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문보기 글쓴이: Next Paul Scholes No18
한 때 우리에게 익숙한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으로 존재했으나 지금은 어디서 존재하는지 관심도 없는 마가트는 0809시즌 볼프스를 깜짝 우승시킨 감독이다. 그리고 샬케04 감독으로 떠났다. 1516시즌 볼프스는 디터헤킹의 지도하에 2위를 찍고 올시즌도 순항중이다. 귄도간이 한 때 머물렀던 팀의 감독으로서 큰 영향을 주고 도르트문트에 450만 파운드 팔렸던 전례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 감독의 지도력은 정말 우수하다. 니주 작센주라는 얼마 안되는 인구수지만 자동차 노동자들의 열혈과 같은 지원으로 세워나가고 있는 볼프스부르크는 오늘날 대부분의 큰 경기장의 관중동원수의 얼마 않되는 배수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지역 인구수 12만명, 정말 작다.
1. 마가트란 놈
마가트의 훈련방식은 흡사 프레이센이 왕국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연상시킬 만큼 충분히 위협적이고, 근면하고, 성실한 반면, 선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만큼 선수 훈련방식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다는 면에서 가는 팀마다 많은 불화를 일으키고 떠난다. 그렇다고 그가 명장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초기 사키의 태동기에 일어났던 여러 명장들의 지도방식의 우수성과 비교해도 그만의 훈련 방식은 생각만큼 현명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 볼프스 부르크 시절 마가트 ]
[ 재부임후 다시 경질되고 1년 넘게 무직이었던 그는 풀럼에서 다시 감독 생활을 하지만 결론은 또 경질이다. ]
지도 경력과 선수 훈련 방식
그의 지도자 경력을 보면 그 면면은 화려하다. 특이하게도 그는 단장과 감독을 겸임하는 조건을 감독으로 부임할 때마다 원칙처럼 내세운다. 감독 경력 초반 그의 능력은 독일의 여러팀에서 1부리그로 승격시키는 능력에서 빛을 드러냈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감독 인생에서 뉘른베르크를 승격시킨 것부터 비롯해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에 이어 유스를 데리고 분데스 준우승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뮌헨으로 부임한 시절부터 최근의 볼프스부르크에 이르기까지 팀의 승격이나 잔류에도 도가 트고, 뮌헨외에는 우승의 경력이 볼프스의 0809시즌말고 내세울 것 없지만 그래도 우승컵을 3번 들어올린 감독의 경력은 명감독의 기준에서 최소 a급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가트는 명장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럴까.
아차~ 함부르크는 그의 코치시절 경력이고 뉘른베르크 이전 시절이다. 그는 감독이기 이전에 선수시절 함부르크의 레전드여서 바로 선수시절 팀의 코치직으로 경력을 시작한 것 같다. 내용을 수정한다. 하지만 그가 수석코치를 맡은 시즌은 9394시즌부터고, 그 이전엔 단장으로 8687시절을 보내기 시작한다. 정말 특이한 인물이다.
여하튼 그가 명장이라 불리지 않고 오히려, 괴팍한 성격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선수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의 이름인 펠릭스 대신 괴롭히다는 독일 말의 합성어로 퀠릭스로 불리는 이유는 독재자스런 운영방식과 선수들의 강압적인 훈련 내용은 다들 싫어했던 마가트의 성향이다.
[쾔릭스 마가트] Qualix :: 괴롭히다 라는 뜻 qualen과 Felix의 합성
[ 문제가 많던 그의 지도방식은 펠릭스가 아닌 쾔릭스 마가트대신에 사담으로도 그를 별칭하고 있다. ]
마가트의 선수훈련 시간은 반나절 이상이다. 그리고 그 훈련에서 체력적으로 버티지 못한 자는 아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에게 주입한 전술이 도르트문트의 게겐프레싱만큼 체력 싸움과 압박을 요할 정도로 용이한 전술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는 그만의 우직하지만 또 아첨에 가까운 복종을 선수에게 강요하는 방식으로 팀내 모든 사생활과 선수의 자율을 제한하고 있을 뿐이다.
2. 마가트의 성적
0708시즌 볼프스부르크에서 감독과 단장직의 권한을 부여받고, 5위로 팀순위를 마감한 다음, 이듬해엔 전방의 공격부대의 강력함으로 분데스의 우승을 이끈다. 당시 잠재력이 터지기 시작했던 선수 중에는 우리가 잘아는 에딘 제코가 있고, 그라피테와 미시모비치가 우승컵을 들어올린 삼인방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독 시절 우승은 오히려 그의 경력을 깍아먹는 원인이 되고 있다. 뮌헨시절 0405시즌과 0506시즌 리그 우승하며 포칼컵을 우승하는 등 2시즌 연속 더블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항상 팀이 추락하는 롤러코스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이런 패턴은 뮌헨에서도 지속되었고, 그 이전에도 드물지 않게 봐왔던 행보이다. 강력한 스쿼드를 자랑하던 뮌헨 선수들을 두고도 3년차에 팀 성적은 곤두박질치고, 챔스 대신 명문클럽이 유로파리그를 뛰면서 결국 경질되었던 마가트다. 요즘 무리뉴가 겪고 있는 징크스의 3년이다.
[ 볼프스 부르크 리그 우승 ] [ 마이스터 샬레(우승방패) 들고 ]
[에딘제코와 그라피테의 0809 시즌 ]
그래서인지 볼프스를 리그 우승시켜 놓고 바로 샬케04로 이적해버린다. 슈투트가르트에선 3년까지 머물며 능력을 인정받아 뮌헨에선 2년차까지 성적을 냈고 3년차에 몰락한 그의 행보는 나름 리그서 강팀이었던 샬케04에 부임하자 마자 팀을 말아먹는다. 그를 강등권에서 구출한 선수는 공격수도 아니고 수비수도 아니고, 노이어였다. 어린 나이에 주장완장을 찰 정도로 상대팀 슛팅을 선방하면서 팀을 구해낸 헌신은 현재 뮌헨으로 이적하는데 가장 큰 디딤돌이었고, 그의 강제 렙업 시절이었던 펠렉스가 펼친 전술운용의 수혜처럼도 보인다. 펠릭스의 전술은 무용론으로 흐르는 시점에서 노이어의 역할은 최후방 수비수였다.
