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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용천탈출 /11]
생면부지의 처자임에도
그 다희를 보는 손씨의 마음이 설레었다.
비천하게 태어난 그 한을 삭이지 못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던 아들 이었다.
천민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에 질곡을 느낄 적마다,
아들은 글방의 서탁을 걷어차고 뛰쳐나가기 일쑤였고,
그런 날 사람 놓아 알아본 아들의 행방은 사위포 퇴기년들의 술집이나,
큰나루 색주가의 골방에서 봉수대 그 왈패들과 술에 젖어 쓰러져 있곤 하기 몇 번이던가...
하여,
그 격하기 쉬운 아들의 심성을 가라앉히고자 일찍부터 사또께 간청하여 아들의 혼처를 수소문도 했었으나,
그런 어머니의 배려에 대하여 아들은 술이 깬 후에도 한번도 탐탁한 얼굴을 보이지 않았었다.
제법 참한 처자가 신부 후보로 나섰어도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건 아들의 오기였다.
아들의 신분에 걸맞는 처자들이란 뻔했다.
그쪽 또한 버젓한 전실 태생일 수가 없었고 그러나,
아들에게 허락된 짝은 그런 속에서 찾는 길 뿐이었다.
아들이 비록 다른 '천것'들과 달리 부지런히 글을 익히고,
제법 남아의 호연지기를 길러왔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도 종당엔 팽개쳐야 할 것들이 뻔한 이상,
아들이 하루빨리 자기도 다른 천것들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천것임을 자각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신의 신분과 걸맞는 여자와 맺어지길 바랐었다.
더구나 멀잖아,
새 세상을 찾아 멀리 경상도 산음현으로 떠나는 아들이 살아서는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는 생부의 눈앞에,
착하고 바지런한 성품을 지닌 아내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 연후에 남편과 하직하고 싶었다.
하여 떠나기 전,
누구를 택할 것이며 또,
어떻게 아들을 설득할 것인 지 난감하던 차에 아들이 스스로 벌여놓은 이번 일의 전말을 전해듣자,
너무나 놀랍고 기뻐 달려온 손씨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다희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허준이란 사내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도 은혜려니와
자기를 대신하여 관아에 오가며,
아버지의 죽음을 신고할 제 낯선 토담집에 혼자 남은 다희의 가슴에 오간 건,
아버지의 죽음이 어찌 처리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 못지않게,
묵묵히 자기를 도와준 허준이란 사내의 미더운 정이었고,
혹,
그의 행동이 강짜 심한 부인의 귀에 들리는 바 되어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초조함이요!
그조차 눈앞에 없고선 이젠 ,
이 세상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외로움 이 었었다.
거의 손씨가 앞장서다시피 하여 다희와 허준이 토담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아들을 눈짓으로 말린 후,
다희와 함께 손씨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허준도 어머니의 눈빛과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허준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결혼문제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고 가슴이 뛰었다.
"친상을 당한 터에 당장 이런 말을 꺼냄이 정녕,
예에 어긋나고,
당돌한 소청인 줄을 익히 아는 터이긴 합니다만,
지금 얘기한 바와 같이 밖의 저 아이와 나 우리 모자의 사정이 더 이상 이 고장에서 차일피일 시일을 지체할 사정이 못 되므로 하는 얘기 올시다."
손씨가 허준의 당면한 여러 사정을 간략하나마 숨김없이 들려준 끝에 완곡한 청혼의 말을 꺼내자,
다희는 다소곳 이마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허준이란 남자가 스스로 밝힌 그 미천한 신분 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실감으로 오지 않았을 뿐 더러,
이제 또 눈앞에 보는 생모 또한 행동거지하며,
어투가 어느 한 곳 비천한 구석이 없는 사람임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아니,
그 놀라움보다,
더 크게 가슴이 뛰는 것은 한가닥 가슴 속에 오가던 의문--
허준이란 남자가
미장가전의 어엿한 총각임을 확인한 때문이요!
지난날의 허혼자에게 절연당한 지금,
천애고아나 진배없는 자기에게 마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어떤 커다란 손이 주재하는 은혜처럼 느껴졌다.
"소녀의 소원은,
이 고장 어디에 제 한몸 의탁할 곳을 구하여 하녀살이 라도 하면서,
아버님의 탈상까지 산소를 지켜 드리는 ... 그밖의 일은 아직 아무 경황이 없사와 ..."
손씨가 조용히 끄덕였다.
곱되 어느 한 구석에도 자만심이 없는 자태 못지 않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 마음씨가 또한,
손을 잡아주고 싶도륵 아름다웠다.
