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 채양묵(해병 229기) 대표이사 사진= 【박흥배 보도국장】 |
채양묵
- 해병대전우회중앙회 부총재
- (주)서일 대표이사
- 최재형기념사업회 공동대표
- 청라산업단지 기업대표자회 회장
- 인천·부천·김포 지역 수출협회 前회장 現고문
- 해병대강서전우회 前회장
- 코트라수출경영자 협의회 3대 회장 역임
- 인천경총회 8기 회장 역임
■ 해병대정신으로 세운 세계 상위 스프링생산업체
(주)서일은 자동차 제작 시 엔진, 시트, 문짝 등에 필요한 중소형 스프링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업체이다.
전 세계 유명 차종에 사용되는 스프링과 전자 관련 부품 전문 업체로 정밀산업 분야의 선두기업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주)서일은 1980년 서일정공사로 시작했다. 미약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서일’이 지금까지 38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해병대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채양묵(대표이사, 해병 229기) 창업자의 강한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가 꺼질 줄 몰랐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생존율이 10%가 안 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1세대 창업주가 40년간 한길을 갈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남다른 능력과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 38년간 한 번도 적자 안 낸 초우량 기업
20년 전 IMF 당시는 미리 국제사정을 예측해 IMF 발생 2년 전부터 축소경영을 지향하면서도 직원들을 감원하지 않은 덕망 있는 기업인의 자세를 유지했었다.
IMF 이후 경영이 안정되자 그동안 지급하지 못했던 상여금을 일시에 지급하여 직원들에게 큰 기쁨을 선물했다.
채 대표가 추구하는 인간가치의 중심에는 철저한 국가관이 자리하고 있다.
(주)서일의 사훈 ‘愛國, 愛社, 信義’을 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가가 있어야 회사가 존재하고 그 바탕위에 개개인의 인간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커다란 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채 대표는 인간가치를 중시 여기는 경영철학과 채양묵상(像)을 그리고 있으며 그것을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실천으로 구현하고 있는 중이다.
국가안보와 재난·구조·구급 봉사단체인 해병대전우회중앙회 부총재를 7년째 맡아 총재를 보필하고 있으며, (사)최재형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아 매년 30여 명의 고려인 학생에게 1억 원 상당의 장학금 후원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 자타가 인정한 채양묵 ‘자랑스런 전북인상’, ‘자랑스런 숭문인상’
채양묵 대표는 2011년 ‘자랑스런 전북인상’을 받았다.
채 대표는 정읍 신태인에서 1950년 6·25둥이로 태어나 5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사람이 되었고, 마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인하공대 전자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 고향 전북 부안과 태어난 곳 신태인이 그의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2016년 모교(숭문고등학교)에서 설립 110주년을 맞아 ‘자랑스런 숭문인상’을 수상했다.
숭문고가 110년을 맞아하는 동안 수많은 동문들이 탄생했지만, 그 중 이런 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얼마나 출중했는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해병 229기 동기생들과 함께 파이팅 외치는 모습 |
| 일문일답 |
- 채양묵 대표를 만나서 영광입니다. 당시 인하공대 전자과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제대 후 전공을 살리지 않고 학업도 포기하고 직업전선으로 들어간 이유가 뭡니까?
인하공대 전자과 2년 재학 중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홀어머니와 형수와 조카들을 제가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에 갈 나이가 되자 해병대로 가서 월남에 지원하여 전투수당이라도 받아 가정에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 말년이 되어 휴가를 나왔을 때 지하철 공사장에 가서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고 간청하면 “알았어요”하며 답을 주지 않더군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터를 알아보던 중 청계천 어느 철사 가게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제대(1973.5.31) 다음날(6.1)에 곧장 직장에 출근했습니다.
당시엔 학업보다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우선이었고, 직장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 부득이 학교를 그만 둔겁니다.
- 제대 다음날 출근한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 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후의 사회생활은 어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내 키와 몸무게가 얼마 안 되는데 100킬로가 넘는 철사 한 묶음을 (간신히) 들어 상차하는 일을 거뜬히 해냈습니다.
‘해병대가 이것도 못하겠나?’고 이를 악물었더니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더군요.
“해병대라 역시 다르구나” 말하는 사장은 해병대는 모두가 저 같은 초인적 힘을 갖고 있는 줄로 알더군요.
제대 3일 전에 대대장에게 (머리가 길다고) 걸려서 앞머리를 ‘바리깡’으로 미는 바람에 부득이 전체를 ‘빡빡이’로 밀고 첫 출근을 했더니 모두 놀라는 겁니다.