마가트는 점점 그의 마법이 팀을 옮길 때마다 짧아지고 훈련 방식의 문제 뿐 아니라 1년차에서도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분데스리그에서 강등권 팀을 구출했던 능력 또한 반대로 흘러갔다. 샬케04의 강등은 노이어가 막았지만 프리미어 리그의 풀럼 감독에 부임했을 때 그의 막장스런 팀 운용은 오히려 팀의 강등을 부추겼다. 그리고 현재 그는 어떤 클럽에서도 찾지 않는다.
최근 게시판에 중위권의 무리뉴, 하위권의 무리뉴는 무리뉴란 우스개 소리를 보며 마가트가 생각났다. 분명 그 동안의 성적을 볼 때 경력상으론 화려하지만 그의 괴팍한 성향은 무리뉴처럼 마법을 부리는데 보증수표가 아니다.
무리뉴 2년차 이후보다 더 짧았던 그의 몰락은 분명 위에 언급했듯 선수기용부터 문제다. 아차 슈투트가르트는 3시즌 연속 감독에 있었으니 그건 제외해야 하나. 암튼 강등권 언저리에 머문 슈투트가르트의 1부리그 사수에 공헌하고, 담시즌인 0203시즌엔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듬해에 팀을 4위로 마감시키고,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히츠펠트에 이어 뮌헨의 감독으로 부임한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의 능력이 딱 거기까지란 것이었다.
[ 우승 후 맥주세례 ]
[뮌헨에서 연속으로 더블을 달성했던 시절의 마가트와 발락]
[분데스에서 영원히 안녕~~~]
볼프스를 우승시킨 것과 슈투트가르트를 우승권에 안착시키는 동안 그는 어린 선수들을 잘 키워내는 수순에선 그의 지도 방식을 주입하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당시 슈투트가르트에는 흘렙과 힐데브란트 쿠라니가 있었고, 2000년대 후반 반할이 오기 전까지 뮌헨에서 사용법을 알지 못해 헤매고 있었던 필립 람을 임대하면서 풀백으로 기용하고 팀을 재구성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한 부분은 그가 장기집권으로 갔다면 괜찮았을지 몰랐던 시절의 일들이었다. 그렇다고 반할처럼 선수의 폼을 살린거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만의 훈련 방식을 통해 자기 말만 잘 들으면 기용하고, 반항하면 제외시키는 수순이다. 감독의 무소불위는 선수의 폼과 무관했다. 이런 부분이 반할과는 어떻게 다를까.
3. 반할과 마가트의 선수 기용 방식과 그 후로 오랫동안 지속된 후폭풍의 차이.
마가트의 지도력이 반할과 대조되는 부분은 그가 낸 성적 대부분이 오래 가지 못하고 망가진다는데에 있었다. 사실 반할과 마가트를 비교하는 건 정말 하늘과 땅차이다. 마가트는 선수들과 팬들의 비난을 받지만 반할이 시즌 내내 팬들과의 대립을 가져가면서도 오랜 기간동안 반할이 명장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부분은 성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떠난 다음에 부임하는 감독들이 반할의 스쿼드와 재구성된 포지션을 물려받아 극강의 전력을 구가하고 있다는데에 있다.
[ 맥주를 뿌리며 ]
[ 뮌헨 시절 반할 ]
그가 부임했던 팀들의 수준도 마가트가 8팀을 분데스에서 전전했던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네덜란드의 아약스와 스페인의 바르샤, 이후 잠깐 침체기를 겪는동안 알크마르에서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다음 독일의 뮌헨에서의 행보와 최근에 부임한 맨유에 이르기까지 그가 거쳐간 팀들은 그 후로 오랫동안 극강의 전성기를 유지하는데 큰 틀을 마련했다고 보여진다.
마가트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강팀이든 약팀이든 부임하는 곳마다 선수단과 갈등이 연출되고, 그렇다고 구단이 그를 믿어주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그는 감독과 단장의 전권을 위임받기만 원하는 떼쟁이로 팀일 이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전술이 나름 리그에서 효용성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가 팀을 재건하는 것에도 분명 일관적인 전술과 철학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무리한 훈련방식은 끊임없는 압박으로 일관된 전술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팀 훈련 방식의 많은 부분에서 기용의 일관성을 잃어버렸다.
분데스에 있다 유일하게 이피엘로 들어와 풀럼 감독으로 재임했지만 곧바로 짤리고, 팀은 강등당하는 걸 보면 그가 이전까지 보여준 강등의 소방수 역할이 리그에 한정된 능력일지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품게 된다. 모든 감독에게 적용되는 룰은 아니지만 마가트를 보면 리그수준을 고려해서 감독의 능력을 평가해 할 필요가 있다.
마가트가 볼프스부르크로 다시 재임했던 시절을 보자. 팀의 강등을 구해주는 대신에 그는 또 다시 감독과 단장직의 권한을 요구한다. 그리고 더블 스쿼드를 구축한답시고, 4명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중앙 미드필더를 8명이나 사오는 경악할 짓을 하고 말았다. 더블의 더블 스쿼드를 중앙 자원 구입에 소모한 마가트의 행동은 떨어질대로 떨어질 볼프스의 사정과 무관하다. 로테와 주전, 유스를 골고루 쓰면 리빌딩의 완성은 4명이면 충분한데, 누가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기존 자원까지 포함하면 중앙 자원은 10명이 넘는다. 구자철은 거기에 희생양되고, 결국 마가트는 팀을 강등권에서 구해냈지만 이듬해엔 또다시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된다.
