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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살타(倂殺打) <短篇小說>
비가 내린다.
포장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비에 젖은 채 바람에 기우뚱 거리며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역할을 하는 막대기가 힘겨워 보인다. 이따금씩 막대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빗물이 막대기의 눈물 같다.
술꾼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남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에게 할머니라고 하기엔 좀 억울할 것 같은 아줌마가 열합 한 대접을 퍼다 준다.
벌써 소주 세 병째를 따고 있는데도 취하기는커녕 정신은 더욱 씻은 듯이 맑아지고 있다.
“젠장. 소주도수(度數)가 막걸리라 더니... 아지매! 맥주 한 병 주소.”
‘아지매’는 대답 대신 소주 한 병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 삼(오징어와 삼겹살)두루치기 후라이팬을 들고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런 궂은날에 맥주는 무슨, 소맥 할라꼬? 혼자 청승 떨지 말고 술동무나 하자 고마.”
그는 사람이 한번 나락으로 떨어지니 포장마차 ‘아지매’ 눈에도 시답잖게 보이는가 싶어 쓴웃음이 피식 나왔다. ‘아지매’는 그의 기분 따위는 무시 해 버리고 자작으로 소주 한 잔을 단숨에 마시더니 그에게 잔을 불쑥 내밀었다.
“마, 억수비도 오고 손님도 없고 오늘 못 팔면 내일 팔고 오늘 비오면 내일은 해가 뜨겠지 하고 안사나. 복 나간다. 고마 인상피고 한잔 받아라.”
나이로 따지자면 아들 벌이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손님에게는 무례하고 기분 나쁜 말투요 행동이다. 그런데도 밉지가않다. 마치 오랜 친구 같다. 그는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주는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맹물 같던 소주가 슬슬 취기를 부채질한다. 아니 벌써부터 취했음에도 이제야 자신이 취한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술자리를 같이한 친구에게 ‘야, 너 취 했구나’ 하면 ‘그래 나 취 했어’ 하고 쿨 하게 인정하는 친구는 하나도 없다. 행동도 흐트러지고 발음도 어눌해지고 중언부언, 횡설수설 하면서도 한결같이 ‘웃기지마라 나 하나도 안 취했어’ 라고 한다. 정작 웃기는 것은 자신인데 술이 취해 자신이 웃기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남자들은 사소한, 아주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걸고 지기 싫어하는 묘한 동물이다. 머리를 쳐 박고 쓰러지기 일분 전 까지도 취하지 않았다고 빡빡 우긴다. 상대방이 백기를 들고 그만 마시자고 손을 내 저으면 야릇한 승리감에 젖기도 한다.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호적상 나이가 동기생들 보다 한 살 아래 일 때에도 굳이 숨기려든다. 그래서 민 증(주민등록증) 까자는 소리를 참 싫어한다.
비는 그 기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있다. 흠신 젖은 포장마차 천정 곳곳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가 혼자 미끄럼 타기도 하고 끼리끼리 모여 세를 불려 밑으로 ‘톡’ 떨어지기도 한다. 기둥 역할을 하는 막대기는 아까부터 흐느껴 울고 있다. 가끔씩 빗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열합 대접을 받혀놓았고 대접 옆으로 빈 소주병이 우로나란히를 하고 있다. 그는 ‘아지매’ 가 취 하느냐고 물으면 쿨 하게 취한다고 할 것 같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렇게 꺼려왔던 민 증도 서슴없이 까 보이리라 하였다. 구차하게 호적이 한해 늦게 되었느니 하는 설명 따윈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술은 들어갈 때도 입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도 입으로 나오는데 모두가 말이 되어 나온다. 사람에 따라, 그날의 분위기나 기분에 따라 나올 때의 모양은 제각각이다. 때로는 군대 이야기를 끄집어 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 오기도 한다. 술기운 탓으로 숨겨져 있어야 할 말들과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술자리는 항상 시끄럽다.
그는 성격이 참 내성적 이었다. 한마디로 숫기가 없었다. 친구들과 식사하러 갔을 때에도 ‘짜장면 먹자’ 가아니고 ‘나도 짜장면’ 하는 식으로 깃대잡고 나서기를 꺼려하고 깃대 잡은 사람에게 끌려 다니는 편이었다. 대구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면서 옆자리나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하는 그다. 상대방이 먼저 인사말을 할라치면 그게 또 미안해서 괜히 빚진 것 같은 기분으로 목적지 까지 가게 된다. 불행 하게도 앞자리나 옆자리 사람들이 그와 같이 내성적인 사람이면 열차 안은 침묵의 시위현장이 되고 그 긴 시간은 고문이 되고 만다. 좋게 봐주면 신중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주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군대는 정말 난관중의 난관이었다. 입영을 연기하고 연기하다가 대학을 졸업 하고 더 이상 미룰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늦깎이 입대를 하였다.
“통합병원에 후송된 걔 죽었다면서?”
