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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통합을 위한 해체
― 함기석『뽈랑공원』(랜덤하우스)
이유(평론가)
1. 언어왕국의 위조지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언명한다. 아담이 언어를 명명하던 시대에는 언어가 탄생하는 시기로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곧바로 존재로 직결되는 언어가 탄생했다. 이 신화적인 세계는 언어와 존재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없었고, 어떠한 설명적 매개 없이도 언어 자체가 존재였던 시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낙원 상실 이후 인간 세계는 이성으로 구축되면서 사물과 언어를 유사성으로 묶어주는 신화적인 언어가 사라졌다. 사물이 자아, 너와 나의 간극을 생성하는 이분법이 탄생하면서 인간에게는 관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식적인 매개가 있으므로 언어도 가치판단의 척도가 된 것이다.
원시인은 언어가 없었으며, 원주민의 언어도 최소한의 단어만이 필요했다. 1980년대의 ‘자유’와 지금의 ‘자유’가 다르지만, 오히려 원주민에게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자유’라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삶 자체가 언어이고, 사냥도 하나의 놀이이자 생존본능이었으므로 언어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양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몇 개의 언어로써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다.
함기석의 제3시집 <뽈랑공원>은 언어왕국의 위조지폐와도 같은 시집이다. 아담이 말하면 시원적인 언어가 되듯 함기석이 호명하면 언어는 바로 존재가 되고 본질이 된다. 그러나 함기석의 시는 의미가 함량 되어 있지 않고 의미를 내장하고 있지도 않다. 화폐가 공공의 제도 속에서 제대로 쓰이려면 조폐공사에서 찍어낸 화폐여야 하듯 함기석의 시는 공준의 질서를 무시한 위조화폐이다.
심각은 베란다에서 천천히 팬티를 내리고 있다
마주 쳐다보고 벙글거리면서도 외로운
불알 두 쪽
말과 그림자
시간의 정액이 얼음덩어리들이 공중으로 떠간다
공원엘 열애 중인 꿀벌 두 마리
접시꽃 카페에 앉아 호로록 냠냠 핏빛 꿀차를 마신다
말 오줌 소릴 내며 바람이 지나간다
네 발 달린 신부가 지나간다
웃음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지나간다
심각은 심각한 털을 뽑고 있다
가랑이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이상한 문장을 읽고 있다
문지르면 자꾸만 딱딱해지는
건드리면 자꾸만 탱탱해지는
이 야구 방망이 문장이 날린 홈런볼 사생아들을 생각한다
낙태된 세계 낙태된 사물들을 생각한다
농담은 인체에 붙은 코야 숨구멍이야
스트라이크 존이야
심각은 랄랄랄 나의 콧구멍을 향해 포크볼을 날리고
네 발 달린 신부 만나러
밤꽃 흐드러진 공원으로 간다
알몸의 근육질의 저기 저 정액냄새 풍기는 너도밤나무
밑에는
이 한 줄의 심플한 통통처녀
깐다 깐다 깐다
허벅지 옆의 하하하 옆의 요코하마 옆의 불알 든 밤송이
-「핫도그 리그」전문
함기석의 시는 기존 공준의 규칙을 벗어나 있어서 문법의 궤도에서 유통될 수 없다. 기본의 자본 궤도에 따라 순환할 수 없는 위조화폐처럼 기존의 범주 밖에 있다. 위조화폐는 금방 들통 나지만, 엄연히 하나의 형식으로 존재해 있듯이, 함기석의 시도 순간순간 뒤바뀌며 변전의 쾌감을 주며 제도권 밖을 돈다. 해체라는 한 양식으로 존재는 하지만 기존의 언어 규칙을 준수하려는 부류들이 보기에는 가짜이다. 위조지폐는 사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거운 모반이며 혁명적 자유를 구가하며 실제의 체계에 반란을 일으킨다.