[라울을 영입했던 샬케 04 시절]
[ 구단주와 마찰이 심했다. 성적 부진의 결과 그는 경질되었다. ]
기이한 행적은 반할과 비슷하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이 바르샤로 재부임했던 0203시즌의 반할을 통해 본다면 마가트의 행보와 비교할 수 있다. 마가트가 남기고 간 스쿼드를 전부 바꿔버린 디터헤킹의 지도력과 달리 반할이 남기고간 전술과 선수의 유스 기용의 유산은 레아카르트에 이어 펩에 이르기까지 그 기틀을 모두 마련하는데,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졌다.
푸욜의 포변과 인혜, 사비의 1군 출전을 결정한 이도 그였고, 그가 떠난 후 패스에 의한 크루이프이즘이 발전되가는 시절을 같이 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가 바르샤에서 리빌딩을 하는데 확실한 철학과 능력, 전술이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껏 반할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철학의 완성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기다림이 퍼거슨 부임후 5년이란 시간처럼 길다면 어쩌면 반할이 추구하는 전술의 완성이 극강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이 될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명문이란 클럽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시간을 주지 않는다.
바르샤에 재부임했던 0203시즌 시절 성적이 10위권밖으로 나갔던 최악의 시절 그를 경질했던 사례를 생각하면 알크마르에서 성적이 곤두박질 칠 때 그의 사퇴의사에도 불구하고 구단과 팬들이 일부 선수들이 만류하면서 유임된 다음시즌에 PSV 와 아약스, 폐예노르트를 제치고, 에레디비지에 우승을 차지하는 결과를 보여줬을 때 감독을 믿는 건 팬들과 선수들과 구단의 몫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런 반전이 가능했던 건 반할이 부임한 알크마르는 바르샤와 뮌헨이 아니라는 것이다. 9192시즌 감독 부임 초에 아약스를 3차례 리그 우승에 올려 놓으며 97년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갔던 그의 경력은 바르샤에서도 몇 시즌간 증명되었고, 이후 네덜란드 국대감독으로 몇년 있다 다시 재부임시가 그의 흑역사인 점을 제외하면 딱히 그의 경력에 뚜렷히 문제삼을 만한 점은 없다.
마가트는 그가 남긴 행적의 예후가 아주 좋지 않고, 선수들마저 그의 정책을 외면한다. 이 정도면 뛰어난 지도자와 그지같은 독재자의 기준으로 마가트와 반할을 비교하는데 충분하지 않을까.
분명 독재자의 색채는 둘다 존재하지만 쓸데없는 훈련방식으로 일관한 마가트는 선수단의 반발을 이끌어낸 반면 반할은 그를 존경하는 감독과 선수들이 무수하다. 이 차이점은 아첨을 좋아하는 왕과 충언을 좋아하는 왕이 가는 길이 다른 것처럼 분명한 판단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철학과 그에 부합된 선수들의 세밀한 분석이다.
[분데스리그 시절 아니면 보기 힘든 사진 ]
[ 반할과 마가트 ]
팀이 어려운 시기에 태동이 되는 유산을 남기느냐, 팀을 엉망진창 만들거나, 잠깐 성적의 유희를 내어주고, 이후의 감독에게 혼선만 주는 감독이 되느냐의 차이는 빚을 끌어다 호위호식하고, 바로 팀이 무너지거나, 아님 팀의 재건을 위해 당장 중요치 않은 선수의 발전을 팀의 성적에 무관하게 기용하느냐의 차이처럼 극명하다. 마가트는 초기에는 어땟을지 몰라도 2000년대 초반 맛보았던 성공의 실체에서 허상에 가까운 감독으로 전락하기까지 그의 성향과 전술은 이미 효용성을 잃어버렸다.
[마누엘 노이어 ]
[ 샬케04에서 개고생해서 강제 레벨업된 풋풋한 시절 ]
4. 자금을 무리하게 끌어다 쓰는 구단과 상업화를 이룬 리그에서 유스의 수준 저하
거부 구단주를 만난 첼시나 맨시티 정도는 아니지만 마가트가 머물렀던 볼프스부르크는 자금 지원이 빵빵 강소클럽이다. 최근 폭스바겐이 배출가스 조작으로 사상 최대 스캔들이 터지면서 주가가 폭락했지만 그 이전까지 선수 영입과 팀재건에 야망을 품고 있는 클럽이 볼프스부르크다. 그가 머문 팀중 비교적 빵빵한 지원이 가능한 클럽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해도 좋았으련만 자금이 주는 함정에 빠져 팀리빌딩은 안중에 두지 않고, 같은 포지션만 필요 선수의 2배를 사버리면서 그의 사이코스런 행보는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가 볼프스 부임초기에 보여주지 않았던 이런 행보는 무언지 이해하기 힘들다.
잠깐 마가트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와 관련없는 얘기를 하고자 한다.
사실 자금을 방만하게 운영해서 망한 클럽이나 2부리그로 강등된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클럽들은 심심치 않게 사례가 존재한다.
이피엘에서 포츠머스가 끌어들였던 천문학적인 영입액과 리즈의 리즈시절을 연상케 하는 과거 영입에 거액을 쏟았던 이후 팀이 망조로 갔던 사례는 90년대 후반 히츠펠트의 능력으로 세워진 도르트문트가 급격하게 치솟은 성적을 빌미로 선수이적료를 갱신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운영해 왔던 부분과 닿아 있다. 도르트문트가 2003년 부도의 위기에 몰렸던 걸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이런 식으로 클럽운영의 시도를 섣불리 하면 끔찍한 불상사가 벌어진다.
더욱이 도르트문트는 끌어다 쓴 자금은 챔스에서 성적을 보장하지 않는한 리그에서 아무리 파내도 클럽의 위상발전과 수입창출을 통한 자금 확보는 정말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중계료가 아주 균등하게 분배되고 상업화에 성공한 이피엘의 1부리그는 예외로 해야겠지만.
