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노선 다툼 격화 … 아나키즘 등장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5.11.01 04:51
지면보기
【총평】
3.1운동 이후 서구와 일본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사상과 이념들이 수용되면서 민족 운동 내에서도 사상 경향과 운동 노선이 다양해졌다.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는 여러 무장 단체가 형성되었다. 독립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평안도와 함경도에 진입하여 일제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했다.
조선혁명선언,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고 주장해 일제를 경악에 빠뜨렸다.
의열단이 활약하던 시기의 신문 기사를 보면 의열단은 정의혈단(正義血團)으로 표현된 경우도 많았다. 이는 의열단이 자신들의 희생을 전제로 일제 식민통치에 타격을 가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직접행동조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의열단의 존재는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노선 다툼은 치열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장투쟁론자와 외교독립론자들의 노선 다툼이었는데, 의열단의 직접행동 노선에 대해 외교독립론자들이 비판하자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에게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고 그 결과 ‘조선혁명선언’이 탄생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이다. 피압박 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과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같았기에 신채호에게는 한국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인 아나키즘이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재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나는 의열단이나 다물단 같은 행동조직을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직접 공격하거나 친일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이상촌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은 모두 국권 회복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지고 상호 보완적인 구실을 했지만, 사상적 배경과 전개 양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민중 계몽, 근대 교육, 식산흥업,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애국 계몽 운동에는 한계점도 있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당시 국제 관계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애국 계몽 운동에는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 내재되어 있다. 다윈이 주장한 생물학적 진화론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등을 인간 사회와 국제 관계에 적용한 사회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의병 운동은 외세의 침탈과 국권 침탈의 위기 속에서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또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이었고, 양반 유생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회 계층이 참여한 민족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열강의 약소국 침략이 극심하던 시기에 의병들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사에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수인 모습의 신채호. 눈빛이 형형하다.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애국 계몽 운동은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국사 분야에서는 계몽적 특성과 국권 수호적 성격을 지닌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이 등장했다.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신채호와 박은식 등은 근대 계몽 사학을 성립했다. 특히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여 역사 서술의 주체를 민족으로 설정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과 일본에 의한 한국 고대사 왜곡을 비판했다. 이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은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들의 전기를 발간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다. 최남선과 박은식 등은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했다.
개화기에도 국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된 사실이 있다. 갑오개혁 이후 공사 문서에 국한문 사용이 제도화 되었으며, 당시의 교과서와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국한문체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이 순 국문으로 간행되면서 국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우리말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국문 연구가 진전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었고(1907), 지석영과 주시경 등의 주도로 국어 문법의 연구와 정리가 이루어졌다. 주시경은 국어 문법을 저술하여 국문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국문 연구소는 나중에 조선어 학회의 모체가 되었다.
헌병 경찰 통치 시대에는 공개적인 활동이 쉽지 않았으므로,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임병찬이 이끌었던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된 비밀 결사로 조선 왕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를 지향했다.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 말살을 위해 역사까지 왜곡했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고, 『조선사』37권을 편찬했다. 조선사 편수회와 경성 제국 대학의 교수들은 청구 학회를 결성하여 식민 사관을 퍼뜨리는 데 앞장섰다. 한국사를 왜곡한 일제는 식민 사관에는 한국사가 봉건 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고대 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 주변 역사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다는 타율성론, 지리적으로 대륙에 속박된 위치에 있다는 반도성론, 합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는 당파성론 등이 있다.
애국 계몽 운동 때부터 한국사를 연구해 온 박은식과 신채호는 일제의 식민 사학에 맞서 민족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중국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활동해 온 박은식은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와 한국 독립운동 과정을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했다. 민족혼을 중시한 박은식은 『한국통사』서문에서 “국가는 형(形)이요, 역사는 신(神)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여 왕조 중심의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그 후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서문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이병도, 손진태 등은 1934년 진단학회를 조직하고 진단학보를 발간하여 문헌 고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나라에 있는 역사서를 대부분 소각한 상황에서 증거를 토대로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한편, 조선인의 일본 이주는 1920년대 이후 크게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도쿄, 오사카 등 공업 도시로 이주하여 일본인들이 꺼리는 토목, 광업, 운수업 등에 종사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이 확대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했다. 무려 15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일본의 탄광이나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에는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뿌렸으며,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 여인을 강간한다는 조작된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일본 신문기사에 사실인양 보도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살해되었다(관동 대학살).
【고교 한국사 8종 교과서 비교해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