사유가 먼저 앞서면서 시가 따라 나온다. 현재는 이미 사유가 앞서 돌아가며 시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아와 타자의 문제가 이율배반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먹는다는 생각이 실제로는 먹지 못하는 철저히 왜곡되고 관념으로 파편화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몸은 여성, 막대는 남성이라는 세계는 진실이 아니며, 때로 먹히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반복과 번복을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는 타자이나 다른 곳에서는 주체가 될 수 있고, 장소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끝없이 반복한다. ‘탈중심주의’라는 담론이 제기하듯 어디에서도 중심이 될 수 없다는 후기산업사회라는 현대적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2. 언어의 간극
신화적인 세계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간극이 없었다. 심리학자로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꿈은 진실이고 인간의 원초아에서 분화된 자아가 본질이라고 했다. 억압된 본능이 꿈으로 나타나며 무의식은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또 하나의 자아를 표현한다. 그래서 꿈이나 신화 속의 언어에는 간극이 없지만, 초자아를 거느린 인간은 객체아(사회적 자아)와 주체아(내면적 자아) 사이의 크나큰 간극이 있다. ‘발자국’이나 ‘양수’가 문학 속에서 관념(삶의 발자취, 태초 등)을 만들고 있듯이 덧씌워진 하나의 관념이다. 이 같은 관념이 바로 언어의 폭력이다. 함기석은 기존의 언어체계로부터 벗어나서 놀이의 대상으로 삼은 기존의 언어체계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횡포를 발휘했는지 보여준다.
저것이 상자인지 사체 보관함인지
저것이 욕조인지 유골 항아리인지
저것이 변기인지 우체통인지 난 모른다
새로 나온 고양이 전용 세탁기인지
새로 나온 신사용 거들인지 난 모른다
어쨌든 누군가
난 석기함을 입는다 말하면 이것은 옷이 된다
난 석기함을 읽는다 말하면 이것은 책이 된다
난 석기함을 피운다 말하면 이것은 담배가 되고
난 석기함을 먹는다 말하면 이것은 음식이 된다
한 마리 붕어빵이 되고 맛있는 찹쌀호떡도 된다
(중략)
석기함은 무엇인가? 당신이
거울을 통해 석기함을 만나면 그것은 당신이 되고
생의 종점에서 석기함을 만나면 그것은 죽음이 된다
석기함은 과연 무(無)엇이고 어디 있는가?
그것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짐승인지
하나의 실체인지 유령인지 허깨비인지
하나의 혼돈인지 꿈인지 환각인지 착란인지 난 모른다
그래서 요즘 나는 석기함에게
발이 시려운 편지를 쓴다
석기함으로 맛있는 요리도 해먹고
석기함으로 맛있는 목욕도 한다
석기함에 누워 달콤한 꿈을 꾸기도 하고
석기함과 함께 놀이동산에도 간다
-「석기함」부분
함기석은 “석기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함기석’이란 언어는―적색 신호등은 ‘서시오’ 녹색 신호등은 ‘가시오’에 불과하듯이―이미 기호로써 전락해버린 존재에 불과하다. 더 이상의 사유는 없고 사유할 틈도 없다. 보편화된 기호인 교도소의 수인번호나 자의적 기호인 주민등록번호, 차량번호가 그렇듯이 복잡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붙여진 기호이다. 함기석이 이름을 붙이면 ‘석기함’은 출현하고, 뽈랑공원을 호명하면 ‘뽈랑공원’이 나타난다. 판타지 형식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재조합된다. 아담은 시원에서 사물의 실재를 명명했지만 함기석은 언어와 언어의 간극을 뚫고 들어간다.
함기석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다음의 시를 보자. “형사가 들어와 수갑을 채운다 당신을 살인죄로 체포하겠소 당신은 어젯밤 꿈속에서 한 여자를 살해했소 자신을 목격자라고 밝힌 저 벙어리 아이는 당신의 꿈속에서 왔다고 했소 난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꿈이오 당신은 당신조차도 모르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오 그건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오 사진들을 보시오 모두가 조작된 게 분명합니다 나도 이 불결한 꿈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오”(「낯선 방문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함기석은 꿈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는다. 곧 꿈이 진실이고 현실이 가면이기 때문이다.