클럽의 명암은 갑부주를 만나 뜬 클럽에겐 축복이지만 반대로 리그의 발전은 역행하기 일쑤다. 현재의 이피엘의 유스 수준의 저하는 반대로 기량 미달 자원들의 인플레를 낳고 있다. 유스의 기량발전이 우선되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쏟아붓는 자금의 대책으로 홈그로운제도를 내세우면서 오히려 자금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는 기현상을 낳고 있다. FFP롤도 실효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 쯤에서 원빈의 말이 생각난다. 얼마면 돼.
5. 재정 수입과 지출에서 페어 플레이(FFP) 하지 못했던 도르트문트
[ 9798시즌 도르트문트의 챔스리그 우승 ]
원래 분데스리그는 2000년 이전까지 유럽에 몰아친 클럽의 상업화와 거리가 먼 행보를 유지해 왔다. 클럽은 비영리가 원칙이었고, 거기에 반했던 클럽이 도르트문트였고, 90년대 초중반 일찍 맛본 리그 우승과 챔스우승은 그 달콤함을 내내 유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고 클럽을 주식회사로 탈바꿈 시켰다. 오늘날도 레버쿠젠과 볼프스부르크를 제외하고 50+ 1의 지분을 비영리 단체가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원칙은 분데스리그에서 변함없다.
분데스리그가 젊은 아시아 축구 선수들, 특히 일본 선수들이 많이 진출하는 리그가 된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지킨 산물이다. 지역사회에서 기반한 클럽의 상업화를 막으니 그만큼 자금의 규모도 천문학적으로 투자할 수 없다. 종종 해외리그로 뺏기는 자원들은 클래스가 증명된 자원이라면 바이에른고 몇몇 클럽을 제외하고 유스들이 라리가와 프리미어 리그로 떠나는 리그가 분데스리그다. 유일하게 뮌헨만이 그러한 흐름을 거스르지만 최근 들어 클럽 소유에 대한 법이 바뀌면서 독일도 상업화에 점점 근접하고 있다.
[ 토마스 로시츠키 ]
[ 당시 뮌헨과의 영입경쟁에서 승리하고 창의력 좋은 체코 국적 선수였다. 그를 위해 영입했던 액수는 1500만 파운드. 참고로 로이스의 우상이자 롤모델은 로시츠키다. 로이스와 로시츠키는 동일포지션. ]
[ 얀 콜레르 ]
90년대 명문클럽으로 발돋움한 돌트문트는 이런 상업화에 다른 클럽보다 앞서 있었다. 챔스 우승이 준 달콤한 착각에 빠져 그나마 계속 생명 연장의 꿈을 이어간 0102시즌의 리그 우승은 이후 벌어질 최악의 상황에서 이룬 폭풍전야에 불과했는데, 그로부터 9년이 지나고 도르트문트가 우승하기 까지 클럽의 부침을 딱히 막을 수가 없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뮌헨과 함께 리그를 리드해 왔지만 이후 리빌딩에 난항을 겪고, 거액을 들여 영입했던 선수들의 줄부상이 이어지면서 챔스에서 고꾸라지고 리빌딩에 실패하면서 홈 경기장을 매각하고 주급을 5분의 1이상 삭감하는 절차를 거치는 등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프리미어 리그의 리즈 유나이티드의 전철을 밟게 된다. 주식회사로 상장한 만큼 클럽이 성적을 못내면 주가는 떨어지고, 동시에 주 수입원이던 챔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고 리그에서도 경쟁력을 잃으면서 방만한 운영은 끊임없는 적자를 생산해 05년도에는 부도상황을 맞이한다.
난 이명박 아저씨가 대통령 재임시절 본인을 대한 민국 CEO 라 할 때마다 얼마나 사기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가 말한 CEO는 요즘 보여지는 먹튀 기업을 의미한 거였던 거 같다. 망하든 말든, 본인의 호위호식을 위한 그런 CEO.
어쨋든 이 시기에 삼성이 도르트문트를 인수하네 마네 라는 루머가 돌았으며 실제 삼성은 첼시의 메인 스폰서로 0506시즌부터 10년간 쏟은 돈은 3000억원에 육박한다. 당시 도르트문트 인수 예상 금액은 정확히 3000억원 정도였다.
이런 루머가 신빙성있게 돌아다닌 근본적 원인은 도르트문트가 주식회사로 상장시키면서 가능한 시나리오가 된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도르트문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클럽의 재정과 선수를 쓰는 방식을 철저하게 실리적으로 운용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 후반부터 그 저력은 클롭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7시즌동안 지속되었다. 히츠펠트로부터 전국대회의 달콤함을 얻고 난 이후에 탕자처럼 자금을 물쓰듯 써댓던 돌트문트가 철저히 실리주의 돌아선건 독일의 문화와도 부합되는 부분이다.
사실 도르트문트는 70년대에 이런 과정을 겪었던 적이 있다. 분데스리가가 출범된 6364시즌 이전부터 우승을 많이 했던 클럽이고, 리그 경쟁력과 유럽대항전에서 유러피안 위너스 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갑자기 들어온 막대한 자금으로 무분별한 선수 영입을 하게 되고, 재정이 악화되면서 선수주급도 주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면서 주축 선수들은 떠나가기 시작했다. 70년대 뮌헨이 독주하는 동안 도르트문트는 2부리그로 강등되다 다시 올라와 재기에 성공했지만 90년대 이전까지 중위권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저 그런 클럽으로 전락하였다.
