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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에피소드
조무환 / 화학공학
# 첫 해외 경험
1984년 8월초 더위가 한창일 때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나와 아내 그리고 세 살이 채 안된 딸과 함께 해외로 첫 비행을 하였다. 김포공항에서 부모님이 우리를 배웅하실 때 평소에 강하시던 어머님이 눈시울을 적시며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보이셨다. 그때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었고 멀리 미국으로 자식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걱정이 많이 되신 모양이었다. 나는 당시 나이가 29이었으니 혈기왕성하여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해외유학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더 커 웃음을 지으며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당시 미국 동부까지 가는 비행기는 알라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종착지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향하였다, 하늘에서 본 뉴욕의 밤 모습은 빌딩과 가로등의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긴 비행 끝에 뉴욕공항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해둔 뉴저지 주립대학-럿거스 (New Jersey State Univ. -Rutgers) 유학생 S군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큰 이민가방 6개를 차에 싣고 S의 대학 패밀리 아파트로 일단 가서 다음 날 미리 예약해둔 뉴브런스윅 (New Brunswick) 시의 넓은 리빙스턴 애비뉴 남쪽 끝자락에 있는 조이스 킬머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3층으로 된 오래된 아파트인 데 나무 바닥이고 냉장고 외엔 다른 가구는 일체 없었다. 바로 아래층엔 여자 두 명이 어린아이와 생활하는 당시로는 이상한 가족이었고, 바로 위층엔 밤늦게까지 일하고 귀가하는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래층 부부(?) 싸움 소리와 위층 남자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잠자리를 설치게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동네는 도심지 변두리로 주변 환경이 낙후된 곳이었다. 다행히 약 3개월 후 비슷한 가격의 학교 패밀리 아파트로 이사를 하여 대학 캠퍼스 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소액청구 소송
학교 밖 조이스 킬머 아파트를 계약할 때 1년간 월세로 하되 중간에 나오게 될 때 다른 세입자를 구해주면 보증금을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 미리 신청해둔 학교 아파트에 입주가 가능하다는 통지를 받고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어 어렵게 세입자를 구해주고 나왔는데 아파트 매니저가 청소 등 여러 가지 다른 부당한 이유를 붙여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다. 우리에게 도움을 준 S군에게 사정을 호소하니 이런 일이 허다하니 법원에 아파트 회사를 상대로 소액청구 소송을 한번 해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법원에 소액청구 소송양식을 제출하고 재판 기일이 되어 법원에 출두하여 기다리는 데 아파트 회사의 담당 변호사가 예정된 시간을 넘겨 도착한 후 재판을 하지 말고 협상으로 해결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나로서는 아직 영어가 서툴고 난생 처음 해보는 소송이라 정식 재판에 가서 다투는 것보다 이 방법이 편안하여 상대 변호사와 타협을 한 끝에 약간의 청소비를 제한 나머지 금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은 교통사고를 비롯하여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 변호사를 통하여 일을 처리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은 변호사 천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첫 자가용과 교통사고
80년 초 당시 한국엔 자가용이 아주 드문 시기였다. 영남대 교수들 중에서 자가용을 소유하고 계신 분들이 아마 손꼽을 정도인 것으로 기억한다. 대구-경산을 잇는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교 통근버스를 이용하였으며 버스 안에서 다른 과의 교수들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중교통이 있지만 노선이 한정되어 있고 운행시간도 간격이 커 자가용 없이는 일상생활을 원활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이 있는 경우 대부분 자가용을 구입하였다. 지역신문 지면에 나온 중고 자동차 판매 개인광고를 보고 구입한 나의 첫 자가용은 GM의 8기통 대형세단 Oldsmobil Delta 88 모델이었다. 차가 8기통이니 시동을 켜면 묵직한 저음의 엔진소리가 부드럽게 들리고 승차감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연료 소모가 많아 고속도로를 달리면 연료계기 바늘이 눈에 띄게 내려갔다. 그렇지만 당시 휘발유 가격이 1갤런(약3.8 리터) 당 $1 정도였으니 연료비는 감내할 만하였다. 하지만 내가 아끼던 자가용 애마(愛馬)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경제적 전손 (total loss)를 받고 말았다. 85년 겨울 저녁에 성탄절을 앞두고 교회 성가대의 연습이 끝난 후 우리 일행은 1번 국도 상에 있는 한 식당으로 이동 중이었다. 