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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제7釋摩訶衍論 卷第七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역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이제까지 그릇된 집착을 대치하여 바른 이해를 내게 하는 문[對治邪執正解門]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도를 향해 발심하고 닦아 나아가는 상을 분별하는 문[分別發趣道相門]을 설하겠다.
【論】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도에 모든 보살들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그리로 향해 나아간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발심(發心)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무엇이 세 가지 발심인가?
첫 번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고,
두 번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고,
세 번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사람이 어떤 행을 닦아서 신성취를 얻어 발심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부정취(不定聚) 중생이 선근을 훈습한 힘이 있는 경우,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어 십선(十善)을
일으키고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위없는 보리를 구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모든 부처님을 만나 직접 공양을
받들고 신심을 닦는다.
일만 겁이 지나도록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도록
가르친다. 혹은 대비심 때문에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고, 혹은 정법이 멸하려는 것을 보고는 정법을 지켜야겠다는 인연 때문에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신성취를 통해 발심한 자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결국에는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를 두고 여래의 종성(種姓)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선근이 적고 미약한 자의 경우는 아주 오래도록 쌍인 번뇌가 깊고 두텁다.
이들은 부처님을 만나 공양한다 해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이승의 종자를 일으킨다.
이 중에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근(根)이 확고하지 않아서 전진했다가는 다시 물러나고 한다.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이는 만 겁이 지나지 않아도 도중에 연을 만나 발심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 즉, 부처님의 색상(色相)을 보고 마음을 일으킨다거나 승려들에게 공양함으로써 발심한다거나,
승려들에게 공양함으로써 발심한다거나, 이승의 지도를 따라 발심한다거나, 남에게 배워서 발심하기도 한다.
이러한 발심은 모두가 확고한 것이 아니라서 나쁜 인연을 만나면 그대로 물러나 이승의 지위에 떨어진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인가?
간략히는 세 가지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곧은 마음[直心]이니, 진여법을 정념(正念)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깊은 마음[深心]이니,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다.
셋째는 대비심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문】 위에서는 법계가 한 모습이라 부처의 체(體)에 둘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여만을 올바로 생각하면 될 것을,
어째서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한가?
【답】 비유를 들겠다. 커다란 마니보주는 그 체성이 밝고 깨끗하지만
광물이나 다른 잡것이 묻어 있다. 어떤 사람이 마니보주의 밝은 체성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법으로 갈고 닦지 않는다면 결국은 밝음을 얻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중생의 진여법도 그 체성은 공하고 청정하지만 셀 수 없는 번뇌와 때에 찌들어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 계속해서 닦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때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체법에 빠짐없이 두루해 있으므로
모든 선행을 닦음으로써 대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진여법을 거스르지 않고
그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방편이란 네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행의 근본이 되는 방편[行根本方便]이다.
일체법의 자성이 생하는 일이 없음을 관함으로써 망견(妄見)을 떠나 생사에 머물지 않고, 일체법이란 인연이
화합한 것으로서 업에 따르는 과보가 유실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대비심을 일으키고 많은
복덕을 닦아 중생을 다 교화하되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머묾이 없는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히 그치게 하는 방편[能止方便]이다.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 모든 악법을 그치고
더 이상 불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모든 허물을 떠난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키고 불려 나가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께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제불께 권청하는 것이니,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두텁기 때문이다. 믿음이 늘어나 결국에는 위없는 도에 뜻을 세워 구하게 되며, 한편으로 불법승이 보호해 주시는 힘을 입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하여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상애를 떠난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커다란 원력이 평등한 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가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남김없이 무여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원을 발하는 것이니,
단절하는 일 없는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법성은 넓고 거서 모든 중생에게 빠짐없이 두루하며 평등하여
차이가 없으며 이쪽과 저쪽을 망념으로 분별하지 않아서 끝내 적멸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법신을 보고, 법신을 보기 때문에 원력에 따라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
즉, 도솔천으로부터 물러나와 모태에 들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에게 아직 법신(法身)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셀 수 없는 과거세로부터 익혀온 유루(有漏)의 업을 완전히 결단하지 못해서 태어나는 바에 따라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그것이 업에 묶이는 것[業繁]은 아니니,
큰 원력에 의한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수다라(修多羅)에서 간혹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아직 확고한 지위[正位]에 들지 못해 나태한 마음을 내는 초학보살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게 용맹심을 갖게 하기 위해 그렇게 설한 것뿐이다. 나아가 이 보살은 일단 발심하고 나면 겁을 먹거나 나약한 마음을 멀리 떠나므로 이승의 지위에 떨어질 것에 대해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겁 동안 힘들게 고행을 닦아야만 열반에 들 수 있다는 말을 들어도 겁을 먹거나 나약한 마음을 내는 일이 없다. 이들은 일체법이 본래부터 그 자체가 열반인을 믿기 때문이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이란 더욱 나아진 발심임을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처음으로 바른 믿음을 일으킨 이래,
첫 번째 아승기겁이 다 차려 하므로 진여법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현전하고 닦는 바에 대해서
닦는다는 상(相)을 떠난다.
법성의 체에 간탐(慳貪)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닦으며,
법성에는 염법이 없어서 오욕의 허물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 시(尸)바라밀을 닦으며,
법성에는 괴로움이 없어서 성냄에서 나오는 번뇌를 떠났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찬제(羼提)바라밀을 닦으며,
법성에는 몸이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상이 없어서
아만과 나태의 허물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을 닦으며,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체에 혼란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선(禪)바라밀을 닦으며,
법성의 체는 밝아서 무명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반야(般若)바라밀을 닦는다.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의 구경지에 이른 자에 해당하는 발심이다.
이들이 어떠한 경계를 증득한다는 말인가? 진여를 증득한다. 전식(轉識)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라고 하는데,
이를 증득한 자는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에서 나오는 지혜뿐이다. 이를 두고 ‘법신’이라고 한다.
이 보살은 일념이라는 짧은 순간에 시방의 세계를 남김없이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륜을 굴려 주시기를 청한다. 이는 오직 중생을 이끌어 주고 이익을 주기 위함인데, 문자에 의존하는 법이 없다. 지위를 초월하여 빠르게 정각을 얻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경우는 겁을 먹는 나약한 중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아승기겁을 지나서야 불도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경우는 태만하고 아만심이 있는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나. 위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보여 주시는 일은 불가사의하지만,
사실상 보살은 종성과 근기가 동등하고 발심과 증득한 바도 동등하여 그 동등함에서 더하거나 넘어서는
법이 없다. 이는 모든 보살이 삼 아승기겁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의 세계가 다 같지 않아서
그들이 보고 듣는 바가 다르고 근기와 욕구와 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행을 보여주는 데에도 차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보살이 발심하는 상은 어떠한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일부러 하지 않아도 두루 행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일고 꺼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은 공덕이 원만히 성취되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일체세간의 가장 높고 큰 신체를 시현한다.
즉, 일념에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완전히 끊어졌으므로 그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한다.
이 경우는 자연히 부사의업이 생겨 시방에 나타나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문】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도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도 끝이 없으며,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의 심행(心行)도 끝없이 차별된다.
이러한 경계는 구분을 지울 수가 없어서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무명이 끊어진다면 심상(心想)도 없어질 텐데,
어떻게 요변하는 능력을 가져서 그것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가?
【답】 모든 경계는 본래 일심이기에 상념(想念)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 허망하게 경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구분이 생기게 되었고,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켜 법성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별할 능력을
갖지 못할 뿐이다. 반면 모든 부처님은 견상(見想)을 떠났기 때문에 어디나 두루하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제법의 성품이다.
법성의 자체는 모든 망법(妄法)을 다 드러내 비추어 대지혜에서 나오는
무량한 방편을 갖추며, 많은 중생이 알아들을 만한 정도에 따라 갖가지
법의(法義)를 열어 보여준다. 이런 이유에서 ‘일체종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문】 모든 부처님께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어디에나 나타나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면
일체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신통한 변화를 보거나 설법을 듣거나 하여 이익을 얻지 않음이 없을 텐데,
어째서 세간에서는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경우가 많은가?
【답】 모든 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빠짐없이 두루하시되
의사를 일으키는 일[作意]이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표현을 쓴다.
단지 중생심에 따라서 나타나실 뿐이다. 중생심이란 마치 거울과도 같다.
거울에 때가 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마음에 때가 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釋】 위 본론은 본디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전체적으로 표제를 내걸고 그에 대해 전체적인 설명을 붙이는 문[摠標摠說門]이고,
두 번째는 각각에 대해 개별적인 해석을 내리고 이런 저런 각도에서 설명하는 문[別釋散說門]이다.
이것이 두 가지 문이다.
두 번째 문은 다시 세 가지 문으로 갈라진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세 가지 발심을 분석하는 문[三種發心分剖門]이고,
둘째는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결단하는 문[發起問答決疑門]이고,
셋째는 논의를 통해 논의를 이끌어 나가는 문답을 시설하는 문[因論生論問答門]이다.
이상이 세 가지니, 본론의 문맥과 맞추어 보면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총표총설문을 시설하는가?
한량없고 끝없는 삼세제불께서 바다 같은 원(願)을 세워 바다 같은 인(因)을 닦으시고
바다 같은 과(果)를 증득하시어 바다 같은 중생을 교화하셨는데, 한량없고 끝없는
삼세의 모든 보살무리들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여여하게 그대로 밟아서 수행하여 그에 맞추어 나아간다.
