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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 Goodbye
“한 시간이요.”
“8번방으로 가세요.”
“내가 마이크 잡을래!”
결국 초래했던 일이 일어났다. 사실 예전부터 꿈꿨던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예상보다 빠르게 일어날 줄은 몰랐던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노래방에서, 그 사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지금 내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당최 이 상황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건 좀 많이 에러스러운 장면이었다. 둘의 사이를 알고 있는 듯한 김종인과는 반대로, 연신 신나 보이는 김종대는 둘의 사이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에 반사적으로 내 앞을 지나가는 변백현의 손목을 잡았다. 이럴 때는 제때 풀어버리는 게 상책이다.
“변백현, 저기 김종대는 몰라?”
“……뭐를.”
“그……너랑 도경수 말이야.”
“우리가 일부러 김종대한테는 말 안 했어. 다른 학교기도 하고, 워낙 우정 중요하게 생각하는 놈이라.”
“아…….”
“들어가자.”
“야, 잠깐만. 너 들어가게? 그래도 둘이 싸웠다며…….”
“나 지금 도경수 때문에 들어가는 거 아니라 너 때문에 들어가는 거거든? 괜히 오지랖 떨지 말고 들어가지?”
“…….”
“기회라고 생각해.”
변백현은 미처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싹둑 꼬리부터 잘랐다. 그와 동시에 있는 힘껏 내 등을 밀기 시작했다. 이미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세 남자를 보며 난 절망의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했던 도경수의 옆자리는 이미 김종대가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저 새끼는 진짜 눈치라곤 밥 말아 먹은 놈이 분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힘으로 제압해버리고 싶은데. 잔뜩 열이 오른 내 기분을 눈치라도 챈 건지 변백현은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음성으로 작게 속삭였다.
“도경수 앞에 앉는 게 좋은 거야, 병신아,”
이어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엉덩이가 푹신한 방석과 얼굴을 맞댔다. 변백현이 강제로 내 어깨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놈이 말한 것처럼, 도경수를 정면으로 마주하니 달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좀 위험했다. 누군가 드럼 스틱으로 내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나오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래놓고 노래는 무슨 노래, 삑사리라도 안 나면 다행이다.
“변백현 너 뭐 부를 거냐? 나랑 잔소리 부를래?”
“내가 남자 새끼랑 잔소리를 왜 불러, 안 불러 시발.”
“그럼 종인아 나랑 할래?”
“변백현이 했던 말 그대로 해줘? 내가 남자 새끼랑 잔소리를 왜 불러, 특히 김종대 너랑 부르는 건 그냥 죽으라는 거다.”
“아, 그럼 누구랑 불……너 부를래?”
“응?”
젠장, 왜 불똥이 나한테로 튀나 싶었다. 피할 수 있는 한 피해보려던 내 야비한 계획을 미리 엿보기라도 한 건지, 기가 막히게도 나를 첫 번째 듀엣으로 정해버리는 거지같은 김종대였다. 그래도 일단 거절을 하기 위해 양 손을 들어 빠르게 손 사레를 쳤다. 그럼에도 상큼하고 달달한 전주가 무자비하게 귀에 꽂혀왔다. 김종대 또한 사람 말 따위 안 들리는 어마어마한 귀머거리가 분명했다.
“늦, 늦게 다니지 좀 마……술은 머, 멀리 좀 해봐. 열 살짜리 아이처럼 말, 말을 안 듣니…….”
“정말 웃음만 나와, 누가 누구보고 아이라 하는지 정말 웃음만 나와.”
여유롭게 율동까지 추며 임슬옹의 파트를 무난하게 소화해버리는 김종대를 보며 할 말을 잃어버린 나였다. 하늘도 무심하지, 그저 순수하고 깨끗한 짝사랑을 하고 싶은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을. 이렇게 비교되는 건 싫었다. 누가 봐도 놈은 뛰어나게 노래를 잘했고, 난 누가 봐도 뛰어나게 김종대보다 못했다. 명백한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뻣뻣하게 노래방 모니터를 응시했다. 놀림거리나 웃음거리가 되는 건 정말 죽어도 싫었다. 그러나 난 이미 그러기에 충분한 요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은 식을 생각을 안 했다. 다급하게 손 부채질을 하며 이어서 나올 파트를 부르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마이크를 들면.
