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一)
지극히 높은 것은 하늘이니 하나뿐이고 낮은 것은 만 가지이다. 지극히 밝은 것은 태양으로 하나뿐이고 어두운 것은 만 가지이다.
사람은 하나로써 영장(靈長)이 되고 못난 것은 만 가지이다. 성인은 하나로써 통달하고 막힌 자는 만 가지이다. 다닐 수 있는 길은 한 가닥이고
한 가닥 이외에는 가시덤불이다. 활쏘기를 할 수 있는 과녁은 하나일 뿐이고 과녁 하나 이외에는 텅 비어 있다. 하나의 그림쇠 이외는 원(圓)이
없고, 하나의 먹줄 이외는 직선이 없다. 천하의 만사(萬事) 중 선(善)ㆍ시(是)ㆍ귀(貴)에 속해 있는 것은 모두 1일 뿐이다. 1을 얻으면
고명(高明)하고 영성(靈聖)하니,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1을 잃으면 전후좌우가 모두 깊은 구덩이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선(善)한 자는 적고 불선(不善)한 자가 많은 것을 보고 도리어 선행에 대해 태만하니, 그 또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선한
사람이 많다면 어찌 선을 귀하게 여기며, 하늘과 같이 높은 것이 많다면 어찌 하늘을 높게 여기겠는가.
이(二)
천하의 이치는 1이 아니면 생겨나지 못하고, 2가 없으면 완성할 수 없다. 천지와 남녀는 둘이 서로 짝하여 합한 것이고, 물과 불,
흑과 백, 옥과 돌은 서로 상반되어 둘이 된 것이다. 대자(對者), 병자(並者), 양자(兩者), 쌍자(雙者)가 있으니, 모두 단독이라면 불가한
것이다. 선과 불선 역시 상대가 되니, 만일 불선이 없다면 어찌 선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그러므로 불선을 “선의 두 번째이다.〔善之貳〕”라고
말해도 괜찮다.
“다른 산의 돌을 가지고도 옥을 갈 수
있네.〔他山之石 可以攻玉〕”라고 하니, 불선이 있은 이후에야 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도 괜찮다.
삼(三)
1과 2가 사귀어 3을 낳으니, 3은 자식이 태어나 아버지를 계승하는 도(道)이다. 3이 없으면 2가 공허해지고 1이 그치게 되니,
천지의 이치가 사라지게 된다. 3이 된 이후에야 오래갈 수 있고, 단단할 수 있고, 공정할 수 있으며, 넓고 클 수 있고, 곧고 평평할 수
있고, 다투지 않을 수 있고, 스승을 섬길 수 있다. 비록 그렇지만 셋으로 갈라지면 덕을 망친다. 3이란 1이 행하는 이유이다. 《시경》에
“해치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不忮不求〕”라고 하고, 《주역》에
“사람과 함께하기를 들에서 한다.〔同人于野〕”라고 하니, 3의 의미가 크도다.
선(善) 넷째
선(善)은 천하의 바른 이치이고, 사물의 떳떳한 법칙이다. 만일 떳떳함에서 변치 않으면 하늘의 서리ㆍ눈ㆍ우레가 모두 인(仁)이다.
만일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사람의 증오와 사형 집행도 모두 선이다. 만일 올바른 이치를 어기고 떳떳한 법칙이 아니면, 비록 공손과 삼감,
은혜와 사랑, 염치와 신중함이라도 모두 선이 아니다. 만일 이치에 합치되고 그 법칙을 따르면, 순(舜)이 요(堯) 임금의 온 천하를 전수받았지만
탐욕이 되지 않고,
무왕이 정벌할 적에 적의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가 떠내려 갈 정도였지만 잔인함이 되지 않고,
주공이 50개국을 멸망시켰지만
잔학함이 되지 않는다.
천만 명이 칭찬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천만 명이 험담하더라도 흔들림이 없으며, 천지의 신기(神氣)에게 물을 수 있고 천만 명이 있더라도 나는 가서 대적하겠다는
의지와 용기가 있다. 이 때문에 크게는 천지를 꽉 채울 수 있고, 자기 몸에 보존해서는
형체를 실천해서 천성(天性)을
완성하고, 멀리는 넉넉함을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이는 바른 이치의 실제 증험이고 떳떳한 법칙의 최대 공효(功效)이다. 가장
못난 자의 한 가지 선이라도 충분히 이름을 이룰 수 있다.
