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으로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조선씨족통보에 623본 으로 나와 있으나 그중 씨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20여 본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계통과 신라의 알지 계통으로 대별되며 현존하는 거의 김씨는 이 두 계통중 어느 한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수로왕의 후손으로 김해김씨와 허씨,인천이씨,양산이씨,함창김씨 등이 있고 진주김씨,수원김씨,영동김씨도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동성동본으로 근원이 다른 김해김씨가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8세손 시흥의 후손인 김녕김씨와 임진왜란때 좌선봉장으로 왜병3천명을 끌고 왔다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김해김씨로 사성된 김충선의 후손으로 사성(賜姓)김해김씨가 있다.
김녕김씨는 처음에 김해김씨로 혼동되어 선김,후김으로 사용해오다가 조선고종때 와서 김령김씨로 확정되었다. |
|
허씨(許氏)는 가락국 시조 임금의 왕후 진주태후 허황후의 성씨이다.
허황후께서 임종하실
그 후세에 이르어 가락국이 신라의 선양되니 사방으로 분거 하게되어 거주지에 따라서 본관을 김해(金海),하양,양천,태인,함창,등 오관으로 나누게 되었다.
허씨는 인구가 많지 않으면서도 이조에 정승 다섯분을 배출하는 명문 집안이다.
성씨. 본관은 양천(陽川) ·하양(河陽) ·김해(金海) ·태인(泰仁) ·함창(咸昌) 외에 수원(水原) ·양주(梁州:梁山) 등이 문헌에 나와 있다. 그 연원을 멀리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김해김씨의 시조)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게 둔다. 허황후(許皇后)는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진해시 운동 앞바다에 이르러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허황후는 아들 10명과 두 공주를 낳았는데 임종때 유언으로 제가 먼 동쪽나라에 와서 대왕을 모시다가 이제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니 가장 슬픈일은 성을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임니다.하시니 시조임금께서는 둘째아들 거칠군과 세째아들 허씨로 사성하시어 모성을 따르게 하셨다. 맏아들 등(登)은 김씨(金氏)로 정통을 잇게 하고, 둘째이들 거칠군과 셋째아들을 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賜姓)하였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경남 하동에 七佛寺가 있다)로 성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김해김씨는 부성(父姓), 허씨는 모성(母姓)을 각각 계승했다는 전설 때문에 오늘날에도 두 성씨는 상혼(相婚)을 피한다. 앞에 든 허씨의 각 본관의 시조는 가락국이 신라에게 패하여 망하면서 각 지방에 흩어진 왕손이라고 하는데, 그 중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은 지금의 경기 김포군 양천인 공암촌(孔岩村)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고려의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해준 공로로 공암촌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고 촌주(村主)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허씨의 대표적 인물 중 조선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종(琮)과 연산군 때 역시 우의정을 지낸 침(琛)은 친형제로서, 모두 현상(賢相)으로서 청백리에 뽑혔다. 또한, 엽(曄)은 선조 때의 동서(東西)분쟁 당시 동인(東人)의 영수가 되었으며, 슬하에 성(筬) ·봉( ) ·난설헌(蘭雪軒) ·균(筠) 4남매가 있어 모두 시문에 뛰어났다. 특히 난설헌은 규수시인으로 이름나 황진이(黃眞伊)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3대 여류’로 꼽히며, 균은 서얼을 차별대우하는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사회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로 널리 알려졌다 . 목(穆)은 당대의 석유(碩儒)인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룬 학자로, 학문 ·문장 ·서예에 뛰어나 ‘학 ·문 ·서의 3고(古)’라 일컬어졌다. 그는 학문이 깊으면서도 56세 때 처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63세에 비로소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80세가 되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우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송시열 등 서인(西人)에 대한 처벌문제가 대두되어 남인의 영수로서 영의정 자리에 있던 적(積:13촌간)과 의견이 맞서 강경론자인 목은 ‘청남(淸南)’으로, 온건파인 적은 ‘탁남(濁南)’으로 분파되었다. 한편, 하양허씨의 인물로는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조(稠)를 들 수 있다 . 이 밖에 허씨의 인물로는 중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굉( ), 선조때 의학의 대가로 중국 ·일본에서까지 번역되었고 현재에도 동양 3국에서는 한의학의 성서로 유명한 《동의보감》 25권을 펴낸 준(浚), 성종 때 직제학 ·대사간을 지냈고 명필로 알려진 계(誡) 등이 있으며, 한말의 의병장으로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위(蔿)가 있다 . 허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22명, 상신(相臣) 6명을 배출하였으며, 고려 때에는 재(載) ·경(慶) ·공(珙) ·호(蒿) ·금(錦) 등의 명신이 나왔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2만 8685가구에 인구 16만 2407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29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6만 3037가구, 인구 26만 4228명으로 274성 중 역시 29위였다. |
|
태인 허씨의 후손중 신라 35대 경덕왕때 아휘찬 벼슬에 있던 허기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玄宗)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성(姓)인〈李氏〉를 사성(賜姓)받았다.허기의 후손 이허겸(李許謙)까지 이허씨로 복성을 사용하다가 그의두 아들 중 형인 접은 태인 허씨를 잇고 아우인 한(翰)은 인천 이씨를 이었다. 이한은 고려 때에 소성(인천)백에 봉해졌다.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허겸(許謙)의 손자인 자연(子淵)이다.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고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맏딸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소생들이 순종(純宗) ·선종(宣宗) ·숙종(肅宗) 등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도 인예왕후의 소생이다. 자연(子淵)의 아들 호(顥)의 딸이 순종비가 되었고, 호(顥)의 아들 자겸(資謙)의 딸들이 예종과 인종의 비가 되는 등 왕실과 척연을 맺음으로써 그 가문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자겸이 인종의 장인으로 권세를 전횡한 끝에 난을 일으켰다가 세 아들과 함께 숙청당함으로써 이들의 권세는 종지부를 찍었다. 대표적 인물은 고려의 학자 이인로(仁老), 조선 초의 명신 문화(文和)를 들 수 있으며, 고려조에서의 성세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인구 61,045명. (1985년) |
|
시조 金時興(김시흥)은 대보대왕 김알지의 39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공을 세우고 금녕군에 봉해졌는데 금녕은 김해의 고호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면서 선김(김수로 계:김해김씨)과 후김(김시흥 계:금녕김씨)으로 각 각 분별해 왔다.그러나 오랜 세대가 흐르고 후손들이 번창 함에 따라 양김의 후손들 간에는 혹은 자기 자신도 선김의 자손인지 후김의 자손인지 조차 분별치 못한 폐단이 있게 되자 헌종때에 이르러 이조일관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금녕군의 후예는 다시 김해의 고호인 금녕으로 이관하게 되었다.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24,323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