90년대 이후 챔스우승과 리그 우승을 하면서 다시 막대한 자금이 들어왔는데, 이때도 똑같은 전철을 밟고, 2000년대 초반 부도상황까지 벌어진 이후, 도르트문트는 3번째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한 시즌은 침체기를 겪었다. 이전과 달리 3번째 찾아온 영광의 시대에도 도르트문트는 레알이나 바르샤, 뮌헨이나 맨유, 맨시티처럼 천문학적인 자금 투자에 신중하다. 그리고 이제는 클롭의 철학을 계승할 감독을 영입한다. 마인츠에서 클롭을 데려오듯 마인츠에서 투헬을 데려오면서 이들의 역사는 계속 써내려가고 있다. 확실한 건 이제 그들은 무리하게 돈을 써가면서 재정위험을 자초하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축구의 신념은 언제든 바뀔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후부터 클럽에 중요한 건 철학의 정립과 그에 맞는 선수들의 합리적인 수급이전에 유스의 발굴이 제일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마케팅과 상업화를 통해서 대박을 터뜨린 이피엘은 중계권료에서 비교적 평등을 추구하고 프리미어 리그 하위권팀들에게 까지 그 대박의 수혜를 입게 하고 있지만 지금의 이피엘은 리그의 수준은 저하되고, 유스의 성장은 더디다. 독일이 근 10년동안 월클재능들이 수페인처럼 계속 뽑아내는 것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내실은 이미 바닥이 났다. 자금이 바닥났다면 정신차릴지 모르지만 안에서부터 함몰되어가는 리그의 암적 존재는 다름아닌 상업화로 나태해진 유스의 발굴과 철학의 정립이다.
[ 옌스 레만 ]
[ 도르트문트가 0203시즌 갑자기 페이스 난조를 보이며 3위로 내려 앉고 챔스 플레이 오프에서 떨어진 후에 0304시즌 자금 유동성의 위기를 맞지만 때마침 아스날로 이적했던 레만은 무패 우승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
[ 세바스티안 켈 - 슈나이덜린과 체격이 비슷하다]
[ 0102시즌에 320만 유로에 영입한 자원. 아직도 도르트문트 현역이고 죽 이대로 은퇴할 것 같다. 슈나이덜린과 같은 수비형 미들 출신. 클래스는 여전하다. 0809시즌부터 주장완장을 달고 1415시즌부터 훔멜스에게 넘겼다. 지금까지 350경기가 넘게 뛰었다. ]
잠깐 도르트문트의 연고지인 보루시아 지역에 설명하고 넘어가자.
5. 보루센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이란 지방은 작은 공국에서 통합된 왕정을 상징하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보루센이란 원래 의미도 프로이센의 의미인 라틴어에서 유래된 팀의 이름이다. 도르트문트가 속한지역은 베스트팔렌이다. 우리에게 베스트팔렌 조약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지역은 쉽게 접근이 가능했던 곳이라 과거 오래도록 다른 왕국과의 다툼속에 자리했던 지역이었으며 편안할 날 없는 DMZ 같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연방 국가들에서 시작된 이 싸움은 오늘날 독일 연방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연방의 두 축이 되어 끊임없이 경쟁하였고, 결국 프로이센왕국이 승리하게 된다.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연방의 큰 축이라 해도 오래 전부터 공공연하게 그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오스트리아는 600년간 지배한 합부르스 왕실가문이 연고지 뿐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독일, 결혼을 통해 에스파냐와 이베리아 반도와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에서 승리하며 여러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으로 날리던 시절을 보면 그들의 부상은 18세기에 벌어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성이 왕권을 쥐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여성은 왕위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 법을 이유로 독일의 여러 연방 국가에서 이의를 제기할 때 소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합병을 오스트리아의 요구하면서 전쟁은 시작되고, 인구 200만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통일을 위한 독일 연방의 기틀을 마련한다.
[ 도르트문트 ]
오늘날 독일의 문화가 사치를 버리고 실리와 생상과 군사력의 상징이 되었던 원동력은 프리드리히 2세가 18세기 왕위에 오르면서 19만의 군사력을 보유하기 시작한 것을 그 연유로 찾을 수 있다.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빌헬름 1세는 30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산 정책을 피면서 불륜을 합법화 하고, 수도승을 끌어내 강제로 결혼시키는 인구 정책을 피면서 군사교육을 어린 시절부터 시키기 시작하며, 모든 사치품들을 매각하고, 오로지 군사를 훈련하기 위한 명목으로 모든 생산과 소비에 초점을 맞춰 나가면서 프로에센은 작은 소국에서 독일연방을 통일하는 저력을 발휘하게 된다.
[레비어 더비]
[ 베스트팔렌 지역을 연고로 한 도르트문트와 샬케 04의 지역 매치 ]
6. 마가트의 의사소통 방식
마가트의 훈련방식이 보루시아(프로이센)만큼의 목적을 가지고 빠른 결과를 도출해 내었다면 도르트문트의 클롭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클럽의 위대한 감독으로 오래 군림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슈투트가르트에 끝까지 남아 유스를 키우고, 성적을 내는 선순환 구조로 가는데 더없이 최상의 질을 제공하던 분데스리그와 팀을 벗어나지 않고 감독이 추구하는 철학의 확고함을 제공하면서 장기집권했다면 확실히 구축된 그의 이미지와는 별도로 전술에서 한축을 세워나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사실 그의 전술과는 별도로 그의 선수단 장악 방식은 반할과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다만 그는 전술의 대가가 아닐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전술을 보자.
0607시즌 초 바이에른 뮌헨이 빌레펠트 클럽에게 충격패를 당하고 독일 국대 주장이던 키퍼 칸이 마가트의 전술에 많은 의문점을 제기했다. 그 중 하나는 공격 일변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밸런스 유지보다 체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마가트가 강조한 체력 훈련은 중소클럽이나 아직 팔팔한 유스들에겐 적합할지 모른다. 뮌헨은 빅클럽이고, 2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던 마가트지만 이후의 그의 전술이 호흡을 길게 가져가려면 볼소유와 관련해서 좀더 그의 전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뮌헨에서 성적부진으로 마가트가 경질된 일련의 전술주문을 보면 차분히 끌고 가는 뮌헨의 역습 트렌드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지 않았나 싶을 만큼 뮌헨의 색깔보다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데 더 치중했다.