세상에는 나약한 한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불의(不義)를 거부할 줄 모르고
불인(不仁)을 미워할 수 없으며, 널리 사람들과 친애하여 거슬림이 없고, 겉모습을 조심히 행동하여 결점을 거론할 수 없는 자이다. 이는
유악(柔惡)한 사람이니, 그가 망하기는 발꿈치를 들고도 기다릴 수 있다. 어떤 이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선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로 삼고 있으니, 매우 심하게 미혹된 것이다.
명(命) 다섯째
이미 정해져 절로 그러한 것이 명(命)이다. 이전에 정해졌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다. 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당연히 구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통달한 사람은 얻어도 기뻐하지 않으니 요행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얻지 못해도 근심하지 않으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 요행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진의(袗衣)를 입고 거문고를 타는 것을 본디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하였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나물밥을 먹고 물 마시며 팔을 베고
눕더라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 본디 가지고 있던 것처럼 하기 때문에 가득 차지만 넘치지 않으며,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남을 의지해 부여잡지 않는다.
소인의 경우 그렇지 않아 요행히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긴다. 내 아첨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치질을 핥는 비굴한 짓에 이르고, 내 부정한 방법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시역(弑逆)에까지 이른다. 이는 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말하기를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사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모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주를 보는 어떤
사람이
“최열(崔烈)의 운명을 점쳐 보니 응당 부정한 방도로 삼공(三公)이 될 것이다. 만일 돈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여 5백 금을 바치지 않았다면 사도(司徒)라는 자리가 저절로 찾아왔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음과 같이 답한다. 사도가 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진정 명을 아는 자는 논하지 않는다. 《맹자》의
‘무너지려는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에 통달한 자만이 더불어 명을 말할 수 있다.
시(時) 여섯째
군자는 명(命)을 알아 의(義)로써 때를 마름질하고, 소인은 명을 무시하여 자신을 위해 때를 좇는다. 때를 마름질하는 사람은 때가
명과 함께한다. 때를 좇는 자는 언제나 때가 아닐 때가 없다. 때가 명과 함께하기 때문에 때는 좋았지만, 공자와 맹자는 끝내 지위를 얻지
못했고, 우 임금과 안연은 같은 도(道)를 추구하였지만 실제 일은 달랐다. 때를 가리지 않는 자는 벽을 뚫고 담을 넘어 좀도둑질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또한 무슨 때가 있겠는가.
작(作) 일곱째
작(作)을 그치지 않아야 마침내 군자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작이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이 작이다.
이 작(作)은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공부에 스스로 힘을 쓰고, 선행을 하는 데에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군자가 되는 이유이니, 자신의
인격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의식하여 작하는 사람에게는
겉치레만을 꾸미는 것이 작이고,
은근슬쩍 불선(不善)을 숨기는 것이 작이고, 말만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것이 작이며, 애써
참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것이 작이다. 이 작(作)은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왕망(王莽)이 초야(草野)에 있을 때 선비에게 공손했던 일과
조조(曹操)가 자신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 일은 그릇된 작(作)이 심한
경우이다.
미(微) 여덟째
형체가 있는 미세한 사물 중 물이 가장 미세하다. 그 본체가 미세하기 때문에 적시고 깊으며, 아래에 있기 때문에 두텁게 쌓여 만물의
어머니가 되고 원기(元氣)의 수레가 되니, 대륙을 실어도 가라앉지 않고 보물을 꺼내도 고갈되지 않는다. 큰 것으로 말하자면 어느 것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이 때문에 미세한 것을 미세하게 여기는 사람은 큰 것을 이룰 수가 없다. 《시경》에
“오직 문왕만이 조심하여 삼가네.〔維此文王 小心翼翼〕”라고 하고, 또
“온순하고 공순한 사람은 덕의
기초로다.〔溫溫恭人 惟德之基〕”라고 하니, 미세함을 제대로 행했다고 말할 만하다.
