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金海) 일원 문화유적 탐방 안내
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 사적 제73호, 경남 김해시 서상동. [대구 대공원역에서 80km, 1시간 10분]. 원형봉토분으로서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른다. 이 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소재지와 위치가 부합되고 있어서 수로왕릉으로서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왕릉은 신라말 이 지역 호족인 충지(忠至), 고려시대 양전사인 조문선(趙文善)과 관련한 기적(奇蹟)을 보였던 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80년(선조 13)에 경상도관찰사였던 허엽이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능비를 세웠는데 '가락국 수로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로왕릉을 도굴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광 속이 무척 넓고 두골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매우 컸다. 널 옆에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되었다. 이것을 광 밖에 내다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순장된 사람들일 것이다"라고 하여 순장묘일 가능성을 짚고 있다.
1878년(고종 15)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김씨·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했다. 이 때 안향각(安香閣)·석양·비각 등이 설치되었으며 왕릉의 전면에는 가락루·연신루·회로당 등의 건물도 있다. 능역은 건물 15동 47칸, 임야 1만 5,170평이다.
수릉원(首陵園)-경남 김해시 봉황동. [김수로왕릉에서 312m, 1분]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과 황후 허황옥(許黃玉)의 만남을 테마로 수로왕과 허황후가 거닐었던 정원을 구상하여 조성하였다. 동쪽 구릉의 산책로는 수로왕을 기념하여 남성적인 분위기를, 서쪽은 유실수를 심어 허황후를 위한 공간으로 연출하였으며, 정문 입구의 연못은 해상왕국인 가락국을 표현하였다. 경내에 허황옥 동상, 김해민속박물관, 오래된 차나무인 장군수(將軍樹) 등이 유명하며 가까이에 김해한옥체험관이 있다.
김해한옥체험관-경남 김해시 봉황동, [김수로왕릉에서 229m, 1분] 우리고유의 전통 한옥생활을 체험하고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김해한옥체험관이 봉황동 425-13번지 일원 4,125㎡의 부지위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김해한옥체험관은 안채 및 아래채, 별채, 사당, 행랑채, 바깥채, 헛간채 등 모두 7동의 전통 한옥으로 구성되어 우리 고유의 주거문화에 대한 폭넓은 체험을 할 수 있으며, 한 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안채와 아래채에 4인실 5개, 2인실 3개의 숙박 체험관이 마련되어있는 것을 비롯해 사랑채에 4인실 3개, 별채에 고급 2인실 2개 등 모두 13개의 숙박 체험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행랑채 등에는 전통한식을 맛볼 수 있는 전통식당과 전통찻집이 들어서 있어 풍요로운 먹거리 문화를 마음껏 향유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한옥체험 외에도 고유의 정원과 장독대, 곳간, 지게 등 민속품 전시와 함께 전통 한식당, 세미나실, 찻집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춰 체험효과를 증대하게 됩니다.
한옥체험마을은 전통 한옥생활을 체험해 보고 싶은 국내 외 관광객들의 신청을 받아 직접 숙식을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며, 특히 체험관 곳곳에 전통정원이 꾸며져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고 즐길 수 있어 가족단위 숙박체험 뿐만 아니라 각종 워크샵, 연수 등의 장소로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대성동고분박물관(大城洞古墳博物館)-경남 김해시 대성동, [김수로왕릉에서 832m, 3분]. 본 박물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4차례의 발굴조사로 출토된 자료들을 전시하여 소개함으로써 역사 속에 가려져 있었던 금관가야의 실체뿐만 아니라 이곳이 금관가야의 중심지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장이다.
대성동고분군은 지배층 분묘군으로 지석묘를 비롯하여 토광묘, 목관묘 등의 가야시대 여러 형식의 분묘가 발굴되었다. 구릉지대에는 4~5C대의 고분이, 구릉주변의 평지에는 1~3C대의 고분이 밀집하여 분포되어 있다. 이 대성동고분군은 김해를 중심으로 성장한 가락국의 실체를 규명하는 획기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통형동기·파형동기(가죽제 방패의 장식)·벽옥제 방추차형 석제품·벽옥제석촉·석제품 등의 유물은 고대 한일간의 문화 교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또한 목곽분의 전통, 호형대구, 청동항아리(동복) 등과 전형적인 북방계 기병용종세판혁철갑(騎兵用縱細板革鐵甲)등은 우리문화의 원류에 북방계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들로 우리 민족문화의 기원 및 전파 경로를 추측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박물관은 지상 1층의 전시실과 지하 1층의 부속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상 1층 3개의 전시실에는 도입의 장, 개관의 장, 고분의 장, 교류의 장, 문화의 장 5개의 전시공간을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철을 기반으로 성장한 가락국의 기상을 이미지화한 철제 갑옷과 철기로 무장한 무사상과 기마인물상을 전시하고 있는 개관의 장과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을 통해서 당시 가락국의 대외적인 교류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교류의 장은 잊혀진 제4의 제국 가야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특히 예안리 고분군 출토 인골을 토대로 하여 복원한 1:1크기의 기마무사상과 고대 장례시의 모습을 고려하여 복원한 무덤모형과 유물모형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영상과 디오라마 전시기법을 위주로 한 점이 본 박물관의 특징이다.