미하엘 발락이 첼시로 이적한 0607시즌에 반 봄멜을 데려왔지만 중원 장악에 실패하고 중앙의 패스 루트에 대한 해법을 적절히 제시하지 못하면서 분데스리그의 약팀들은 선수비 역습으로 일관했지만 제호베르투도 없던 시즌에 중원의 활동량은 급격히 저하되었다. 그리고 변화없던 전술의 고착으로 3년차부터 타팀들이 타개법을 찾으면서 유독 약팀에게 고전했던 시즌이 마가트가 부임하고부터 3년차에 찾아든 부진의 시초였다. 사실 마가트의 분노의 영입은 이 시즌 때 했어야 했다. 이 때 실종된 중원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볼프스에 재부임했을 때 중미 자원만 8명 사는 끔찍한 사례를 저지르며 저질스런 감독의 역량을 드러내는데 충분했다.
[ 볼프스 부르크 인 마가트 ]
[ Comming BUT OUT From Next Season !!!!!! ]
자신이 부임했던 팀들중 슈투트가르트와 뮌헨의 두시즌과 0809시즌 볼프스부르크 제외하곤 그의 경력은 거의 실패로 점철되었다. 살케 04 시절에는 라울 훈텔라르를 위주로 한 전술이 실패하면서 무리한 전술을 계속 운용하였다. 팀은 강등권에서 헤매고, 과도한 체력싸움에 집중한 나머지 이거저거 시험하는 동안 수비밸런스는 무너지고, 전술에서 어떠한 체계도 잡혀지지 않은 그의 축구 철학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0708시즌에 바젤에서 영입된 이반 라키티치는 드락슬러의 성장이 두드러지고 토트넘으로 이적하다 최근 함부르크로 임대후 완전이적한 홀트비가 떠오르면서 마가트에 의해 공미에서 수비형 미들로 포변하면서 자리를 못잡고 땜방으로 계속 기용되었다. 마가트가 경질된 그 해 그는 샬케04에서 라리가의 세비야로 이적한다.
함부르크 출신의 전설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팀을 3번 우승시키며 8283시즌엔 유러피안 컵에 우승했던 선수시절의 명성은 그의 감독시절 체력에 대한 독재스런 훈련 방식으로 초반에는 긍정적인 경기력을 이끌었지만 리그내내 그러한 방식을 유지하다 보니 선수의 반발을 초래했고, 지금껏 그의 방식을 선호했던 클럽은 한 군데도 없다 보니, 성적마저 보장하지 못하는 감독을 쓰는 클럽은 전무하듯, 그의 감독 경력도 무주공산이다.
그의 문제는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단장과 감독직을 둘다 요구하면서 선수 기용과 영입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며 휘두르며 무분별한 선수 영입과 훈련 방식을 강요했고, 둘째는 그로 인한 재정의 피폐였으며 세번째는 전술 발전의 부족이었다.
실제 샬케 04에서 그를 해고한 이유중의 하나는 재정의 탕진과 리그에서의 성적부진이었다. 마가트의 무분별한 영입으로 재정의 위기가 오고 고액 주급자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0910시즌에 회장과 대립하면서 까지 관철시켰던 마가트의 지도력은 리그에선 부진을 면치 못햇다. 클럽이 역사상 두번째로 챔스 리그 8강에 진출하고, 라울의 결승골로 뮌헨을 이기고 포칼컵 결승행을 이루는 등 승승장구하는 동안 샬케 04의 재정위기는 현실화 되었다. 실제 그의 경질은 전격적으로 이뤄졌고, 볼프스 부르크로 바로 재부임하면서 그의 경력을 이어갔지만 강압적인 선수 컨트롤과 팀을 강등권에서 구한 이듬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다.
하인케스처럼 맞춤 전술없이 일관된 훈련강화는 선수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다.
7. 바르샤의 리빌딩 배경과 뮌헨의 리빌딩 진행 방식
[ 하인케스 그가 성취한 컵들 뒤에서 ]
펩이 뮌헨을 이끌기 전 하인케스가 이끈 뮌헨의 모습은 선수에게 맞는 전술을 부여하기 위해 상대하는 각 팀의 장단점을 모두 분석해서 경기에 임하고 맞춤 전술로 상대의 전술을 파해하는 식의 경기력으로 뮌헨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상대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좌우 윙포의 종적 드리블을 간결하고도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역습의 빌드업을 구축했다. 뮌헨의 축구가 실리를 넘어 다이나믹한 수준의 능력을 보이는데는 감독의 역량이 지대하게 끼쳤다.
하인케스의 전술은 확실히 마가트와 대척점에 있다. 선수 기용이 무분별하지 않으며 풀백과 전방의 윙포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며 나갔던 종적 드리블의 연속성은 펩의 바르샤가 추구했던 점유율의 완성을 위한 활발한 풀백의 오버래핑과 다른 개념으로 풀백의 능력을 극대화했다. 득점에 관여된 모든 패스가 간결해지면서 쓸데 없이 오래도록 볼을 점유할 필요도 없었고, 상대 전술에 따라 대응했던 전술 또한 패스 철학만을 위해 부합된 움직임에서 벗어나 유연하게 대처했던 하인케스의 능력은 비단 선수 자질에서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해야만 가능했던 티키타카보다 오랜 장수를 꿈꿀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나이가 감독으로서 이미 막바지였던 것만 빼면 좋을 뻔 했다.
현재는 펩이 들어오면서 뮌헨은 최근까지 잡음이 심했다. 봉합이 가능한 수준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종전까지 위대했던 드리블과 역습의 꾸준한 작업을 버리고, 대신 패스위주의 점유율로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뮌헨 선수들은 반발이 심하다.