이들은 반드시 그 차례에 따르며, 수량을 넘어서는 일도 없고 지위를 뛰어넘는 일도 없이 방향을 잡아 들어가는 뜻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 총표총설문을 시설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부처에게는 도를 향해 나아가는 데 정해진 법칙이 없고, 모든 보살도 그에 따라서 도를 향해 나아가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는 가운데 여여한 행을
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도에 모든 보살들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그리로 향해 나아간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총표총설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별석산설문을 설하겠다.
여기에는 세 가지 문이 있으니, 순서에 따라 세밀히 사유하여 내용을 가려보아야 한다.
첫 번째로 시설한, 세 가지 발심을 분석한 문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세 가지 문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신성취발심문(信成就發心門)이고,
둘째는 해행발심문(解行發心門)이고,
셋째는 증득발심문(證得發心門)이다. 이상이 세 가지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발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이 세 가지 발심인가?
첫째는 신성취발심이고,
둘째는 해행발심이고,
셋째는 증발심이다’라고 하였다.
첫 번째의 신성취발심문은 세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논의를 시작하는 질문을 일으켜 전체적인 표제를 내거는 문[發起開問摠標門]이고,
둘째는 답을 통해 해석을 제시하면서 자세히 설명하는 문[顯示答釋廣說門]이고,
셋째는 문답을 일으켜 의신을 풀어주는 문[發起問答決疑門]이다.
이상이 세 가지다.
첫째와 둘째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첫째 문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질문을 일으켜 전체적인 표제를
내거는 데에는 네 가지를 밝히려는 의도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가설[假者]임을 밝히려는 의도로서,
닦아 나아가는 사람을 기준으로 물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믿음의 행상[行相]을 밝히려는 의도로서,
닦아 나아갈 바의 행을 기준으로 물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각각에 해당하는 분수[自分]을 밝히려는 의도로서,
성취하는 것을 기준으로 물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넷째는 향상(向上)을 밝히려는 의도로서,
점점 더 진취하는 상을 기준으로 물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상이 네 가지다.
이를 본론에서는,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사람이 어떤 행을 닦아서
신성취를 얻어 발심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발기문답총표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현시답석광설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기지인가?
첫째는 질문에 따라 차례대로 답하고 해석을 붙이는문[隨問次第答釋門]이고,
둘째는 열등한 것을 들어서 보다 나은 것을 드러내어 이해를 돕는 문[擧劣顯勝生解門]이다.
수문차제답석문에는 여섯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신을 닦는 행인을 가설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修行假者門]이고,
둘째는 중생에게는 본래적으로 본각과 선근을 훈습하는 힘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는 문[自然本有熏習門]이며,
셋째는 수행에 따르는 능력을 밝히는 문[顯示修行功能門]이고,
넷째는 신신을 성취하는 데 걸리는 기한을 밝힌 문[信心成就時量門]이며,
다섯째는 발심의 계기를 밝히는 문[顯示發心因緣門]이고,
여섯째는 신김을 닦은 데서 얻는 이익과 그에 따른 지위상승을
밝히는 문[顯示得益位勝門]이다. 이상이 여섯 가지다.
현시수행가자문이란 교화의 대상이 되는 중생은 한량없고 끝없지만
지금 여기서는 우선 부정취 중생만을 선택하여 십신위에 있는 중생을 섭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시설한 문이다. 무엇 때문인가?
부정취에 속하는 세 가지 품의 중생을 교화하여,
이들이 열 가지 신심을 빠짐없이 성취하여 확고히 십주보살(十住菩薩)의 초발심주에 안립하여
변치 않는 금강위(金剛位)에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본론에서는,‘부정취중생이……’라고 하였다.
자연본유훈습문이란 이렇게 중생이 끊임없이 생사를 계속하는 가운데도
무시 이래로 항상 본각장불(本覺藏佛)을 가지고 있으며 중생의 선근이 끊임없는 훈습에 의해
자라나게 한다는 뜻에서 이 문을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선근을 훈습한 힘이 있는 경우……’라고 하였다.
현시수행공능분이란 어떤 것인가?
부정취에 속하는 갖가지 중생들은 인과업보가 실유하는 것은 아니나 유사존재[似有]로서 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믿으며 인연이 화합한 도리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십악(十惡)의 허물을 알아서 거기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내고, 십선(十善)의 공덕을 관찰하여 거기에 마음을 일으켜야 겠다는 마음을 낸다. 그리하여 업에 묶인 처지를 싫어하고 해탈의 경계를 구함으로써 점점 벗어나 깨달음을 향한다. 현시수행공능문은 이러한 뜻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어 십선(十善)을 일으키고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위없는 보리를 구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모든 부처님을 만나 직접 공양을 받들고 신심을 닦는다’라고 하였다.
신심성취시량문이란 신심을 성취하는 시절이 멀고 가까운 차별을 갖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이 문에 대해서는 열다섯 가지 경에서 각각 다른 설을 펼치고 있다.
열다섯 가지 다른 설이란 어떤 것들인가?
첫 번째는 『일체제법인연무주계경(一切諸法因緣無主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께서는 갖가지로 빠짐없이 얽혀 있는 범부의 지위에서
부정취로 들어간다 하셨습니다. 모든 행자는 얼마만큼의 시절을 지나야 열 가지 신심이 구족하게
성취되어 점점 나아가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확고히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때 존자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잘 듣고 생각해 보아라.
내 그대를 위해 신성취를 얻을 수 있는 시절의 분량을 해설해 주겠다.
선남자여, 모든 행자는 갖가지 번뇌에 빠짐없이 얽혀 있는 범부의 지위에서
부정취에 들어가 일만 삼천 겁을 지나야
열 가지 신심을 성취하여 보살의 초발심주에 확고히 들어간다.’”
두 번째는 『섭무량대승계경(攝無量大乘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그리고 불자여, 신지가명보살(信地假名菩薩)은 육만 사천 겁이 다 차고 나서
열 가지 애락심(愛樂心)을 성취하여 금강지에 확고히 들어간다.”
세 번째는 『혜명다라니계경(慧明陀羅尼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부정취중생은 대부분 팔만 천오십 겁이
지나야 신심이 성취되어 물러남이 없는 지위에 확고히 도달할 수 있다.”
네 번째는 『법문명자계경(法門名字契經)』에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그리고 믿음을 즐겨 닦는 지위[信樂地位]에 있는 털끝 같은 범부는
이만 육천 겁을 지나서야 빠지거나 모자라는 일 없이 신심이 성취된다.”
다섯 번째는 『청정삼매계경(淸淨三昧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어떤 중생이 난각지(難角地)에 들어 신신을 닦으려 한다면 구만 겁을 다 채우고서야 신품(信品)이 성취된다.”
여섯 번째는 『금강다라니계경(金剛陀羅尼契經)』의설을 들 수 있다.
“신성취에 이르는 기한의 양은 사만 팔전육십 겁만큼이나 된다.”
일곱 번째는 『대지혜광명계경(大智慧光明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그리고 선남자여, 부모가 되고 천지가 될 만한 공덕과 선근을 성취하고자 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십 찰나만큼을 지나면 잡초가 없는 평탄한 믿음의 지위를 성취할 수 있다.”
여덟 번째는 『실상본제결정부동계경(實相本際決定不動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신심을 성취한 자는 신심을 일으키는 첫 찰나에 열 가지 신심이 빠짐없이 구족된다.”
아홉번째는 『문수사리원만인해대총지계경(文殊師利圓滿因海大摠持契經)』에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삼 아승기겁이라는 무량한 겁을 경과한 후에야 신위(信位)가 구족하게 성립한다.”
열 번째는 『심심보리인연계경(甚深菩提因緣契經)』의설을 들 수 있다.
“신의 지위[信地]를 건립하는 데 꼭 삼만 겁이 걸린다.”
열한 번째는 『대방편지선교계경(大方便智善巧契經)』의 설을 들 수 있다.
“신을 닦는 보살은 구천 겁을 지나야 청정한 신신을 확고히 성취하여 그 사유가 지극히 즐거워진다.”
열두 번째는 『보살광명변조계경(菩薩光明遍照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이때 금강혜(金剛慧)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위없는 무상보리에
처음 종자를 심는 지위까지 가려면 얼마만큼의 시절을 지나야 신심이 결정코 순수하게 숙성해서
보리의 싹이 나서 자라게 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처음 종자를 심는 지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칠만 오천육십 겁을 지나야 첫 종자를 심는 지위가 완전하게 세워진다.’”
열세 번째는 『수기평등계경(授記平等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신심을 성취하는 일은
먼 것도 아니고 가까운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니며,
근본적인 것도 아니고 지말적인 것도 아니며,
과거의 일도 아니고 미래의 일도 아니며,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삼세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삼세에 속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위(位)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지(地)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그른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의 작용처가 멸했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한 신심’이라고 한다.”
열네 번째는 『여래장본식계경(如來藏本識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이때 지장(地藏)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무엇을 두고 광대원만공덕부모신지품(廣大圓滿功德父母信地品)이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십신(十信)의 십신ㆍ십해(十解)의 십신ㆍ십행(十行)의 십신ㆍ십향(十向)의 십신ㆍ십지(十地)의 실신ㆍ
불지(佛地)의 십신을 말한다. 갖가지로 얽혀 있는 악종자지(惡種子地)와 모든 이승(二乘)에도 모두 십신이 있다.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법 중에 그 어느 하나도 십신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대원만신지라고 한다.’”
열다섯 번째는 『보살영락대본업계경(菩薩纓絡大本業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신상보살(信想菩薩)은 만 겁 동안을 십선법을 닦아서 신성취의 지위에 확고히 안립한다
.”이상이 신성취의 기한에 대한 열다섯 가지 다른 경설이다.