정(靜) 상 아홉째
정(靜)은 만물의 근본이고, 동(動)하는 것은 물건이니, 동은 반드시 정을 체(體)로 삼는다. 하늘에 북극성이 없으면
칠정(七政)을 행할 수 없고, 사시(四時)를 운행할 수 없다. 땅이 두텁지 않으면 산과 바다를 실을 수
없고 여러 물건을 낳을 수 없다. 사람은 미발지중(未發之中)이 아니면 여러 이치를 주재하여 만사(萬事)를 응대할 수 없다. 나무에 꽃을 활짝 필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고, 물이 넘실넘실 흐를 수 있는 것은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방 안으로 들어가 편안히 쉬기 때문에 하루 종일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다. 밭 갈고
물고기 잡으며 종신토록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사해의 백성들이 순 임금의 공(功)을 모두 떠받들었다. 백리해는 소를 살찔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진(秦)나라의 패업(霸業)을 보좌할 수 있었다. 장량은
적송자(赤松子)의 마음으로 유악(帷幄)에 있었기 때문에 서한(西漢) 시대에 공과 덕을 온전히 세운
사람이 되었다.
봄잠을 자던 선비는 국사(國事)에 진력을 다할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만고(萬古)에 전해졌다.
황제의 증손(曾孫)을 보호했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은 병길(丙吉)의 분수에 걸맞은 정(靜)이고, 약갈라(藥葛羅)가 절한 것은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의 신령한
정이니, 정의 쓰임이 크도다.
정(靜) 중
정(靜)이 아직 극진하지 않은데 동(動)하는 것은 망녕되이 움직이는 것이니, 동하더라도 반드시 막힌다. 정이 극진하면 절로 동하니,
절로 동한 것은 반드시 뻗어 나가 막을 수가 없다. 천지의 양(陽)은 동지(冬至) 자시(子時) 반(半)에 생기고, 사람 몸의 양은 매일 자시에
생긴다. 정이 극진한 것은 생기는 징후이고 떠오르는 초기이고, 차오르는 시작이다. 천지가 돕고 귀신이 보호하니,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정(靜) 하
사람의 우환은 정(靜)할 수 없는 데에 있다.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의 임금은 임금답게 안정할 수 없었고, 주공과 소공 이후의
신하는 신하답게 안정할 수 없었으며, 춘추 시대 이후의 선비는 선비답게 안정할 수 없었다. 정의 경우 욕심이 적은 자만이 제대로 안정할 수
있다. 일상의 말과 행동이 어디를 가든지 체(體)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조급하게 분주하면 반드시 넘어지고, 경쟁하여 내달리면 반드시
손상한다. 진수성찬을 차린 큰 밥상이라도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맛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목이 멘다. 음악이 연주되더라도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면
즐기지 못하고 반드시 탄식한다. 세상 사람들은 안정되지 못한 마음과 행동으로 부귀를 빨리 추구하려고 하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를 얻은 자가
없으니, 더구나 누릴 수 있겠는가.
분(分) 열째
하늘은 높고 땅은 낮기 때문에 세상이 설 수 있고, 해는 크고 달은 작기 때문에 사물이 변화하는데, 이는 분수가 절로 그러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분수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사물도 없어 차례가 없이 혼란스러울 뿐만이 아니다. 크게는 삼강오륜, 작게는
귀신(鬼神)ㆍ기물(器物)ㆍ음식(飮食), 세밀하게는 동정(動靜)ㆍ말ㆍ웃음 모두 분수가 아닌 것이 없다. 분수를 얻으면 길하고, 얻지 못하면
흉하다. 그보다도 한 국가의 존비(尊卑)에 관한 구분이 무너져 내리면 모든 집의 기물이 모두 그 쓰임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모든 사람의 음식과
말ㆍ웃음이 모두 그 타당함을 잃게 된다.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만물이 길러지지 않게 되어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니 두려워할
일이다.
허(虛) 열한째
하늘의 마음에는 사사로운 사물이 없기 때문에 허(虛)하다. 허하기 때문에 움직이되 끌어당기지 않고, 운행하되 쉬지 않으며
칠정(七政)이 추락하지 않고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높아서 넘어갈 수 없고 강건하여 함부로 대할 수가 없으니, 실제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에 사사로운 의도가 없으면 허하다. 허하기 때문에 온갖 변화에 응대하고 만물을 주재하여 여러 선(善)이 모인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허(虛)는 외물이 침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유구하게 지속하면서 훼손되지 않는다.
