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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32인
1. 탈레스 (기원전 624 ~ 기원전 546)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따로 책을 남기거나 하지 않았다. 침묵을 미덕으로 하였던 시대. 이 세마디 뿐.
- 발밑의 웅덩이도 못 보는 사람.
- 7현인 중 한 사람 : 탈레스, 비아스, 피타코스, 클레오브로스, 솔론, 킬론, 페리안드로스.
- 그가 논리를 따져 사회에 퍼져 있는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찰 결과를 종합. 세상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 결론 내리는 ‘철학적 사고’를 했다는 사실.
2. 헤라클레이토스 & 파르메니데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 파르메니데스
- 헤라클레이토스가 파악한 세계의 본질 : 만물은 흐른다.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
- 우주의 섭리, ‘로고스’ :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 그리고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을 인식하고 따르는 분별과 이성을 뜻한다.
- 변하는 현실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정의로움과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세. - 현실주의자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 ‘없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 사실 우리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없다.’의 형태로 어림짐작할 뿐, ‘없음 자체’를 머리에 그릴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 뿐이다.
이성과 논리를 통해 파악된 세계가 진짜라고 믿는다. 이 점에서 그를 세상을 자기의 생각에 맞추려는 사람. 곧 이상주의자라고 여겨도 좋을 듯 싶다.
둘은 라이벌이자 생각의 동반자.
한 사람은 세상을 끊임없이 변한다고 보았고, 한 사람은 고정불변하다고 보았다.
3. 소크라테스 (기원전 470~399?)
- 못 생김의 대명사.
- ‘나는 내가 모르는 사실만 알 뿐’
- ‘철학을 하는 목적은 지식을 얻는데 있지 않다. 자신의 지식과 신념이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의미 있는지를 검토하며 마음 깊숙이 박힌 독단과 선입견을 제거하는 데 있다. 편견과 독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진정하는 철학하는 이들의 자세.
아버지는 석공 / 어머니는 산파 / 집안에 여유가 있었음 / 큰 전쟁에 몇 번 참가 /
- 소피스트 : 토론과 재판, 정책들이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므로 조리를 갖추어 설득력 있게 ㅁ라하는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소피스트는 변호사와 논술 강사, 철학자를 합쳐 놓은 듯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진리란 상대적일 수 밖 에 없다. 돈을 주는 쪽을 따라 어느 경우에는 갑이, 어느 경우에는 을의 입장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 밖 에 없었던 탓이다.
-> ‘인간은 만물의 척도’ (프로타고라스) = 상대주의적 관점.
- 질문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모순된 것이며, 사실은 모르고 있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산파술 : 소크라테스가 직접 상대방에게 틀렸음을 가르쳐 주지 않고, 상대방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다.
4. 플라톤 (기원전 427 ~ 347)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 명문가 출신 / 레슬링 대회 3회 우승 / 스무살에 소크라테스 만남 / 플라토닉 러브 말의 탄생 / 지적으로 성숙한 성인에 대한 소년의 정신적인 동경이라는 뜻 / 8년 동안 제자로 생활 / 소크라테스 사망 /
이데아 : 객관적이고 불변하며 완전한 사물의 본질. (수학적 진리를 모든 사물에 확장시킨 것)
국가도 유익함과 올바름의 이데아, 곧 선의 이데아를 알고 있는 사람이 통치할 때 정의로워진다. 그렇다면 선의 이데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철학자다. = 철인 통치론
정의로운 국가와 개인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국가란 ‘큰 글자로 쓰인 인간’
인간의 영혼은 이성 , 기개 , 욕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각각 역할을 다 할 때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만들어진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이성은 통치자(철학자 왕), 기개는 수호자 계급(군인), 욕망은 생산자 계급(농민)
사회가 썩은 이유는 사람들의 욕심 탓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없애야 한다 -> 재산의 공동 소유
40세 : 시라쿠사의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의 국가론을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
52세 : 아테네 돌아와 ‘아카데미’ 설립. 모든 교육을 고루 실천하는 ‘전인교육’ 지향
80세 : 사망
5.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기원전 322?)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 그리스 북부 스타기라 출신 / 촌 동네 / 아버지 마케도니아의 어의 / 부유했으나 평민출신 / 열 살 무렵 부모님 잃음 / 17세 때 철학 공부를 위해 아카데미아로 옴 / 20년 동안 열공 /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현재 삶에서 진리 추구 / 현실주의자 /
철학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유’를 꼽았다.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 = 그런데 행복한 삶이란 결코 쾌락적이고 무절제하지 않다 -> 무절제한 삶은 고통을 가져다 준다 -> 행복은 쾌락과 도덕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 중용 => 극단을 피한다.
