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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적인 시의 언어
산 /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 그림자
- 영암에서 / 신경림
이른 새벽 여관을 나오면서 보니
밤새 거리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잠시 꽃향기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콩나물 사들고 가던 중년 아낙
어디 아프냐며 근심스레 들여다본다
해장국집으로 아낙네 따라 들어가
창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본다
창틀 아래 웅크린 아낙의 어깨를 본다
하늘과 세상을 떠받친 게
산뿐이 아닌 것을 본다
파도 / 이성선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양파의 진실/ 리규
양파의 껍질을 벗긴다
벗기고 보면
청초한 여인처럼 살결이 희다
조선백자만큼 말쑥하고 윤기가 돈다
그러나 양파를 벗기려면
벗기는 자가 울어야만 한다
이건 여자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그리고 탱탱하고 옹골찬 저 유혹!
한 껍질 또 한 껍질 벗기고 보면
속살은 끝끝내 보이지 않고
눈물만 한바가지 쏟아야 한다
썩을 놈/ 복효근
푸르른 이파리가 말라비틀어지고
탱탱하던 실뿌리들 부석부석 말라 떨어지고 나서야
양파의 대가리는 완성되거니
그래, 다 자란 양파는 대가리가 있다
붉은 모기장 주머니에서
여차하면 썩으려 드는, 썩어버리는 대가리 속
메추리알만큼 남은 자궁이 얼마나 깊기에
부화하듯 푸른 싹 한 줄기 솟는다
썩은 밑둥에선 악착같은 실 뿌리가 돋는다
한 생이 끝났다 싶으면
제 수족과 제 대가리100퍼센트 다 썩혀서
제 생을 다른 생에 건네주는
눈부신 금빛 고리
부활이 있다면 저 자세 저 빛깔이겠다
혼신이 썩어서 내는 그 향기는 그래서 눈물이 솟도록 매운 것인가
이쯤에선, 죽는다는 말이
썩는다는 말이 순교처럼 아름답다
뇌의 3퍼센트밖에 쓰지 못하고 죽는다는 내 대가리는
양파만 하였느냐
서로 몰래 생을 희롱하다 무덤 가까이 와 버린
내 수족과 대가리는 양파만큼 진화했다더냐
천상 나 또한 썩을 놈이어서
쪼글쪼글 사위어가는 저 양파는
분명 이 생에 대한 한 질문이거나 답이겠거니
어느 날은 저 비밀한 교의에 귀의하고 싶다
저수지는 웃는다/ 유홍준
저수지에 간다
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간다
요즈음의 내 낙은
홀로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있는 것
아무 돌멩이나 하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을 던져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저수지의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긴 한숨을 내뱉어 보는 것이다
알겠다 저수지는
돌을 던져 괴롭혀도 웃는다 일평생 물로 웃기만 한다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 내 가슴팍도 웃는다
겨울 저수지 / 전명숙
당신이 던진 돌멩이를 받아먹으며
울먹울먹 울렁거리다
출렁출렁 무거워지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아가던,
결단코 소화되지 않고
무겁게 쌓이던
파문들로
추워져 추워져 얼어붙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
뚜껑을 닫았다
보아라 당신이 던진 돌멩이가
얼마나 아픔이었는지
껑껑껑 울며 토해내는
얼음판 위를 구르는 저 적나라한
당신의
돌멩이들
정곡 / 장인수
저수지에 돌을 던진다
풍덩!
파르르 열리며
수면에 동그란 과녁이 생긴다
과녁의 正鵠에 깊이 박히는 돌
신기하다
무언가를 던지면
순간 순식간
자신에게 닿는 무언가의 존재에게
저수지는 中心을 내어준다
명중!
잠시 후 흔적없이 과녁을 소멸시키는 저수지
저수지는
자신의 중심을 뚫고 들어온 존재들을
고요와 격랑의 아득한 틈으로
발바닥에 흐르는 끈적한 시간 속으로
질을 지나 자궁 속으로
着 착 착
들어앉힌다
33/ 유안진
A4용지에다
아라비아 숫자 3을 거푸 쓰니
백지는 그만 하늘이 되어
새 한 쌍이 날아가고 있다
앞서 날고 뒤를 따르는 저 삼삼한 사이가
성급하고 조급해 보여 아무래도 미심쩍다
밥과 무덤/ 김영석
마을 뒷산의 한 무덤 앞에는
무덤 모양 동그랗게 고봉으로 담은
흰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난해 흉년에 굶어죽은 이의
무덤이었다
새싹들을 어루만지는 봄볕 속에서
봉분은 그의 죽음의 무덤이고
밥은 그의 삶의 무덤인 양
서로 키를 재고 있었다
밥알/ 이재무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슬픈 동화/ 강희안
어느 봄날, 세 살배기 자식놈과 더불어
난생 처음 성북동삼림욕장에 갔다네
주차장 가로질러 산책로 숲길로 들어서자
녀석은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지
두 눈 휘둥그레 치뜨고는 연신 웅얼거리네
전봇대 보고는 기린, 철쭉 보고는 닭
방갈로 보고는 코끼리, 새 둥지 보고는 달
구름 보고는 사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보고는 귀신
소나무 보고는 고슴도치, 돌담 보고는 기차
풍향계 보고는 헬리콥터, 날아오르는 멧새 보고는 별
벼랑 아래 펼쳐진 숲 보고는 바다
숲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보고는 고해(래)
와! 고해 바다 고해 바다…
어처구니없게도 고해의 바다라니
마음으로써 형상을 짓지 말라 했거늘!