3. 통합을 위한 해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인이자 작가였으며 논리학, 정치학, 자연과학까지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학자였다. 이처럼 함기석도 단편적이지 않은 측면에서 하나로 통일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언어를 허물고 새롭게 접속시키면서 이성으로 축조해온 인간 중심, 기계 중심, 물질 중심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 똑같이 통합된 세계를 꿈꾸는 언어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함기석은 기존의 이성적인 언어로는 통합된 세계를 꿈꾸지 못한다. 신화적 언어 이전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에 위반의 언어를 구상하고 있다.
멋쟁이 불독 점프가 높이뛰기 선수를 끌고
빈칸 놀이동산으로 산책을 나간다
밟으면 피아노 소리를 내는 펭귄 블록들
머리를 노랗게 볶은 물음표 소년 갸우뚱이 지나간다
한 손엔 솜사탕
한 손엔 포도 주스보다 맛있는 깔깔웃음주스
안녕 점프
안녕 콩나물
어린 글자들이 지나간다
몸이 투명한 글자들이 인라인스케이트 타고 지나간다
(중략)
폭포수 광장 점핑 놀이기구에서 아이들이 논다
허공과 논다
점프도 점프하며 공기들과 논다
높이뛰기 선수도 점프해 여우구름에게 꽃을 전하고
글자들도 논다
명사들은 돌고래 점프
동사들은 벼룩 점프
부사들은 방아깨비 점프
(중략)
반짝반짝 흔들흔들 빛의 꼬랑지들이 웃는다
말랑말랑 허공엔 피아노 발자국 투명 음각으로 남고
모나리자 아랫배 아래에서
아름다운 물들의 노랫소리 흘러나온다
-「높이뛰기 선수를 위한 말랑말랑한 피아노곡」부분
인용시의 특징은 명사, 동사, 부사들로 고정된 문자의 세계를 일거에 와르르 무너뜨리고 있다. 문법적으로 고착화된 기존의 문법체계를 무너뜨리며 유쾌하게 놀고 있다. 축제에서는 모든 것이 용인되어 본능대로 행동해도 허용이 되듯 문법의 중력에서 일탈하여 의미와 사유를 떠나 즐겁게 놀고 있다. 모든 관습과 편견의 더께가 녹아내림으로써 기존 이성적인 의미망들이 구축한 세계를 위반하고 있다. 서정시, 리얼리즘시, 모더니즘시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며 세계를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함기석은 리얼리스트나 모더니스트들의 문명을 슬기롭게 극복해가려는 의도 자체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거울이 깨지면 복원이 불가능하듯 해체주의자에게 현실 세계는 복원불능한 실재인 것이다. 단지 즐겁게 신화세계로 환원하여 해체하면서 함께 즐겁게 놀고 있다. 경쾌하고 리듬감 있게 문자들이 시소를 타고 있으며 기존의 심각한 세계들이 만들어놓은 경계선을 “아름다운 물들의 노랫소리 흘러나”오듯 부드럽게 무너뜨리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들이 한판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의미 있는 시가 하도 지겨워
의미 없는 방정식을 푼다
내가 기호들과 즐겁게 노는데
창가로 팡새가 날아와 앉는다
주머니 달린 빨간 조끼를 입고 있다
선물이야 주인아저씨 몰래 훔쳐왔어!