실(實) 열두째
실(實)은 얻음과 잃음이 있다. 나무는 실하기 때문에 꺾이고, 금(金)은 실하기 때문에 깨지고 흙은 실하기 때문에 무너진다. 물과
불은 허(虛)하기에 잃음이 없으나, 그래도 형(形)과 색(色)이 있기에 물은 마르고 불은 꺼진다. 오직 기(氣)만이 형과 색이 없기 때문에
천지를 실어도 쓰러지지 않고, 천지가 없어져 다하도록 장구하게 존재한다. 이 때문에 마음이 꽉 들어찬 자는 괴팍할 뿐이고, 창고가 가득 찬 자는
잔학한 짓을 하다가 뒤엎어진다. 성인은 부실(不實)을 실로 삼는다.
승(勝) 열셋째
이기려는 자는 반드시 진다. 늘 이겼던 자는 반드시 패배한다. 이기려는 마음이 사사로움이니, 이기려는 사심을 지닌 자는 사물에
부림을 받기 때문에 사물을 이길 수가 없다. 사물이 이기게 되면 패배하는 것이다. 의(義)를 모아 호연지기를 기르면, 내가 만물을 부릴 수
있다. 내가 사물을 이겨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니,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항상 펼 수 있어
한 번도 지지 않는다.
시(猜) 열넷째
시기심은 여러 악(惡)의 근본이고 모든 선(善)의 원수이다. 남을 해침으로써 스스로를 해치고, 나라를 망침으로써 제 몸까지 망치고,
천하를 전복시킴으로써 제 집까지 전복시킨다. 시기심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은 없으니,
서부인(徐夫人)의 비수는 그에 비하면 무딘 것이다. 시기심보다 더 큰 침략은 없으니, 견융(犬戎)은
이에 비하면 세세한 것이다.
공공(共工)ㆍ환두(驩兜)ㆍ조고(趙高)ㆍ
조절(曹節)의 흉악함은 그 근본이 시기심이며,
정위(丁謂)ㆍ
장돈(章敦)의 악행도 그 근본이 시기심이다. 만고(萬古)에 크고 작은 천백 가지 악이 시기심에서
근본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가장 두려운 경우는 소식(蘇軾)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왕안석이 끝내 훌륭한 선비가 되지 못한 것이니,
모두 시기심이 그 근본이다. 더욱 애석한 경우는
이광필(李光弼)이 근심 속에서 죽고, 부필(富弼)이 위공(魏公
한기(韓琦))과 사이가 좋지 않고,
장준(張浚)이 이강(李綱)과 화합할 수 없고 곡단(曲端)을 보호할 수 없었으니, 모두 그 마음이 착하고 포용력이 있어 남의 재능을 자기가 지닌
것처럼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주역》에
“하늘과 불은 동인이다.〔天與火同人〕”라고 하고, 또
“불이 하늘 위에 있는 것이 대유이다.〔火在天上大有〕”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지극하도다.
공(恭) 열다섯째
공손은 덕(德)의 기반이다. 그러나 지나친 공손은 덕의 적(賊)이고, 지나친 공손은 스스로를 속임이 심한 것이다. 스스로 속이는
자는 하늘을 속이기 때문에 꺼리는 바가 없다. 꺼리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공손하다. 공공(共工)ㆍ왕망(王莽)ㆍ조조(曹操)는 지나치게
공손했던 대표적인 자들이다. 그 나머지 한번 말하거나 움직이거나 웃는 공손도 모두 크게 간특함이 되니,
강직하되
예(禮)가 없는 자의 가벼운 폐해보다도 도리어 못하다. 《주역》에
“믿음이 질장구에 가득하다.〔有孚盈缶〕”라고 하고, 《시경》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법이 되었다.〔柔嘉維則〕”라고 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야 한다.
