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貴妃 와 唐名皇의 사랑(719-756)
양귀비는 절세미인으로 당 현종의 愛妾이다.
아버지, 楊玄廉의 任地인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났고. 西施, 王昭君, 貂嬋과 더불어 중국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壽王(李瑁)의 妃가
되었고 그의 본명은 玉環 그리고 唐名皇의
愛妾으로 들어가기 전 절차로 道館에 머무를
때 太眞이란 道名으로 改名되었다.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아버지와
아들을 지아비로 섬겨야 하는 서글픈 운명을
감당해야 했었고, 그녀는 37세의 꽃다운 나이
에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 도중 馬嵬 언덕
에서 강제 자결 당했다. 그녀가 당 현종의
사랑을 받았고 그렇게도 당 현종이 죽은 양귀
비를 그리워했던 이유, 그녀와, 당명황, 그리고
그 주위에 관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 그녀
가 진정 傾國之色의 미인이었나 역사적 사실
을 알아보기로 하자.
당 현종은 사랑하던 武惠妃를 잃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후
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명이나 있었으나 누
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다. 이때
현종의 귀를 스치는 말 한마디가 그의 관심으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환관 고력사가 만들어낸
웃지못할 작품이었다.
육십을 바라다보는 노인, 당명황의 외로운 마음
의 안정과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환관 고력사는
스스로 採紅使가되어, 미인을 물색 중, 하필이
면 현종, 아들의 부인 壽王妃를 선택했던 것
이다, 물론 그녀는 傾國之色이었지마는 말이다.
이리하여 양귀비와 당명황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
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 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
을 사로잡았다.
이때에 옥환의 남편 수왕, 이모는 고력사의 더러운
계략으로 저 멀리 廣東省 按撫使로 가게되었고,
까마득히 이 사실을 모르고 풍토병이 많다는 愴의
땅 광동성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雪上加霜, 마침내 高力士가 보낸 刺客에의해
젊은 나이에 피살되고 말았다.
56세 중늙은이. 현종과 22세 꽃다운 며느리 옥환
과의 불륜적인 사랑은 고금을 통하여 충격적인
사건임이 틀림없으나, 이성을 잃은 중늙은이 당명
황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玉環본인 자신 뜻이라 憑藉하여 그
녀를 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
고 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太眞宮이라개칭하였다.
이는 고도로 계산된 宦官 高力士의 奸計였다고
唐,歷史書,自治通鑑에 기록하고있다.
太眞이 貴妃로 冊封되어 楊貴妃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太眞
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남
궁에 들어 온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 에게 서는
마치 황후가 된 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과 태진 이 두 사람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렇게 하여 일찌기 흥경궁에 근정전
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
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
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
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녀
의 일족들도 차례로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
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
소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민첩
하고 요령 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이다.
天寶 10년(751)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
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
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
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
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만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
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아 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어지이다."
이 뜻을 풀이하면, "比翼鳥"는 중국 전설에 나오
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
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連理枝" 또한 중국 전
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
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
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
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개원 24년(736)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
는 간신들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
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 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번
영의 뒤에 숨겨져 있던 위기가
점점 심화되어 갔다.
우선 농촌에서는 均田制가 무너져 국가의 稅入
원이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
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군사 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府兵制가 무너져 군대를 모집해도 응
모하는 자가 없어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邊境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그의 손에 장악
하고 있어 일단 유사시 당 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
한 모든 정세로 보아 당의 현종 왕조의 위기는
폭발 일보 직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사실 唐 ,玄宗(685∼762)은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총명했다. 위황후가 중종을 시해하고 제위에 오르
려 할 때 군사를 일으켜 슬기롭게 반란을 제압하
고 그 뒤 황제가 되어 또다시 정변을 모반한 태
평공주 일당을 진압하여 年號를 開元이라 고치
고 당나라의 최대 전성기를 이룬 聖君이었다.
그는 개원 초기 강직한 성품을 가진 명신 한휴
를 재상으로 登庸했는데 한휴는 현종의 정치적
오류를 면전에서 서슴없이 지적하였다고 한다,.