게다가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눈빛은 해병대 기합이 안 빠져서 독기가 서려 있는 채 입사 신고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사회 첫발이 청계천 바닥에서 ‘성실한 청년, 괜찮은 청년’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 ‘괜찮은 청년’이 창업을 결심하게 된 정신력이 궁금합니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일했지만 당시 월급은 1만2천 원의 박봉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일해도 가족들 끼니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구나 하는 무능감이 갑자기 저를 엄습해오더군요.
그때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 번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니 세상이 확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이곳을 나갈 땐 사장이 되어 나간다’로 목표가 설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니까 주위에서 “양묵 씨 나와 함께 일합시다”며 오라는 곳이 많아지는 겁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성의만 받겠습니다. 저는 사장이 되어 나갈 사람입니다“고 사양하며 미래를 향한 저의 목표를 입 밖으로 선언하기 시작했습니다.
- 창업의 조건은 무엇이고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29살 되던 해 아내는 “월급 받는 게 좋으니 사장이 되지 마세요”하며 가정의 안정을 위해 저의 꿈을 말렸습니다.
그래서 아내 모르게 일을 저질러 놓곤 “우리 다시 일어나는 각오로 삽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온 것이 38년째이고 지금까지 단 한 해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장수 기업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2007년 중국에 공장을 설립하여 더 넓은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중이고, 함께 일했던 고참 사원들은 소규모 공장을 차려 줘서 협력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다 하면 밀어붙였고 그 다음부터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경영을 추구해왔습니다.
그것이 해병대의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신이고 ‘끈끈한 전우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 채 대표가 가진 진정한 해병대정신은 무엇입니까?
한계에 다다르는 극단적 상황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들어 죽겠다”, “도저히 못 하겠는데요”라는 부정적 생각이나 말을 입 밖에 내서도 안 되고 표현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태어나는 날부터 6·25전쟁의 발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세대이다. 전쟁으로 인해 조실부모한 3남1녀 중 막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이 계속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한순간도 비전을 놓은 적이 없었다. 남다른 창의력을 가져라. 주입식 수업과 4지선다형 학점 따기에서 과감하게 떠나 보거라. 순간적으로 미쳐봐라. 도둑질 빼고 뭐든지 미치도록 몰두해보자.”
이렇게 저의 70년 인생을 말하며 살아있는 경험을 설파해 나갑니다.
학생들은 모두가 저에게 더 많은 말을 들으려고 질문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 그런 아버지에 그 자식이 있을 텐데요. 자녀들 자랑을 해줄 수 있습니까?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학점이나 스펙을 쌓으려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합니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저의 교육에 잘 순응해줬습니다.
큰딸은 현재 쇼핑몰 사업체를 운영하고, 아들은 연봉 7억의 중요 자리에 있다가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 과정을 수업 중에 있습니다.
“너는 잘 될 거야, 너는 가능해, 실패해도 돼”하며 자식들에게 도전정신을 키우게 했습니다.
- 채 대표에게 잊을 수 없는 전우는 누구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해병 227기 정재근 2기 선배를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군대 있을 당시 한 번은 전방 GP 공사가 한창일 때 제게는 너무 벅찬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재근 선배가 “너는 우리처럼 사회에서 힘을 써 일하던 사람들과는 다르다”며 선배도 아닌 후배의 힘겨운 짐을 대신 지어주었습니다.
무섭기만 한 선배의 호의에 저는 감동이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전우애를 체험했습니다.
‘해병대니까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어 주는구나!’고 말입니다.
그 분을 수십 년 만에 찾아 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 일문일답 |
- 채양묵 대표를 만나서 영광입니다. 당시 인하공대 전자과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제대 후 전공을 살리지 않고 학업도 포기하고 직업전선으로 들어간 이유가 뭡니까?
인하공대 전자과 2년 재학 중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홀어머니와 형수와 조카들을 제가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에 갈 나이가 되자 해병대로 가서 월남에 지원하여 전투수당이라도 받아 가정에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 말년이 되어 휴가를 나왔을 때 지하철 공사장에 가서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고 간청하면 “알았어요”하며 답을 주지 않더군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터를 알아보던 중 청계천 어느 철사 가게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제대(1973.5.31) 다음날(6.1)에 곧장 직장에 출근했습니다.
당시엔 학업보다 호구지책(糊口之策)이 우선이었고, 직장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 부득이 학교를 그만 둔겁니다.