“응, 장(腸)파열 이라 카데”
“일찍 후송했으면 살았을 거라 카더라”
“엄살 피운다고 더 조졌데”
“죽은 놈만 불쌍하지 뭐 완전 개죽음이잖아”
조교들에게 쇠막대기로 배를 얻어맞은 1소대 훈련병이 육군통합병원 으로 후송 되었으나 일주일만 에 숨지자 온 신병교육대가 술렁거렸다. 그렇게도 입단속을 시켰으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짬만 나면 훈련병들은 삼삼오오 모여 새로운 소문을 듣기도하고 만들기도 하였다.
동료애 보다 나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더불어 어쩌면 앞으로 훈련이 좀 수월해 지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헌병백차’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헌병대로 몇 명이 끌려가고 진상파악을 위해 개인면담과 소원수리와 내무반 사열(査閱)도 있을 것이라 하였다.
고문관(顧問官)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가 ‘정부에서 고문으로 초빙한 사람’ 이고 두 번째가 ‘주로 군대에서 어리숙한 사람을 농조로 이르는 말’ 이다. 그는 고문관으로 놀림을 받았다. 물론 두 번째 의미의 고문관을 말한다. 그는 하루에 수십 번도 더하는 선착순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열 번째 이내로 들 수 있어 신병훈련이 그렇게 힘겨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다. 그에게는 일석점호(日夕點呼) 시간이 제일 고역이었다. 고문관이라 불리게 된 것도 일석점호 시간에서 비롯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의 일석점호 시간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긴장되었다. 주번사관이 노란색 바탕에 빨간 줄 두 개를 두른 완장을 차고 그의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점호보고도 생략하고 내무반 통로를 뚜벅 뚜벅 걸어오던 주번사관이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번사관은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를 쓱 한번 쳐다보더니 지휘봉으로 그의 배를 쿡 찔렀다.
“옛! 훈병 공.영.태(孔榮泰)!”
“직속상관 관등성명!”
“옛! 사단장 소장(少將) 황,황,황.....잊었습니다!”
한번 더듬거리게 되자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의 머릿속이 하얀 만큼 내무반장의 얼굴도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의 배를 찌르던 지휘봉이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라던 내무반장의 배를 찌르기 시작하였다.
“어이 내무반장! 넌 뭐하는 놈이야! 초등학생도 십초면 외울 사단장님 관등성명을 아직도 모르는 놈이 있다는 게 말이 돼?”
“시정 하겠습니다!”
그날 그는 일생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몸서리치는 기억을 군대의 추억으로 남겼다. 하느님의 동기동창으로부터 받은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보다도 천금보다 귀중한 취침시간 한 시간여를 그로인해 단체기합으로 탈취당한 내부반원들의 저주는 그의 심장에 비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군대에서 그를 아는 모든 이로부터 ‘고문관’ 또는 ‘고문관새끼’ 로 불리게 되었다.
자칫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의 소심하고 나약한 심장 속에서 알지 못할 분노와 오기가 치솟아 오른 것이다. 그 분노와 오기가 살아가는 목표를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극단의 상황을 피해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냐. 두고 보자 되로 받은 거 말 로 갚아주마’ 하고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억세게 재수 없는 1소대 훈련병의 사망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래! 그거다!’
진상조사단이 내무사열도 한다는 말에 그의 심장이 뛰었다.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것도 주번사관과 내무반장을 한방에 보내버리고 내무반원들을 제압해 버릴 방법을 내무사열에서 찾은 것이다. 점호에서 받은 것은 점호로 돌려주고 고문관으로 받은 것은 고문관으로 되돌려 줄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그런데 내일, 내일하던 내무사열 이 자꾸 미루어지더니 또다시 훈련병들 사이에 ‘카더라 통신’이 만발하였다.
‘오늘도 헌병 백차에 기름을 만 땅(가득) 넣어 갔다 카더라’
‘스페어 깡(예비 기름통)에도 만 땅 넣어 줬다 카더라’
‘중대장 하고 헌병대 새끼들 몇 놈이 시내 술집에서 기생파티를 했다 카더라’
이런 유언비어들이 사실이라면 내무사열은 물 건너간다. 이러다가 복수의 한방을 시원하게 날려보지도 못하고 훈련소 생활을 마칠 것 같아 그는 초조해 지기 시작하였다. 고심 끝에 그는 중대장이 검열관 역할을 하며 내무사열 예행연습을 하는 일석점호 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거사(?)에 실패를 하더라도 헌병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는 지금 구타나 가혹행위는 하지 못할 것 이라는 확신이 섰다.
주번사관을 앞세우고 중대장이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중대장은 여느 때보다 여유가 있어보였다. 감히 내 배 다치랴 싶은 그에게도 중대장 못잖은 여유가 생겼다. 입소하고 처음으로 비로소 중대장과 주번사관과 내무반장을 내려다볼 뱃심이 생겼다.
야릇한 흥분 속에서 점호는 시작되었다. 내무반장의 구령소리도 여느 때보다 절도가 있고 우렁차다.