이상에서 예로 든 갖가지 경은 무슨 이치로 그와 같이 차별되는가?
중생의 마음이 한량없고 끝없이 각기 차별되기 때문에 그 마음의 정도를 따라서 설한 신의 행상이
그와 같이 차이가 나는 것이니 세심하게 사유해서 가려보아야 한다.
위 본론에서는 이상의 경설 중에 임의적으로 『본업경』에 의거해 해서한 것일 뿐이다.
이를 본론에서는,‘만 겁을 지나 신심이 성취된다’고 하였다.
현시발심인연문은 이미 신심을 성취한 행자가 제일주심(第一住心)을 일으키고자 하는 경우,
인연의 힘을 만나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본론은 세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부처님께 교화를 청하는 인연[勸請因緣]이고,
둘째는 중생을 구하고 제도하는 인연[救度因緣]이며,
셋째는 정법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연[護法因緣]이다. 이상이 세 가지다.
권청인연이란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 무리들이 뛰어나고
오묘한 갖가지 교법이 담긴 계경의 바다를 출현해 내시고,
신위(信位)에 있는 행자가 교화를 권청하여 부정지를 뛰어넘어 부동의 경계에 안립한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도록 가르친다’고 하였다.
구도인연이란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고해(苦海)를 연하여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금강같이 물러남이 없는 장대하고 청정한 대자비심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혹은 대비심 때문에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고’라고 하였다.
호법인연이란
제불의 교법이 멸하려고 할 때 갖가지 방편을 써서 편의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함에 따라 때에 따라 곳에 따라 신명을 아끼지 않고 불법을 지키려는 큰 인연의 힘 때문에,
금강같이 물러나지 않으며 광대하고 청정하여 오래 머무는 마음을 스스로 일으킨다는 뜻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혹은 정법이 멸하려는 것을 보고는 정법을 지켜야겠다는 인연 때문에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현시득익위승문은 신(信)을 성취하여 해(解)를 얻은 행자는 열 가지 명칭을
갖추어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무엇이 열 가지 명칭인가?
첫 번째는 근심과 번뇌가 없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다시 퇴굴하여 온갖 번뇌에 빠짐없이 얽혀 있는 범부의 지위에
떨어질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아주 부귀한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번뇌의 황무지를 갈아 없애고 열반의 과실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종성이 높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하열한 범부의 종성을 멀리 떠나 높고 귀한 여래의 종성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수족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반야의 횃불을 잡고 광대한 법계의 뜨락을 거닐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커다란 강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거칠 것 없이 곧장 흘러 살반야(薩般若)의 큰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궁전을 건립한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이미 부정지(不定地)를 넘어서 여래의 가문에 확고히 안주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부처님의 진실한 아들이 되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범부의 태(胎)를 멀리 떠나 성인의 태에 들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크게 복전이 되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번뇌를 벗어나 홀로 청정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무량한 무리를 거느리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법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자신의 권속이 되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마음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신을 성취하여 해를 얻은 행자에게 붙이는 열 가지 명칭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와 같이 신성취를 통해 발심한 자는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결국에는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를 두고 여래의 종성(種姓)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수문차제답석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거열현승생해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다시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열등한 사람을 들어서 열등한 법 얻는 형상을 밝히는 문[擧劣顯勝生解門]이고,
두 번째는 수승한 자를 들어서 수승한 법 얻는형상을 밝히는 문[擧勝顯勝形相門]이다.
이것이 두 가지 문이다.
거열현열평상문이란 선근은 미약하고 얇은데다가 번뇌는 깊고 두터운 중생의 경우,
대승의 인연을 만난다 해도 직은 선근 종자밖에 일으킬 수 없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선근이 적고 미약한 자의 경우는 아주 오래도록 쌓인 번뇌가 깊고 두텁다.
이들은 부처님을 만나 공양한다 해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이승의 종자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거승현승현상문을 시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중생이 대승의 깊고 미묘한 법문을 구하는 경우, 그 마음이 확고하지 못하다면
순조로운 인연을 만날 때 정신없이 나아가나가 거스르는 인연을 만나면 저절로 퇴굴한다.
이는 확고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 중에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근(根)이 확고하지 않아서전진했다가는 다시 물러나고 한다’고 하였다.
확고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이들을 수승하고 높은 사람이라고 부르는가?
비록 마음이 확고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지극히 높은 법을 바라보고 나아가기 때문에,
그리고 높은 법을 소망하면서 인천과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아래로는 신심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기한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열네 가지 경에서 설한 대의를 해석하는 내용이다. 제불께 공양을 함으로써
신심을 성취하는 중생의 경우는 그 시한에 정해진 바가 없다.
아주 오래 걸리기도 하고 아주 짧게 걸리기도 하며
혹은 그 중간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연(緣)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심이 숙성되어 생하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이는
만 겁이 지나지 않아도 도중에 연을 만나 발심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위에 속하는 각각의 경우를 해석하여
발심에 관계하는 인연의 양상을 밝히는 내용이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발심인연에 네 가지 경우를 들고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부처님을 본 인연으로서,
여래의 묘한 색신을 보고서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즉, 부처님의 색상(色相)을 보고 발심한다거나’라고 하였다.
둘째는 승려에게 공양하는 인연으로서,
승려들에게 갖가지 도구를 공양한 인연으로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승려들에게 공양함으로써 발심한다거나’라고 하였다.
셋째는 부끄러운 미음을 내는 인연으로서,
이승의 교법을 듣고 열등함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갖는 인연으로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승의 지도를 따라 발심한다거나’라고 하였다.
넷째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을 겸하는 인연으로서,
남에게 배운 것을 자기 마음에 보태는 인연으로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론 본론에서는, ‘남에게 배워서 발심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상이 네 가지 발심인연이다.
이 아래로는 해당하는 인연을 들어
열 가지 신심을 갖는 부정취중생의 형상을 밝히고,
앞서 설한 열 가지 신심에 대해 결론적으로 결택하는 부분이다.
무슨 이유로 열 가지 신품(信品)에 대해 부정(不定)이라는 명칭을 붙이는가?
순조롭고 타당한 인연을 만나면
그에 따라 선취(善趣)로 나아가고
거스르는 인연을 만나면
그에 따라 악도(惡道)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마치 가벼운 터럭이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리는 것과 같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러한 발심은 모두가 확고한 것이 아니라서
나쁜 인연을 만나면 그대로 물러나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첫 번째[第一重]에 속하는 두 가지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두 번째[第二重]에 속하는 두 가지 문을 설하겠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인가?’
라는 문장은 발기개문총표문(發起開門摠標門)에 해당한다.
질문을 시설함으로써 행할 바에 대해 전체적으로 묻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간략히는 세 가지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 구절은 총표총답(摠標摠答)에 해당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라고 한 문장은 총거총문(摠擧摠問)에 해당한다.
이 아래로는 직설적으로 답을 하고 그 내용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세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정지방편문(正智方便門),
둘째는 복덕구족문(福德具足門),
셋째는 안락성취문(安樂成就門), 이것이 세 가지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과 남을 이롭게 하는 것 양쪽에
다 통하고, 두 번째는 오직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오직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앞의 두 가지를 자리(自利)로 보고
마지막 한 가지를 이타(利他)로 볼 수도 있다. 또 다르게는 세 가지 모두 양쪽에 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각각은 모두 주제를 내거는 부분[標]과
그에 대해 해석하는 부분[釋]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자세히 사유하여 가려보아야 한다.
정지방편문이란 곧은 마음[直心]을 말한다.
정체지(正體智)를 이루어 방편을 짓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첫째는 곧은 마음[直心]이니, 진여법을 정념(正念)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복덕구족문이란 깊은 마음[深心]을 말한다. 모든 공덕을 지어 그것들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두 번째는 깊은 마음[深心]이니,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안락성취문이란 고통을 슬퍼하는 마음[悲心]을 말한다. 모든 중생의 무량한 고통과 번뇌를 구제하여
그들이 안온하고 광대한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세 번째는 대비심이니,일체 중생의 고통을제거해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두 번째[第二重]에 속하는 두 가지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발기문답결의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따져 묻는 문[前後相違難問]이고,
둘째는 앞뒤 내용을 회통하고 해석하여 문제를 소멸하는 문[開通會釋消難門]이다.
이것이 두 가지다.
전후상위난문문이란 본문의 내용이 위에서 말한 것과 아래에서 말한 것이
모순되어 그 차별상을 따져 묻는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어떻게 모순되는가?
저 위에서는 ‘무슨 뜻에서 각의 측면[覺義]을 말하는가?
심의 체[心體]는 염(念)과 상(相)을 떠났다. 염과 상을 떠난 것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어디나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는, 한 모습의 법계로서 다를 아닌 여래의 평등법신을 말한다.
이 법신(法身)에 의거해서 본각(本覺)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해 놓고,
뒤에서는 ‘두 번째는 깊은 마음[深心]이니,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한 말과 아래에서 한 말이 이와 같이 모순되므로 질문을 일으켜 그 차이를 따져 물은 것이니,
자세히 사유하여 가려보아야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위에서는 법계가 한 모습이라
부처의 체(體)에 둘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여만을 올바로 생각하면 될 것을,
어째서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이제까지 전후상위난문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개통회석소난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일곱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 번째는 정곡으로 답을 제시하여 문제를 풀어주는 문[正答決斷彼難門。二者]이다.
두 번째는 선을 닦는 행자가 얻는 이익을 밝히는 문[修善行者得益門]이다.
세 번째는 훌륭한 방편을 수행하는 것을 밝힌 문[修行善巧方便門]이다.
네 번째는 발심에 따르는 공덕을 밝힌 문 [顯示發心功德門]이다.