차량 여러 대가 줄을 지어 따라가는 상황이었는데 우리 앞 차에는 유명한 한식당 ‘금문교’ 사장의 딸과 약혼자가 동승하고 있었다. 당시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나는 길을 잘 몰라 앞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따라 붙고 있었다. 그런데 1번 국도 진입을 앞둔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파란불인 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앞차가 급정차를 하였다. 나도 따라서 반사적으로 급 브레이커를 밟았지만 저녁에 비가 막 흩뿌리고 있어 노면이 미끄러워 8기통 대형차는 가속도에 의해 앞차의 뒤 범퍼를 받고 말았다. 더구나 대형차가 앞차를 밀어 붙이니 연쇄적으로 그 앞의 차까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나의 애마는 앞 본넷이 우그러지고 흰 연기가 올라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차량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문을 열고 뛰쳐나왔지만 화재는 아니고 캬뷰레타가 터져 나오는 수증기였다. 잠시 후 경찰차와 소방차 그리고 앰뷸런스까지 몰려와서 일대는 큰 교통사고의 현장 같았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다행히 일행 중 미국 벨연구소 소속 연구원으로 계시는 분이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잘하여 사건이 일단 수습이 되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푸른 신호등에서 앞차가 급정거를 한 지 이유를 물어보니 그 앞의 차가 저녁에 미등도 켜지 않고 신호등 앞에서 깜깜한 채로 정차를 하고 있었고 자기들도 급 브레이커를 밟아 겨우 앞차와 충돌을 면했다고 한다. 그 앞차에는 한 노인이 운전을 하다가 연료가 소진되어 차를 신호등 앞에 비상등을 켜지도 않고 그냥 세워놓고 인근 주유소에 휘발유를 구하러 갔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은 참작이 되지 않았고 교통사고의 책임은 모두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의 애마는 사망했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어 보험으로 모두 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앞차의 결혼을 앞둔 커플에게 매우 미안했고 첫 교통사고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한동안 운전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유학을 마치고 휴직하고 간 영남대로 복직하여 동료 교수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그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고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이런! 내가 크게 다친 것이 아니고 나의 애마가 중상을 입었는데 말이지!
# 뉴욕 맨하탄 관광루트
유학간 지 이듬해 미국에 유학 온 다른 지역의 대학 동기들이 뉴욕에서 남쪽으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우리 집에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놀러오겠다고 한다. 그래서 자동차로 뉴욕 맨하탄을 멋지게 구경할 수 있는 루트를 알아보니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페리를 타고 차를 운반하여 맨하탄 남단으로 접근하는 루트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뉴저지와 뉴욕의 경계선인 허드슨강을 건너기 위하여 혼잡한 링컨 터널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고 배를 타고 맨하탄 남쪽 바다를 건널 때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남쪽의 마천루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배가 도착하면 차를 몰고 도로로 나와 최남단에 위치한 배터리 파크부터 시작하여 테러폭파 전의 쌍둥이 빌딩인 세계무역센터, 금융의 중심지 월가를 통과하여 소호 거리를 거쳐 32번가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까지 갔다. 102층 엠파이어 전망대에 올라 빽빽한 고층빌딩들의 숲인 맨하탄 전경을 감상하고 내려오면 배가 출출하여 바로 뒷골목에 있는 한식당 ‘뉴욕곰탕’에 들러 뜨끈한 곰탕을 무 깍두기와 먹고 나면 피로가 풀리면서 고향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곰탕 맛을 40년이 지난 요즘에 한류열풍으로 미국인들이 즐겨 찾는다니 세상이 많이도 변하였다. 여담이지만 당시 한인들이 고국을 방문하기 전에 32번가 뒷골목에 있는 귀국선물 가게에 들러 고향 가족들에게 줄 미제 물건을 잔뜩 사서 차 트렁크에 넣어두고 ‘뉴욕곰탕’에 들러 식사를 하고 나오면 뉴욕의 좀도둑들이 차를 털어 선물을 몽땅 훔쳐가는 일이 허다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고급 승용차의 경우 수 분만에 네 바퀴가 털리고 차가 주저 앉아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아무튼 배를 채운 후 다음으로 볼 곳은 맨하탄의 허파이며 시민들의 안식처인 센터럴 파크다. 아름다운 호수와 넓은 잔디밭 그리고 아름드리 나무숲이 있어 많은 뉴요커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센터럴 파크 북쪽 할렘 가와 가까운 콜럼비아 대학교를 방문할 수 있다.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여기서 유학을 하고 계셨는데 평소에 늘 20달러 정도의 지폐를 뒷주머니에 넣어 다니다가 등 뒤에서 누군가 권총을 들이대면 현금을 빼 갈 수 있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대낮에도 할렘 가를 지나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 뉴브런스윅 한인교회