“소대 차렷! 제5소대 일석점호 인원보고 총원45, 사고 무, 현재원45, 열외1, 열외는 보고자1 외 점호준비 끝!”
“좌로 번호” 주번사관의 지시를 받아 내무반장이 복창 하였다.
“좌로 번호!”
“하나, 둘, 셋, 넷........ 서른다섯, 서른여섯, 서른일곱, 삼십 팔!” 번호는 물 흐르듯이 일사천리로 흘러가다가 그의 차례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낭창하게 깔아가지고 ‘서른여덟’을 ‘삼십팔’이라고 해버린 것이다. 주번사관과 내무반장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였다. 짜릿한 흥분과 함께 분노와 오기로 뭉쳐있던 답답한 그의 가슴이 후련해졌다. 이 기막힌 장면을 검열관이 보았다면 더욱 가관일 터였다. 그의 예상 되로 아무도 그에게 구타나 가혹행위를 하지 못하였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내무반장이 분을 삭이지 못해 식식 거리고 있었다. 중대장이 한마디 하였다.
“좋다. 긴장을 하면 그럴 수도 있다. 주번사관! 번호다시!”
“내무반장! 번호다시!”
“소대 차렷! 좌로 번호!”
“.......서른다섯, 서른여섯, 서른일곱,..서른, 여어덟”
그는 이번에는 자기차례에서 서른 한 뒤 반 박자를 쉬고 ‘여어덟’ 하고 길게 빼 버렸다. 내무반이 술렁거렸다. 역시 노련 하기는 중대장 이었다. 한번 내무반을 쓱 훑어보는 것으로 분위기를 잡고 내무반장에게 명령하였다.
“내무반장! 3.8선을 1번으로 보내!”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는 내무반장을 대신하여 주번사관이 나섰다.
“고문관! 자리 바꿔 맨 우측 1번으로 가! 내무반장 연습시켜!”
그제 서야 내무반장이 그를 맨 우측 1번 자리에 세워놓고 번호 연습을 시켰다.
“번호!”
“하나!”
이렇게 ‘번호! 하나!’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번호!’ 하면 ‘하나!’ 만 하면 되니까 그 정도야 못하랴싶은 건 중대장의 마음이고 철저하게 고문관으로 무장한 그에게는 쓸모없는 계책이었다.
그를 1번으로 세워놓고 점호는 다시 시작되었다.
“소대 차렷! 좌로 번호!”
그는 자신 만만 하다는 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외쳤다.
“일!”
“.........”
사람이 너무 황당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 할 말을 잃는다. 지금이 꼭 그런 때이다. 내무반 전체가 할 말을 잃었다. 중대장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자 여기저기서 킥킥 거리며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사망사건 전이었다면 전원 ‘빤쓰(팬티)’ 바람으로 연병장에 집합하고도 남았을 텐데 중대장은 아무 말 없이 주번사관과 내무반장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저 새끼 완전 또라이 아냐?”
“고문관이긴 한데 저 정도 인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막사 출입문 바로 앞이라서 덜 닫힌 문틈사이로 중대장과 내무반장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내무사열 나오면 의무실에 입원 시켜 버릴까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구린 게 있어 입원 시킨 게 아닌 가하고 개인면담 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한심 하기는...”
중대장인들 별 뾰족 한 방법이 있는 것 도 아니었다. 똑똑한 놈 하나 어디서 빌려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무사열 없이 사건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주번사관이나 내무반장은 직업군인이 아니니까 제대하면 그뿐이지만 중대장은 사정이 달랐다. 만약에 엉뚱한 사고라도 치는 날이면 얼치기 고문관 한 놈 때문에 소령 진급은 물론 군대생활을 종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이 내무반장. 행정과에 가서 고문관 학력조회 해봐. 뛰어! 빨리 갔다 와!”
잠시 후 내무반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보고했다.
“중대장님. 대졸입니다! 그것도 서울에서 알아주는 학굡니다!”
“뭐?! 개 새끼 고문관인척 잔꾀 부리는 거 아냐?”
“대가리 좋은 놈일수록 군대적응을 못해 또라이가 되는 놈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그 새끼는 건드리지 마라. 점호도 열외 시키고 사격이나 수류탄 투척 같은 위험한 훈련도 열외 시켜. 무사히 훈련소 졸업만 할 수 있도록 해!”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거사가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다. 이제 내무반에서 깐죽거리는 한두 놈만 처리하면 남은 훈련소 생활은 누워서 떡먹기다 아니 떡 먹고 누워있기다.
군중심리(群衆心理)라는 게 있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심약한 사람도 많은 무리 속에서는 선동하는 자에게 휩쓸려 과격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불법시위를 주도하는 전문 ‘꾼’ 들이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기술은 귀신도 못 따라간다. 이불 덮어쓰고 만세나 부르는 이들도 꾼들의 덫에 걸리면 독립투사도 되고 선각자도 되고 핍박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의인이 되어 죽기 살기로 날뛰게 된다. 그러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꾼’ 들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주술 풀린 강시(僵屍) 만 연행되어 간다.