다섯 번째는 위 아래로 제시한 경설의 차이를 가리는 문[揀擇上下顯異門]이다.
여섯 번째는 경의 문장들을 회통함으로써 의심을 결택하는 문[通契經文決疑門]이다.
일곱 번째는 발심에 따르는 공덕을 찬탄하는 문[讚歎發心功德門]이다.
첫 번째 분은 다시 세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비유를 들어서 훌륭한 설명을 열어 보이는문[開示譬喩善巧門]이고,
둘째는 비유를 법에 대응시켜 뜻을 확정하는 문[合說契當安立門]이며,
셋째는 법설을 밝힘으로써 이때를 돕는 문[顯示法說生解門]이다. 이상이 세 가지이다.
비유문은 다시 네 가지로 되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보석의 비유[寶喩],
둘째는 성품이 청정하다는 비유[性淨喩],
셋째는 때에 물들었다는 비유[垢染喩],
넷째는 사람의 부류에 따른 비유[人衆喩]다. 이상이 네 가지다.
보석의 비유란 큰 마니구슬 보석을 말한다.
이러한 마니구슬 보석에서 어떤 점을 비유로 드는가?
이러만 마니구슬 보석이 황색을 띤다는 점이다.
이 마니구슬 보석은 무슨 색인가? 짙은 황색이다.
그 몸체와 형상은 어떠한가?
반듯한 좌석[方座]같이 생겼다. 길고 짧은 데가 없기 때문이다.
크기나 분량은 얼마나 되는가?
한 길 정도 된다. 이 구슬 보석이 모든 황색의 원석(原石)에 다 들어 있어서
황색의 원석이 없다면 마니구슬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머물러 있는 양상은 어떤 차례를 갖는가?
첫 번째는 구슬,
두 번째는 황금,
세 번째는 돌의 몸체다.
이 마니구슬이 한 길 정도 된다고 하였는데, 저 갖가지 황색 원석에는
아주 작은 것도 있고 아주 큰 것도 있어서 각기 다른데
어떻게 그것이 모두에 두루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마니구슬은 수승한 공능을 갖기 때문에 비록 한 길 정도 되는 것이라도
큰 것과 중간 것과 작은 것에 다 통하며,
남는 법도 없고 막히거나 걸리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저 원석 속에 이 보배가 있기 때문에
그 원석의 색깔이 황색을 띤다는 사실을 잘 관찰해야 한다.이것이 보석의 비유다.
이를 본론에서는,‘비유를 들겠다. 커다란 마니보주는……’이라고 대답하였다.
성품이 청정하다는 비유는 이 보배 구슬의 체성이 지극히 밝고 깨끗하여 티끌의 누적을 떠났다는 뜻에서
든 것이다. 이를 성품이 청정하다는 비유라고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 체성이 밝고 깨끗하지만’이라고 하였다. 때에 물들었다는 비유는 이 보배 구슬이 광석 등에 가리어져 밝고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에서 든 것이다. 이를 때에 물들었다는 비유라고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광물이나 다른 잡것이 묻어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부류에 따른 비유란 매우 가난하고 게을러서 보배를 구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노력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배를 구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에서 든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어떤 사람이 마니보주의 밝은 체성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법을 써서 길고 닦지 않는다면 결국은 밝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개시비유선교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합설계당안립문을 설하겠다.
보석의 비유에서 큰 마니구슬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본각불성(本覺佛性)을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본각불성이 중생의 상속(相續)하는 몸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저 구슬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황색의 원석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일체 중생이 끊임없이 몸을 통해 이어지는 것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중생의 몸이 그 속에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저 원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황색을 띤다는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저 불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불성이 견고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저 금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듯한 좌석과 같아서 길고 짧은 데가 없다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진여법은 평등하여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다는 뜻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 진여법은 평등한 한 가지 맛으로서 차별이 없는 것이
저 좌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길 정도 된다는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진여법은 빠뜨리는 것 없이 모두를 완전히 구비하고 있다는뜻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법신이 빠짐없이 만 가지 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저 한 길 정도 되는 구슬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보배 구슬이 모든 황색의 원석에 다 들어 있어서 황색의 원석이 없다면
마니구슬도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진여의 성품이 모든 중생의 갖가지 몸에 두루하여 진여
본각의 성품을 갖지 않은 중생은 없다는 뜻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 진여의 성품이 두루하지 못하는 허물을 떠난 것이 저 구슬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구슬, 두 번째는 황금, 세 번째는 돌의 몸체라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본디 갖추고 있는 법이 거친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을 비유한다.
본각의 지혜로부터 유전(流轉)해 나와서 사상(四相)의 바다를 건립할 때,
거친 순서대희 점점 드러나는 것이 저 세 가지와 같기 때문이다.
이 마니구슬은 수승한 공능을 갖기 때문에 비록 한 길 정도 되는 것이라도 큰 것과
중간 것과 작은 것에 다 통하며 남는 법이 없다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진여의 본각이 불가사의한 업을 가져서 모기나 용 등 크고 작은 몸속에
아무 어려움이나 걸림 없이 두루하다는 뜻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 진여법의 성품이 평등하여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할 것 없이 두루한 것이
저 구슬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저 원석 속에 이 보배가 있기 때문에 그 원석의 색깔이 황색을 떤다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모든 중생에게 다 본각이 있어서 심상(心相)을 갖게 된다는 뜻을 비유한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중생이 각심(覺心)을 갖기 때문에 요별하는 식[了別識]을 갖게 되는 것이 저 원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보석의 비유를 법설에 대응하여 뜻을 확정하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청정하다는 비유를 법설에 대응하여 뜻을 확정하는 문을 설하겠다.
이 보배 구슬의 체성이 지극히 밝고 깨끗하여 티끌의 누석을 떠났다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성정본각(性情本覺)은 청정하고 명백하여 오염을 떠났다는 뜻을 비유한다.
이제까지 청정하다는 비유를 법설에 대응하여 눈을 확정하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물들었다는 비유를 법설에 대응하여 뜻을 확정하는 문을 설하겠다.
이 보배구슬이 광석 등에 가리어져 밝고 깨끗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자성청정심이 무명에 덜이고 가리어져 무루성품의 공덕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을 비유한다.
이제까지 물들었다는 비유를 법설에 대응하여 뜻을 확정하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사람의 따른 비유를
법설에 대응하여 뜻을 확정하는 문을 설하겠다.두 종류의 사람을 든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불법의 보배를 구하는 사람 중에는 지극히 정진하는 사람도 있고 지극히 나태한 사람도 있다는 뜻을 비유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마찬가지로 중생의……’이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합설계당안립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현시법설생해문을 설하겠다.
이 대목은 차례대로 법설을 비유에 대응시켜 행자의 이해를 돕고 있으니 잘 사유해서 해석해 보아야 한다.
주문의 맥락에서 내용이 명백히 드러나므로 개별적인 해석은 할 필요가 없겠다.
본론에서는, ‘진여법도 그 체성은 공하고 청정하지만 셀 수 없는 번뇌와 때에 찌들어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 계속해서 닦지 않는다면 역시 정정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때가 셀 수 없이 많아서 일체법에 빠짐없이 두루해 있으므로 모든 선행을 닦음으로써 대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정답결단피난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수선행자득익문을 설하겠다.
어떤 중생이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는다면 자연히 자재하게 되어
진여삼매(眞如三昧)를 얻고 무명의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추어 의심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였다.
이를 본론에서는, ‘어떤 사람이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진여법을
거스르지 않고 그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수선행자득익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수생선교방편문을 설하겠다.
이 문에는 본디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수행의 근본이 뇌는 것을 밝히는 문[一切修行根本門]이고,
둘째는 악업을 눌러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문[制伏惡業不生門]이고,
셋째는 선근을 내고 늘려 나가는 문[出生善根增長門]이고,
넷째는 서원이 끝이 없어서 평등한 문[誓願無邊平等門]이다.
이상이 네 가지다.
이를 본론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방편이란 네 가지로 요약된다’고 하였다.
첫 번째 문은 두 가지 근으로 되어 있나.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반야(般若)를 성취하여 머묾이 없는 문이고,
둘째는 대비(大悲)를 성취하여 머묾이 없는 문이다.
이것이 두 가지나. 반야를 성취하여 머묾이 없는 문은
모든 법이 본래부터 생한 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어서 필경에 적멸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음을
관찰함으로써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행의 근본이 되는 방편이다. 일체법의 자성이 생하는 일이 없음을 관함으로써 망견(妄見)을 떠나
생사에 머물지 않고’라고 하였다. 대비를 성취하여 머묾이 없는 문은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인과가 공하지 않고 업보도 있다는 것을 관찰하여 무량무변한 중생계의 바다를 인연으로 삼아 결국 그들을
다 받아들이되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 ‘일체법이란 인연이 화합한 것으로서 업에 따르는 과보가 유실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대비심을 일으키고 많은 복덕을 닦아 중생을 다 교화하되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머묾이 없는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구절은 수행의 근본이 되는 인연을 밝힘과 아울러 반야와 대비 두 가지로써
열반에 머물지 않는 도행(道行)을 결론적으로 제시한 내용이다.
수행하는 법문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머물지 않는 도[無住道]가 그 중에
가장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근본 행방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되는 것을 밝힌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악업을 눌러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문을 설하겠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했는가?
행자가 부끄러움 등의 청정한 심품(心品)을 내서 셀 수 없는 모든 악작(惡作)을 방지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악작이 줄고 없어져서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 시설하였다.