김해봉황동유적(金海鳳凰洞遺蹟)-사적 제2호. [김수로왕릉에서 824m, 3분].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높이가 7m,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인접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을 통하여,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철기가 이미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철기 이외에 골각제품(骨角製品)으로서도 골촉(骨)·골침(骨針) 등과 송곳 같은 찌르개류[尖頭類]가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토기는 종래의 민무늬토기보다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든 발달된 경질(硬質)의 토기로서, 그 특색은 문살무늬나 삿무늬 등의 타형(打形)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타형무늬는 토기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특히 후일에 와서 신라토기(新羅土器)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시신라토기라고도 한다.
1920년의 발굴 때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의 돈인 화천(貨泉) 1 개가 나와 이 패총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밝혀졌고, 또 함께 발견된 탄화미(炭化米)는 한국의 벼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뒤 34~35년의 발굴을 통하여 한 무리의 돌널무덤과 그 옆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개의 옹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남방식 고인돌[南方式支石墓]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있다.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는 2001. 2. 5일 회현리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국립김해박물관(國立金海博物館)-경남 김해시 구산동, [김수로왕릉에서 1.6km, 6분]. 고대국가의 하나인 가야(加耶)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1998년 7월 29일 개관 되었다. 가야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깃든 김해시 구지봉(龜旨峰) 기슭에 자리 잡은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의 문화재를 집약 전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시대의 문화상과 가야의 성장 기반이 된 변한(弁韓)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가야는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유물·유적의 발굴을 통해 가야사를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립김해박물관은 다른 국립박물관들과 달리 고고학 중심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 되어 있다.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경남 김해시 구산동(龜山洞), [김수로왕릉에서 1.4km, 6분].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며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다. 허왕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 성이 유래되었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되어 왔다고 한다.
■허왕후의 등장은 앞선 철기문화로 세계와 교류했다는 가야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48년 7월 27일에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답하며 해안 쪽으로 사람들 보낸다. 그 때 갑자기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한 척의 배가 다가온다. 왕은 신하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려 하지만 배 안의 왕비는 모르는 이를 따라 갈 수 없다 한다. 그러자 왕은 대궐 밖에 장막을 치고 기다린다. 왕비도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바친다.
왕비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 한다.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인데 부모님들께서 꿈에 상제님을 보았는데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라고 하여 가락국으로 오게 된 사연과 배를 타고 오다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다시 돌아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후 허왕후는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해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허왕후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쌍어문(雙漁文)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 쌍어문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여겨 사용하던 문장이다. 이후 인도에 전파되고,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하나가 되어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이 된 것은 허왕후가 이 땅에 시집오며 소개한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 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지금도 가야의 옛땅이었던 경남의 여러 불교사원에는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 한 여인의 국제결혼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봉화마을). 진영 봉하마을은 진영읍내에서 동부쪽으로 4.5km 떨어진 봉화산(해발140m)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영단감과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峰下)마을"이라고 불리며, 봉화산에는 정토원이라는절과 마애불이 있으며, 산정상에는 사자바위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마을 인근 화포천은 자연습지하천으로 68종의 많은 조류와 16종의 다양한 식물군락이 분포하고 있어 생태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故 노무현 대통령 생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문과 의견을 반영해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2009년 9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생가는 전통적인 시골 초가집 형태로 11평 규모의 본채에는 방2칸과 부엌이 있고 4.5평인 아래채에는 헛간과 옛날식 화장실이 있다. 생가를 찾은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생가 입구에는 생가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도 들을 수 있다.
■ 귀로. 노대통령생가에서 대공원역까지는 75km, 1시간 8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