- 용기는 무모와 비겁, 절제는 낭비와 인색, 긍지는 교만과 비굴의 중간
- 추상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탐구뿐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만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
-<정치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어느 정도 재산과 상식을 가진 사람들, 즉 중산층이 다스리는 ‘중산 정치’라고 주장한다. 즉 지나친 부와 가난은 모두 극단 -> 중용적이지 않다.
- 기원전 ~ 천년까지 플라톤만 유럽에서 공부됨.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랍에서 활발히 연구되다가 기원후 천년에 유럽에 역수입되어 연구되었다.
7. 에피쿠로스 (기원전 341~270?)
- ‘나의 스승은 바로 나 자신’
- 아타락시아, 고통 없는 쾌락 = 고통을 줄이고 가능한 한 쾌락을 많이 얻는 것이 선하고 좋은 삶이다. ‘쾌락주의자’
그러나 어떤 쾌락은 얻으면 얻을수록 오히려 고통만 커진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큰 즐거움을 얻으려면 고통이 필요없는 쾌락만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크게 필수적 욕망, 필수적이지 않는 욕망, 공허한 욕망으로 나누었다. =>필수적이지 않고 공허한 욕망은 허상이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필수적인 욕망 뿐 ->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음식, 의복, 집 등 기본적인 욕구, 철학과 우정도 포함. => 철학을 함으로써 불필요한 욕망을 없애고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소박하게 산다면, 어떤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고통도 없는 상태인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있다.
-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쾌락주의라고 부르지만 실제적으로 금욕주의에 더 가깝다. 금욕적 쾌락주의.
- ‘정원 공동체’ =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애 강조 = 현재의 대안 공동체 원조 -> 소박한 삶.
- ‘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없으며,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흩어지고 없기 때문이다.’
- 플라톤이 이야기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네 가지 덕을 필요하다고 여김.
- ‘욕망은 채워질수록 점점 더 크고 강해지며 우리 삶은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원 후 121~180)
- 로마의 마지막 시절 황제
- 당시 스토아 철학 = 지나친 욕심과 쾌락 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이어진다. => 어떤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강조 = 마음의 평화
- 로고스 =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 로고스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 로마가 내세웠던 ‘세계 시민주의’ =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이성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이 만든 법도 ㄹ마법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 포용과 관용.
9. 아우구스티누스 (354~430)
- 기독교의 주교,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론을 세우고 정리한 성직자 (교부)
- <<성경>> 에 따르면 하느님은 선하고 전능한 분이다. 이런 신이 만든 세상은 행복과 사랑이 가득찬 곳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왜 고통과 절망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 ‘악이란 없으며 선의 결핍일 뿐’ = 신이 만든 세상에서는 무엇도 악하지 않다. 예컨대, 물건을 훔치고 집에 불을 지르는 일마저도 모두 선한 행동이다. 다만, 이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주는 작은 선이다. 반면, 훔치고 불 지르고픈 욕망을 참는 인내는 더 큰 선이다. 보복을 피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전과 평화라는 선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작은 선보다는 큰 선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큰 선보다는 오직 자신에게만 이익을 주거나 심지어 해로움을 안기는 작은 선ㅇ르 택하는 때가 더 많다. 왜 그럴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의 ‘원죄’에서 찾았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최초로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작은 선을 택할 수 밖 에 없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작은 선을 택하지 않고 더 큰 선으로 향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작은 선에 대한 집착, 곧 악행에서 벗어나 큰 선을 택할 수 있다.
- ‘내게는 나 자신이 문제일 뿐’, 그의 사상 출발점은 항상 자신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10. 토마스 아퀴나스 (1225~1274)
‘들은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능력은 모든 인간의 이성 속에 들어 있다.’