이를 본론에서,‘두 번째는 능히 그치게 하는 방편이다.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 모든 악법을 그치고
더 이상 불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모든 허물을 떠난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구절은 악을 방지하는 연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내용이다.
이제까지 악업을 눌러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선근을 내고 늘려 나가는 문을 설하겠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는가?
행자가 모든 삼보를 공경하고 공양하며 예배하고 찬탄하며 함께 기뻐하고 법문해 주시기를 권청함으로써
신실을 불려 나가고 악업의 장애를 소멸하며, 결국은 위없는 대보리에 뜻을 두고 구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이를 본론에서‘세 번째는 선근을 일으키고 불려 나가는 방편이다. 삼보께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제불께 권청하는 것이니,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두텁기 때문이다.
믿음이 늘어나 결국에는 위없는 도에 뜻을 세워 구하게 되며, 한편으로 불법승이 보호해 주시는 힘을 입기 때문에 업상을 소멸하여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장애를 떠난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구절은 선근을 불려나가는 연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내용이다.
이제까지 선근을 내고 늘려 나가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서원이 끝이 없어 평등함을 밝히는 문을 설하겠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는가?
행자가 시방세계의 티끌같이 많은 광대한 서원의 바다를 일으켜 시방세계의 티끌같이 많은 행인(行因)의
바다를 닦고 시방세계의 티끌같이 많은 중생의 바다를 다 거두어들이며 시방세계의 티끌 같은 원만한 과(果)의
바다를 성취함에 있어서, 이 모두에 모자람이없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 이 문을 시설하였다.
이를 본론에서는 ‘네 번째는 커다란 원력이 평등한 방편이다. 미래가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남김없이
무여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원을 발하는 것이니, 단절하는 일 없는 법성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구절은 서원의 인연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내용이다.
이 아래로는 법성에 수순함으로써 얻어지는 수승한 상을 밝히는 내용이다.
무슨 뜻으로 네 가지 문의 결론 부분에 공통적으로 ‘법성에 수순한다’는 표현을 붙이는가?
법성은 허공과 같아서 그 체성이 넓고 크고 원만하여 끝간 데가 없다. 또 법성의 상과 작용은 걸림없이
자재하여 처음과 끝이 없다. 저 네 가지 문을 닦는 행자도 이와 같이 법성에 따라 여여하게 행하기 때문에,
그들이 원[阿世耶]을 수행하는 검은 광대하고 원만하여 시간적으로 구분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에 법성에 수순한다는 말을 쓴다. 이를 본론에서는, ‘법성은 넓고 커서 모든 중생에게 빠짐없이 두루하며 평등하여 차이가 없으며
이쪽과 저쪽을 망념으로 분별하지 않아서 끝내 적멸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수행선교방편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현시발심공덕문을 설하겠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는가?
초발실주(初發心住)에 있는 보살은 법계의 성품 가운데서 광대하고 원만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상사관지(相似觀智)로써 법성신을 보고, 법신을 보기 때문에 원력이 자재해지고,
원력 때문에 무량무변한 법계의 중생을 인연으로 대비심을 일으킨다.
대비심이 지극히 길어지기 때문에 여덟 가지로 안락하게 친화하는 상을 나타내 보이되,
때에 맞게 장소에 맞게 편의에 띠라 적절한 상황에 따라 순리적으로 여여하게 이익과 안락을 준다.
이러한 점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였다. 이를 본론에서는, ‘보살이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법신을 보고, 법신을 보기 때문에 원력에 따라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 즉, 도솔천으로부터 물러나와 모태에 들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현시발심공덕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간택상하현이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두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지상보살(地上菩薩)과는
다른 점을 구별해 내는 문[揀異地上門]이고,
두 번째는 갖가지 번뇌에 빠짐없이 얽혀 있는 범부와도
다른 점을 구별해 내는 문[揀異具縛門]이다. 이것이 두 가지다.
지상보살과 다른 점을 구별해 내는 문은,
발심주(發心住)에 있는 보살에게는‘환화영상신(幻化影像身)’이라는 명징만 부여할 뿐
‘진여법신보살’이라고 부긴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 보살은 무시이래로 쌓은 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생을 받는 처소에 따라서 미세한 괴로움과
분리되지 않고 상응한다. 그러나 지상보살은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러나
이 보살에게 아직 법신(法身)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셀 수 없는 과거세로부터 익혀온 유루(有漏)의
업을 완전히 결단하지 못해서 태어나는 바에 따라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갖가지 번뇌에 빠짐없이 얽혀 잇는 범부와도 다른 점을 구별해 내는 문은,
조발심주에 있는 보살에게는 계박(繫縛)에 의해 전변하는 업인(業因)의
상이 없고 계박에 의해 생을 받는과보도 없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큰 원력의 방편이 구속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그렇다 해서 그것이 업에 묶이는 것[業繁]은 아니니,
큰 원력에 의한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간택상하현이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통계경문결의문을 설하겠다.
이 문을 본디 다섯 가지 경에서 설한 이설로 되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문수사리환희다리니계경(殊師利歡喜陀羅尼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항상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십 가지 마음이 과해(果海)와 행인(行因)의 근본을 장엄하며,
모든 행자는 이 도를 겪어야 등정각(等正覺)을 이룰 수 있다≻고.
이 오십 가지 마음에서 얼만큼이 물러남이 있는 부분[退分]에 속하고
얼마큼이 확고한 부분[定分]에 속합니까?
세존께서는 저를 위해 부디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잘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내 이제 그대를 위해 설명하겠다.
선남자여, 열 가지 진실한 지(地)를 금강반야주지(金剛般若住地)라고 하며,
전 단계의 사십 가지 마음은 파리주수전회향지(頗梨珠隨轉迴向地)라고
한다. 그대는 이렇게 알아들어야 하고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보살[大士]의 십지(十地)는 이미 진여를 증득한 지위에 있으므로
불퇴분(不退分)이라 이름하고 이전의 사십 가지 마음에서는
증지(證智)를 얻지 못했으므로 퇴분(退分)이라 이름함을 밝히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본각대비자연훈습계경(本覺大悲自然熏習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그리고 불자여, 그대는 앞에서 꺾이고 물러나는 모습[節退相]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하여 어리석은 범부나 처음 발심한 보살 등이 알 수 있는 것이아니다.
’ 이때 대명보살(大明菩薩)이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니 부처님께서 대명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꺾이고 물러나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신심(信心)ㆍ발심주(發心住)ㆍ정심지(淨心地)ㆍ금강심(金剛心)
이 네 가지 처(處)에 모두 퇴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저들 중간에 각각 불퇴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꺾이고 물러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불법이라는 큰 바다는 광대하고 원만하여
끝이나 구분되는 한계가 없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세 번째는 『대증득다라니계경(大證得陀羅尼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열 가지 안정된 마음[安心]은 결정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여기에는 물러나고 유실된다는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십주보살이 법계의 성품에 따르는 마음을 일으킬 때
선근이 넓고 커진다는 뜻과 확고하게 금강위(金剛位)에 안주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다.
네 번째는 『오명계경(五明契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이다.
“열 가지 확고한 마음은 물러나지도 않고 나아가지도 않으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어서
만 가지 덕을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이를 자연히 머무는
마음이라고 한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십주위에 있는 보살은 이미 과덕을 만족하여 더 이상 나아갈 것도 물러날 것도 없으며,
자연히 상주하여 빠뜨리는 일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여러 선남자들이여, 만일 일 겁이나 이 겁 나아가 십 겹 동안 신심을 수행해서 십주에 들어간 사람이,
이때 첫 번째 주(住)로부터 여섯 번째 주에 이르기까지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정관(正觀)이 현재전(現在前)한다.
게다가 제불과 보살과 선지식의 보호를 받으면 거기서 나와서
제칠주(第七住)에 이르러 항상 머물러 물러나는 일이 없다.
이 제칠주 전까지를 퇴분(退分)이라고 한다.”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하열하고 태만한 중생을 장려하여 용맹심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다. 위에 인용한 경들 가운데 여기서는 임의대로 『본업경』에 근거해서 회통하였으니 잘 관찰해야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수다라(修多羅)에서 간혹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아직 확고한 지위[正位]에 들지 못해 나태한 마음을 내는 초학보살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게 용맹심을 갖게 하기 위해 그렇게 설한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통계경문결의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찬탄발심공덕문을 설하겠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는가?
발심한 보살은 두 가지 두려움을 멀리 떠나
마음이 확고부동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무엇이 두 가지 두려움인가?
첫째는 하지(下地)에 생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으로서,
하열한 도에 생하는 것에 대해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둘째는 높은 곳에 생하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서, 수승한 경계에 대하여
듣고는 마음이 약해지고 겁먹어서 지극히 두려움을 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두려움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발심에 따르는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 ‘나아가 이 보살은 일단 발심을 하고 나면 겁을 먹거나 나약한 마음을 멀리 떠나므로
이승의 지위에 떨어질 것에 대해 결로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겁 동안 힘들게
고행을 닦아야만 열반에 들 수 있다는 말을 들어도 겁을 먹거나 나약한 마음을 내는 일이 없다.
이들은 일체법이 본래부터 그 자체가 열반임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구절은 두 가지 공녀의 인연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에 대한 결택분(決擇分)을 다 설명해 마친다.
이 아래로도 갖기지 문이 시설되어 있는데,
본문의 맥락에서 뜻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중복해서 해석하지 않겠다.