지(知) 열여섯째
공자는
“자공은 억측을 하면 자주 들어맞는다.〔賜也
億則屢中〕”라고 하였고, 맹자는
“지혜를 미워하는 것은 천착하기
때문이다.〔所惡於智者鑿也〕”라고 말하였다. 억측하여 자주 들어맞으면 그 지혜를 자신하기 때문에 지혜가 향상되지 않고,
천착하면 사의(私意)에 빠지기 때문에 지혜가 더욱 어두워지니, 이것이 성인이 훈계로 삼는 이유이다. 성인은 나면서부터 아는 데도
순(舜) 임금은 천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고, 우(禹) 임금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했고, 탕(湯)은 간언을 받아들여 거스르지 않았고, 중훼(仲虺)는 묻기를 좋아하라고 했고, 문왕은 상보(尙父
강태공(姜太公))를 스승으로 삼았고, 공자는 배우기를 싫증 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큰
지혜가 된 이유이다. 금수 역시 지각이 있지만, 배울 수 없기 때문에 막힌 상태로 생을 마친다. 오늘날의 경우 지혜가
금수보다 나은 사람이 진실로 드물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는다면, 미혹한 상태로 일생을 마치는 데에서 어찌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지혜롭고 싶은 자는 먼저 나를 버려야 한다. 나를 버린 이후에야 마음이 비워지고, 마음이 비워진 이후에야 여러
선(善)이 모이고 이치가 절로 밝아진다. 이치가 밝아지면 거울이나 물과 같다. 나로 인하여 사물을 따르게 하지 않고, 사물로 인하여 내게 가하지
않고, 사물을 나와 격리하지 않고, 내가 사물을 가리지 않아 사물과 내가 서로 비추어 절로 밝음이 있는 것, 이를 큰 지혜라고 한다.
외(畏) 열일곱째
군자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마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절로 멀어지므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끝난다.
소인은 가난을 두려워하고 비천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운 대상이 없다가 두려움으로 빠져든다. 푸른 하늘이 위에 있고 해와 달이 비추니,
우러러보면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러 사람이 주시하고 있으니, 이를 마주 대하면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어둠 속에서도 마음이
동요하고 이마에 절로 땀이 나니, 돌이켜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소인은 이런 점이 없다.
강(剛) 열여덟째
성품이 강(剛)한 자는 꺾이고, 기(氣)가 강건한 자는 망가지며, 망녕된 행동으로써 강한 자는 뒤엎어지고, 믿는 구석을 끼고서 강한
자는 망한다. 《주역》에
“곧고 방정하고 크면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直方大 不習 無不利〕”라고 하니, 군자의 강함이다.
예(穢) 열아홉째
천하에 지극히 천한 것이 분예(糞穢
거름과 똥)이다. 그러나
팔곡(八穀)과
육생(六牲)이 입에 맛있는 것은 모두 분예(糞穢)의 도움이고, 왕(王)ㆍ후(侯)ㆍ공(公)ㆍ경(卿)의
몸에 이바지하는 것은 모두 분예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안으로 지려(智慮)와 정신, 밖으로 윤택과 살찜은 모두 분예의 공(功)이다.
시(視)ㆍ청(聽)ㆍ언(言)ㆍ동(動)은 모두 분예의 힘이다. 만일 지극히 천하다고 하여 없애 버리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땅은 하늘의
거름이고, 백성은 임금의 거름이며, 불선한 자는 선인(善人)의 거름이다. 그 더러운 겉만 보고 더럽다고 하여 버려 둔다면, 이는 논밭에
농사지으면서 거름을 없애는 것과 같다.
예(譽) 스무째
남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서 기뻐하는 자는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매사에 자기를 돌이켜 생각하는 자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고, 매사에 남을 의식하는 자는 자신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자신을 중시하기 때문에 늘 크게 잘난 체하고 싶은 마음을 견디지
못한다. 남의 칭찬을 들으면 으쓱거리며 기뻐한다. 기뻐하면 망가지기 마련이다. 자기의 행동이 진실로 선(善)을 행하더라도 이는 이치상 당연한
일이니, 어찌 남의 칭찬에 기뻐하겠는가. 만일 불선(不善)하였는데 칭찬한다면 칭찬하는 자가 망녕된 것이니, 또 무엇을 기뻐하겠는가. 또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공자가 인정하고 안자ㆍ증자ㆍ염유ㆍ자공이 칭찬했다면 또 어찌하여 기쁘지 않겠는가. 만일
도척(盜跖)ㆍ환퇴(桓魋)ㆍ계씨(季氏)ㆍ진항(陳恒)이 칭찬했다면 이는 진작 죽는 것만도 못하니, 어찌 기분 나쁘다고 말할 겨를이나
있겠는가.
