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성북동 길을 따라가다가 성북2동사무소를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한국단편소설의 선구자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을 만난다.
'한국의 모파상' 이태준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던 곳으로 그의 수필<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현재는 그의 외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11호로도 지정된 곳이다.

<조용한 산 속 처소에서 여럿이 모여서 공부하는 방>이 바로 수연산방이다.
글 쓰는 이들의 필독서인 <문장강화>와 수필집 <무서록> 그리고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그리고 장편소설 <황진이>, <왕자호동> 등이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이태준문학의 산실이다.

고향인 철원의 큰 한옥을 뜯어낼 때 나온 목재를 서울까지 가지고 와서 손수 감독해 지은지 70년이 넘은 집이다.
우리 한옥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고택이 바로 수연산방이다.
막돌로 쌓은 담에 세운 일각대문으로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건물은 대지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남쪽에는 감나무·사철나무가 있다. 우물가 정원에는 한옥에 잘 어우러지는 우리 꽃들이 씨가
뿌려지면 뿌려진 대로, 피어나면 피어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나 한국식 정원의 운치를 뽐내고 있다.

시인 정지용이 단아한 기품과 약간의 호사를 지닌 이 ‘조선 기와집’을 질투했다고 한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기 서울 'ㄱ'자형 한옥의 전형을 보여주던 수연산방은
이제 안채 뒤쪽 전체에 방을 덧붙여 '工'자형으로 시대에 맞게 확장되었다.
특히 사랑채 없이 사랑방의 기능을 가진 누마루를 안채에 이어 붙이고, 부엌을 안방 뒤로 배치하고
화장실을 안채에 부속시킨 점 등은 전통한옥이 현대에 어울리게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해도 대지주의 딸로서 부유하게 살다가 문학청년인 이태준에게 반한 이순옥이다.
이태준은 가난으로 더 이상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귀국했다.
1929년에 개벽사에 입사도 하고 이듬해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의 이순옥과 결혼한다.
이순옥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을 타고 집을 뛰쳐나와 애인 이태준과의 결혼을 단행했다.
"남편과 자녀 다섯의 문제로 달아오른 쇠꼬치에 살을 지져대는 듯한 아픔을 그렇듯 무수히 당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애정을 죽는 순간까지 잃지 않았던 현숙한 여성이었다."
상허 이태준의 부인 이순옥여사의 인물평이다.
그녀는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딸 소명에게 받아 적게 하여 한 편의 시를 남긴다.
“나는 불나비
불빛을 보고 찾아든 나비
그 불빛 아름다워 내 넋은 취했네
그 불빛 뜨거워 내 심장 달았네
불길이여, 타 오르라, 더 활활 치솟으라
나는 이 몸, 이 마음 다 바쳐
너의 불길 더 높이 솟구치게 하리라.”
부인 이순옥여사가
남편 상허에게 향했던 사랑을 정리한
불후의 명작이었다.
그가 병상에 누워 알아듣기조차 힘든 말로 되뇌었다.
그 남편과 딸이 옮긴 시이다.
죽음을 앞에 둔 아내가 남편에 대한 사랑을
어떤 젊은이보다도 뜨겁게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태준은 '최고의 문장가''순수문학의 기수''한국의 모파상'등으로 불리운다.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도 했던 그는 1955년 소련파 숙청시 함경도 탄광촌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의 죄목은 일제시대의 구인회 활동의 반동성과, 전쟁기 소설의 친미적 성향이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소식은 한 남파공작원의 수기를 통해서 전해진다.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 건강한 체구였다.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일 성싶은 얼굴이었다. 척 보기에 범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한말을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뭐하는 분이시죠?”
“......”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선 본 얼굴 같기도 했다.
땜질을 하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 보았다.
한참 동안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물어나보자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글 쓰시는 분 아니십니까?”
“......”
내 말에 무슨 충격이나 받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흘리는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태준이라 합니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나는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을 처음 보았다.
평률리에서 민주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그가 쓴 창작집 『달밤』이나 장편소설『가마귀』를 읽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장강화』란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요리조리 자유롭게 쓰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해서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날 그의 책 모두가 도서실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헌데 아직도 글 쓰십니까?”
나는 이 사실이 궁금했다.
“쓰고는 싶소만......”
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 김진계,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조국』중에서 -
그 후의 소식은 더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지붕과 처마, 미닫이문 창살들에는 여전히 한옥의 고풍스러운 멋들이 가득하다.
이태준은 그의 수필집 <목수들>에서 이 집을 지은 과정 등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순박ㆍ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중략)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 이태준 <목수들> 일부
상허 이태준이 직접 사용했던 고가구와 소품들에서 그의 손길이 아득히 느껴진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직접 집자해 팠다는 문향루(聞香樓)란 현판이 아름답다.
'문향루' 현판. '향기를 듣는 집'이란 뜻이다. 향기는 맡는 것인데 듣는다고 표현했다.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상지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25년 단편 〈오몽녀〉로 데뷔하였으며, 잡지 《개벽》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구인회 동인과 문학잡지 《문장》 출간 등으로 순문학 계열에서 활동했다.
작품의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박태원과 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낙향하여
철원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많지 않은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 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북조선에서의 행적이나 사망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1956년 경 숙청되어 함경남도, 강원도로 좌천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사망 시기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