已說對治邪執正解門,次說分別發趣道相門。
本曰:‘ 分別發趣道相者,謂一切諸佛所證之道,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
略說發心有三種。云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
二者解行發心,
三者證發心。
信成就發心者,依何等人,修何等行,得信成就,堪能發心?所謂依不定聚衆生。
有熏習善根力故,信業果報能起十善,厭生死苦,欲求無上菩提,得値諸佛,親承供養,修行信心,經一萬劫,信心成就故。諸佛菩薩教令發心,或以大悲故,能自發心,或因正法欲滅,以護法因緣故,能自發心。
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入正定聚,畢竟不退,名住如來種中,正因相應。若有衆生,善根微少,久遠已來,煩惱深厚,雖値於佛,亦得供養。然起人天種子,或起二乘種子,設有求大乘者,根則不定,若進若退,
或有供養諸佛,未經一萬劫,於中遇緣,亦有發心。所謂見佛色相,而發其心,或因供養衆僧,而發其心,
或因二乘之人教令發心或學他發心如是等發心,悉皆不定。遇惡因緣,或便退失,墮二乘地。
復次,信成就發心者,發何等心?略說有三種。云何爲三?
一者直心,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欲拔一切衆生苦故。
問曰: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何故不唯念眞如,復假求學諸善之行?
答曰: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而有鑛穢之垢。若人雖念寶性,不以方便,種種磨鍊,終無得淨。
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而有無量煩惱垢染。若人雖念眞如,不以方便,種種修習,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以爲對治。若人修行一切善法,自然歸順眞如法故。
略說方便有四種。云何爲四?
一者行根本方便,謂觀一切法自性無生,離於妄見,不住生死。觀一切法因緣和合,業果不失,
起於大悲,修諸福德,攝化衆生,不住涅盤,以隨順法性無住故。
二者能止方便,謂慚愧悔過,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以隨順法性,離諸過故。
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謂勤供養禮拜三寶,讚歎隨喜勸請諸佛,以愛敬三寶淳厚心故,
信得增長,乃能志求無上之道。又因佛法僧力所護故,能消業障,善根不退,以隨順法性,離癡障故。
四者大願平等方便,所謂發願盡於未來,化度一切衆生,使無有餘,皆令究竟無餘涅盤,以隨順法性,
無斷絕故,法性廣大,遍一切衆生,平等無二,不念彼此,究竟寂滅故。菩薩發是心故,則得少分見於法身,
以見法身故,隨其願力,能現八種,利益衆生。所謂從兜率天退,入胎,住胎,出胎,出家,成道,
轉法輪,入於涅盤。
然是菩薩未名法身,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未能決斷,隨其所生,與微苦相應,亦非業繫,
以有大順自在力故。如修多羅中,或說有退墮惡趣者,非其實退,但爲初學菩薩未入正位,而懈怠者恐怖,
令使勇猛故。又是菩薩一發心後,遠離怯弱,畢竟不畏,墮二乘地,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勤苦難行,
乃得涅盤。
亦不怯弱,以信知一切法,從本已來,自涅盤故,解行發心者,當知轉勝。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於眞如法中,深解現前所修離相,
以知法性體,無慳貪故,隨順修行檀波羅蜜。
以知法性無染,離五欲過故。隨願修行尸波羅蜜。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隨順修行羼提波羅蜜。
以知法性無身心相,離慢怠故,隨順修行毘梨耶波羅蜜。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隨順修行禪波羅蜜。
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隨順修行般若波羅蜜。證發心者,從淨心地,乃至菩薩究竟地,
證何境界?所謂眞如。以依轉識,說爲境界。而此證者,無有境界。唯眞如智名爲法身。
是菩薩於一念頃,能至十方無餘世界,供養諸佛,請轉法輪,唯爲開導利益衆生,不依文字,
或示超地,速成正覺,以爲怯弱衆生故,或說我於無量阿僧祇劫,當成佛道。
以爲懈慢衆生故,能示如是無數方便,不可思議而實菩薩種性根等,發心則等,所證亦等,無有超過之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但隨衆生世界不同,所見所聞,根欲性異。故示所行,亦有差別。
又是菩薩發心相者,有三種心微細之相。云何爲三?
一者眞心無分別故,
二者方便心自然遍行利益衆生故,
三者業識心微細起滅故。
又是菩薩功德成滿於色究竟處,示一切世閒最高大身,謂以一念相應慧,無明頓盡,
名一切種智,自然而有不思議業,能現十方,利益衆生。
問曰:虛空無邊故,世界無邊。世界無邊故,衆生無邊,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如是境界,
不可分齊,難知難解。若無明斷,無有心想。云何能了名一切種智?
荅曰:一切境界本來一心,離於想念,以衆生妄見境界故,心有分齊,以妄起想念,
不稱法性故,不能了知。諸佛如來離於見想,無所不遍,心眞實故,卽是諸法之性。
自體顯照一切妄法。有大智用無量方便,隨諸衆生,所應得解,皆能開示種種法義。是故得名一切種智。
問曰:若諸佛有自然業,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一切衆生若見其身,
若睹神變,若聞其說,無不得利。云何世閒多不能見?
荅曰:諸佛如來法身平等,遍一切處,無有作意故,說自然。但依衆生心現。衆生心者,
猶如於鏡。鏡若有垢,色像不現。如是衆生心,若有垢,法身不現故。
’ 論曰:卽此文中,自有二門。云何爲二?
一者摠標摠說門,
二者別釋散說門。是名爲二。
第二門中,自有三門。云何爲三?
一者三種發心分剖門,
二者發起問荅決疑門,
三者因論生論問荅門。是名爲三
說相可觀,言摠標摠說門者,爲欲顯示卽此分別發趣道相門中,無量無邊三世諸佛所誓願海,所行因海,
所證果海,所化徒海,無量無邊三世一切諸菩薩衆,如是如是,如如隨踐,順行應轉,如其次第,不超數量,
不過位地,趣入義故。復次,爲欲顯示如一切諸佛無趣向,則一切菩薩於彼無有趣向,則中如如行故。
如本‘分別發趣道相者,謂一切諸佛所證之道,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故。
已說摠標摠說門,次說別釋散說門。
此中三門,如其次第,應審思擇。就第一三種發心分剖門中,卽有三種故,自有三種門。云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門,
二者解行發心門,
三者證得發心門。是名爲三。
如本‘略說發心,有三種。云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
二者解行發心,
三者證發心’故,就初門中,卽有三門,云何爲三?
一者發起開問摠標門,
二者顯示荅釋廣說門,
三者發起問荅決疑門。是名爲三。
第一二門,有二種重。應審觀察。
就第一發起開問摠標門中,卽有四意#云何爲四?
一者假者意,問能修人故;
二者行相意,問所修行故;
三者自分意,問得成就故;
四者向上意,問勝進相故。是名爲四。
如本‘信成就發心者,依何等人,修何等行,得信成就,堪能發心’故。
已說發起開問摠標門,次說顯示荅釋廣說門。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隨問次第荅釋門,
二者擧劣顯勝生解門。是名爲二。
就隨問次第,荅釋門中,卽有六門。云何爲六?
一者顯示修行假者門,
二者自然本有熏習門,
三者顯示修行功能門,
四者信心成就時量門,
五者顯示發心因緣門,
六者顯示得益位勝門。是名爲六。
言顯示修行假者門者,謂雖所化衆生無量無邊,而今此處中,且取不定聚,攝十信衆生故。
所以者何?爲欲令使化不定聚,三品衆生十種信心,具足成就,決定安立十住菩薩初發心住金剛不變之位中故。如本‘所謂依不定聚衆生故。
言自然本有熏習門者,謂如是衆生相續中,從無始世來,常有本覺藏,
佛衆生善根常恒熏習,令增長故。如本‘有熏習善根力故。
’言顯示修行功能門者,謂不定聚種種衆生,信因業果報似有不空,因緣和合之道理故,
知十惡過失,起不應作意,觀十善功德,起當應作意,厭繫縛地,求解脫城,漸漸出離,向菩提故。
如本‘信業果報能起十善,厭生死苦,欲求無上菩提,得値諸佛,親承供養修行信心故。
言信心成就時量門者,謂顯示其信心成就,時節遠近,差別相故。
卽此門中,十五契經各各異說。云何名爲十五異說?
一者一切諸法因緣無主契經中,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卽白佛言:尊者從具縛地,入不定聚一切行者,
經幾時節,十種信心具足成就,漸漸轉勝,定不退位?於是尊者告文殊師利言:善男子,諦聽諦聽,善思念之。我當爲汝,解說信成就時節分際。善男子,一切行者從具縛地,入不定聚,經一萬三千劫已訖,
卽便成就十種信心,決定菩薩初發心住。
二者攝無量大乘契經中,作如是說:復次,佛子,信地假名菩薩,
六萬四千劫量已滿,卽便成就十愛樂心,定金剛地。
三者慧明陁羅尼契經中,作如是說:不定聚衆生,多經八萬一千五十劫已訖,信心成就,決定不退。
四者法門名字契經中,作如是說:復次,信樂地位毛頭凡夫,經二萬六千劫已訖,便信成就,無所闕失。
五者淸淨三昧契經中,作如是說:若有衆生,入難角地,修行信心,當九萬劫滿足已訖,信品成就。
六者金剛陁羅尼契經中,作如是說:信成就量四萬八千六十劫量。
七者大智慧光明契經中,作如是說:復次,善男子,若有衆生,爲欲成就功德善根父母天地,
當經十剎那量已訖,卽便信地平坦無草。
八者實相本際決定不動契經中,作如是說:信位成就,信心發起初剎那中,十種信心具足圓滿。
九者文殊師利圓滿因海大摠持契經中,作如是說:三阿僧祇大無量劫經過已訖,卽便信位具足成立。
十者甚深菩提因緣契經中,作如是說:建立信地,唯三萬劫。十一者大方便智善巧契經中,
作如是說:信行菩薩九千劫量,決定成就淸淨信心,其思極樂。十二者菩薩光明遍照契經中,
作如是說:爾時,金剛慧菩薩摩訶薩卽白佛言:世尊,無上菩提初種子地,經幾時節,決定淳熟菩提之芽,
出生增長?佛言:若爲成就初種子地,當經七萬五千六十劫,初種子地具足建立。十三者授記平等契經中,
作如是說:信心成就非遠非近,非無非有,非高非下,非本非末,非去非來,非大非小,非三世非非三世,
非位非地,非善非惡,非非非是,言語道斷心行處滅是故名爲眞實信心十四者如來藏本識契經中,
作如是說:爾時,地藏菩薩摩訶薩卽白佛言:世尊,云何名爲廣大圓滿功德父母信地品耶?
