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장단(전북)
작품/자료명 : 판소리장단(전북)
지정여부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보유자(단체) : 이성근(李成根), 주봉신(朱鳳信)
문화재지정일 : 1992년 6월 20일
전승지역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동산동
구분 : 민속악
개요
<판소리장단>은 판소리에 맞추어 고수(鼓手:북 치는 사람)가 북으로 장단을 쳐 반주하는 것을 말한다.
‘고법(鼓法)’이라고도 하는데 판소리를 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수의 장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판소리장단은 판소리와 함께 출발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고수들은 고수를 판소리 수업의 방편으로
여겼기에 고법의 발달은 미미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많은 명고수가 탄생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판소리장단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판소리장단도 각기 다른 이론과 가락으로 독특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내용
‘고법(鼓法)’은 판소리의 반주이기 때문에 고수를 따로 내세우는 일이 없어 조선시대에는 이름 난 명고수가 매우 드물다.
다만 고수로 활동하다가 소리꾼으로 명창이 되어 이름이 전해지는 이로는 조선 순조 때 가왕(歌王) 송흥록의 북을 쳤던 송광록과 주덕기, 고종 때 송만갑과 김채만의 소리에 북을 쳤던 장판개와 김정문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도 고수로서가 아닌 명창으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 판소리가 매우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발전함에 따라 고법도 발전되고,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말기와 일제시대에는 박판석, 오성삼, 신고주, 주봉현, 신찬문, 한성준과 같은 전문적인 명고수들이 나와서 <판소리고법>을 발전시켰다.
일제 때 유성기 음반에는 이흥원, 한성준, 정원섭, 백점봉 등이 판소리 북을 친 것이 보인다.
광복 후에는 김재선, 김명환, 이정업, 김득수와 같은 고수들이 활동하였다.
<판소리고법>에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크게 ‘자세론(姿勢論)’, ‘고장론(鼓長論)’, ‘연기론(演技論)’으로 나눌 수 있다.
고수에 따라 이론이 약간씩 다르나 대체로 ‘자세론’은 소리꾼의 왼편에 북을 앞에 놓고 소리꾼을 향하여 책상다리로 앉는다. 북은 왼편으로 당겨 가죽이 좌우로 향하게 세워 놓고 왼손 엄지를 북의 왼쪽 통에 걸치고 손을 펴 손가락을 모아 북의 왼쪽 구레를 친다. 북채는 오른손에 쥐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가 소리에 맞춰 치되, 북채가 좌우 몸 밖과 머리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한다. 식지를 위로 세우고 북채를 잡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고장론’은 고수가 소리꾼의 소리에 따라 장단을 치는 것이다.
악절의 시작과 가락의 흐름을 손과 채를 이용하여 북통과 가죽을 쳐 연주하는 것이다.
악절의 시작은 반드시 채로 오른편 가죽을 크게 치고 소리가 날 때에는 북의 반각(半刻) 자리를 좀 크게 치고 소리가 달거나 절반 풀 때에는 채로 북의 매화점(梅花點) 자리를 굴려 치고, 소리가 절정에 올라 맺어야 할 때에는 채로 북의 온각(全刻) 자리를 매우 세게 한 번 친다.
소리가 풀 때에는 왼손을 뒷손이라 하여 뒷궁, 즉 북의 왼편 가죽을 굴려 친다.
소리가 달고 갈 때에는 매화점자리나 반각자리를 굴려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것은 또드락가락이라 하여 시끄러우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약하거나 뒷손으로 대신한다.
‘연기론’은 고수가 소리꾼의 상대역으로 소리(창)와 아니리(말)를 추임새로 받아주고,
또 소리에 따라 추임새로 흥을 돋우고 소리의 공간을 메우며 소리꾼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연출하는 것이다.
전승자 정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장단> 보유자로 지정된
이성근(1936.1.1)과 주봉신(1934.2.10)은 여러 차례의 국악대회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후진양성에 힘쓰는 등 판소리고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이성근은 1936년 전라북도 정읍군 감곡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국악 애호가일뿐 아니라 쇄납의 명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국악인들과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어려서부터 국악을 접해왔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국악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조금 늦은 스무 살이 되던 1955년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살길을 모색하다가
전주시 전동에 있던 전동국악원에서 소리선생으로 있던 김동준에게 <심청가>를 배우게되었다.
사실 김동준의 영향을 빼면 이성근의 북가락과 인생이 설명되지 않을 만큼 김동준은 이성근에게 절대적인 존재다. 이런 김동준 명창으로부터 2년 동안 <심청가>와 <춘향가> 등을 배웠으며 이순신, 안중근, 이준, 윤봉길, 유관순 등의 전기를 판소리화한 <열사가>까지 전수받았다.
이때 문 밖에서 들으면 김동준의 소리인지 이성근의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승의 소리를 빼닮았었다고 한다.
그 후 1년 이상 국극단에서 활동하고 1958년 동편제 <적벽가>의 정통을 이어받은 명창 박봉술을 찾아가 <적벽가>를 이수하였다. 이성근이 완창할 수 있는 것은 <적벽가>뿐인데 바로 이때 배운 것이다.