- 맹목으로 흐르기 쉬운 신앙에 대해 이성적 사유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모든 종교가 평화와 관용을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종교 간의 갈등과 폭력이 빚어지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신앙은 광기에 가깝다. 이성적 사과와 합리적인 대화로 진정한 신의 뜻을 깨닫는다면 종교를 둘러싼 어떤 문제도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겸손함을 잃어버린 이성은 광기로 바뀌어 버린다.
- 토마스가 강조한 것은 ‘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이성이다.’
- ‘국가와 교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해 가는 서로 다른 길이다.’
- 행복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신이 세상에 심어 놓은 자연법을 깨닫고, 이에 따라 선을 좇고 악을 피하는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11. 마키아벨리 (1469~1527)
“인간이란 두려움을 주는 자보다 사랑을 주는 자에게 해를 끼치기를 덜 주저하는 사악한 존재다. 정치는 이 같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강제 장치다.”
“폭력은 짐승에게나 어울릴 수단이지만, 군주는 때때로 짐승이 되어야 한다. 곧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추어야 한다.”
-마키아벨리즘 :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정치꾼의 권모술수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보존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값싼 도덕심과 동정 따위는 때로 던져 버리라 라고 말하지 본인이 마키아벨리주의자는 아니다.
- 보르자 : 군주론의 모델. 약육강식의 세상에 맞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
- 군주의 덕과 기독교의 전ㅌ오적인 덕목들을 구분한다. 기독교에서는 겸손과 정직, 동점심과 경건함을 강조하지만, 군주에게는 이보다는 단호함, 용맹, 기민한 판단력이 더 중요하다. -> 군주는 국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일도 서슴치 않아야 한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라는 마키아벨리즘의 오해.
* 서양의 17세기는 천재들의 세기라고 불린다.
12. 프랜시스 베이컨 (1561~1626)
- 철학자 베이컨은 근대 철학의 선두에 서서 과학 시대를 이끈 사람이다. 그는 지식이란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려면 모든 지식은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 관찰과 실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학문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권위와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 분위기를 뚫고 근대의 새싹을 피우는 토양이 되었다.
- 스콜라 철학 : <<성경>>에 기초해 세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중세의 철학.
- 베이컨의 4대 우상 비판 :
1) 종족의 우상 :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편견. 우리의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아서 자연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인간과 관련 지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번개가 치는 이유를 우리가 벼락 맞을 짓이 했기 때문이라 보는 오류가 여기에 해당ㅇ한다.
2) 동굴의 우상 : 개인의 편견, ‘우물 안 개구리’ 라는 우리 속담은 이 우상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 준다.
3) 시장의 우상 : 언어에서 생기는 잘못된 생각이다. 증권시장에서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입 소문만으로도 시세가 올랐다 내렸다 한다. 마찬가지로 행운의 여신, 봉황 같은 말들도 실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시장의 우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4) 극장의 우상 : 기존 이론이나 종교의 권위에 기대는 오류를 말한다. 잘 차려진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듯, 그릇된 많은 학설들이 기득권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판단을 어지럽힌다.
- 베이컨은 이성을 흐리게 하는 모든 편견을 거둬내고 귀납법에 기초한 유용한 지식 체계를 만들려고 했다.
- 베이컨의 삶은 출세욕과 학문적 성취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13. 토머스 홉스 (1588~1679)
“자연 상태 속에서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가운데 있다.”
- 홉스는 국제 관계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세계로 본다. 세상에서 확실한 사실은 사람들이 제각각 갖고 있는 살아남으려는 절실한 욕구, 곧 ‘자기 보존욕’ 뿐이다. 개인이 모인 국가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살아남으려는 욕심 외에 나머지는 모두 허구와 거짓이다.
- 자연과학에 대한 고나심은 관심과 실험이라는 탐구 방법의 우수성을 일깨워 주었다.