佛言:十信十信,十解十信,十行十信,十向十信,十地十信,佛地十信,乃至具縛惡種子地,
及一切二乘皆悉十信,無量無邊一切諸法,無一一法而非十信。以此義故,名爲廣大圓滿信地。
十五者菩薩纓絡大本業契經中,作如是說:信想菩薩於十千劫,行十善法,決定安立信成就處,
是名十五異說契經。
如是諸經以何義故,如是差別?謂衆生心無量無邊,各差別故。
隨其心品,說信行相如是不同,應審思擇。
今此文中,且依本業解釋而已。
如本‘經一萬劫,信心成就故’故。
言顯示發心因緣門者,謂已信心成就,行者爲欲發起第一住心,當待緣力,而發起故。
於此文中,自有三種。云何爲三?
一者勸請因緣,
二者救度因緣,
三者護法因緣。是名爲三。
言勸請因緣者,所謂無量無邊一切諸佛及大菩薩衆,出現種種勝妙教法契經之海,信位行者勸請教化,
超不定地,決定安立不動域故如本諸佛菩薩教令發心故言救度因緣者所謂緣無量無邊種種衆生之一切苦海,
以之爲因,發起金剛不退廣大淸淨大慈悲心故。如本‘或以大悲故,能自發心故,
言護法因緣者,所謂諸佛教法欲破滅時,以種種方便隨宜,隨應,隨當,隨時,隨處,不惜身命
救護佛法大因緣之力故,自能發起金剛不退廣大淸淨大久住心故,如本‘或因正法欲滅以護法因緣故,
能自發心故。
’言顯示得益位勝門者,所謂信成就得解行者,具足十名,無退失故。云何爲十
一者名爲無憂惱人,遠離退還,墮於凡夫具縛煩惱地怖畏心故;
二者名爲大富貴人,蠲除煩惱之荒,收藏涅盤之果故;
三者名爲種性高勝人,遠離凡夫之下劣種,已入如來尊高種性中故;
四者名爲手足具備人,執般若炬,遊行法界廣大庭故;
五者名爲作大江水人,無㝵直流,入薩般若之大海中故;
六者名爲宮殿建立人,已超不定地,決定安住如來家中故;
七者名爲眞實佛子人,遠離凡胎已,入聖胎故;
八者名爲大福田人,出離煩惱獨淸淨故;
九者名爲徒衆無量人,法界衆生皆悉以爲自眷屬故;
十者名爲無障㝵人,隨心轉故。是名爲十。
如本‘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入正定聚,畢竟不退,名住如來種中,正因相應故。已說隨問次第答釋門,
次說擧劣顯勝生解門。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擧劣顯劣形相門,
二者擧勝顯勝形相門。是名爲二。
言擧劣顯劣形相門者,所謂善根微薄,煩惱深厚凡夫衆生,雖値摩訶衍之因緣,而起小善根種子故。
如本‘若有衆生,善根微少,久遠已來,煩惱深厚,雖値於佛,亦得供養,然起人天種子,或起二乘種子故。
言擧勝顯勝形相門者,所謂若有衆生,求摩訶衍之甚深微妙法門,其心卽便不能決定,値順因緣,恍惚若進,
遇逆因緣,自然若退,無定心故。如本‘設有求大乘者,根則不定,若進若退故,若不能定。
云何名爲勝高人耶?雖不能定而所望法極最高故。復次,望起天人二乘之種子故,自此已下,顯示信心成就,
無定時,解釋十四經之大意焉。所謂若有衆生,供養諸佛,信心成就,其時不定,或極極遠,或極極近,
或中閒故。所以者何?隨緣有無,信熟生故。如本‘或有供養諸佛,未經一萬劫,於中遇緣,亦有發心故。
自此已下,造作別釋,顯示發心因緣之相。於此文中,卽有四種發心因緣。
云何爲四?
一者見佛因緣,因見如來妙色之身,而能發起廣大心故。如本‘所謂見佛色相,而發其心故;
二者供僧因緣,以種種具,供養衆僧,因此因緣,而能發起廣大心故。如本‘或因供養衆僧,而發其心故;
三者慚愧因緣,見聞二乘之人教法,慚愧其劣,因此因緣,而能發起廣大心故。
如本‘或因二乘之人,教令發心’故。
四者隨兼因緣,隨他兼心,因此因緣,而能發起廣大心故。如本‘或學他發心故。
’是名爲四。自此已下,作其因緣,
顯示十種信心不定聚形相,及摠結前所說之十信決擇分焉。以何義故,十種信品立不定稱?所謂若値順當因緣,隨向善趣,若遇逆違因緣,應趣惡道。譬如輕毛隨風所吹,東西轉故。如本‘如是等發心,悉皆不定,遇惡因緣,或便退失,墮二乘地故。’已說第一重二種門,
次說第二重二種門。言復次,信成就發心者,發何等心者,卽是發起開問摠標門。謂發開問,摠問所爲故,
略說有三種者,卽是摠標摠荅焉歟。云何爲三者,卽是摠擧摠問焉歟。
自此已下,直明顯示荅釋廣說門。
就此門中,卽有三種。云何爲三?
一者正智方便門,
二者福德具足門,
三者安樂成就門。是名爲三。
於此三中,初通二利,中唯自利,後唯利他。復次,初二唯自利分,後一利他。
復次,三種皆通二故,皆悉各各具足標釋,應審思擇。言正智方便門者,直心爲正體智,有作方便故。
如本‘一者直心。正念眞如法故’故。言福德具足門者,深心。爲一切功德有作方便故。
如本‘二者深心樂集一切諸善行故’故。言安樂成就門者,悲心。能善救度一切衆生無量苦惱,令得安隱。
廣大樂故。如本‘三者大悲心。欲拔一切衆生苦故’故。已說第二重二種門,次說發起問荅決疑門。
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前後相違難問門,
二者開通會釋消難門。是名爲二。
言前後相違難問門者,謂擧上下之二文,相違,難其差別相故。
云何相違?謂上文中作如是說:所言覺義者,謂心體離念相,離念相者,等虛空界,無所不遍,
法界一相,卽是如來平等法身。依此法身,說名本覺。於下文中,作如是說:二者深心樂集一切諸善行故。
上下二文如是相違。是故發問難其異相,應審思擇。如本‘問曰: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何故不唯念眞如,
復假求學諸善行故。’已說前後相違難問門,次說開通會釋消難門。
就此門中,卽有七門。云何爲七?
一者正荅決斷彼難門,
二者修善行者得益門,
三者修行善巧方便門,
四者顯示發心功德門,
五者揀擇上下顯異門,
六者通契經文決疑門,
七者讚歎發心功德門。是名爲七。
就初門中,卽有三門。云何爲三?
一者開示譬喩善巧門,
二者合說契當安立門,
三者顯示法說生解門。是名爲三。
就譬喩門中,卽有四種。云何爲四?
一者寶喩,
二者性淨喩,
三者垢染喩,
四者人衆喩。是名爲四。
言寶喩者,謂卽大摩尼珠之寶。如是珠寶當有何處?如是珠寶當有黃石。如是珠寶其色如何?謂深黃色。
其身形相當如何耶?謂如方座無長短故。大小之相其量云何?謂一丈故。如是珠寶諸黃石中,皆悉具足,
無有黃石,而無摩尼。其止住相次第如何?謂第一珠,第二黃金,第三石體。此摩尼珠一丈量者。
彼諸黃石或有極小,或有極大,各各差別。豈可得言皆遍一切?此摩尼珠有殊勝力,雖一丈量,遍於大中小中,無餘無所障㝵。亦可得說遍一切處。於彼石中,有此寶故,其石色黃,應審觀察。是名寶喩。
如本‘荅曰:譬如大摩尼寶故#’言性淨喩者,如是珠寶其體性甚極明白,遠離塵累故,是名爲性淨喩。
如本‘體性明淨’故。言垢染喩者,如是珠寶能爲金石等之所障,不能出現明白相故,是名爲垢染喩。
如本‘而有鑛穢之垢’故。
言人衆喩者,謂極窮貧極懈怠故,不求寶人,幷及精進樂求寶人故,是名爲人衆喩,如本‘若人雖念寶性,
不以方便種種磨鍊,終無得淨故。’已說開示譬喩善巧門,次說合說契當安立門。寶喩中,言大摩尼珠者,
當喩何法?喩本覺佛性故。所以者何?本覺佛性隱藏衆生相續身中,似彼珠故。言黃石者,當喩何法?
