은 잘 쓰는데 글이 너무 길어' 이런 댓글은 주로 일베들이 달았습니다. 그럼 저의 대답은 거의 같았습니다. "이렇게 긴글, 단 한줄로도 쓸 수 있어, 써 볼까? 부디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저의 모든 글.. 이 블로그에 올리는 모든 글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이겁니다. "부디 행복하게 사시기를.." 제가 당신에게 부디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원하면 당신은 행복하게 살게 되나요?
팔만 대장경의 내용도 한마디로 할 수 있습니다. 그 한마디는 이런 거죠. "당신은 몸과 마음이 아닌 몸과 마음을 가능케하는 그것이다." 이걸 더 줄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다...Your are That"
세상은 아주 간단한 겁니다. 진리역시 간단한 거고요. 물론 현상세계의 진실 역시 아주 간단한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알고, 체득하고, 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도 아주 간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거의 무한할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래서 말이 길어지는 것이고 말이 길어지다 보니 결국 팔만대장경까지 펼쳐지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인들은 대부분 SNS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화가 단답형으로 이루어집니다. 만약, 당신이 아래 글도 길어서 한번에 읽지 못할 정도라면 당신 마음은 정상이 아닙니다. 물론 읽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좀 다른 문제입니다만 당신이 관심있어서 읽는 글이 길어서 십분도 길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대해서 더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유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이 병의 이름은 조급증입니다. 그리고 조급증이 깊어지면 정신불안, 정신불안이 깊어지면 조현증.. 즉 정신분열로 이어집니다.
도마복음 03장 The Marvel of Marvels/기적 중의 기적(2/5)
머리란, 취해 있으면 변명거리를 찾겠지만 모든 변명은 거짓이다, 그것은 마치 "그 친구는 너무 아파서 말할 수조차 없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섹스에 대한 구실과 담배 피는 것에 대한 변명을 찾을 것이며 육욕에 대한 핑계와 권력에 대한 구실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변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진실은 그것이 강제적이라는 것, 자신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으며 최면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취해 있으며 정신 없이 잠들어 있다, 그대가 깨어 있지 않으면 그대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차릴 수 없게 된다, 온 세상이 몽유병 상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이처럼 비참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잠들어 있고 취해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이러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예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자신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너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정신 없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 그의 꿈이라도 바꿀 수 있단 말이냐?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가지고 구제프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예수를 대표하는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티칸의 교황이 아니고 구제프이다, 구제프야말로 예수를 대표하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가 행한 마찰의 방법을 믿었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유형의 십자가를 만들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매달리게 하여 자기 십자가에서 변형을 경험하게 했다.
구제프 역시, "그대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만일 그대가 깨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단순히 그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런 믿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 이제 이 경전을 보자, 이 말들은 모두 매우 심오하고, 깊으며, 중요하다, 그리고 그대의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 될 수 있다, 이 말들을 잘 기억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한 가운데 서 있었고
나의 육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었다.
나는 그들이 모두 취해 있음을,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아무도 목말라 하는 자가
없음을 보았다.
예수는 결코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잣거리로 들어갔고 군중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창녀, 노동자, 농부, 그리고 어부들과 이야기했다.
그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바로 여기에, 그대들 한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는 세상을 등진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예수의 메시지가 그렇게도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하비라의 메시지는 결코 그런 힘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거의 전 세계의 반을 개종시켰다, 왜일까? 왜냐하면 그는 세상 속에 머물렀으며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움직였으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잠들어 있고 취해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깨어나게 할 방법과 수단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자기 자신을 잊고 싶을 때마다 술이나 마약을 한다.
예수가 잡히기 전날 밤 또는 일부러 잡혀주기 전날 밤 마지막 드라마가 연출되었던 그때, 한 제자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말했다, "이것이 나의 밤이다, 나는 이제 깊은 기도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기도해야만 한다, 너는 밤새워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내가 돌아와 볼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밤이다, 기억하라!"
예수는 기도하러 갔고 삼십 분쯤 지난 후 다시 돌아왔다, 그 제자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제자를 깨웠고 그에게 말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밤이기 때문에 밤새워 깨어 있으라고 말했는데도 너는 깊이 잠들어 있구나,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 나는 다시는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너는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나의 마지막 밤만이라도, 나와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깨어 있으라!"
제자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졸려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깨어 있겠습니다."
예수는 다시 기도하러 갔다, 삼십 분쯤 후에 그는 돌아왔으나 제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제자를 다시 깨웠고 그에게 말했다.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아침이 가까웠고 나는 체포될 것이다!"
제자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육신은 너무 강하고 의지는 너무 약합니다, 그리고 몸이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만 자는 건 괜찮겠지, 주님이 오시면 다시 깨어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번째 예수가 돌아왔을 때에도 제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제자들의 형편이다, 여러 번 나는 그대들에게 왔었지만 그대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그대에게 올 때마다 나는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잠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 잠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 자신을 자각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며 무엇을 하든지 그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미쳐 있으며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취해서 하는 것이다.