“고문관 새끼 때문에 오늘도 곱게 자기는 글렀다.”
전문 꾼 축에 드는, 손봐 줘야할 한두 놈 중에 한 놈이 중대장에게 들릴까 속삭이듯 빈정거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만세족’ 들이 우르르 나선다. 군중심리는 사람 수가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씨팔 놈. ‘하나’ 소리도 못하고 ‘일’ 하고 자빠지나.”
“삼십팔은 또 뭐고.”
“개새끼. 정신병원에나 가지 군대는 지랄할라 고 왔나.”
그때다. 내가 언제 고문관 이었냐는 듯이 그가 한 발 앞으로 쓱 나서며 내무반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행동에 알 수 없는 위엄이 서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위엄과는 어울리지 않는 쌍욕이 튀어 나왔다.
“야 이 씨 팔 놈들아! 그래 나 고문관새끼다! 고문관새끼가 개지랄 떠는 거 한번 볼래? 앞으로 내 눈에 거슬리는 새끼들 잘 때 옆구리가 서늘하거든 빨래 줄이 기어 나온 줄 알아라. 어차피 정신병자 취급받는 고문관인데 니들 한두 놈 골로 보냈다고 사형이야 당하겠나!”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반격에 내무반이 휘청거렸다. 권투로 비유 하자면 상대를 얕잡아 보고 장난치듯 잽을 툭툭 날리다가 전광석화와 같은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그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네 번이나 다운되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지옥에서 왔다는 ‘가라스키야’를 고향(지옥)으로 돌려보낸 프로복싱계의 살아있는 전설 ‘홍수환’ 이었다. 막사 밖에서 ‘고문관 대책회의’를 하던 중대장은 정말로 저놈이 고문관 행세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개지랄’ 이라도 떨면 큰일이다 싶었다. 고문관에 대한 울화통이 내무반으로 향하였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전우가 실수하고 잘못하면 감싸주거나 격려는 못해줄망정 야유하고 짓밟으려고 해? 내무반장! 이놈들 정신 차릴 때 까지 빤쓰 바람으로 구보 시켜! 오늘 취침시간은 몰수다!”
헌병백차에 만 땅으로 넣어준 ‘기름’과 ‘기생파티’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무사열은 고사하고 개인면담도, 소원수리도 없이 소문은 소문으로 끝났다.
상황이 끝나면 중대장도 사건 전으로 돌아가고 내무반에서 또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놈이 생기지 않을까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다행히 그럴 조짐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옆구리에 빨랫줄이 나올 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그에게 ‘고문관’ 이라고 하는 치도 없었다. 다만 중대장만이 아직도 ‘어이 고문관’ 하며 불렀고 내무반장과 조교와 교관들은 ‘삼팔선’으로 별명을 바꾸어 불렀다. 그건 그를 놀리거나 모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체기합이나 위험한 훈련에서 열외 시키기 위해 ‘어이 고문관 중대본부에 가 있어’ 라든가 ‘어이 삼팔선 열외’ 하는 식이었기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팔자 좋은 훈련병이 되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그의 성격이 자신도 모르게 개조된 것은 ‘덤’ 이었다.
“그래서?”
“죽어도 좋다! 철저하게 고문관 행세를 하자 싶었지.”
“그런데도 빳다 한 대 안 맞았단 말이지?”
“점호시간에 아이들 빤쓰까지 까 내려놓고 빳다 맞은 자국이 있나 살펴보고 혹시 내무사열 때 물으면 절대로 맞았다고 하지 말라던 놈들이 감히 때릴 수 있겠나 싶은 생각이 적중 한 게지.”
“굼벵이 구르는 재주 있다더니 이 자식 군대 가더니 배포도 커졌고 인간 됐네.”
“야 인마 이건 상관을 기만한 벌주다. 폭탄주 일 배!”
봄도 아닌 여름도 아닌 5월 중순 어느 일요일. 면회 온 친구 다섯 명과 그는 부대 근처 대폿집에서 훈련병 시절 ‘고문관 사건’ 이야기로 좌중의 중심이 되어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사단장 관등 성명을 더듬거리다 잊어버린 ‘사실’을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으로 ‘각색’ 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가 사실인 것은 틀림이 없다.
저녁 무렵 귀대할 때 그는 헌병백차처럼 ‘만 땅’이 되었다. 건들건들 연병장으로 들어서니 병사들 사이에서 ‘사나이’로 통하는 일직사령 라 소령(羅 少領)이 술 먹은 귀대 자들을 따로 집합시켜 놓고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너! 술 얼마나 마셨어?”
“옛! 석잔 마셨습니다!”
“이쪽으로!”
“넌 얼마나 마셨어?”
“옛! 한 병마셨습니다.”
“저어 쪽으로!”
