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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사물의 빛 (이지훈 철학가)_1회 개인전 "PAUSE"에 대해
구해인 ・ 2024. 7. 1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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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개인전 <PAUSE> 도록 중
작가가 그리는 ‘일상의 빛’은 기실 일상의 빛이 아니다. 일상에는 부재하는, 그러나 끔찍하게 현존하는 빛이다.
그 빛이 드러나는 양상은 스크래치를 닮았다. 스크래치는 사물의 빛이 스스로 솟아나게 하는 수동적 창조의 방법이다. 수동적 창조란 작가가 사물의 빛을 가리지 않고 비켜서 있다는 뜻이다.
또한 작가가 비켜선다는 말은 곧 작가가 빛을 보는 게 아니라 빛이 작가를 보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작가의 손을 벗어나있다.
사물의 빛_이지훈 (철학가)
세계는 세계로 돌아간다. 말이 없는 사물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포즈(Pause). 요란한 광채와 선(線)들은 사라졌다. 마침내 생각은 가볍고 또렷하며 섬세하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사물에 이름붙인 낱말들이 죽어간 순간, 사물을 이야기하던 언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잊고 무의미로 되돌아간 순간, 저 사물들이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침묵에서 나온 것들이 모두 저 자신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조용하고 따뜻해진 것이다.
작가 구해인의 작품들 속에는 특이한 시선이 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은 시선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얼 보고 있을까? 또 작가는 무얼 보고 있을까? 아니 그들은 정말 무언가를 보고 있기나 한 걸까? 그러나 시선의 인력(引力)이라는 그 힘겨운 작용과 반작용에서 벗어나 탁 트인 풍경 속에서 모든 의문들은 긍정의 형식이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던 풍경이 여기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진실이다. 이야기 없는 이야기, 말 없는 말. 그러니까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은 그 시선은 우리를 신화적인 침묵으로 이끄는 기이하고도 부드러운 고삐인 셈이다.
작품들의 질감은 조금 거칠면서 두툼하고 몽실하다. 우리 옛집의 기둥을 받치는 덤벙주초처럼. 지중해 건축의 하얀 회벽처럼. 그래서 사물의 진실을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그러니까 사물들이 스스로 자신의 진실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는 말이다. 덤벙한 질료의 두께에 그어진 선들은 사물의 눈이 되고 피부가 된다. 작품 속의 사람과 나무와 도형들에게 눈이 없으면서도 천 개의 눈이 달리고, 감각이 없으면서도 천 개의 촉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물들은 거친 질료에게 표면의 광채를 빼앗기면서 저 자신의 빛을 되찾은 듯하다.
사물들은 우뚝우뚝 서있다. 하나같이 충실하다. 거의 추상적인 모습이 드러내는 사물의 충실함. 이렇게 부서질 수 없는 사물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부서질 듯 간결한 선이다. 우리가 세계를 잘라내며 이름을 붙일 때마다 사물들이 죽어간다면, 작가는 우리가 사물에게 부여한 이름과 선들을 제거해나간다. 그렇게 해서 사물의 완전함에 다가간다. 세계를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저마다 덩그러니 서있을 뿐이다. 부분도, 전체도 없다. 공통의 척도도 없다. 사물들은 하나같이 완전하고 완벽하다. 저마다 하나의 동그라미를, 마당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구해인의 작품에는 사물이 하나만 있기도 하고 여럿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도 여럿도 아니다. 그들은 외적인 결합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도, 장치도 없다. 다만 공허한 배경, 침묵이 놓여있다. 그런데 이 침묵은 사물들 간의 거리마저 집어삼킨다. 일상이 부여한 사물의 질서와 구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거리는 없다. 이 중성적인 공간 속에 사물들이 서있다. 하나 또는 여럿이. 하나도, 여럿도 아닌 모습으로.
단색의 배경, 단색의 사물들, 겹겹의 눈을 가진 달, 보이지 않는 빛의 섬광들, 굵고도 흐릿하며 간결한 선들, 이제 솟아날 빛이 밀어내는 마개, 아직 터지지 않은 마개, 일상 속에 잠겨있는 사물의 마개. 작가가 그리는 ‘일상의 빛’은 기실 일상의 빛이 아니다. 일상에는 부재하는, 그러나 끔찍하게 현존하는 빛이다. 그 빛이 드러나는 양상은 스크래치를 닮았다. 스크래치는 사물의 빛이 스스로 솟아나게 하는 수동적 창조의 방법이다. 사물의 빛을 가리지 않고 비켜서 있다는 뜻이다. 또한 작가가 비켜선다는 말은 곧 작가가 빛을 보는 게 아니라 빛이 작가를 보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작가의 손을 벗어나있다.
(1회 개인전 “PAUSE” 평론.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