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 /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의 헛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당나라 현종때 도사 여옹(呂翁)이 예전의 조나라 수도였던 한단으로 가던 도중 주막에서 가난한 청년 노생(盧生)을 만났습니다. 노생은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누려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막집 주인이 밥을 짓기 시작하는데 노생이 졸고 있자 여옹이 베개를 주면서 그것을 베고 자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생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결혼하고 수상이 되었다가 모함으로 귀양살이도 하고, 다시 복직하여 많은 손자를 두고 80세까지 잘 살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품을 하니 이 모두가 꿈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막집 주인은 아직 밥을 다 짓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옆에 앉아있던 여옹이 인생은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노생은 그 가르침을 명심하겠다고 감사하며 한단을 떠났습니다. - 심기제(沈旣濟)의 침중기(枕中記) –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지난 며칠간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꿈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들이 따르던 예수라는 분을 통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터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예수라는 분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분은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 옛날 다윗처럼 용맹하게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한단지몽’과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유대인들은 ‘호산나’ 외치며 그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외침과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꿈과 희망은 모두 십자가에서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습니다. 예수의 생전에 그를 따랐던 이 두 제자는 꿈같았던 한 때를 기억하며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는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가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 한바탕 도성 예루살렘을 시끄럽게 했던, 그리고 온 유대를 들썩이게 했던 예수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집에 당도하자 그 사람에게 자신들의 집에서 유숙하고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음식을 먹을 때 그 사람이 감사 기도를 하고 나누어 먹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예수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생시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생시인지, 아니면 부활의 주님을 몰라 보는 이 세상이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거나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믿습니다!”를 외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에게 부활은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부활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지 않으면, 부활은 우리의 참된 미래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부활은 ‘한단지몽’처럼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계몽의 사건이 아니라, 참된 우리의 실존을 말해 줍니다. 궁금증을 갖고 질문해 보십시오. 부활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