그는 만취한 가운데에서도 두세 잔 먹었다고 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 하는 게 유리할까 하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굴리다가 슬그머니 호승심(好勝心)이 발동하여 모험을 하기 로 하였다. 라 소령이 앞에 오자 일부러 더욱 건들거렸다.
“이 녀석 봐라?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네. 넌 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옛! 일병 공.영.태! 소주 다섯 병에 맥주 다섯 병 폭탄주로 마셨슴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일직사령 라 소령 앞이다. 호랑이 앞에 윗옷을 벗는 꼴이다. 그런데 기막힌 반전이 일어났다. 라 소령이 통쾌 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좋아! 사나이가 그 정도는 마셔야 사나이지. 이 봐 주번하사! 이 사나이 내무반으로 데려가서 바로 취침시켜! 주번사관 여기 이놈들, 소주 한 병 이상 마신 놈들은 연병장 한 바퀴! 나머지 놈들은 열 바퀴 구보 시켜! 소주 두 세잔에 비틀거리는 놈들은 사나이가 아니야! 체력단련부터 시켜. 실시!”
두세 잔 먹었다고 얕은 수 부리던 자 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고 만취한 졸병들이 행여 고참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슬기롭게 조치하는 ‘사나이’ 라(羅) 소령은 지장(智將)임에 틀림이 없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자체 내무사열이 있었다. 라 소령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대동하고 그의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간단하게 내무사열의 취지와 함께 정훈교육을 하고 그에게 불쑥 질문을 했다. 그때의 만취사건을 기억하고 그를 지목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것이다. 귀관! 일석이조가 뭔가?”
“옛! 일병 공.영.태! 병살탐(倂殺打)다!”
중대장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째서 병살타 인가?”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거나 공 하나로 두 사람의 주자를 잡는 거나 똑 같슴다!”
“귀관! 일석이조는 이득을 보는 것이고 병살타는 손해를 보는 것인데 어떻게 같은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이득을 보는 검다!”
순간 라 소령은 이놈 봐라 하는 어이없는 표정이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생각의 역발상이 훌륭하다. 그리고 그 배포가 사나이답다. 배포 있는 병사를 육성하는 것도 전투력 향상이고 지휘관의 능력이다. 이상 3내무반 내무사열 끝!”
그날이후 그는 부대 내에서 ‘병살타’로 불리며 명물이 되었다. 군대생활에서 얻은 세 번째 별명이다. 사병들은 물론 장교나 부사관 까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중대장을 배포 있는 병사를 육성하여 전투력을 향상시킨 능력 있는 지휘관으로 평가 받게 한 유공자다. 따라서 훈련소 만 큼은 아니지만 군 생활을 비교적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비는 지치는 기색도 없이 낡은 포장마차 지붕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막대기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용케도 버티고 있다.
과거(科擧)에 낙방하여 평생 글만 읽고 있는 가난한 선비의 집처럼 포장마차 곳곳에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신흥 재개발지역 아파트단지의 대로변에 역삼각형 모양의 공터 일부와 인도를 물고 포장마차 세 곳이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장사를 시작하고 마쳤는데 오늘은 장마철 보다 더 기세등등한 가을비 탓으로 두 곳은 벌써부터 허리가 질끈 묶인 채 텃밭의 허수아비처럼 서있고 그와 술동무가 된 ‘아지매’ 포장마차는 비가 새건 말건 여전히 영업 중이다. 소문에 의하면 재개발당시 턱없이 요구한 땅값 때문에 자투리로 남게 되었는데 단독으로 건물을 짓기에는 면적도 적고 모양도 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 땅 주인의 부아를 지른 것은 구청에서 미니공원을 조성한다고 터무니없는 값에 팔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내심 후회하고 있던 땅 주인이 약이 올라 절대로 안 판다고 했다는데 그 맹세가 지켜지기만 한다면 ‘아지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행운이 될 것이었다.
‘행복 하니까 웃는 것이 아니고 웃으니까 행복 해진다.’는 웃음강좌나 건강강좌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열광하는 청중이 명연설을 하게 만드는지 명연설이 청중을 열광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군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니까 그가 신이 나서 떠드는지 그가 신이 나서 떠드니까 ‘아지매’가 재미있게 듣는지 모를 일이다.
늦가을 서리 맞은 홍시처럼 검붉은 얼굴 빛깔로 보아 두 사람 모두 만취가 됐을 법도한데 자존심 대결이라도 하는 듯이 그도, ‘아지매’도 먼저 항복을 하지 않는다.
올해는 추석이 9월 중순에 들고 있어 8월 초순부터 영업 부서는 추석특수를 겨냥한 선물세트 수요예측과 이벤트 계획 등으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최근 3년간 추석 성수기 품목별 판매실적 분석을 내 놓아라’
‘전년도 판매실적이 가장 우수했던 상위 5위까지의 품목과 올해의 전망치를 내 놓아라’
‘경쟁사의 가장 인기 있는 제품과 대안을 내 놓아라’ 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본사로부터 온갖 주문들이 쏟아졌다. 그를 포함하여 열세명의 영업과 직원들이 ‘지상목표 달성을 위한 영업계획’에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사원자질향상교육’ 이 있다는 사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추석이 코앞인데 계획 되어있는 교육도 연기해야할 판에 자질향상 교육 좋아하네.”