훼(毁) 스물한째
사람들은 남이 자기를 험담하는 말을 들으면 그 화를 견디지 못하니, 아직 생각이 부족해서이다. 내 행실이 정말 불선(不善)하여
험담을 들을 경우, 내가 이를 통해 고친다면 화낼 필요가 뭐 있겠는가. 만일 내 행실이 의리에 어긋나지 않아 불선한 자가 험담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장담하는 것도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아아, 진실로 불선한 자가 나를 험담한다면 그 자와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니, 또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당(黨) 스물두째
당(黨)이란 마음과 뜻이 서로 맞아 믿고 어긋나지 않는 명칭이다. 중니(仲尼)는 ‘너희들〔二三子〕’이라고 칭하여 ‘오당(吾黨)’으로
삼았다. 당은 나쁜 명칭이 아니다. 중니의 당이 3천 명이었으니, 큰 규모의 당이다. 그러나
염구(冉求)에 대해 북을 두드리며 성토해야 한다고 하였고,
유비(孺悲)에 대해 비파를 연주하면서 만나 주지 않고 거절하는 뜻을 밝혔으며, 자로의 비파 소리를 배척하고, 신장(申棖)의 욕심을 거론하였다. 공자 사후에 문인들이 스스로 당을 만들어 유약(有若)을 스승으로 섬기려고 하였지만 따르지 않았고, 서하(西河) 사람들이 자하를 공자라고 의심하자 꾸짖었다.그 선(善)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사로움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한 당이 되고 올바른 당이 된다. 만일 맹자가 순경(荀卿)에 대해
한비(馯臂)에게 배웠다고 하여 같은 당으로 삼았다면 맹자는 성악(性惡)의 당이 되었을 것이다.
자공(子貢)이
공손룡(公孫龍)에 대해 70여 명 공자 제자의 반열에게 참여했다고 하여 같은 당으로 삼았다면, 자공은
견백(堅白)의 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 당과 무리를 짓고자 하면 도리어 자기 몸을 망칠 것이니,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가령 노자(老子)를 배우는 사람이 마침내
구겸지(寇謙之)와
장도릉(張道陵)을 추대하여 진인(眞人)으로 삼는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세상에
있는 당이란 자기편에 대해서는 악창이 터져도 향기롭게 맡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매끄러운 피부를 종기처럼 보고 있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이 곁에서
보면 그 코에는 악창이 나고 그 눈에는 종기가 나고 있음을 절대로 모른다. 같은 당의 악창을 가리고자 자기 코에 악창을 내고, 당의 종기를
없애고자 자기 눈에 종기를 내는 짓이니, 이를 두고 마음을 상실했다고 한다.
양(讓) 상 스물셋째
겸양은 덕의 근본이다. 크게는 천지(天地)ㆍ음양(陰陽)ㆍ사시(四時)ㆍ만물(萬物)의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이 겸양 아닌 것이 없다.
작게는 정교(政敎)ㆍ행사ㆍ풍습ㆍ교화가 겸양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 가까이는 사람 몸의 팔과 다리, 손가락과 관절이 서로 겸양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으며, 이목구비와 치아ㆍ혀ㆍ입술ㆍ잇몸은 서로 겸양하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으니, 겸양의 쓰임이 매우 크도다.
겸양이란 자기의 물건을
양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단점을 버리고 상대편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이 겸양이다. 자기의 분수를 편안히 여겨 상대편에게
매달리지 않는 것이 겸양이다. 겸양하는 덕(德)이 흥기하면 천하에 사사로움이 없고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는다.
흙섬돌에서 조회 받고 순의(純衣)를 입었건만 백성이 업신여기지 않았으니 요순의 겸양이고, 상(象)을 걸어 진설하였지만 백성이 의혹하지 않았으니, 주공의 겸양이다.
서해(西海)에 겸양이라곤
전혀 모르는 나라가 있었는데, 아비가 후처(後妻)를 얻어 자랑하자 그 아들은 제 처를 내쫓고 다시 장가들었고, 공자(公子)가 얼굴에
풍양(風瘍)이 생기자 도살장에서 불을 쬐던 자가 자기 얼굴에 불을 지져 비슷하게 하였다. 귀인(貴人)이 양고기를 먹으니, 말 먹이는 자가 제
처를 팔아 양을 샀다. 그 나라 임금은 스스로를 ‘무수간(無愁干)’이라고 부르자 온 나라 사람 모두 ‘무수간’이라고 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먹어 망하게 되었다고 하니,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온다는 훈계가 두렵다.