리빙스턴 애비뉴와 죠지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오래된 미국 감리교회가 있었다. 당시 뉴브런스윅 한인교회는 오후 시간에 이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많은 럿거스 대학교 유학생들이 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우리 가족도 이 교회에 출석하여 다른 유학생 가족들 및 이민 온 한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성가대, 주일학교, 한글학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니 교회에서 유학생들의 기여도가 매우 컸다. 그래서 교회의 중직을 맡은 교인들이 연말이 되면 유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함께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한때 럿거스 대학원 한인 유학생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 데 주요 업무 중의 하나가 신입 유학생이 뉴욕시 공항에 도착하면 마중을 나가고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도록 하고, 정착하는 일을 도와주곤 하였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면 함께 한인교회에 출석하여 다른 유학생들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유학생 가족들의 교회등록 횟수가 많아져 교회가 부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교회는 우리가 졸업한 뒤 몇 해 후 다른 넓은 장소에 신축 교회를 지어 미국 교회로부터 독립을 하고 ‘갈보리 교회’로 개명을 하였다. 이 교회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였으니 우리가 처음 출석할 때는 불과 9년 된 개척교회였다. 작년에 이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당시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목사님과 교인들을 반갑게 만나 감회가 새로웠다.
# 아내의 아르바이트
1980년도 중반 우리나라 일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2,500~3,000 달러 정도였으니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다. 학교로부터 등록금을 면제받고 생활비 보조를 받더라도 아파트 월세와 자동차 유지비 및 보험료 등을 내고나면 생활비는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유학생 부인들이 나서서 아르바이트를 하곤 하였다. 아내는 베이비시터 (baby sitter)를 하기도 하고 샌드위치 가게나 세탁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리고 교회 한인교인들 중 사업하시는 분들로부터 일거리를 받아와서 다른 유학생 부인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일을 하였는데 한번은 생강 까는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하도 아파서 얼음물에 손 찜질을 하면서 일을 마무리하는 고생을 하였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보니 미국의 백화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그릇이나 가재도구를 마음대로 살 수 없으니 아내는 다소 아쉬워하였는데 나는 속으로 미안하였지만 표현을 할 수 없었고 지금까지도 아내에게 빚진 심정으로 살고 있다. 간혹 유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나면 소파나 가구 등을 쓰레기장에 버리곤 하였는데 그중 괜찮은 것들을 가지고 와서 재사용하였다. 그 버릇이 유학 후에도 남아 있어 아파트 이웃들이 내놓은 좋은 물건을 발견하면 한동안 재활용하였고 아직도 미국 아들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인근 재활용 가게 (thrift shop)를 탐색하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 라리탄 (Raritan)강 꽃게 낚시
럿거스 대학교는 라리탄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뉴브런스윅 시에는 주로 인문사회 대학이 있고 북쪽 피스카트웨이 (Piscataway) 시에는 이공계 대학이 있다, 라리탄 강은 동쪽으로 흘러 스테이튼 아일랜드 남단 대서양과 만난다. 그래서 바다의 밀물이 강 쪽으로 밀려올 때 바다 꽃게가 따라 들어와서 강 선착장에서 꽃게를 낚시로 잡을 수 있었다. 밀물 때를 맞추어 이 방면에 정통한 한 선배를 따라 한인 유학생들이 매년 피크닉을 도날슨 파크 선착장으로 갔다. 우리는 생 닭목을 실에다 매달아 강물 속으로 여러 개 내리고는 꽃게들이 닭목을 물 때를 기다렸다가 낌새가 느껴지면 살금살금 위로 올려 물속에서 뜰채로 건져 올렸다. 수 시간 만에 가지고 간 큰 통에 꽃게들이 가득 찼다. 마치 노다지 금광을 캐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지고 온 꽃게는 잘 손질하여 된장을 풀고 무를 넣어 꽃게탕을 끓였는데 동료 유학생 친구들을 불러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아마 내가 평생 먹어 본 꽃게탕 중 가장 맛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셰난도아 (Shenandoah) 국립공원 캠핑