- 제대 다음날 출근한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 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후의 사회생활은 어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내 키와 몸무게가 얼마 안 되는데 100킬로가 넘는 철사 한 묶음을 (간신히) 들어 상차하는 일을 거뜬히 해냈습니다.
‘해병대가 이것도 못하겠나?’고 이를 악물었더니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더군요.
“해병대라 역시 다르구나” 말하는 사장은 해병대는 모두가 저 같은 초인적 힘을 갖고 있는 줄로 알더군요.
제대 3일 전에 대대장에게 (머리가 길다고) 걸려서 앞머리를 ‘바리깡’으로 미는 바람에 부득이 전체를 ‘빡빡이’로 밀고 첫 출근을 했더니 모두 놀라는 겁니다.
게다가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눈빛은 해병대 기합이 안 빠져서 독기가 서려 있는 채 입사 신고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사회 첫발이 청계천 바닥에서 ‘성실한 청년, 괜찮은 청년’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 ‘괜찮은 청년’이 창업을 결심하게 된 정신력이 궁금합니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일했지만 당시 월급은 1만2천 원의 박봉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일해도 가족들 끼니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구나 하는 무능감이 갑자기 저를 엄습해오더군요.
그때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 번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니 세상이 확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이곳을 나갈 땐 사장이 되어 나간다’로 목표가 설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니까 주위에서 “양묵 씨 나와 함께 일합시다”며 오라는 곳이 많아지는 겁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성의만 받겠습니다. 저는 사장이 되어 나갈 사람입니다“고 사양하며 미래를 향한 저의 목표를 입 밖으로 선언하기 시작했습니다.
- 창업의 조건은 무엇이고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29살 되던 해 아내는 “월급 받는 게 좋으니 사장이 되지 마세요”하며 가정의 안정을 위해 저의 꿈을 말렸습니다.
그래서 아내 모르게 일을 저질러 놓곤 “우리 다시 일어나는 각오로 삽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온 것이 38년째이고 지금까지 단 한 해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장수 기업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2007년 중국에 공장을 설립하여 더 넓은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중이고, 함께 일했던 고참 사원들은 소규모 공장을 차려 줘서 협력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다 하면 밀어붙였고 그 다음부터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경영을 추구해왔습니다.
그것이 해병대의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신이고 ‘끈끈한 전우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 채 대표가 가진 진정한 해병대정신은 무엇입니까?
한계에 다다르는 극단적 상황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들어 죽겠다”, “도저히 못 하겠는데요”라는 부정적 생각이나 말을 입 밖에 내서도 안 되고 표현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태어나는 날부터 6·25전쟁의 발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세대이다. 전쟁으로 인해 조실부모한 3남1녀 중 막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이 계속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나는 한순간도 비전을 놓은 적이 없었다. 남다른 창의력을 가져라. 주입식 수업과 4지선다형 학점 따기에서 과감하게 떠나 보거라. 순간적으로 미쳐봐라. 도둑질 빼고 뭐든지 미치도록 몰두해보자.”
이렇게 저의 70년 인생을 말하며 살아있는 경험을 설파해 나갑니다.
학생들은 모두가 저에게 더 많은 말을 들으려고 질문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 그런 아버지에 그 자식이 있을 텐데요. 자녀들 자랑을 해줄 수 있습니까?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학점이나 스펙을 쌓으려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합니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저의 교육에 잘 순응해줬습니다.
큰딸은 현재 쇼핑몰 사업체를 운영하고, 아들은 연봉 7억의 중요 자리에 있다가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 과정을 수업 중에 있습니다.
“너는 잘 될 거야, 너는 가능해, 실패해도 돼”하며 자식들에게 도전정신을 키우게 했습니다.
- 채 대표에게 잊을 수 없는 전우는 누구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해병 227기 정재근 2기 선배를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군대 있을 당시 한 번은 전방 GP 공사가 한창일 때 제게는 너무 벅찬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재근 선배가 “너는 우리처럼 사회에서 힘을 써 일하던 사람들과는 다르다”며 선배도 아닌 후배의 힘겨운 짐을 대신 지어주었습니다.
무섭기만 한 선배의 호의에 저는 감동이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전우애를 체험했습니다.
‘해병대니까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어 주는구나!’고 말입니다.
그 분을 수십 년 만에 찾아 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정신이 바르면 성공하더라”며 목포에서 어구 생산업을 하며 살고 있는데, 그 집 대문에 ‘재근과 영단, 행복한 우리 집’ 문패가 걸려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 언제까지 사업가의 길을 걸을 예정입니까?