양(讓) 하
사람이 겸양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자기가 작아지고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음은 많음의 창고이고, 상실은 얻음의 뿌리가
된다는 점을 누가 알겠는가. 겸양은 천하를 사양하는 일보다 큰 것이 없다. 만고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아직껏 없는데 요순만이 지금까지 천하를
진정 잘 다스렸다고 칭송을 받으니, 그 얻음이 많은 경우가 아니겠으며, 그 잃지 않음이 오래된 경우가 아니겠는가. 요 임금을 찬미하기를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한다.〔允恭克讓〕”라고 하고, 공자를 찬미하기를
“온순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한다.〔溫良恭儉讓〕”라고 했으니, 위대하도다.
구(久) 스물넷째
부귀를 오랫동안 누리는 것은 사람이 바라는 일이다. 쌓아서 도모하는 경우가 있고, 보관해서 도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주왕(紂王)은 녹대(鹿臺)에 쌓아 놓았지만 옥(玉)이 불태워졌고,
동탁(董卓)은 재물을 미오(郿塢)에 보관해 놓았지만 시신의 배꼽에 불이 붙었다. 부귀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재앙과 난리만 재촉한다. 도모함이 또한 엉성하지 않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둥글어 가는 달과 같다.〔如月之恒〕”라고 했는데, 항(恒)은 반달이니 항(恒)이라고 말한 뜻이
깊도다.
점(漸) 스물다섯째
태양이 뜨거워도 쇠를 녹이기에는 부족하고, 바람이 차가워도 바다를 얼리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양(陽) 하나가 순차적으로 커지는
단계를 타고 천천히 180일이 흐르기 때문에 불볕더위에 이르러 쇠가 녹지 않을 수 없고, 음(陰) 하나가 순차적으로 커지는 단계를 타고서 천천히
180일이 흐르기 때문에 매서운 추위에 이르러 바다가 얼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순차적 단계를 기다리지 않고 섣달에 햇볕이 내리 쬐고
유월(六月)에 눈이 날린다면 예사롭지 않은 재앙일 뿐이니, 어찌 정상적인 해나 바람이라고 하겠는가. 지금 사람이 하는 여러 일들이 모두 섣달의
햇볕이고 여름의 눈과 같은 꼴이니, 슬픈 일이다.
굴(屈) 스물여섯째
초목의 싹이 처음 생길 적에 반드시 굽히는 것은 환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릴 적에는 환란을 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굽힌다. 굽히기 때문에 펼 수 있다.
생(生) 스물일곱째
초목의 열매는 새싹이 나올 적에 껍데기가 열린다. 혹 뿌리가 이미 땅에 심어져 있으면서 가슴 부분에 열매가 매달리기도 하고, 혹
구부러진 데가 펴지면서 머리 부분에서 껍데기를 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가슴 부분에 열매가 맺힌 것은 크고, 머리 부분에 껍데기를 이고 있는
것은 가늘다. 크고 작은 종류가 비록 다르지만, 열매에서 떠나가지 않으니, 그 낳아 준 대상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生)을
이룩할 수 있다. 부모가 낳고 스승이 가르치고 임금이 다스리는데, 혹 매달리지도 않고 받들지도 못하면서 통달하려고 하니, 그 지혜가 초목보다
훨씬 못하다.
고(古) 스물여덟째
어리석은 사람은 옛것을 반대하고, 곡사(曲士
융통성 없는 선비)는 옛것에 얽매인다.
오직 이치를 통달한 사람만이 옛것을 따르면서도 오늘을 마름질하고, 오늘을 통해서 옛것을 이용한다. 선비들이 하는 말 가운데 “요순의 훌륭한
다스림을 오늘날에 다시 회복할 수 있다. 다스림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데 요순 시대를 회복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찌된 일인가.
요순 이후 5천 년 동안 아직까지 요순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요순 시대를 회복할 수도, 요순이 될 수도 없는 점이
분명하다.
중니(仲尼)는 요순보다 더 나았지만, 군주 중에 요순과 같은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그 다스림을 회복할 수 없었다. 더구나
중니보다 못한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탕왕과 무왕은 본성을 회복한 지극한 분이었지만, 그래도 요순보다 못했다. 더구나 탕과 무왕보다 못한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이 때문에 통달한 사람은 요순을 표준으로 삼지만, 반대하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않기 때문에 학문이 이단에 빠지지 않고,
다스림이 구차한 지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맹자 이후 오직 정자와 주자만이 요순을 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요순 같은 인물에게
천명(天命)을 주지 않았을 때에는 정자와 주자 또한 어찌하겠는가.