럿거스 대학교 생물화학공학과에 유학 중인 한인학생들은 당시 약 13명 정도된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대학 중에서 생물화학공학의 프로그램을 일찍이 시작했기 때문에, 이 분야에 전공을 하고 싶은 유학생들이 각 나라에서 많이 몰려왔다. 같은 과의 친한 몇 가족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셰난도아 국립공원에 캠핑을 갔다. 럿거스 대학에서 거기까지 차로 갈려면 남쪽으로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와싱톤 D.C. 근처를 지나 무려 약 5시간이나 걸렸다. 우리 일행은 차 세 대로 나누어 타고 95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한참을 내려가다가 어느 마을 근처 내리막길에서 맨 앞차가 갑자기 비틀거리다가 길옆 쪽으로 차를 세웠다. 뒤따라 오던 차들도 같이 정차하고 앞차를 살펴보니 타이어 하나가 펑크가 났다. 인근 카센터에 수리를 맡기고 그 마을을 구경하다가 재활용 옷가게를 발견하고 모두 몰려갔다. 값이 매우 싸고 깨끗한 중고 옷들이 많아 남자들은 양복 재킷을 하나씩 구매하였는데 여행이 끝난 후 다음 주일날 교회에 모두 입고 온 것을 보고 한바탕 웃은 기억이 난다. 셰난도아 국립공원 북쪽으로 진입을 하는 도로를 스카이라인 드라이브 (Skyline Drive)라고 하는 데 그야말로 높은 산등성이에 난 도로로서 하늘과 가까운 도로였다.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서행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꽃사슴 가족이 도로가의 숲속에서 나타났다. 그 황홀한 광경이 마치 선경 (仙境)처럼 펼쳐져 그 아름다움에 모두 감탄하였다. 이곳이 지상인지 천상인지 우리는 한동안 차를 세우고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무사히 캠핑장에 도착하니 벌써 날이 어둑해져 빨리 텐트를 치고 저녁식사 후 캠핑의 낭만인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불멍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발 옆으로 너구리가 왔다 갔다 하였다. 우리가 순간 놀라서 흠칫하는 데 이 동물은 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근처를 돌아다녔다, 이 캠핑장 주변에는 야생 곰들이 자주 출몰하여 안전을 위하여 울타리가 있었는데 너구리는 용케 다닐 수 있는 구멍을 찾은 모양이었다. 미국의 국립공원들은 스케일도 크고 캠핑장 시설도 잘 되어 있고 경치도 아름다워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이곳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곤 한다.
# 글을 맺으며
1980년 3월에 영남대 화공과에 전임강사 대우로 부임하여 이듬해 전임강사로 승진하고 나서 3년이 지난 뒤 조교수로 승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실험실에는 사용할 만한 실험장비들이 매우 열악하였고 연구비 조달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교수 생활을 계속하기 위하여 박사학위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선택지는 국내 또는 국외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밟을 수 있었는데 나는 미국 대학에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고 조금씩 준비하였다. 필요한 시험은 영어 TOEFL과 대학원 자격시험 GRE가 있었다. 틈틈이 준비하여 대학에서 요구하는 최소 성적 이상을 받았지만 처음 시도에서는 실망스럽게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1년 동안 더 성적을 올리기 위하여 공부에 집중하여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은 후 미국 여러 대학에 다시 원서를 내어 입학허가를 기다렸지만 상위권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전공하고 싶은 생물화학공학 프로그램이 있는 럿거스 대학교에서 교육조교 TA장학금을 제의하여 수락하고 입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전면 장학금을 받지 않고 유학을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몸을 담고 있는 영남대의 배려로 88년 2월까지 휴직을 하면서 무사히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돌아보면 다사다난한 유학생활이었고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내 인생의 젊은 시절에 폭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행복한 인생의 한 챕터를 장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동고동락한 아내도 그 시절을 추억하며 다시 태어나도 같은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격언에 새삼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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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교수님, 유학기간 동안 온갖 세상 경험 다 하셨네요. 소송부터 교통사고까지..... 그보다는 그만큼 세밀히 기억해 주신 거겠지요? 많은 분들께 자신의 유학생활을 그려보게 합니다. 그리고 쓰시지는 않으셨지만, 노래 잘하시는 교수님 내외분께서 성가대도 휘어잡고 활동하셨겠지요. 옥고 감사드립니다!! 귀국하셔서 정리하실 일도 많으실텐데, 숙제 기한 지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마음 부담 터시고, 아기 예수님 향해 훨훨 나셔도 되겠습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조무환 교수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제 수필작가로 등단하셔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