“김종대 네가 음을 너무 높게 잡아서 그래.”
“……아, 그런가.”
“남자면 남자 키에 맞춰야지, 병신아.”
“미안해, 높았어?”
나를 이 지옥 속 용암덩어리에서 구해준 건, 변백현도 김종인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시니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도경수라는 사실이었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살만했다. 사랑도 할만 했다. 정말로 나를 배려해준 건지, 아님 단순히 내 노래가 듣기 싫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 거짓말 같은 상황이 내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자꾸만 그 하나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내 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던‘잔소리’가 중단되었고, 남자들의 필수코스인‘서쪽하늘’이 새어 나왔다. 노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변백현이었다. 아예 내 마이크까지 채가며 노래가 시작되기 전까지 엉덩이를 흔들거나 깨방정을 떨어대는 모습이 여간 바보 같은 게 아니었다. 마음 편히 앉아 도경수의 폭풍 매너를 다시 한 번 되새기려던 내 계획은 보기 좋게 올라가는 변백현의 고음에 그 또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것들은 나 빼고 다 노래를 잘하나 싶었다. 벌써 두 명한테나 배신을 당한 기분은 생각보다 많이 참혹했다. 실연을 당한 사람처럼 우울해진 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퉁명스럽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데,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는지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김종인의 모습에 난 다시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저 새끼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
“도경수랑 변백현, 뭔 생각으로 여기까지 같이 온 거지.”
이 세상에 모든 스테이지를 다 접수할 만한 무대 매너를 보여주고 있는 변백현과, 지금 여기가 학교 교무실인지 노래방인지 모를 정도로 무뚝뚝하게 팔짱을 끼고 정자세로 앉아있는 도경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김종인이‘미치겠다.’라는 말을 하며 심하게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니 나도 덩달아 이 상황이 심오하게 느껴졌다. 김종인의 마음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도 그랬다. 둘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야, 도경수 너도 불러!”
“난 안 불러, 그냥 볼게.”
“아, 너 노래방까지 와서 이러는 거 민폐다? 내가 예약해줄 테니까 불러라? 미씽 유 예약하면 되는 거지?”
“야, 김종대 나 진짜 안…….”
“미씽 유! 미씽 유! 도경수! 도경수!”
“……또라이 새끼.”
“미친 새끼…….”
“응…….”
차례대로 미친 김종대, 김종인, 변백현. 그리고 나였다. 마치 유명 가수 도경수의 디너쇼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응원단장 김종대가 가뜩이나 냉소적인 분위기에 더 심한 얼음물을 들이부었다. 그에 창피해 죽겠다는 듯,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경수였고, 또 그 모습에 난 조용히 함성을 보냈다. 잘한다 김종대, 장하다 김종대!
“알았어, 하면 되잖아…….”
“자, 박수!”
호응 없는 응원단장은 그것마저도 좋은 듯했다. 노력을 이기는 자는 없다. 결국엔 도경수도 일으켜 세웠으니, 그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했다. 그 전에 단독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고 온 변백현이 땀을 닦으며 내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무미건조하게‘너 노래 잘하더라.’하며 말하니, 한번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여는 변백현이다.
“도경수 노래 진짜 잘해, 내가 들어봤잖아.”
“…….”
“아마 너 쓰러질 거다.”
전주가 끝나자마자 경수의 노래도 시작되었다. 잘 다져진 음색의 조화가 또 다시‘배신당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그건 곧이어 저릿한 감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내가 도경수를 좋아한 기간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반이었다. 그 빛 하나 없는 캄캄했던 공간 속에 내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건, 경수였다. 지질히도 추하고 병신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난 그랬다. 내가 이뤄낼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딱 눈앞에 펼쳐진 건, 가히 세상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예고 없이 올라오는 포근하고도 뜨거운 감정에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젠 머리까지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도경수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동자 안에 담았다간, 즉사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과분한 그 감정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귀에 들리는 저 목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유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정말이지 기쁨의 눈물이었다. 경이롭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황홀한 느낌.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나를 따라 고개를 숙이곤, 이리저리 내 표정을 살피는 변백현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왜 그래? 아파? 집에 갈까?”
“……아니.”
“그럼, 왜 그래? 공기 탁해? 방 바꿔 달라 해?”