14주 펀(pun)의 효과
정치 / 이은봉
정치는 염치없는 잔치다 치사한 일 많아도
절대로 치사하지 않는다 정치는
눈치코치 없는 불치다 한번 걸리면
쉽게 치료되지 않는 암치다
비늘 없는 갈치 따위 조려 유치하게 잔치나 벌이고 있는 정치,
등 푸른 꽁치 따위 구워 치졸하게 잔치나 벌이고 있는 정치,
가까이 다가서면 정치는 치한처럼
아무나 잡고 치근대며 놓아주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폭탄을 장치를 한 채
치정어린 잔치 따위 벌이고 있는 정치,
치즈조각 따위 씹어대고 있는
정치는 먼발치의 경치일 때나 아름답다
온종일 잔디밭을 걸으며
공치는 일로 역사를 잡치는 사람들
수치스러운지도 모르고 지금 서로의 뺨 치고 있다
더러는 한강 둔치의 국회의사당에 앉아
법 개정의 치적 쌓기도 하고
치솟는 물가 걱정도 하는 정치
치자꽃 밤꽃 향기에 잔뜩 젖어 있기 때문일까
기껏 아줌마들의 치맛자락을 쳐들기에 바쁘다
눈 치켜뜨고 잘난 체 하기에 바쁘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질하듯 깨끗하게 닦아내고 싶은 정치,
밥솥에 쌀 앉히는 듯 정치는
사람들의 치욕 제자리에 들어앉히는 일 아닌가
아침 까치 마음으로 거리를 달리며
어지럽게 도치된 세상, 차분히 정치시키는 일 아닌가.
을지로 순환선/정해종
구멍 난 도시의 심장을 여러분께선
관통하고 계신 셈인데, 관통을
자꾸 간통으로 알아듣는 이가 있다
혀가 짧은 것도 아닌데 순환선을
수난선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그는 종일 간통죄 폐지의 거론과
도덕의 수난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잠실과 신도림이 은밀하게 연결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교통과 고통을 얼버무리고
다 그게 그거라고, 우리말 사전의 몇몇
어휘들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우겼다
90년대에 이르러 그는 문명과 문맹을
利器와 利己를 얼버무려 놓았다
이제 그는 없다, 언젠가 그가 바람난 서울을
떠나겠노라 했을 때 아무 말하지 못한 건
관통과 간통의 일맥상통을,
소득수준과 소비지수가 다른
잠실과 신도림의 은밀한 밀회를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호흡의, 팽창하는 성감의 서울
간통죄 폐지의 거론과 도덕의 수난을
생각하며 마그네틱 테이프 들이밀 때
나는 문명의 진공 속으로 빨려드는
담배꽁초가 되고, 아랫배에 힘주어
바리케이드 밀고 나오면
그렇다, 이건 영락없는 문명과 이기의,
간통
간 / 임영조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기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奸과 諫차이
한 몸 속 肝과 幹사이는 그렇게 먼가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맛 나는 세상에
그 어려운 소금 맛을 늬들이 알어?