- <<리바이어던>> 은 ‘누구도 감히 맞설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중 괴물’을 말한다. 이상적인 국가란 바로 이 괴물과 같아야 한다. 누구도 반하을 꿈꾸기조차 못할만큼 국가는 무시무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 국가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홉스는 자연 상태를 설명한다. 자연 상태란 국가가 생기기 전의 인간 모습을 말한다.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홉스는 이러한 자기보존욕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즉 ‘자연권’ 이라 부른다. 그런데 살아남으려면 경쟁자를 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결국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서로서로 싸움을 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계속된다.
-> 따라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 계약을 맺는다. 이것이 생존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맺어진 최초의 법, 즉 ‘자연법’ 이다.
-> 그러나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한 계약이 반드시 지켜지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다. 계약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를 강제적으로 지키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국가는 이때 등장한다. 계약을 어겼을 EO 상대를 무자비하게 처벌하여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도록 하는 힘. 그것이 바로 국가다.
-> 강력한 국가가 주는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따라서 국가는 ‘리바이어던’ 같은 괴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있다.
-> 홉스의 생각은 왕권신수설을 대신해 왕의 권력을 지지하는 새로운 이론으로 환영받았다.
14. 데카르트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아침 11시까지 침대에서 사색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습관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수업보다 침대 속 사색이 낫다’
- 세계라는 큰 책
- ‘방법적 회의’를 전개한다. 의심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지식을 얻기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도마 위에 올려 놓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과연 확실한지 되묻는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해 보아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 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2+3=5’ 가 거짓인데 악마가 참이라고 나를 속이고 있다 해도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로부터 데카ㄹ트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이끄어 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 연역법 : 예를 들어 ‘내가 존재한다’ 라는 필연적이면서 절대 확실한 명제를 토대 삼아 다른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추론 하는 것.
- 교회는 데카르트의 주장 속에 숨어 있는 위험 요소를 알고 있었다. 세상의 확실성이 신이나 <<성경>>에서 나오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 라는 사실에서 나온다면, 신은 인간보다 더 불확실한 존재로 떨어지고 만다.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말로서 근대 서양 사상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진리의 근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에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이 명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봄으로ㅆ 자연 속의 그 어떤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위치로 올려놓았다. ->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느 존재보다 존엄하다 -> 이성과 합리성으로 요약되는 근대 사상인 ‘합리론’을 낳았다.
- 그러나 부작용이 있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존엄하다면 그렇지 못한 자연의 모든 것은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 반대 되는 것으로는 포스터모더니즘이 있다. 포스터모더니즘은 자연을 이용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ㅇ로 여기며, 육체적인 욕구도 이성으로 억눌러야 할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5. 스피노자 (1632 ~ 1677) - 합리론자
- 스피노자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은 이성 자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이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이성이며 정신이고 곧 신이라고 생각했다. 세계가 곧 신인 이상,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신의 섭리이다. 예컨대, 지진이 나서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불행이 일어났다 해도, 그것은 이미 신의 섭리에 따라 결정되어 있던 일일 뿐이다. 따라서 신의 섭리를 깨다든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비통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 세상 만물 속에 나타난 신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올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는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에서 국가의 목적은 실제로 자유라고 하면서 국가는 교회의 지나친 간섭을 막고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는 교회에게도 도전이었고, 자유를 억압하던 권력자들에게는 심한 모욕이었다.
16. 라이프니츠(1646 ~ 1716) – 합리론자
- 미적분학의 창시자(뉴턴도 발견, 각자가 제각각 발견). 수리논리학의 기초를 닦음. 에너지보존 법칙 구상,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발견, 계산기 발명-> 다양한 분야에서의 천재성
-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고 결론. 왜냐하면 완전하고 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 세상의 도처에 악과 고통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악이 있기에 세상은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 모나드 이론, 보편 기호학(계산기처럼 이성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 최선의 선택을 계산한다), 예정 조화설 주장
- 합리주의의 절정이라고 평가 받음 = 면밀한 이성과 냉철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철학 사조.
-> 그러나 불행히도 세상은 논리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 그래서 좋게 평가 받지 못하는 이론.
17. 로크 (1632 ~ 1704)
-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상식에 비추어 살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관용하라.’