“사장님 특별지시라나? 외부초청강사가 온데.”
“강사가 미모의 아가씨라며?”
불만은 영업과 직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이삼십 대의 아가씨로부터 ‘특별교육’을 받아야 할 만큼 사원들 자질이 형편없다는 것이냐며 빈정거리기도 하고 ‘사장’의 자질부터 향상시켜야 한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서도 ‘미모의 아가씨’라 하여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는데 강사는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미모의 강사라고 할만도 했다. 그러나 강의내용은 ‘사원들 자질을 향상’ 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의 속담이나 격언과 위인들의 어록과 명언들을 죽 나열하는 식이었다.
“집에서 배달해준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것입니다.”
아까부터 참고 참았지만 군대에서 단련된 호승심이 기어이 그를 부추기고 말았다.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강사 아가씨는 여유가 있었다.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예. 말씀 하세요.”
“그렇다면 집에서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보다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이 더 유식 합니까?”
순간 교육장은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의 질문은 마른장마처럼 습하고 뜨거운 바람만 불던 짜증스런 교육장에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되었다. 강사 아가씨도 어쩔 수 없이 같이 따라 웃긴 했지만 불쾌한 표정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강의는 계속 되었다. 직원들은 자질향상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거나 게임에 빠져있고 강사는 혼자서 동서양을 넘나들며 명언과 격언들을 열심히 낭독하고 있으니 교육을 받는 사람 따로, 교육을 하는 사람 따로 완전 따로국밥이다.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그의 휴대폰이 바르르 떨었다. 입사동기이자 단짝친구인 순광(安淳光)이 가 문자를 보내왔다.
‘저 많은 명언들을 어디서 주워 왔을까? ㅋㅋ’
‘강의내용도 뭐도 순꽝 이다. ^^’
순꽝은 순광이 의 이름에 빗데 ‘순전히 꽝’이라고 놀려 데는 별명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앞에 부정사가 있어 순전히 꽝이 아니라서 ‘안 순광’이라며 허허 웃어넘기는 마음이 넉넉한 친구이다.
‘도탄에 빠진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한방 더 날려라 제발. ㅠㅠ’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균형 잡기가 참 어렵다. 핸들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고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자전거가 넘어가는 쪽으로 몸을 맡기면 되는데 반대편으로 힘을 기울이다가 결국 넘어지고 만다. 여강사의 강의가 꼭 그랬다. 위태위태하더니 결국 그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습니다.” 고 하자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슴다!”
이번에는 듣기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놀린다고 오해 할 수도 있는 군대식 말투이다. 교육장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였다. 아까처럼 시원한 홈런 한방 날리라는 응원의 눈길 같았다.
“그렇다면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일찍 일어나는 새의 아침식사 거리가 되고 마는데 늦잠 자는 벌레가 장수 한다고 해야 합니까?”
관중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래저래 억눌러왔던 불만을 강사에게 분풀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찍 일어나서 배를 채우는 ‘새’가 있으면 새의 식사 거리가 되는 ‘벌레’가있다. 하찮은 노름판에도 돈을 ‘따는 놈’이 있으면 ‘잃는 놈’이 있다.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음(陰)과 양(陽)이 조화를 이루면서 굴러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교육을 받던 직원들은 지금까지 쌓였던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되었고 강사는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불행 하게도 그녀 에게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도, 포용할 아량도 없었다. 수강생들에게 계획적으로 놀림을 당하고 조롱당했다는 생각에 분하고 괘씸하여 울면서 교육장을 뛰 쳐 나가버렸다.
기세 좋게 내리던 비는 ‘아지매’ 포장마차 보다 먼저 마무리 할 모양이다. 잔설거지 하듯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힘겹게 버티고 있던 막대기둥도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다. 입가심 하려는 술꾼들 두 서너 패가 기웃거리다가 빈 탁자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의자를 보고는 돌아가 버렸다. 초저녁부터 ‘레스토랑’을 전세 낸 재벌이라도 된듯하던 그의 호기도 비와 함께 잦아들었다. 그는 지갑에서 오만 원 짜리 두 장 을 꺼내어 ‘아지매’앞으로 쓱 내밀었다.
“이기 먼데?”
“오늘 하루 포장마차 전세 값.”
“문디 자슥 누가 술값 내라 카드나.”
“그냥 넣어두쇼. 그래야 내 맘이 편하지.”
“따끈한 우동이라도 한 그릇 묵고 가거라. 그래야 내 맘도 편해진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를 ‘아지매’가 기어이 눌러 앉혔다. ‘아지매’는 돼지고기 연탄불 석쇠구이 한 접시와 우동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가지고 왔다.