[하다하다 의료진까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펩]
[팀 닥터와 갈등이 심했던 펩. 결과적으로 펩의 잘못이었다. ]
그들이 펩 전술에 저항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반할이 남기고 간 선수들을 데리고 하인케스의 전술이 완성된 시점에서 뮌헨의 바르샤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르샤는 중미의 노쇠화에 대한 대체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고, 지금의 바르샤는 1선의 파괴력있는 드리블로 회귀하는 뮌헨화를 추구하고 있다. 비단 인혜와 사비의 노쇠화를 막지 못한다면 유스에서 그에 필적하는 유스를 올려 쓰는 것이 이들의 철학인데, 왜 그럴까.
[ 인혜와 사비 ]
메시와 사비, 인혜 이후로 그런 롤을 소화하는 있는 선수는 확률상 다시 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결과 6년동안 극강 모드를 실현한 펩의 바르샤는 이미 압박의 질이 점점 하락하고 있었고, 펩의 철학에 부합했던 선수들이 기용되었던 시점은 10대 시절 그들의 능력을 알아채고, 기용한 반할의 유산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폼 하락을 펩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뭘까. 그건 바로 펩이 뮌헨에서 진행하는 바르샤화는 항구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술 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때 극강의 모드를 거친 후에 그 철학에 부합한 선수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크루이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만큼 쉽지 않은 선택을 뮌헨은 펩에게 맡기고 있다. 그가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현재 라키티치가 중동으로 이적한 사비의 공백을 어느정도 메꾸고 있다지만 유스에서 인혜와 사비의 공백을 메꾸기는 부족하다. 솔직히 인혜와 사비는 그가 발탁해서 처음 기용했던 선수들이 아니다.
젊은 초임 감독으로서 바르샤 B팀을 거쳐 1년만에 바르샤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그가 일으킨 선수들은 반할이 일으킨 선수 기용보다 한참 모자른다. 비교적 이르다 싶을 만큼 사비, 인혜와 같은 10대 선수들을 기용했던 반할은 그 위험성을 감수하고 바르샤를 오래도록 기량을 유지하는데 공헌했다. 퍼거슨의 92세대의 출현 이후에 10년이 넘도록 그 클래스를 유지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반할의 선수보는 눈은 포변과 더불어 까다로운 선수들의 사용법 조차 빨리 포착해서 팀을 재건하는데, 유능하다. 그리고 그의 재건은 리빌딩에서 오래도록 그 영광을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초석이 된다. 0203시즌 그 짧은 기간동안 어떻게 바르샤가 오래 갈 수 있는 포인트를 집고 떠났는지 정말 반할은 대단하다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선수 기용은 방만한 클럽 운영과 전혀 틀린 포석이다.
필자가 펩대신 클롭을 선호하는 까닭은 이런 연유이다. 철학은 펩이 반할의 후임에 부합할 지 모른다. 하지만 선수 기용 방식은 클롭이 반할에 부합한 자질을 보인다. 클롭은 본인의 철학에 부합한 선수들을 발굴해내는데, 반할과 유사한 재주가 있다. 무명에 가까운 선수를 데리고 오는 그의 능력은 가가와를 통해 증명되었고, 유스 발굴 능력은 괴체와 누리사힌을 통해 증명했다. 다른 클럽에서 대체자를 완벽하게 구매했던 이력은 레반도프스키와 마인츠에서 함께 데려온 수보티치, 누리사힌의 대체자로 데려온 귄도간으로 증명했다. 클롭이 리빌딩에 소모했던 액수는 맨시티가 한 선수에 투자했던 천문학적인 숫자보다 적은 비용으로 팀을 재건했다. 유스 출신 로이스를 다시 데려오는데 묀헨글라트바흐에서 1700만 유로를 데려온 걸 제외한다면 비용 자체는 초저비용 초고효율이다.
별볼일 없던 클럽에서 들어와 그의 철학에 부합한 선수들의 조합에서 그는 7시즌동안 도르트문트가 명문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 감독이 클롭이다.
[ 마리오 괴체와 로이스 ]
[ 뮌헨 오라 덕후질 하는 마리오 괴체, 로이스는 움쩍도 안한다. ]
[ 누리사힌 ]
클롭이 데뷔시킨 유스들의 나이를 보자 2010년에 18세였던 마리오괴체를 과감히 기용했으며 폐예노르트에 임대시켰던 누리사힌을 0910시즌부터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는데,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괴체는 리그 33경기출전 6골 15도움을 기록했으며 그의 포지션은 공미이다. 누리사힌은 0809시즌부터 1군에 등록되었고 그의 활약은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니 사실 20 살부터 도르트문트 1군 무대를 밟은 것이다. , 0910 시즌 그의 출장경기는 33경기며, 4골 8도움을 기록했다. 그의 포지션은 수비형 미들이다.
가가와는 35만유로에 사왔으며 현재 후멜스의 파트너로 뛰는 수보티치는 그의 지도하에 급격히 성장하여 비디치와 함께 2010년 세르비아 국대에서 센터백으로 발탁되고, 뛰어난 수비력과 준수한 득점력으로 첼시에 링크되었던 선수다. 실제 1011시즌 제의가 있었지만 도르트문트의 거부로 이적이 무산되었던 선수이다.
[ 네벤 수보티치 ]
[ 마르코 로이스 ]
클롭이 키워낸 선수들은 팀이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이적료를 물쓰듯하다 엎어진 도르트문트의 상황을 이겨내고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다. 펩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바르샤 1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가 전력에서 배제했던 선수들은 이미 앙리나 즐라탄, 에투에 이어 외계인 모드 호나우지뉴까지 월클에 다다른 선수들이었고, 이미 성장해서 잠재력이 터졌던 유스는 그의 손이 아닌 반할에 의해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어떤 감독이라도 젊은 세대 교체가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인 상황을 그대로 끌고 가지 역행하지 않는다. 펩이 감독으로 부임했던 상황은 바르샤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던 바르샤 B팀 감독 시절부터 내부적으로 진행하기 수월한 상황이고, 그의 플랜에서 유스의 활용은 다른 감독처럼 오랜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고, 선수단을 파악할 필요성을 간과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펩이 선수발이라 말하는 어떤 이들의 펩의 능력을 폄하하는 근거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른다.