저는 38년 간 계속 상승곡선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젊어진다면 옛날 힘들었던 시절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위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은퇴 안 한다.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다”고 말입니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가는데 ‘내 상표와 제품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으로 다니며 70 고령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겁니다.
고령이라고 말하면 “나는 한국에서 알아주는 능력자다. 항상 상승하고 있는 미래비전형이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머지 저의 인생은 봉사하고 베푸는 일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기에, 이웃에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다.
- 언제까지 사업가의 길을 걸을 예정입니까?
저는 38년 간 계속 상승곡선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젊어진다면 옛날 힘들었던 시절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위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은퇴 안 한다. 죽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다”고 말입니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가는데 ‘내 상표와 제품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으로 다니며 70 고령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겁니다.
고령이라고 말하면 “나는 한국에서 알아주는 능력자다. 항상 상승하고 있는 미래비전형이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머지 저의 인생은 봉사하고 베푸는 일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기에, 이웃에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다.
2014 인천 무역의 날 수상 모습 |
채양묵 대표의 선배 정재근 전우의 대문에 걸려 있는 문패. ‘재근과 영단, 행복한 우리 집’이라고 쓰여 있다. |
채양묵 전우의 단란한 가족들 |
정밀기계산업의 선두주자, (주)서일
채양묵 대표가 설립한 ㈜서일은 스프링 전문 제조 및 세트(Set) 조립 업체로써 30년 이상의 노하우로 자동차, 전자, OA등의 하이테크놀로지 기기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세상에 없던 새로움을 창조하는 기술력과 도전정신으로 탁월한 설계능력, 제조 공정을 거쳐 엄격한 품질 관리를 통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 연혁
1974 삼원정공 입사
1980 서일정공사 창업
1988 유망중소기업체 선정
1990 일본 언론이 주목한 한국의 유망 스프링 제조업체 선정
1995 인천남동공단 제2공장 설립
1998 일본 캐논협력업체 등록
2000 기업은 초우량기업지정
2007 중국 천진공장 가동
2012 으뜸기업 선정(중소기업진흥공단), 유망중소기업지정(인천중소기업청)
2017 기술혁신형 중소기업확인서
■ (주)서일의 세계무대
㈜서일의 무대는 세계이다. 세계 초일류 스프링전문 기업의 목표를 향해 현재 일본 및 아시아시장을 거점으로 미국, 유럽 등 세계 시장에 눈을 돌려 특히 첨단 스프링 관련 부품 제품에 집중 투자하며 일류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 ㈜서일 생산 제품
㈜서일은 자동차 부품에 사용되는 코일스프링, 토션 스프링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밖에도 프레스와 코일링 가공의 장점을 모은 판스프링, 산업 전반에 사용되는 와이어 포밍, 태엽 스프링, 힌지 등을 생산하며 산업용 스프링 분야 비즈니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품질인증
ISO9001·9002·14001, QS9000, TS16949 품질인증 획득. 현대MOBIS MSQ인증서(2011), 르노삼성자동차의 SES-Tier인증서(2013), 주 만도MQ인증서(2013) 획득
페치카 최재형, 그는 누구인가?
‘최재형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채양묵이 말하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
채양묵 대표는 현재 (사)최재형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최재형은 함경도 출신의 노비로서 1860년대 조선의 큰 흉년으로 인하여 만주, 러시아 등지로 최초로 집단 이주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러시아 상선을 타고 세계를 두루 돌아다닌 뒤에 한반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둘러싸고 전개된 20세기 초반의 국내외적인 격랑의 세월 속에서 한 시대를 이끌어간 풍운아이자, 기업인, 독립운동가였다.
최재형은 1880년 러시아에 귀화하고 기업인으로 성장하여 재러 한인사회를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며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가장 신망을 받은 친러 인사였다.
1900년대에는 의병조직 동의회의 총재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민족 언론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을 역임하였고, 재러 한인 독립운동의 총집결체인 권업회총재,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 국민의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최재형은 1900년대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지역에서 조직된 주요 단체의 책임자로 일했고 우리나라 초기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중근의 막후 후원자로서 의거 전 준비과정과 의거 후 안중근의 가족까지 돌보았다는 증언과 기록이 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에 의해 처형됐다.
최재형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동포들의 교육 및 항일운동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앞장서 실천한 기업가였다.
잊힌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생애와 활동이 다시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