“일차는 니가 냈고 이차는 내가 낸다. 지금부터 이차 데이.”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지고(會者定離), 헤어진 자는 반드시 만난다(離者定會)고 했던가. 그는 오늘 지사장 앞에 사직서를 내 던지고 나왔다. 3년 남짓 만났던 이들과 헤어진 것이다, 물론 제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픈 건 동료 직원이자 연인 사이였던 상희(申祥姬) 와의 헤어짐 이었다. 회사 앞에서 맨 처음 오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서 맨 첫 번째 포장마차에서 죽도록 퍼 마시리라 했는데 운 좋게 ‘아지매’를 만난 것이었다.
“와 죽을상을 해갖고 왔드노? 불쌍해서 못 보겠더만.”
“고문관이 삼팔선 넘어와서 병살타를 치고 나서 술독에 빠져 죽으려고 했지요.”
“먼 소린동 모르겠다. 차근차근 말해봐라.”
자질향상 교육이 끝나고 거래처로 막 출장을 가려는 참인데 지사장실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지사장실에는 뜻밖에도 ‘명 강의’를 한 여강사가 있었다.
“오! 공 영태 씨 인사하게. 거 왜 명성그룹 있잖아. 우리 회사 사장님과 친형제처럼 지내시는 명성 회장님 막내이자 고명딸이신 미쓰 윤 일세.”
여강사는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는 듯이 오만한 자세로 고개를 까닥 하였다. 지사장의 저자세와 여강사의 오만한 자세가 그의 비위를 확 긁어 놓았다.
“명 강의 잘 들었습니다.”
그의 말은 ‘꽈배기’처럼 비비 꼬여 있었다. 여강사의 얼굴이 잠시 붉어 졌다. 지사장은 ‘너’의 지금 태도로 보아 충분히 오늘사태를 짐작 하겠다는 표정이다.
“오늘 일 정중히 사과해! 공 영태 씨가 대표로 사과 하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시니까!”
“누구에게 어떤 사과를 하라는 건지, 그리고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죠.”
“아니 이 사람이? 강의시간에 직원들을 선동해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망쳐놓고도 뻔뻔하긴!”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공주마마’ 면전에서 송구스러워 쩔쩔 매고 있는 지사장을 무시하고 그는 여강사 미쓰 윤 에게 따져 물었다.
“강사 아가씨! 강의시간에 질문하는 것이 사과 할 일입니까? 그것이 선동입니까?”
“이봐, 공 영태! 손님에게 무슨 무례인가! 지금 태도만으로도 사과 드려야 할 일이 아닌가!”
적어도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지사장은 속물근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살찐 돼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중히 사과하라는 게 사장님 지시사항입니까? 아니면 지사장님께서 알아서 기는 겁니까? 아가씨는 강의내용을 팔러온 세일즈맨이고 내가 고객이자 손님이 아닙니까? 사과는 강의도중에 고객을 팽개치고 뛰쳐나간 강사가 해야지요!”
“야! 너! 뭘 믿고 까불어! 회사 그만 다니고 싶어?!”
‘김 미경’이 같은 명강사가 되는 게 꿈이라는 윤 회장님 막내 따님이 첫 강의를 대구지사에서 할 것이니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는 사장님의 ‘당부말씀’을 떠올린 지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극도로 흥분해 버렸다. 그에 대한 호칭이 ‘오! 공 영태 씨’에서 ‘이봐, 공 영태!’로 바뀌더니 ‘야! 너!’로 바뀌었다. 더 이상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사장의 책상위에 있는 사내 전화수화기를 들고 관리과로 돌렸다. 공교롭게도 경리업무를 맡고 있는 상희가 전화를 받았다. 순간 그는 멈칫 했으나 이왕에 내친 길 이었다.
“수고 하십니다. 지사장실로 사직서 용지 한 장 보내 주시겠습니까?”
상희가 사직서용지를 들고 지사장실로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냐고 그에게 눈짓으로 물었으나 애써 외면해 버렸다. 상희가 못내 미심쩍어 하면서 지사장실을 나가자 그는 사직서를 작성하여 지사장 앞에 내밀었다.
“믿는 곳도 개뿔도 없이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지사장님처럼 강사를 회장 딸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사과를 못하겠습니다. 회사 그만 다닐 수밖에 없네요.”
사직서를 읽고 있던 지사장의 솥뚜껑 같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비꼬는 말투도 참기 어려운데 사직사유에 ‘더러워서 그만둠’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노로 말문이 막혔는지, 아니면 ‘공주마마’앞에서 체면유지에 안간힘을 쓰는지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사장의 반응에 훈련병시절 ‘고문관사건’ 같은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강사 에게도 한마디 쏘아붙이고 지사장실을 나와 버렸다.
“아가씨. 내가 보기에는 강사가 될 만한 실력도, 자질도 없어 보입니다.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는 속담 들어 본적 있나요? 오늘 맛없는 국에 입천장 데고 갑니다.”
미쓰 윤의 얼굴에 생긋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가 보았더라면 비웃는다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사표는 와 내노. 아니꼬워도 사과 하고 말지. 엄마하고 아부지가 아시믄 얼마나 속이 상하겠노.”
