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감독 영화 파계 破戒 속 화두에 답하여
0. “내 고픈 것을 지독히 알라. 그 다음 구절은?”
1. : 조세희 소설 <민들레는 없다> 가운데 <우리는 모두 몰랐다>라는 이야기
은강 방직의 여근로자들이 단식 농성을 했다. 아는 사람은 알았고 모르는 사람은 몰랐다.
안 사람들 중의 얼마는 그들을 도울 수 없어 안타까와했고, 안 사람들 중의 얼마는 그냥 알고만 있었다. 모른 사람은 계속 몰랐기 때문에 계속 모르고만 있었다. 모른 사람이 알았더라도 아무 일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 사람들 중의 얼마가 속을 태운 것과 상관없이 은강 방직에는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안 사람들 중에서도 얼마는 그냥 알고만 있었으니까.
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과 똑같이 의미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 몰랐다.
은강 방직은 괴물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다.
은강 방직은 통뼈다.
우리는 모두 몰랐다.
아홉밤 열낮 동안 은강 방직의 여근로자들은 밥을 안 먹고 굶었다. 보리차는 마셨다. 소금도 먹었다. 아무 묽게 쑨 흰죽 조금, 그리고 사과 몇 알은 먹었다. 견디지 못하고 실신한 사람은 바깥 사람들에게 인계해 병원으로 보냈다.
그녀들은 아홉밤 열낮을 보내고 단식을 풀기로 했다. 그녀들은 단식을 풀면서 갖고 있는 생각, 느꼈던 점들을 말해 정리했다. 다음이 그 기록이다.
1. 몸이 쇠약해져 단식을 푼 뒤의 건강 관리가 문제이다. 2. 반대측 근로자들을 멀리하지 말고 가까이 하자. 3. 현장에 들어가 관리자들이 심하게 굴더라도 꾹 참고 상냥하게 받아 넘기다. 4. 미워하는 사람에게 더 큰 친절을 베풀자. 5. 돈을 모아 똑같이 영양 섭취를 했으면 좋겠다. 6. 관리자가 부르면 반드시 옆 동료에게 알리자. 7. 비인격적인 대우를 해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격적으로 대해 주자. 8. 외면해도 인사하자. 9. 배고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10. 참을성을 기를 수 있었다. 11. 수제비 생각이 간절했다. 12. 물이 생명수라는 것을 알았다. 13. 소금맛이 설탕맛 같았다. 14. 힘이 없어 누워 있으니까 천정에 붙어 있는 나무 무늬가 깨과자로 보였다. 15. 옷에 달린 단추는 고구마과자로 보였다. 16. 부서가 다른 친구를 사귈 수 있어 좋았다. 17. 모두 한 식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18. 근로자의 날 기념식장에서 받은 노동자빵을 안 먹고 누구 주었는데 그 빵 생각이 자꾸만 났다. 19. 텔레비전에서 본 원더 우먼의 힘이 부러웠다. 20. 어려선 남자로 태어났었으면 했는데 이제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21. 우리를 때린 남자들의 주먹이 무섭지 않다. 22.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나는 쌀을 훔쳐 먹고 김치도 훔쳐 먹었다. 23. 두둑의 심리를 알 수 있었다. 24. 내가 생각한 것은 도둑의 심리가 아니라 불우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의 일생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바칠 생각이다. 25. 층계를 올라갈 때 다리가 후들사들 떨렸다. 26. 밥 먹는 꿈을 꾸고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울었다. 27. 동료가 수건을 들고 들어오는데 과자봉지로 보여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28. 낮이 돌아 오는 것이 두려워 밤만 계속 되었으면 했다. 29. 우리 모두의 약점도 알았다. 30.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31. 서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32. 죽그롯을 받아 허겁지겁 마시는 모습들을 보고 눈물이 왈칵 솟았다. 33. 우리들의 상황을 살피려고 가짜 의사가 왔을 때 참기 힘든 분노를 느꼈다. 34. 문소리가 날 때마다 공포를 느꼈다. 35. 나는 내내 이층에 누워 있었다. 매일 새벽 같은 시각에 창 밑을 지나가는 자전거 벨소리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까 몹시 알고 싶었다. 36. 우리가 죽으면 누가 울까 생각했다. 37. 시집을 가고 싶은 생각도 났다. 38. 모두들 너무 날씬해졌다. 39. 누워만 있으니까 무거운 병을 앓는 중환자 같았다. 40. 신부나 수녀, 또는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이 들어설 때마다 혹시 먹을 것이나 안 가져왔나 손부터 보았다. 41. 먹을 것이 생기면 행동이 부끄러웠다. 42. 굶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 몰랐다. 시간이 길어 절망감에 빠졌다. 43. 희망은 너무 희미했고 절망은 너무 뚜렷했다. 44. 작은 사람이 들어오면 먹을 것으로 보였다. 45. 죽기는 정말 어렵구나 느꼈다. 46. 나는 사람의 목숨이 별거 아니구나 생각했다. 47. 배가 고파 죽겠는데 나쁜 소식만 들려와 삼층 아래로 뛰어 내리고 싶었다. 48. 해고 당할 각오로 단식에 참여 했으나 속마음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49. 굶주리며 단체 생활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 50.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편안했다. 51. 우리를 때리고 감시한 남자들이 입에 못 담을 욕을 할 때 미칠 것만 같았다. 52. 그들을 말끝마다 저 시발년들, 저 시발년들 했다. 53. 그것은 아주 점잖은 편이다. 옮길 수 없는 욕설을 너무 많이 들었다. 54. 나는 참을 수 없어 너희들은 먹고 할 일도 참 없구나 해 줬다. 55. 반대편이 비웃어도 웃음으로 대해주자. 56. 현장에 돌아갔을 때 누가 무어라해도 거기에 절대로 신경 쓰지 말고 우리의 목표를 밀고 나가자. 57. 관리자들을 무서워하지 말자.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도록 각자 노력하자. 일을 열심히 하자.
그리고 은강 방직 여근로자들은 단식 농성을 풀었다.
은강 방식 여근로자들이 아홉낮 열밤 동안 농성을 하게 된 동기를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단식에 참가했던 근로자들이 해고를 당해 지방 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해고를 당한 근로자들이 몇 달 동안 수입 한 푼 없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공장에 들어가려고 해도 도저히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사실은 모르고 있다.
은강 방직은 괴물이다.
우리는 모두 바쁘다.
은강 방직은 통뼈다.
우리는 모두 몰랐다.
2. “내 고픈 것을 지독히 알라. 그러면 남의 배고픈 것도 몸 저리게 알리라.”
3. “지상에 행복이 넘쳐흐를 때를 기다리면서” - <파계> 마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