새는 과자로 만든 시계를 꺼내 건네준다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발을 꺼내 건네준다
나는 시계를 먹으며 창밖을 본다
파스칼 아저씨네 과자 가게가 보인다
토마토 모자를 쓰고 과자를 굽고 있다
과자들은 모두 숫자로 되어 있다
가게 안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생각도 갈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방정식을 푼다
시계를 먹으며 발을 먹으며
맛있게 맛있게 방정식을 푼다
시간이 새콤달콤 녹아내린다
두통이 살콤살콤 녹아 사라진다
나는 계속 방정식을 푼다
그런데 아무리 풀어도 해답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해답인 방정식
그런데 그것이 해답인 나의 삶
-「파스칼 아저씨네 과자 가게」전문
함기석은 파스칼(Pascal Blaise)의 ‘팡세(Pensees)’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거운 관념과 철학, 상상적 사유마저도 자본의 욕망과 결탁해 있는 현실을 마음껏 신나게 가볍게 조롱하며 넘나들고 있다. 팡세 속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방정식을 풀고 있는데, 피앙세(fiancee)가 나타나 “과자로 만든 시계”를 준다. 시간마저도 수치로 계량화된 근대의 시간도 먹어치우는 것이다. 화자는 과자를 먹으며 파스칼 아저씨네 가게를 들여다보지만 “생각도 갈대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인생의 방정식은 해답이 없는 것이 해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4. 언어의 복원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면서 언어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몇 개의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언어가 양적으로 팽창했다고 해서 언어가 발달했다고만 볼 수 없다는 것이 함기석 시의 논리이다. 함기석의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시원적인 언어로의 복원 의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 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하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본다
수학 선생도 사회 선생도 국사 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하모니카 부는 참새」전문
함기석의 시세계를 가장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시로서, 여기에서의 참새는 의미 없이 하모니카를 불지 않는다. 참새는 이성에 의해 관념화된, 물화된, 개념화된 세계를 흔들어 깨우는 존재이다. 현실의 완고한 수학, 사회, 국사로 구획된 현실을 하모니카의 부드러운 음률로 녹여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타자 자체가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풍경을 갈구한다.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로 함기석의 해체는 신화적 언어의 세계가 현현하길 갈망한다.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닌 언어를 신성성의 세계로 환원하려는 해체인 것이다. 현대는 극단적으로 세분화된 한 분야에서 전문적이기를 지향하며 연구 발표해야 인정받는 시대이다. 다른 분야까지 접근하면 자본주의 관점에서 낭비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 세계 자체가 모순이라는 사실을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 객체를 따지는 자체가 무의미하며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통해 신화적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이 문장은 오동나무 관이다
뚜껑을 열면 친구의 주검이 보이는
앞의 문장을 싣고 나는 화장터로 가고 있다
장의 차 바퀴에 말과 생이 휘감긴다
(중략)
인간의 최초의 생존 도구이자 마지막 살인 도구인
공기
죽은 자들의 뼛가루가 떠내려간다
1연과 2연 사이로 흐르는 저 무자비한 강물
2연과 2연 사이로 펼쳐진 저 천태만상 대지
저 보이지 않는 저 표현될 수 없는
행 속으로 행 속으로
행 속으로
-「공기놀이」부분
인용시에서 함기석은 ‘공기’와 ‘문장’을 동일화하여 이것들의 유무에 따라 생존의 징표와 죽음의 장소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 특히 시인은 문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함기석이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부정하고자 하지만 낯선 언어의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인은 신과 마찬가지로 욕망과 다르지 않으며, 언어와의 합의를 꿈꾸는 최초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고자 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은 불행하지만, 그 참혹한 운명의 형식으로써 시인은 비장하게 분투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함기석의 제3시집은 궁극적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에 이르자는 것이다. 사물과 인간을 근원적으로 묶어주는 것을 상실한 시대의 잃어버린 언어를 회복하려는 것이 시인의 열망이며 창조적인 활동이다. 기존의 언어는 공동체를 떠받치고 선․악을 규정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양심이고 도의적인 책임으로 공준의 언어, 공공의 언어이다. 함기석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규칙을 위반하고 어김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위악적인지를 공포하고 있다. 함기석은 매우 건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수학교사이다. 제3시집 <뽈랑공원>을 통해 그의 정신세계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면 “만약에 태양이 만약이라는 노란 환각제 알약이라면” 같은 비논리 속에 정확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