“아니야, 바보야…….”
“아프면 말해, 데려다 줄…….”
“고마워서 그래, 너한테.”
“…….”
“그냥……진짜 고마워서.”
“……바보냐, 진짜 고마우면 고개 들어. 도경수가 네 앞에서 노래하는 거 직접 봐야할 거 아니야. 밥통, 밥통 하니까 진짜 밥통 같이 구네.”
남을 위로해주는 법을 모르는듯한 변백현은 연신 어색한 말투와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와 함께 내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힘 조절을 제대로 못한 탓에 추한 비명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빛나는 존재를 가득 담았다. 말랑거리는 내 짝사랑이 처음으로 보람차고 잘한 짓이라고 느꼈다. 놈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 감정에 취해 음정을 맞추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두 눈에 도경수가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 물 좀 사가지고 올게.”
“변백현 너 혼자가게? 같이 가줘?”
“넌 그냥 여기서 도경수 감상이나 하세요.”
내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지만, 정말 혹시라도 제 이름이 나오는 소리를 들었을까 동공을 확장시키고 경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 난 멀쩡했던 호흡이 목구멍 밑까지 훅하고 들어갔다. 정말로 도경수가 나와 변백현 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진 마음은 빨라진 손가락 스냅과 비례했다.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위에 손까지 얹으며 쐐기를 박고 나가는 변백현의 행동에 조각난 심장소리가 자잘하게 뛰어댔다. 그토록 바랐던 눈 맞춤이지만, 이런 느낌은 죽어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급한 대로 경직된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결백함을 강조했다. 이건 오버일 수도 있지만, 나와 변백현 사이를 의심하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가히 어렸을 적, 인소에서나 봤을 법한 세계 서열 0위만 가지고 있다는 싸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도경수의 행동에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못하는 가마니가 돼버리고 마는 나였다. 이거 정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었다. 잠깐이라도 변백현이 내 옆에 없으면 보란 듯이 사고를 쳤다. 심연의 한숨은 나날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초라하게 고개를 돌리는 일 뿐이었다.
“들어가라, 나중에 보자 종대야.”
“나 너희 진짜 부럽다. 셋이서 같은 학교면 매일 만날 거 아니야.”
“그러지도 못해, 반이 다르잖아.”
“그래도 너랑 도경수는 같은 반이잖아.”
“아, 김종대 너만 혼자 학교 다른 데로 떨어진 건 우리 책임 아니다?”
“빡치니까 그러지, 빡치니까.”
“안 늦었냐? 너 형들이랑 약속 있다며.”
“맞아, 늦었다. 나갈게! ○○○ 안녕!”
“아, 안녕……!”
“잘가, 종대야.”
“잘가라, 새끼야!”
“연락 좀 해, 시발아!”
도경수와 나만 빼고 나머지 둘은 다소 거친 언어로 우정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 꽤나 어둑해진 저녁은 낮과는 또 다른 느낌에 푸른빛 생기를 띄고 있었다. 맛있는 하늘색 솜사탕을 쥐고 있기라도 한 듯 자연스레 아랫입술에 마른 침을 축였다. 사실 뒤를 돌아보기 어려워 하늘 핑계를 대는 걸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도경수에게 인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만큼은 도경수의 감정을 읽기 싫었다. 그랬다간 내 얇은 막이 다 갈기갈기 찢겨질 것 같았으니까. 도경수를 지나쳐 아무렇지 않게 변백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인사를 하려면 제일 쉬운 쪽부터 어려운 쪽으로 올라가는 게 좋으니까.
“김종인 나갈게.”
“너도 가냐? 잘 가라.”
“변백현 내일 보자.”
“너 지금 가? 내가 데려다 줄까?”
“응? 아니야, 너 반대 방향이잖아. 그냥 나 혼자 갈…….”
“내가 데려다 줄게.”
“…….”
변백현이 병신이 아니고서야 한번 거절한 말을 또 꺼낼 리 없었다. 장난스러운 어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격적이고 사나운 말투도 아니었다. 이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부드럽고 잔잔한 톤이었다. 아까 노래방에서 들어본 적 있는, 날 말랑거리게 했던 그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음성의 근원을 향해 두 눈을 정지시켰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잖아……. 불안한 동공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럼에도 경수는 여전히 무채색을 띈 장미 같았다. 아름답지만 색깔은 없는 장미. 당연히 장난이라고 할 줄 알았다. 하다못해 내가 헛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정말 그게 사실이었던 건지, 내 뒤에 있던 변백현 또한 적잖아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 끝인데……그래, 가자. 뭐 이런 보편적인 대답.