- 인간에게 확실한 지식이란 ‘1+1 = 2’처럼 직관적으로 아는 것. 그리고 경험과 합리적인 추론에 의한 것 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도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신에 대한 지식은 이 강누데 어떤 것도 아니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확실한 근거를 댈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지식은 단지 믿음일 뿐이다.
- 로크의 <정부론> 에 따르면 왕이 될 권리는 왕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신이 부여하지 않았다. 왕은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복종하리라 맹세했기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려고 로크는 왕도, 정부도 없는 상태, 즉 자연 상태를 가정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연법에 ??라 ??유롭고 평화롭게 자연권을 누린다. 자연권이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권리를 말한다.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물건들을 대해서도 자연권을 행사한다. 자연법이란 곧 우리의 이성이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누구라도 상대를 쓸데없이 공격하고 해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충돌과 다툼은 언제나 일어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자연권을 침해 당했을 때 이를 막아주고 정당하게 처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연법에 따라 사회를 관리하는 통치자를 세우기로 계약 맺는다. -> 사회 계약론 -> 그런데 통치자가 사람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착취하고 괴롭힌다면 ? -> 개인의 자연권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통치자는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 -> 혁명을 통해서 통치자를 바꾸라는 뜻이다.
-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로크를 탄압하던 제임스 2세가 권력을 잃었다. 영국은 왕이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17. 흄 (1711~1776) -회의주의자, 무신론자.
‘철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 철학의 의미는 ‘일상을 반성케 하여 이따금 생활 태도를 교정하는 것’ 에 지나지 않는다.
- 그는 인간 이성의 구조를 탐구하면서 <성경> 이나 권위 있는 이론에 기대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지식,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밝히려 했다.
- 우리는 오랜 습관과 관습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이 각각의 경험들을 원인과 결과로 묶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을 수 있는 확신은 거기??지다.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과관계를 얻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 얻어지지만, 경험은 결코 인과관계 자체에 대한 지식을 주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를 기초로 얻어진 우리의 모든 지식과 학문 역시 확실하지 않다. -> 당시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혀내리라는 오만함을 팽배해 있었으나 이런 자신감에 흄은 찬물을 끼얹었다.
- 그는 우리의 도덕은 이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성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알려 줄뿐, 무엇이 덕이고 악덕인지 알려주지 못한다. 이를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가슴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공감하고, 감정을 통해 무엇이 인간적이고 도덕적인지를 판단한다.
-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날아가려면 안정된 법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법률에만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설사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지라도 전체에 이익이 된다면 이를 받아들일 줄 아는 공감 능력이 있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서 도덕적일 수 있다.
- 그는 종교나 철학 이론에 기대지 않고 인간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과 도덕을 새롭게 세우려고 했다.
-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
18. 볼테르 (1694~1778)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는 종교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 - 빅토르 위고’
볼테르는 역사를 꿰뚫어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를 예술과 정신의 진보에서 찾았다.
볼테르는 사상의 자유, 종교적 관용, 이성과 평화 , 인간의 행복을 위해 억압을 맞선 투사.
*프랑스인으로, 재치어린 독설을 잘 날렸다고 한다. 신에 대한 논증으로 기독교의 ‘신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였다.
사교계에서 유명인으로 통하다가 영국으로 추방당함. 영국의 민주주의를 눈으로 목도하고 충격.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역사서와 시사에 대한 글들을 적음. 굉장히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끊임없는 의심과 검토는 성공을 불러온다.
19. 루소 (1712~1778)
아카데미가 내건 논문 주제 ‘예술과 krans의 발전이 도덕의 향상에 기여하는가?’ -> 답정너 -> ‘인간의 도덕의 도덕심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루소는 정반대의 논문을 제출한다.
예술과 도덕은 인류에게 해악만 끼쳤다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자연 속에서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술과 학문은 인간을 본래의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치와 무절제로 몰아넣었다. 예술과 학문을 하는 이들은 남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물자로 한가하게 지내며 사색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예술과 학문의 결과물은 자신들의 게으름을 정당해했다. 예술과 학문은 사람들을 게으름과 무절제 속으로, 인류를 점점 더 큰 사치와 방탕으로 몰고 갔을 뿐이다. -> 이 논문으로 루소는 상을 받게 된다.
루소 = 사회계약론 / 에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