이에 어느 중신이 “한휴가 조정에 들어
온 이후 폐하께서는 단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
는 것으로 신은 알고있습니다. 왜 한휴를 내
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허기지나
천하가 배부르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고하니, 聖君의 자질을 타고난 황제이리라.
그러나 이런 현종도 楊貴妃의 치마폭에 빠져,
헤어나올 줄 모르는 졸장부가 되어버렸으니,
고금을 통하여 여색의 함정이 얼마나 위험한
가를, 두 사람의 사랑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종은 양귀비의 친척 오빠인 楊國忠을 재상
으로 등용하였는데, 그는 요샛말로 술 주정꾼.
노름쟁이 그리고 조폭,등 오색잡놈 이었다한다.
이런 그를 단지 양귀비의 친척이란 명분으로 대
제국의 재상자리에 앉혔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정에는 奸臣輩들이 득실거렸
고 정권을 오로지 했다고 한다. 특히 양국충은
개인적인 면식이나 은혜, 원한의 유무로, 관리를
등용하거나 형벌을 가했고, 안록산도 이때의
관리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종은 안록산을 양귀비의 양아들로 삼아주었고
동년배의 안록산은 양귀비를 어머니라 부르면
서도 이들 두 남녀, 안록산 양귀비 사이에 艶情
이 오갔다고 야사는 전한다.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의 軋轢 그리고 酒色에 빠
져버린 현종의 放蕩은 결국 국가변란으로 이어져,
결국 북경을 중심으로 河北일대의 군정장관인
안록산은 양국충의 폭정을 규탄한다는 명목으
로 반란의 기를 높이 들었다. 또한 현실정치에
불만을 품은 소외계층의 武士들이 그의 소굴로
모여들어 그 규모는 당 제국 정규군의 숫자를
웃돌았다, 이것이 이른바 安史의 亂이다.
마침내수도장안이 함락되고 당명황은 간신 양국
충등의 제의로 촉의 成都(청뚜)로 피난길에 오르
게되고 피신처 行宮에서 아들 숙종이 安史의난
을 진압하고 皇帝로 登極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것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게 된 동기이며 그
로부터 6년 후 세상을 떴는데
그의 나이 78세였다.
장안으로 쳐들어오는 반란군을 피해 현종은
사천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궁지에 몰리게
된 힘없는 황제 현종은 六軍 總司令官 陳玄禮
의 위협으로 양국충, 이임보 등 간신들 모두
를, 현지에서 참수하고, 당 현종은 어쩔 수없이
양귀비마저도 피난길 馬嵬언덕에서 액살형(縊
殺刑,명주천으로 목을 매는 刑)으로 처단하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自治通鑑에 기록된 楊貴妃 慘殺장면을 目睹해보자.
방위병 사령관인, 진현례가 황제 앞으로 나가 땅에
엎드렸다. 진현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귀비
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되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현 종----- 貴妃는 약한 여자다. 정치적으로 그녀
는 아무책임도 없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 ?
진현례----- 그러나 폐하 장졸들은 貴妃의 오빠
양국충을 이미 誅殺 하였습니다. 그러니 貴妃가
옆에 있으면 불안합니다.
늙은 황제는 驛門에서 돌아와 楊貴妃가 휴식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 속에 들어가 지팡이에 기대어
머리를 푹 숙이고 서있었다. 병사들의 함성소리
는 더욱 드높아 가기만 했다.
젊은 시종이 나와서 아뢰었다.
-----폐하, 국가를 위해 결단을 내리시소서
황제는 힘없이 殿閣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貴妃와 함께 나와 貴妃를 북쪽 街道로
나있는 작은 문까지 轉送하고 측근인 高力士가
모셔 가게 하였다. 거기서 과히 멀지 않은 이
름조차 모르는 절간 그 앞 배나무에 걸려진 명
주천이 양귀비의 목숨을 앗아갔다.
병사들의 고함소리는 그래도 멈출 줄을 몰랐다.
현종은 貴妃의 屍體를 앞마당에 가져오게 하였다.
방위군 사령관 진현례는 가렸던 헝겊을 재끼고
屍體의 머리를 쳐들며 말했다.-----
분명합니다. 貴妃가 맞습니다. 이 때 현종의 눈에서
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음카페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