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는 또 다른 편집력 – 작가 김훈 문체의 3가지 매력
‘지(知)의 편집공학’ 저자 마쓰오카 세이고는 편집을 “대상의 정보 구조를 해독하고 그것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생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개념을 기반으로 편집력을 재정의 해본다면 “산재한 팩트와 스토리를 취사선택 가공하여 완결된 콘텐츠로 종합 구성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원천 이야기를 생산하는 스토리텔러다. 독특한 표현과 전개방식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언어의 마술사다. 작가는 자신의 텍스트를 편집해줄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기 전 이미 최초 편집자로서 편집력을 발휘한다. 즉 자신의 스토리를 가장 감동적으로 전달할 문체를 찾는 것이다. A작가와 B작가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문체이다. 문체는 스타일(Style)이다. 스타일은 시대 사상 문화에 따라 일률적이지 않고 독특한 것을 말한다. 정형화된 기존 양식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대세를 이룬 트렌드를 가리킨다.
2000년 들어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는 단연 김훈이다. 김씨는 “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은 대체로 나를 비난할 때 쓰인다”면서도 “나는 그 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훈에게 문장 스타일은 겉멋이 아니다. 그의 내용이자 형식이다. 그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앵글이다. 작가는 자신의 3대 역사소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을 통해 전쟁과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 앞에 선 인간의 허무를 남성적 문체로 찬찬하게 그려냈다.
“소설의 내용과 주제를 드러내는 형식인 스타일은 분리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제에 맞는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스타일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김훈다움’은 기존의 이야기를 자기식대로 재해석, 재창조하는 데 있다. 김훈을 거치면 이순신이나 남한산성 이야기는 새롭게 탄생된다. <칼의 노래>를 통해 박제화된 ‘성웅 이순신’은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으로 변신한다. 죽음을 앞둔 인간 이순신의 내적 번민을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문체에 담아냈는데 한국 독서계의 변방에 물러나있던 중장년 남성들이 가장 환호했다. 2007년 100만부를 돌파했다. 역사소설을 통해 본 작가 김훈의 문체 매력을 편집력의 관점에서 세 가지로 추려본다.
첫째 주어와 동사로 승부하라.
수사적 군더더기를 빼라. 김훈은 작가로서 문장력을 다지기 위해 법전으로 공부했다 한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문체, 명석 명료한 문장 구사를 위해 법전을 많이 읽었다”고 밝힌다. “기본적으로 글이란 전술과 전략을 갖고 쓰는 것이다. 아주 치밀하게 접근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내 작품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이다. 폐허가 된 남해안을 이것보다 절묘하게 묘사한 문장이 있을지 모르겠다. 수백 번을 고민한 뒤에 쓴 구절이다.”
작가는 형용사와 부사를 부리지 않고 주어와 동사로만 밀고나가는 문체를 구사했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직감적 묘사가 앞서고 시공을 꿰뚫는 유장한 시선이 독백처럼 뒤따라온다. 인간의 개별성과 구체성이 뒤채이는 동사(動詞)에 실려 여울진다. 그의 문장을 따라 걷다 보면 세상의 길 위엔 선 ‘수많은 나’를 만날 수가 있다. 감정이입이 잘돼 자기 동일시되는 흡입력이 발생한다.
둘째 최적의 문체 장단을 찾아라.
주제를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자기만의 문체를 만들어라. 그는 각 소설마다 언어적 장단을 변주한다. 그게 텍스트와 문체의 궁합으로 나타난다. <난중일기>에서 힌트 얻은 <칼의 노래>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군인의 문장이다. 그래서 긴박감 넘치는 단문적 속도감이 물씬하다.
김훈은 말한다. “글을 쓸 때 문장 안에 음악이 있어야 합니다. 음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논리와 사변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음악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전에 에세이를 쓸 때는 진양조 문장을 썼어요. 한없이 뻗어가는 스물네 박자짜리 진양조 문장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문장 하나하나가 하나의 우주이고 하나의 세계여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칼의 노래>를 쓸 때는 진양조를 버리고 휘모리로 갔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마구 휘몰고 나간 겁니다. <현의 노래>를 쓸 때는 중모리나 중중모리로 밀었습니다. 체력이 덜 들어가고 문장이 편안합니다. 그런 박자를 갖는 문장이 아름답고 단정할 수가 있죠.” (계간지 <문학동네>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셋째 현미경 같은 사실주의로 칼날 같이 취재하라.
그의 서사는 장황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모든 묘사와 서술은 사실에 기반 한다. 그는 <칼의 노래>를 구상할 때 여러 날을 아산 현충사 사당 장군의 큰 칼 앞에서 종일 서성거렸다. <남한산성>을 쓰기 전 한 계절 동안 산성을 자전거로 오르내렸다. 글들은 경박하지 않고 진중하여 읽기가 쉽지 않다. 주인공은 애써 중얼거리지 않는다. 백일몽으로 들뜨고 신파로 찔끔거리지 않는다. “21세기적 상상력”이라며 찰랑대지도 않는다.
여기에 문장 리듬이 남성적 호흡을 타면서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한다. 파도처럼 다가왔다 노을처럼 퍼지고 철새 떼처럼 아스라해진다. 문장과 문장은 역설적 대구를 이루면서 의미를 증폭시킨다. 구체성과 묘사와 주관이 꼬리를 물면서 꿰어져 있다. 예민한 후각을 장착한 필력은 팽팽한 관능의 문장으로 날이 선다. 현란한 동사의 역동성 사이를 헤매다 보면 마치 몽상에 빠진 듯 얼얼하다. 작가가 집중한 문맥들은 웬만한 시인의 시적 긴장감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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