한번은 물라 나스루딘이 체포당했다, 그가 법정에서 나왔을 때 그는 한 친구에게 말했다, "너무 힘들었어, 처음에 판사는 나에게 오십 루피의 벌금을 선고했었지." 왜냐하면 그는 길에서 한 낯선 여자에게 키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계속해서 말을 했다, "판사는 처음에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했다는 죄로 오십 루피의 벌금을 선고했지 그리고는 그녀를 쳐다보더니 내가 취해 있었다는 죄로 오십 루피를 더 추가하는 거야!" 그 여자는 거의 여자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도 추하게 생겨서 만일 맨 정신이라면 아무도 그녀에게 키스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모두 가장 추한 것들과 키스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오직 그대들이 취해 있고 잠들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대들은 자신이 매달려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추한가! 그대는 권력보다 더 추한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대는 히틀러나 나폴레옹, 또는 알렉산더보다 더 추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역시 그대가 가진 야망인 것이다, 그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대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또는 히틀러처럼 세상에서 성공한, 세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추한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권력은 가장 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권력을 원한다, 그대는 부의 추함을 본 일이 있는가? 그것은 추해지기 마련이며 아름다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착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피와 죽음이 거기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박탈당한다, 오직 그래야만 그대의 은행 잔고는 계속 늘어가게 된다, 그대는 그것보다 더 추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이 부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날이 오면 그대는 먼저 오십 루피의 벌금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리고 신이 그대가 키스해 온 것들을 보고는 그대에게 오십 루피의 벌금을 더 추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나의 육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의 영(spirit)이 아니었다, 많은 스승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영으로 그대를 방문하고 있다, 붓다는 지금도 그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렇지만 만일 그대가 육신으로 온 사람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붓다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금세기에, 블라바츠키(러시아 신지학자)가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일을 영적으로 돕는 스승들의 존재를 발견, 아니 재발견했을 때,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은, "증거를 보여달라, 그 스승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했다, 신지학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스승들의 재발견이다.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세상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밖에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만 오직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는 육체 없이 세상에 남는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사람들을 돕는 기능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무가 아니라 깨달은 이의 본성이다.
그것은 마치 등불과 같다, 등불은 끊임없이 그 주변의 것들을 비춘다, 비록 그 길에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어도 불은 계속 타오른다, 그것이 빛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 길로 온다면 그 빛은 그를 인도한다, 그것은 빛의 의무가 아니라 빛의 본성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하나의 인도자로서 남는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육신으로 온 인도자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오는 인도자를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예수는 말한다, "나는 나의 육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었다, 나는 육체로서 존재했으며, 그들은 나를 볼 수 있고, 그들은 내 말을 들을 수 있고, 그들은 나를 느낄 수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놓치고 있다, 그들은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 모두가 취해 있음을 보았다, 진실로 그들은 거기에 없다, 전혀 의식이 없다, 나는 그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들은 집에 있지 않았다."
만일 예수가 그대의 집 문을 두드린다면, 그대는 거기에서 그를 맞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대는 결코 집에 있지 않다, 그대는 그대의 집만 빼고는 세계 어디든 돌아다닐 것이다, 그대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내면, 의식의 중심이 있는 그곳이 그대의 집이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그곳에 있지 않다, 오직 깊은 명상에 있을 때에만 그대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대가 깊은 명상에 있을 때 그대는 즉시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다, 그가 육신으로 오든 육신을 입지 않고 오든 차이는 없다.
만일 그대가 집에 있다면 그대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집에 없다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예수는 문을 두드릴 것이고 그대는 집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취해 있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대는 집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대는 자기 자신을 잊고 싶을 때마다 술이나 마약을 한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잊고 싶을 때마다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신다는 의미는 망각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들은 '기억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들이 술 마시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술 마시는 것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다, 만일 그대가 구도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대가 그 길을 간다면 술 취하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여정은 '자기 일깨움'으로 되어 있는데 술 마시는 것은 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대는 자기 자신을 잊고 싶어하는가? 왜 그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도 싫증을 내는가? 왜 그대 자신과 살지 못하는가? 왜 그대는 깨어 있지 못하고 편안해 하지 못하는가?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는 바로 그대가 혼자일 때마다 공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치 그대가 아무도 아니라는 느낌을 가진다, 그대는 내면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고 그 텅 빈 느낌은 심연이 된다, 그대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취해 있지 않을 때 갈증은 일어난다.
그대의 깊은 내면에 들어가면 그대는 하나의 심연이다, 그리고 그 심연이 그대를 계속 달아나게 하는 이유이다, 붓다는 그 심연을 '무아無我', 아나타(anatta)라고 불렀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대가 그곳을 들여다보면 무한히 넓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단지 내면의 하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의 심연이 있을 뿐이다, 그대가 그곳을 보는 순간 그대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즉시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대가 도망갈 곳은 어디인가? 그대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 공空은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도道이며 그대의 본질이다, 그대는 그것과 타협해야만 한다.
명상이란 단지 그대 내면의 공과 화합하는 일일 뿐이다, 달아나지 않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 달아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사는 것, 달아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그러면 돌연히 그 공은 충만한 생명이 된다, 그대가 그것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을 때,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오직 공만이 순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면 한계가 들어간다, 만일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면 신은 거기에 있을 수가 없다, 신은 위대한 심연, 궁극적인 심연을 의미한다, 그것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여지껏 그곳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산에 올라가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 그대는 현기증을 느낀다, 그러면 그대는 바라보고 싶지가 않다, 공포가 그대를 휘어잡고 밑으로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산이나 계곡도 그대의 내면에 존재하는 계곡보다 높거나 깊지는 못하다.
그리고 그대가 내면을 볼 때마다 그대는 현기증과 구토를 느끼고 즉시 달아난다, 그대는 눈을 감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대는 지금껏 수백만의 생을 통해서 이렇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대는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대는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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