아, 양한(兩漢) 시대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는데, 더구나 당우(唐虞)를
다시 바랄 수 있겠는가.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위상(魏相)과 병길(丙吉)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는데 더구나 고요(皐陶)와 기(棄)를 다시
바랄 수 있겠는가. 동중서(董仲舒)와 한유(韓愈)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는데 더구나 공자와 맹자를 다시 바랄 수 있겠는가. 공자와 맹자 이후 한번
정자와 주자가 나왔지만, 그들 역시 세상에 다스림을 시행할 수 없었다.
지금 당연히 “정자와 주자의 말을 오늘날 실천할 수 있다.”라고
하고, 당연히 “사람마다 모두 정자와 주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자와 주자 역시 옛날 사람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옛사람만 찾을 것인가, 아!
서(書) 스물아홉째
천지의 전체는 이(理)일 뿐이다. 하나에 근원하여 만 가지로 전파되는데 각기 당연한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도(道)이다.
천하에는 도에 벗어난 일이 없고, 도에 벗어난 물건이 없다. 성현은 사물의 법칙을 날줄과 씨줄처럼 엮어 글로 드러내니,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이것이다. 이 나머지
구류 잡가(九流雜家)의 글은 관견(管見)으로 비록 옹색하지만 그 푸른 것은 참 하늘이고, 다리가 빠진
곳이 비록 구덩이지만 그 언덕은 실제 땅인 것이다. 선할 경우에는 하늘을 택하고 옹색한 대롱을 버리고, 불선할 경우에는 언덕에 의거하여 구덩이를
경계해야 하니, 또한 도에 벗어난 사물이 없다.
오늘날 세상에 이르러 글 자체가 별개의 한 물건이 되었다. 독서하는 선비는 하늘과 땅을
사람과 분리하고, 일과 물건을 글과 나누어 여섯 가지로 만들었다. 비록 만권의 글을 읽고 외우더라도 하늘을 알고 사람의 도리를 닦고 사물을
처리하고 응대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없다. 다만 구두(句讀)와 편장(篇章)만을 고문이라고 부르면서 표절하고 꾸미는 용도로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대개 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脩)ㆍ삼소(三蘇
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의
부류에서부터 모두 이를 벗어나지 못해 문장과 도리가 나뉘어 두 가지 물건이 되었다.
과거(科擧)를 위한 학문이 성행함에 이르러서는 그
문(文)이 드러내놓고 도에 벗어난 물건이 되었고, 고서(古書)는 단지 글자를 모아 놓는 용도가 되었을 뿐이다. 가령 불교에서는 개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하는데, 오늘날 과거 시험 문장은 천인(天人)과 사물(事物)의 법칙이 없으니, 과문의 경우는 문장에 있어서 도리를 상실한
것이다. 세상에 또 한 부류 똑똑한 체하는 자들은 정자와 주자를 담론하면서 경전을 깎아 나누며 귀로만 이치를 듣고 입으로만 도(道)를 말하여
단지 글 위의 한 사람을 첨가할 뿐이니, 또한 글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도리의 측면에서도 바르지 못한 것이다. 만일 참으로 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있다면, 세세하게는 밥 먹고 물 마시는 것, 더럽게는 대변과 소변을 누는 것까지 모두 도(道) 가운데 한 가지 일이 된다.
더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간 일이겠는가.
저 과거 시험을 공부하는 자는 장차 입신하기 위해서이며 임금을 섬기기 위해서이니, 도에서 벗어나
제대로 성취할 수 있다고 누가 여기겠는가. 정자와 주자를 담론하는 것이 근사한 듯하지만, 장구(章句)를 분리하여 백 명의 요순을 만들고
훈고(訓詁)를 각박하게 논변하여 천 명의 공자와 맹자를 만들어 경전을 옮겨다가 도 밖으로 벗어나게 하고 마음과 몸으로 이를 따르니, 슬프도다.
어찌 또한 그 근본을 회복하지 않는가.
《서경》에
“덕은 일정한 스승이 없으니 선을 주로 하여 스승이 되며, 선은 일정한 주장이 없으니 한결같으면 합치된다.〔德無常師
主善爲師 善無常主 協于克一〕”라고 하고, 정자가
“앎을 극진히 하면서 경(敬)에 있지 않는 자는 없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