다희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는 물론,
자식으로서의 소녀의 간절한 소망이옵고 결코,
저를 도와주신 분의 은고를 허술히 알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소서."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산소를 버리고 떠나기를 난들 어찌 권하오리 까마는,
저 아이가 행한 일들을 새삼 짚어보건대 평소 없던 너무도 절실한 행동이라서 정녕,
반상의 격차를 의중에 아니 두신다면,
혹 저 아이의 진정이 용납될까 하여 에미로서 대신하여 말씀드리는 것올시다."
손씨가 자꾸만 망설여지던 대목--
서로의 신분에 대해 입을 열자,
그러나,
다희의 대답은 조용하고 명료했다.
"사람의 귀천은 행실이 가늠하는 것이옵지 신분의 고하에 구애되는 건 아닌 줄 아옵니다."
"하오면,
아버지의 시묘가 끝나면 저 아이를 맞아줄 수 있사올지?"
다희의 작고 하얀 손이 꼭 마주 쥔 채 한창 말없다가 시선을 들었다.
숙였을 때 보이지 않았으나,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소녀 또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련한 처지 이옵니다.
지닌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몸이오나,
남자 되는 분의 부모와 집안이 허락하시는 인연이면,
탈상을 마친 후,
감히 권하시는 바를 따를까 하옵니다."
손씨가 다희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그러리다.
저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꼭 허락을 받으오리다."
친상을 당한 노심초사로 인해 해쓱하니 핏기라곤 비치지 못하던 다희의 양볼에 처음으로 한가닥 홍조가 어리며 다소곳 아미를 숙였다.
붐하니 새오는 새벽하늘을 향해
방안의 정경을 알지 못하는 허준의 목젖이 또 한번 오르내렸다.
그때,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고,
등불을 들려 데려왔던 몸종에게
토담집에 남아 다희를 시중들 것을 일렀고 아들에게는 서둘러 돌아가기를 권했다.
아들이 영문도 결과도 모두 알고 싶었으나 어머니는 부드러운 눈빛을 한번 보냈을 뿐 더 이상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허준은,
어머니를 따라나온 다희의 눈길이
자신에게서 한참 머물렀다가
시선이 향해 가자 다희의 귓불이 빨갛게 물드는 걸 얼핏 본 듯했다.
허준이,
방안에서 어머니가 다희와 주고받은
얘기를 들은 것은 읍내로 돌아오는
장천 구름다리에서였다.
"내 천한 신분을 밝혔는데도 용납을
하더이까?"
같은 말을 거푸 묻는 허준의 안색이
딴때없이 빛났다.
한전골에서 돌아온 그들 모자가
다희에게 다녀온 자초지종을 아뢰려
장번사령 시켜,
사또의 심기를 살펴주길 부탁했으나,
이른 새벽부터 닥친 외부의 손님으로 인해 좀처럼 여가가 나지 않는다는 전갈이
두어 번 전해졌고,
거의 해가 중천이 되었을 때 허륜이 직접 건너왔다.
그리고,
손씨로부터 다희와의 사이에 오간 얘기를 묵묵히 들은 후,
그 첫마디를 허준을 향해 꺼냈다.
"한양으로부터 사람이 찾아왔다.
찾는 사람은 바로 그 부녀일시 분명해."
"한양에서 부녀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어떤 관계의 사람이온지?"
긴장한 아버지를 의아해하며,
허준이 오히려 반기는 투로 물었다.
"낭자의 말로는 이미 한양에도 어디에도
자기들을 찾아올 법한 사람이 없다
들었습니다만.."
"죽은 이가 죄인으로 몰리기 전에
그 낭자에겐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어."
"정혼한 사람!
정혼이라 했사오니까?"
손씨가 물었다.
"소상히 얘기하려 않는다마는
아무래도 관련이 있다 싶어 물어보니
낭자의 집안이 죄로 몰리자,
남자의 집안에서 여자의 집으로 일차
파혼을 통지했다 하나,
그 집안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젊은이는
그 낭자를 잊지 못하여 북청으로
찾아나섰다가,
어찌어찌 수소문하여 다시 또 의주까지
와서 다시 부녀의 행색을 탐문한 끝에
부녀가 이 용천지경으로 향했다는
얘기를 연도 주막거리에서 주워듣고
나타난 게 틀림없다."
허준이 숨을 삼켰다.
입이 떼지지 않는 손씨가 그 아들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하여 ...
아직 죄인의 죽음에 대한 문건은
꾸미기 전이라,
난 알지 못 하는 일로 대꾸도 했다만 ...
또,
사사로이 찾는 일이니 일일이 내가 나서서 대답할 거리는 아니나 ..."
"사또 ... "
"아버님 ..."
"이미 파혼한 처지요!
그 낭자 또한 너의 모자에게 그런
언약을 한 바라면,
하나도 겁낼 일은 아니로되 천리길
멀다 않고 찾아나선
그 사람에게도 당연히 할 말이 있으리라."
" ..."
"하오나 파혼한 처지면,
장차 혼사의 향방은 낭자의 의향에
있지 아니 하오니까."
" ..."