0607시즌부터 진행된 리빌딩의 과정은 굳이 펩이 아니더라도 순리대로 가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가 이룩한 펩의 티키타카일 뿐이다. 쉽지 않은 전술색채를 드러내는데 있어 최상의 질을 제공했던 바르샤의 감독 생활은 그에게 영광으로 남지만 문제는 그 이후의 리빌딩 방식에서 그는 의문점을 남겼다. 장기집권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6년의 시절들이 선수빨이 아니란 소리를 불식시킬 수 있었을지 아님 정말로 선수들의 능력으로 그의 능력이 구현된건지는 뮌헨으로 떠난 그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한 가지 보고 싶은 건 그가 뮌헨을 떠날 때 리빌딩이 얼마나 제대로 진척되어 있을지 그게 궁금할 뿐이다. 아이러니한 건 0203시즌에 반할이 바르샤에서 했던 작업처럼 뮌헨도 이미 반할의 손을 거쳐 탄생한 월클들이 다수 존재하고 전성기 기량에서 떨어지려면 아직 멀만큼 최상의 수준이라는 것까지 바르샤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왜 반할이 거쳐간 클럽으로 오는걸까. 솔직히 필자는 펩에 대해 긍정적일 수 없다. 맨유는 장기집권할 유능한 보스가 필요하고 리빌딩을 수시로 착수할 만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 필요하다. 펩은 장기집권에선 어떨지 불안하다. 팀을 재건하는데, 최상의 질이 제공되는 감독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펩은 정말 행운아인 전략가인걸까.
[ 포칼컵을 앞에 둔 클롭과 펩 ]
[ 양옆은 세바스티안 켈과 괴체 ]
8. 반할의 의사소통 방식.
[ 젊은 시절의 반할 ]
[무리뉴 통역관 시절 ]
[ 무리뉴와 함께 ]
펩과 클롭의 얘기가 길어져서 말이지만 두 감독의 차이는 점유율과 압박으로 나눌 수도 있고, 선수를 대하는 마인드에서도 격차가 있으며, 감독 생활의 시작만 봐도, 펩이 클럽의 수혜를 다 받은 반면에 클롭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망가진 팀을 재건했던 개천에서 용을 본 것처럼 용팔이의 전형을 보여줬다. 둘다 하나의 철학으로 팀을 이끈점은 일치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독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능력이고, 그 철학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감독의 철학은 정반대에 서 있다.
[ 반할 선수시절]
반할은 어떤가. 처음 맨유에 부임하기 전에 그에 대한 실체를 알기전에 그에 대해 떠도는 소문부터 들어야 했던 필자는 이제 막 축구 전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독재와 이상주의가 버무려진 감독이고, 들어가는 팀마다 구단주와 불화를 일의키고, 팀이 삽질할 때도 일관된 전술로 팬들에게 원망을 들었던 감독이라는 설이 여기저기 방문을 두드릴 때 필자가 들었던 생각은 모예스보다 낫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 그가 부임한 이후부터 전술의 다양성은 정말 뛰어난 전술가의 면모를 보였다.
지나간 시절은 누구라도 떠들수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 미래의 될일을 생각하고 떠드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반할은 그런 타입의 감독이다. 미래의 될 일을 이미 다 예견하고 움직이며 선수의 폼과 전술에 대한 지시사항에 대해 아주 자세하고, 몽학선생처럼 가르친다. 그의 이런 점은 선수와 소통을 자주한다는 말을 해도 오만스럽다는 이미지를 버리기 힘들다. 실제로, 그가 선수를 대하는 방식은 솔직하다. 하지만 그의 전술적 식견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고, 따라서 그의 가르침에 따라야 하는 선수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야만 한다.
반할이 월클에 다다른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키고, 침체에 있거나 유스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포변을 시도해서 성공하는 케이스가 십수년 동안 무지 많았던 이유는 그의 가르침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이미 성장해서 기량의 끝판에 다다른 선수에게 포변을 강요한다면 그건 다시 성장하라는 의미고, 원래 가진 롤에서 후퇴하라는 얘기다.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그런 제의가 달가울리 없다. 감독은 선수들을 통해 필드 위에서 전술을 입히는 최종 판단자고 선수기용도 감독의 몫이다. 당연히 감독과 선수의 갈등은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원만한 소통을 원한다면 안첼로티를 데려오면 된다. 하지만 리빌딩의 오랜 후광의 전제는 팀에게는 혹독할지 모르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 방식은 혁신이다.
반할을 통해 혁신에 이르는 과정을 보고 있지만 그의 의사소통에서 가장 필요한 건 인내심인 것 같다. 그리고 팬들의 비판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과정이다.
필자는 반할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포변을 통해 선수를 성장시키는 능력은 리빌딩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반할을 알고 싶어 여기저기 뒤적이다 보니 결론은 그가 아닌 그 이후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게 펩일지 클롭일지 무리뉴일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무리뉴나 클롭이 왔으면 한다. 무리뉴는 요즘 팀상황이 너무 좋지 않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기에 팬들을 포함해 필자까지 무리뉴를 놀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무리뉴와 클롭을 지지하는 상황은 변하기 힘들 것 같다.
[마지막 샷은 차범근과 마가트 사진 추가 ]
[ 8889시즌 은퇴를 결정한 차범근, 독일 축구 협회에서 은퇴한 스타들 전용 코치 학교에 현역 출신이 다녔다. ]
* 축구 토크 게시판은 3단락 이상이 원칙입니다.
* 통합공지 및 게시판 이용수칙을 꼭 숙지해 주세요.
- 통합공지: http://cafe.daum.net/manchesterutd/5LnW/14
- 축구 토크 이용수칙: http://cafe.daum.net/manchesterutd/JK1X/2
첫댓글 내가 쓴 글 [ 맨유 까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