喩一切衆生相續故。所以者何?諸衆生身藏裹佛性,似彼石故。言色黃者,當喩何法?喩彼佛性不變義故。
所以者何?眞如佛性堅固不改,似彼金故。言如方座,無長短者,當喩何法?喩眞如法平等無增減故。
所以者何?此眞如法一味平等,無有差別,似彼座故。言一丈者,當喩何法?喩眞如法具足圓滿無闕失故。
所以者何?眞如法身具足萬德,無所闕失。似彼丈故,言如是珠寶,諸黃石中,皆悉具足。
無有黃石而無摩尼者,當喩何法?喩眞如性遍諸衆生種種身中,無有衆生而無眞如本覺性故。
所以者何?此眞如性離不遍過,似彼珠故。言第一珠、第二黃金、第三石體者,當喩何法?喩俱有次第法,
漸漸麤現故。所以者何?從本覺智,流轉建立四相海時,如其次第,漸漸麤現,似彼三故。
言此摩尼珠有殊勝力,雖一丈量,遍於大中小中,無餘者,當喩何法?喩眞如本覺有不思議業,
遍蚊龍等小大身中,無妨難故。所以者何?此眞如法其性平等,遍凡聖中,似彼珠故,言於彼石中,
有此寶故。其石色黃者,當喩何法?喩諸衆生悉有本覺,有心相故。所以者何?一切衆生有覺心故,有了別識,似彼石故。已說寶喩合說契當門。次說淨喩合說契當門。言如是珠寶,其體性甚極明白,遠離塵累者,
當喩何法?喩性淨,本覺淸淨,明白離垢故。
已說淨喩合說契當門,次說染喩合說契當門。言如是珠寶,能爲金石等之所障,不能出現,明白相者,
當喩何法?喩自性淸淨心。爲無明之沂隱覆,不能出現無漏性德故。已說染喩合說契當門,
次說人喩合說契當門。言二種人者,當喩何法?喩求佛法寶,極精進人,極懈怠人故。如本‘如是衆生故。
’已說合說契當安立門,次說顯示法說生解門。於此門中,如其次第,法說合喩生行者解,應審思擇,文相明故,不須別釋。如本‘眞如之法體性空淨,而有無量煩惱染垢。若人雖念眞如,不以方便種種修習,亦無得淨。
以垢無量無邊,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以爲對治故。已說正荅決斷彼難門,
次說修善行者得益門。謂若有衆生,斷一切惡,修一切善,自然自在,得眞如三昧,
照達無明之闇夜,無所疑畏故。如本‘若人修行一切善法,自然歸順眞如法故’故。
已說修善行者得益門,次說修行善巧方便門。就此門中,故有四門。云何爲四?
一者一切修行根本門,
二者制伏惡業不生門,
三者出生善根增長門,
四者誓願無邊平等門。是名爲四。
如本‘略說方便,有四種故。’就第一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般若成就無住門,
二者大悲成就無住門。是名爲二。
言般若成就無住門者,所謂觀察一切諸法,從本已來,不生不滅,畢竟寂滅,皆無所有,不住生死故。
如本‘云何爲四?一者行根本方便,謂觀一切法自性無生,離於妄見,不住生死故。’言大悲成就無住門者,
所謂觀察一切諸法因緣和合故,因果不空。業報亦有。緣#無量無邊衆生界之海,爲究竟攝取,不住涅盤故。
如本‘觀一切法因緣和合,業果不失,起於大悲,修諸福德,攝化衆生,不住涅盤故,以隨順法性無住故’者,
卽是示緣,及結兩種不住道行。修行法門雖無有量,而不住道其最根本。是故說言行根本方便焉。
已說一切修行根本門,次說制伏惡業不生門。此門爲明何義?爲欲顯示行者當發起慚愧等淸淨心品,
防止一切無量惡作,漸漸損滅,不令增長故。如本‘二者能止方便,謂慚愧悔過,能止一切惡法,
不令增長故。以隨順法性離諸過故者摠結其緣已說制伏惡業不生門次說出生善根增長門此門爲明何義?
爲欲顯示行者當一切三寶,恭敬供養,禮拜讚歎,隨喜勸請,增長信心,消除業障,志求無上大菩提故。
如本‘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謂勤供養,禮拜三寶,讚歎隨喜,勸請諸佛#以愛敬三寶淳厚心故,信得增長,乃能志求無上之道。又因佛法僧力,所護故,能消業障,善根不退故。以隨順法性,離癡障故’者,楤結其緣。
已說出生善根增長門,次說誓願無邊平等門。此門爲明何義?爲欲顯示行者當發起十方世界之塵數廣大誓願海,修習十方世界之塵數行因海,攝取十方世界之塵數衆生海,成就十方世界之塵數果滿海,一切皆悉無有餘故。
如本‘四者大願平等方便,所謂發願盡於未來,化度一切衆生,使無有餘,皆令究竟無餘涅盤故,
以隨順法性無斷絕故’者,摠結其緣,自此已下,顯示隨順殊勝之相。以何義故?四門結中,皆悉通名,
隨順法性,爲欲顯示法性虛空,其體性廣大圓滿,無有邊際,其相用無㝵自在,無有始終#修彼四門,
一切行者亦復如是。順順如如,其阿世耶廣大圓滿,無分際故。如本‘法性廣大,遍一切衆生,平等無二。
不念彼此,究竟寂滅故’故。
已說修行善巧方便門,次說顯示發心功德門。此文爲明何義?
爲欲顯示初發心住菩薩起隨順法界性中,廣大圓滿心故,相似觀智見法性身。見法身故,願力自在。由願力故,緣無量無邊法界之衆生而起大悲心。由大悲心極甚深故,出現八種安樂化相,隨時,隨處,隨宜,隨應,
順順如如,利益安樂故。如本‘菩薩發是心故,則得少分見於法身。以見法身故,隨其願力,能現八種,
利益衆生。所謂從兜率天退,入胎,住胎,出胎,出家,成道,轉法輪,入於涅盤故。’已說顯示發心功德門,
次說揀擇上下顯異門。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揀異地上門,
二者揀異具縛門。是名爲二。
言揀異地上門者,謂發心住菩薩,唯名幻化影相身,不得名眞如法身菩薩故。所以者何?此菩薩無始餘業,
猶未出離,隨受生處,與微細苦相應不離。地上菩薩此相違故。如本‘然是菩薩未名法身,以其過去無量世來。
有漏之業未能決斷,隨其所生,與微苦相應故’故。言揀異具縛門者,所謂初發心住菩薩,無繫縛俱轉業因相,
無繫縛受生果報故。所以者何?大願方便具足轉故,如本‘亦非業繫,以有大願自在力故’故。
已說揀擇上下顯異門,次說通契經文決疑門。
就此門中,自有五種。各說契經。云何爲五?
一者文殊師利歡喜陁羅尼契經中,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卽白佛言:世尊常大衆中,唱如是言:五十子心,
莊嚴#果海行因之本。一切行者當經此道,成等正覺。如是五十 子心中幾是退分幾是定分唯願世尊,爲我解說。於是世尊卽告文殊師利菩薩言:諦聽諦聽,善思念之。我今爲汝分別解說。善男子,十種眞地,
名爲金剛般若住地。前四十心名爲頗梨珠隨轉迴向地,汝當應如是知,應如是觀。今此經文爲明何義?
爲欲顯示大士十地已,得眞證域,名不退分。自此已前四十種心,未得證智,名爲退分故。
二者本覺大悲自然熏習契經中,作如是說:復次,佛子,汝前所問,云何名爲節退相者,此事殊勝,
不思議中,不思議故。愚癡凡夫、初發意菩薩等之所不能知。爾時,大明菩薩至心勸請。
佛卽告大明言:善男子,言節退相者,謂信心、發心住、淨心地、金剛心之此四處,皆名爲退分。各彼中閒,
皆名爲不退分。是故說言節退相焉。今此經文爲明何義?爲欲顯示佛法大海廣大圓滿,無邊際故。
三者大證得陁羅尼契經中,作如是說:十種安心,決定不退,無退失理。今此經文爲明何義?
爲欲顯示十住菩薩發起隨順法界性中,廣大善根故,決定安住金剛位故。
四者五明契經中,作如是說:十種定心非退非進,非來非去,非出非入,圓滿萬德,無所闕失。
是故說言自然住心。今此經文爲明何義?爲欲顯示十住位中,果德已滿,更無所進,復無所退,
自然常住,無闕事故。
五者菩薩纓絡大本業契經中,作如是說:諸善男子,若一劫、二劫乃至十劫,修行十信,得入十住,是人爾時,從初一住,乃至第六住中,若修第六般若波羅蜜,正觀現在前,復値諸佛菩薩、善知識所護,出到第七住,
常住不退。自此七住已前,名爲退分。今此經文爲明何義?爲欲顯示勸策下劣懈怠衆生,爲令增長勇猛心故,
今此論中,且據本業而作會通。應審觀察。如本‘如修多羅中,或說有退墮惡趣者,非其實退,
但爲初學菩薩未入正位而懈怠者,恐怖,令使勇猛故’故。
已說通契經文決疑門,次說讚歎發心功德門。此門爲明何義?
爲欲顯示發心菩薩遠離二怖畏,其心決定,不動故。云何名爲二種怖畏?
一者下生怖畏,生下劣道極怖畏故;
二者上生怖畏,聞殊勝境,其心怯弱,極怖畏故,離此二怖。是故名爲發心功德。
如本‘又是菩薩一發心後,遠離怯弱,畢竟不畏,墮二乘地。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勤苦難行,
乃得涅盤,亦不怯弱故,以信知一切法從本已來,自涅盤故’者,卽是摠結二種功德之因緣焉。
從上已來,信成就發心決擇分已焉。自此已下,種種諸門文相明故,不須重釋。
釋摩訶衍論卷第七 丁未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석마하연론』 7권(ABC, K1397 v37, p.1051c01-1058c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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