" 간 " 이라는 우리 말은 짠 맛의 정도를 나타내거나 짠 맛을 내는 재료를 뜻한다. 그런데 국 한그릇을 끓이든 말 한마디를 하든 그 간맞추기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싱겁고 짠 것도 奸計와 諫戒의 차이도 한 끝이 넘치거나 모자라는데서 생겨난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도 어렵거니와 "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 은 더 험난하다. 이 시는 그 어려운 " 소금 맛 " 의 지혜를 푸성귀와 생선, 꼴뚜기와 멸치, 그리고 임박과 임향이라는 인물을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풀어 나간다.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똑똑하다 / 강희안
Knock* 소리가 들리거든 당장 일어나라 누구라도 지금은 편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안사람이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동안 바깥사람은 사색이 되어 간다 절대 Knuck** 놓고 볼일 보지 마라 내가 밀어내기에 힘쓰는 동안 그는 끌어당기느라 골몰한다 단단한 두개골을 두드려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파열음 ‘K’자가 왜 묵음에 빠졌는지 알게 되리라 신은 인간에게 ‘똑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신도가 똑똑했으므로 목사도 똑똑했다
문밖의 신은 인간이 ‘똑똑’하자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 두드리다
** 주먹이나 손가락 관절
농약 사이다는 지독한 은유다 / 강희안
요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제조한 ‘농약 사이다’는 지독한 은유다 그는 ‘사이다’와 ‘농약’ 중 어떤 말로 선을 잡을지 늘 망설인다 머리에 농약을 친다는 것은 사이다의 김을 빼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선한 사이다를 내밀 경우 명사의 포즈를 취했던가 소액을 건 화투를 치다가 언쟁을 벌인 일로 박씨 할머니(83세)가 사건의 주어로 낙인찍혔다 조만간 그가 어떤 패를 내밀지, 앞으로 무슨 패가 따라붙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 비정한 명사의 서술어가 ‘사이다’이므로 또 다른 두 할머니는 이미 고독성 삶을 주검으로 요약했다 사소한 화투에서 끄집어낸 잔혹한 어투는 얼마나 낯선 발상인가 깊은 혼수에서 깨어난 피해자 신모 할머니(65세)는 용의자인 “박씨 할머니와 사이좋았다”고 진술했다 우리말의 성격상 피해자는 가해자의 심리와 동떨어진 농약 사이였다 그의 은유가 아름다운 건 ‘농약 사이다’를 ‘사이다 농약’으로 뒤집었기 때문이다
뿔과 뻘이란 관계의 도식
어느 날, 한 평론가 선배가
술에 잔뜩 취해서
내가 너한테는 뿔이냐 뻘이냐고 물었다
나는 뿔이라 할까 고민하다가
뻘이라 대답했다
뿔은 상대를 치받는 나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그 선배가 뻘이 되어야 내가 뿔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어느 날은 한 고전소설을 전공한 후배가
술에 더 잔뜩 취해서는
나에게 자꾸 빨려 들어간다고 문자가 왔다
나는 나도 그렇다고 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뻘이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나는 당구에서도 끌어치는 일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선배의 뿔이자 후배의 뻘로 남고 싶기 때문이었다
13주 풍자와 역설
<풍자>
水西풀이 / 박진환
이 화창한 봄날
청청 백일에
음성 발음은 싫어.
양성화가 좋아
수서도
수사로 양성화가 좋아.
발음도 똑똑히
水西가 비록
訓讀으론 서물이 되나
선물은 아니지.
비록 水西가
냇물을 칸막이로 한 東西의
방위이긴 하나
뇌물은 아니지.
선물도 뇌물도 아니면
水西는 무엇일까
양성모음으로 풀면
수서는 수사가 되는 것을
문법으론 발음하고
법으론 함구하니
어느 날
말문 트이는 날이 있어
수사를 외쳐보랴.
<역설>
낙엽 / 습작생
중량 없는 황금
액면 없는 수표
아무 것도 살 수 없다.
다만
비매품
사랑과 추억을 거래한다
12주 현대시와 아이러니
1. 도착적 아이러니
나사못 / 이수명
나는 나사못
돌고 돌아 온몸으로 걸어나가는 꿈을 꾼다
돌고 돌아
도망가는 길을 꿈꾼다
내 몸을 먹어버린 나의 길
환한 죽음 / 이대흠
술안주로 먹으려고 사온 조개를
수돗물에 담그자
그것들 일제히 입을 다문다
몸 밖은 죽음
제 안의 어둠을 파먹으며
이승의 삶을 잠시 버티는, 그
불에 닿자 퍽 소리를 내며
다 놓아 버리는
온몸을 환히 열어 보이는
악착같이 잡고 있던 것이
生이라는 암흑이었구나
2. 은유적 아니러니
웃는 돼지머리 / 주용일
중앙시장 순대골목 진열장에는
얼굴 가득 미소 띤 돼지머리가 수두룩하다
대웅전 부처님처럼 거룩하다
생사를 놓아버리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표정이다
웃음 직전까지의 번뇌는 생략되었기에
목을 지나간 칼날의 날카로움을
사람들은 헤아리지 못한다
두 눈 지그시 감고 골목 내려보며
유리상자 안에서 돼지머리가 웃는다
잘린 목의 무수한 여래들이 웃는다
밥 / 박남희
내가 밥을 먹을 때 밥은 식사가 되지만
밥이 나를 먹을 때 밥은 거대한 우주가 된다
내가 먹는 모든 것은 밥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밥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먹은 커다란 우주의 밥이다
나는 밥이라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밥이 되어 살고 있다
나는 밥을 먹고 거대한 우주의 밥이 된다
밥을 먹을 때는 잠시 포만감을 느끼지만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진다
포만감은 밥의 기표가 아니다
포만감과 배고픔은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배고픔에 속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먹히는 걸 좋아한다
밥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도 구름도 모두
나의 밥이지만
나 역시 그들의 밥이다
밥은 일방적으로 먹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배고프므로 밥을 먹을 뿐
태양이 내 입속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나오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내 속에서 밤과 낮이 교차할 때
배가 고픈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단지 밥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