“엄마와 아버지! 참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초등학교 4학년 이었으니까 열 살 때 함께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오늘처럼 이렇게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그의 눈가에 잠시 이슬이 비쳤다. 위로 누나 셋과 형이 있어 외롭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그의 앞에서는 금기시된 단어였다. 형과 누나들은 엄마와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가 들어오면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려버렸다. 형과 누나들과 함께 엄마 아빠 이야기도하고 실컷 울어보고도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를 위한 배려였지만 그게 늘 불만이었다. 열다섯 살 위인 형님과 형수님이 부모 이상으로 그를 키웠지만 구멍 난 그의 가슴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비가내리면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창가에서 혼자 눈물을 삼킬 때 말없이 안아주던 엄마 같은 형수님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때부터 그는 안으로만 파고드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된 것 같았다.
“세상에! 그랬구나. 그랬구나. 쯧쯧쯧....”
연신 혀를 차는 ‘아지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형수님 같은 여자가 있는가 하면 수틀리면 재빨리 손익계산서를 들이미는 영악한 여자도 있네요.”
첫 직장이었고 평생을 함께할 상희를 만나게 해준 곳이었다.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을 상희로부터 위로 받고 싶었다. 그런데 지사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상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을 하고서 선언하듯이 한마디 하였다.
“우리 그만 만나! 헤어져!”
그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덜컥 사표를 내버려서 단단히 화가 났구나 싶었다.
“미안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가족이야 굶건 말건 알량한 자존심만 내세우는 무능한 남자는 우리아빠 하나 만으로도 숨이 막혀. 아빠 같은 사람하고 평생을 같이 살 자신이 없어. 미안해.”
이번엔 그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상희와 같은 표정으로 한마디 하였다.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을 수도 없이 겪을 텐데 그때마다 비굴하게 살아가라고 강요할 여자하고는 나도 평생을 같이 살 자신이 없다. 그런데, 아빠! 하고 부를 때 대답해 주는 숨 막히는 아빠라도 있는 네가 부럽다. 좋은 사람 만나라.”
“아지매! 그래서 오늘 내가 군대별명 값 했다 이겁니다. 직장 떨어지고 여자 친구 떨어지고 보기 좋게 병살타를 쳤단 말입니다. 고문관이 삼팔선을 넘어와서 병살타를......”
자꾸만 잠이 온다. 아니 나락으로 떨어진다. 취기가 머리 꼭대기 까지 올라온 것 같다. 그는 ‘아지매’ 에게 지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다가 탁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라(羅) 소령이 ‘사나이가 소주 두 세잔에 이 꼴이 뭔가!’ 하면서 지휘봉으로 그의 배를 쿡쿡 찌른다. 그는 ‘아님다! 소주 다섯 병 마셨슴다!’ 하고 소리쳤으나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놈 이거 벙어리 아니야?’ 하면서 놀린다. 여기저기서 ‘고문관 임다!’ ‘삼팔선 임다!.’ ‘병살탐 다!’ 하고 놀려댄다. 살찐 돼지 같은 지사장 도 있고, 중대장과 내무반장도 있다. 아! 그런데 상희도 있다. 상희는 여강사와 같이 깔깔 웃으면서 그를 놀린다. ‘상희야! 너는 그러면 안 돼! 상희야 너 만은!’ 그는 왠지 모를 설움에 북 받혀 흐느껴 울었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준다. ‘엄마다! 아! 엄마다! 엄마 왜 이제야 왔어?’ 도대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정말 벙어리가 된 것일까? 엄마의 눈에 가득고인 눈물이 그의 얼굴위로 떨어진다.
그가 탁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자 ‘아지매’가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아들 생각에 참아왔던 눈물이 그의 얼굴위로 떨어졌다. 아들은 대학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왔다. 복학할 기간 동안 피자집에서 알바를 하였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오토바이로 배달 가다가 빗길 교통사고로 먼저 가버렸다. 비오는 날은 ‘아지매’의 가슴속에서도 비가 내렸고 취하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비가 왠수 구나. 이 왠수 같은 비 땜에 나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니는 엄마 아부지를 가슴에 묻었구나. 팔다리 성한데 묵고 사는 거 걱정할거 없데이. 세상에 반이 여잔데 서러워할 거도 없데이.”
‘아지매’는 그가 꼭 하늘나라에서 잠시 내려온 아들인 것만 같았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굵은 눈물방울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주르륵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그 시각 ‘공주마마’가 명성그룹 ‘윤 회장님’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아빠.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우리 회사로 데려와. 약속해. 꼭이야 꼭!”*
2014. 10. 3.
첫댓글 연강 선생, 드디어 병살타가 떴군요, 거국적으로 환영합니다,
일본출장을 다녀와서 5월16일 이후에 한 꼬뿌 합시다.
琴川 선생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본 잘 다녀 오십시요. 한 꼬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江 然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