특히 이성근에게 전해지는 송판 <적벽가>는 전통적인 동편제로 송씨 가문에서 전승되던 <적벽가>를 일컫는다. 이성근은 다시 국극단 생활을 시작한다.
대체로 1962년경까지는 박봉술, 이용배, 임준옥, 신봉학 등의 중앙국극단과
여성단체인 이일파의 낭자국악단,
문미나의 송죽국악단 등에 몸 담고 꾸준한 활동을 하였다.
여성국극단에서 이성근은 특히 장단을 주로 쳤는데 후에는 작창을 맡아 단원들의 소리를 지도하기도 했다.
이 무렵 이성근은 강도근을 찾아가 <흥보가>를 배우기도 했지만 끝을 맺지는 못했고
이후에는 지방단체의 가설무대에 의탁하기도 하고 신태인, 이리, 전주, 오수 등의 국악원 강사를 지냈다.
1986년 전주에 정착할 때까지 이성근은 20년 이상 이와 같은 생활을 지속하다
50세에 전라국악원을 개원하게 된다.
고난의 행로를 지나 1986년 10월 전라북도도립국악원이 창단되자 창극단 수석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고
1991년부터는 국립창극단 지정고수로도 활동한 바 있다.
그는 1971년에는 호남전국명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1986년에는 전남예술제명창대회 특장부수상을,
1986년에는 경북개천예술제에서 대상을,
1987년에는 남도예술제에서 특장부 수상을,
1990년에는 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에서 장원에 올랐다.
고수의 고법은 대개 특정한 것이 없고 판소리를 공부하는 데 저절로 터득했다고 하지만,
이성근은 소리 스승 김동준이 명고수였기 때문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본래 소리꾼이었기 때문에 고법에 더욱 능할 수 있었다. 소리의 속을 모르면 소리에 맞게 북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의 북가락은 소리를 알고서 반주하는 역량이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높은 수준의 고법 소유자로 판소리 고법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주봉신은 완주군 종촌면 정암리 출신으로 1952년 18세에 군산에서 이민암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1953년에는 박창을에게서 판소리장단을 사사했다.
1957년에는 임방울로부터 판소리 <춘향가>와 <수궁가>를,
1964년에는 명고수 이정업에게 장단을 전수받았다. 소리와 장단을 번갈아가며 사사한 것이다.
특히 주봉신은 당대의 명창들에게 배운 소리를 갖고 있는 관계로 음악성이 뛰어나,
그의 나이 32세 때 전주에서 열린 전국명창대회에서 김동준에 이어 2등에 입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원각사 시절부터 일제시대를 통해 최고의 명고수로 알려진 한성준의 가락을 계승한 이정업과 전라북도 지역 북가락의 전통 속에서 탄탄한 명고수 박창을과 같은 명고수들에게 북을 배웠다는 것이 그의 고법에 있어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다.
전라북도 태인 출신인 전계문에 의해 기초가 세워지고 해방 후
박창을에 의해 완성된 전라북도 지역 북가락의 전통을 주봉신이 이어받았다는 것은
전라북도 고법의 줄기를 살펴 볼 수 있는 최대의 사료이다.
이정업과 박창을의 장단을 살펴보면 이정업은 장단에서 보비위를 중시하고 진양조를 잘 쳤으며,
소리를 따라가는 고음의 힘찬 추임새를 잘 이끌었다고 한다.
또 원박자에 충실하면서 주로 장단의 강약으로 소리판을 이끌어가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반대로 박창을은 한량 광대로 화려하고 기교적인 북가락으로 유명했다.
또 소리에 어울리는 다양한 가락이 있어 북가락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멋을 느낄 수 있는 가락을 구사하였다. 이정업은 궁편을 많이 쓰고 박창을은 채편을 많이 쓰는 타법을 구사했으며,
이 두 가지 특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주봉신의 고법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어 의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 속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복습인 바,
주봉신의 장단은 전라북도에서 살고 부딪히는 가운데 익힌 것이므로
한마디로 전라북도 지역 공동체 문화 유산의 상속자라는 점이다.
주봉신은 자신의 북가락 대부분을 이 두 사람으로부터 물려 받았기 때문에
현재 우리 나라 북가락을 대표하다시피 하고 있는 김명환계의 북가락과는 그 전통이 다르며,
주봉신 장단의 예술성은 이미 전국고수대회 국고부 대상을 차지함으로써 입증된 바 있다.
특히 주봉신 장단의 특징은 헌신적인 보비위와 따라치기이며, 중중모리 가락에서 장기를 보인다고 한다.
그 후 1964년에는 김연수로부터 판소리를 사사하고 1966년부터 6년 동안 군산국악원 창악강사를 거쳤다.
1972년부터 7년 동안 충청남도 강경국악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78년부터는 명창 박동진의 지정고수로 활동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한국국악협회전북지부 이사장, 대사습놀이보존회 회원, 효도 민속예술단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는 1992년 제12회 전국고수대회 대명고수부 최우수상을,
1994년 전국고수대회 국고부 대상을 수상하는 등 고수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주봉신은 오랫동안 우리 나라 최고의 명창 박동진의 지정고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음반을 취입하였고 그 능력을 공인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