"말은 그러할지나,
세상의 귀천이 엄연한 터에
너희가 혼인한다 함은,
세상의 이목을 속이는 일이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어찌 문제가
없다하리."
"아버님 ...
하오면 소자는 어찌하오니까!"
"헤어지겠느냐?"
"못하옵니다, 결코."
무엄하게 아비의 말허리를 끊는 아들을
지그시 보던 생부가 말을 뱉었다.
"죽은 이는
곧이곧대로 위에 알리면 될 것이요,
그 딸의 행방까지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단 ..."
"단 무엇이오니까?"
"헤어질 수 없는 사람이거든 하루 속히
데리고 이 고장을 떠나는 길뿐 ..."
"낭자는 삼 년 시묘를 마치고 떠난다
하옵니다."
"삼 년은커녕 사흘도 늦어 ..."
허준이 결의에 찬 눈빛을 들었다.
"소자가 설득하여 해 안으로 떠나겠습니다."
" ..."
"해 안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손씨가 아들을
돌아보았다.
"하오니 전일 마련해주시마 하오신
산음 현감께 보일 서찰을 하나 꾸며
주옵소서!."
생부가 20여 년 인연이 있었던
그 모자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아니 부자의 영이별이었다.
산소의 위치는 그런 대로 잘 잡은 듯했다.
수일 전 이루어놓은 봉분 주위에
거의 뼘 가웃이나 쌓였던 눈들이
그 동안의 햇살에 녹아,
잡초의 순들이 듬성듬성 내비치고 있었고 마른 뗏장으로 덮은 봉분의 응달에만
새벽녘 잠시 날린 싸락눈들이 엷게 덮여
있었다.
죽어서 장인이 된,
그 초라한 봉분을 향해 허준이 마지막
절을 드렸다.
그 곁에서 다희가 함께 아버지께 이별의
긴 절을 올렸다.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나,
밤새 못다 운 부엉이놈이 아직 부엉부엉 울고 있었고,
그 메마른 소리가 산속의 냉랭한 공기를 한층 더 느끼게 했다.
상황이 급했던만큼,
서로 맹세 하나로 남편과 아내가 된
두 사람이었다.
허준이 아직 신방도 치르지 않은
그 아내의 손을 잡았다.
수없이 눈물을 닦아내던 그녀의 옷고름은 새벽냉기 속에 서걱거리도록 얼어 있었고 그 옷고름을 또 한번
얼굴로 가져가다가 산소 앞에 주저앉을 듯 휘청거리는 다희를
허준이 부축하며 그녀의 여린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서로 열을 앓는 아이처럼
뜨거웠다.
이불짐도 지울 겸,
원행을 하는 모자에게 아버지가 딸려보낸 장번사령이 기물도 생략하고,
산소 앞에 벌여놓은 마른 음식들을
주섬주섬 쌌다.
그것들은 일행이 가다가 주막을 못 만나는 사이사이 허기를 때울 떡과 생선포, 강엿
따위였다.
이만큼 조용히 물러서 있던 남바위를
쓴 손씨가 다가와
다희가 벗어놓은 장옷을 집어
며느리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남행을 하는 데는 여러 길이 있으나,
역시 역로가 뚫린 철산,
평양으로 뻗은 큰길이 보행에 편했다.
애초 허준이 내심에 작정한 노정은
육로였다.
그건 용천을 탈출한다는 당장의 궁리 외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갑자기 부부가 된 다희와 좀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고,
또,
다희를 찾아온 김상기의 일행도 필시
택할 해로를 뒤따라간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천수백 리나 되는 경상도 산음까지의
먼길을 신혼의 며느리가 행보할 것이
가엾게 느껴졌던지,
살아서 다시 만날 기약 없는 그들 모자에게 이별의 정이 쓰렸던지,
하직인사를 할 때까지도 묵연히 눈을 감고 고개만 끄덕이던 아버지가
그들 부부가 산소에 오른 사이
가마 두 채를 뒤딸려보내며 서찰을
동봉해왔다.
내용인즉,
갑자기 생각난 것이라며,
마침 오늘 서북의 물산을 싣고
한양의 삼개로 향하는 장삿배가 출항하니 그 편을 이용토록 손을 써주마는 것과
그 삼개에 당도하여 수소문하면
서해와 남해를 돌아 경상도 고성으로
왕래하는 세곡선이 있을 것이요,
세곡선을 부리는 선군들이란
그 오가는 길에 으레 선객을 모아 술값
따위 마련해 쓰는 무리라,
그들을 찾아 편의를 도모하라는 지난날의 수군 군관다운 지식을 자상히 적고,
그 배가 닿을 고성과 너희가 찾아갈
산음현이 지호지간이노라며 글을 맺고
있었다.
온통 붉게 물든 서해바다 저쪽으로
용천의 산하가 멀어져갔다.
내일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