“같이 가자, ○○○.”
“아…….”
“잠깐만, ○○○.”
“…….”
심장이 제 멋대로 펌프질을 해댔다. 변백현이 잠깐 물을 사러 나가도 사고를 치고 마는데 어떻게 무사히 집까지 갈 수 있겠냐 이 말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같이’라는 키워드를 잊으면 안됐다. 변백현도 그걸 느꼈는지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여간 급한 보이는 게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 좀 살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놈은 아까 전 노래를 부를 때 잠시 맡겨두었던 휴대폰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초조해진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눈을 마주하려 용을 썼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입술을 꿈틀대며 내게 무어라 전하려고 하는 듯 하는 모습에 애연한 감정이 몸을 감쌌다. 그 상황에서도 ‘잘해’ 라는 격려의 의미로 도경수가 못 보는 시야에서 모르게 내 뒷머리를 한번 쓸어주고 가는 변백현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는 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우리 둘 다 예상 못한 상황이었다. 먼저 걸음을 떼는 경수를 따라 그 모습을 놓칠세라 나도 서둘렀다. 도경수와 집이 같은 방향인 건 알았지만 내가 꿈꿔왔던 사실이 현실이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며칠 전 본, 밤하늘의 뜬 별 같았다. 내가 한 발자국 내밀면, 옆 사람의 발자국소리도 들려왔고, 이번엔 반대편 발을 내밀면, 옆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이어서 오곤 했다. 내 삭막했던 골목길에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린다는 건 상당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도경수였다. 나 진짜 성공한 덕후구나. 아이돌 팬들 다 필요 없어. 나만큼 계 탄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해. 매년 걸었던 골목길도 오늘만큼은 다른 기분이었다. 희미한 안개가 가득 찬 가로등도 세상에서 제일 눈부신 포근한 태양 같았다. 내 마음 속 파도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돌들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맡은 임무를 다하고 있었고, 바람은 매섭게 불어댔다. 한참 다른 생각에 빠져 정작 해야 할 대화는 까먹어버린 내게, 먼저 숨통을 트이게 해준 건 다름 아닌 경수였다.
“너 말이야.”
“응?”
“너 변백현이랑 친해?”
“……어, 그냥 친군데.”
“친구?”
“응, 친구!”
“…….”
“…….”
“네가 변백현 좋아하는 거 알아.”
이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사랑하는 도경수한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 아닌가. 내가 누구를 좋아해? 변백현을? 도경수가 아니라? 다급히 손을 들어 여러 번 흔들어댔다. 부정적인 의사를 확실히 밝히기 위함이었다.
“네가 어떻게 변할 지도 알아, 상처받을 것도 알고.”
“…….”
“그래서 네가 좀 걱정돼, 똑같이 그럴까봐. 아직까진 그냥 나 혼자 생각이지만, 그래도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너를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래, 변백현이랑 친한 여자애라는 게……사실 내가 그 새끼랑 어지간히 사이가 안 좋거든.”
“……아, 그게.”
“아마 변백현이 너랑 친구 하는 이유가 정말 네가 편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말 한 건 너가 처음이거든.”
“……아.”
“잘자, 좋은 꿈.”
머릿속을 망치로 때려 맞은 느낌이었다. 무어라 해명을 하기도 전에 벙찐 입술이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영화 해운대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거대한 바다가 날 덮치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제대로 물을 먹은 셈이었다. 그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건 넌데. 그 날은 베개를 책상 삼아 고개를 파묻고 소리 없이 울어댔다. 그건 내가 도경수라는 놈을 좋아하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울게 된 날이었다. 끊임없이 진동이 울렸다. 마지막 메시지가 올 때까지 난 넘치던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변백현]○○○ 자냐? 도경수가 잘 데려다줬어?
[변백현]진짜 자?
[변백현]존나 일찍도 자네
[변백현]오늘 고생했어 쫄보가 성공했네
[변백현]잘자라 밥통아
[변백현]내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