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戰爭
전쟁(戰爭)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소낙비가 멈추는 것처럼 또는 비통(悲痛)한 음악이 사라지는 것처럼 전쟁은 아주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폭풍우(暴風雨) 다음에는 무지개가 뻗치지만 전쟁은 종말(終末)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평화(平和)의 찬란한 예고(豫告)를 마련하는 적이 없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다. 위험(危險)한 짐승이 어두운 동굴에서도 동면(冬眠)을 하듯이 꼬리를 감추고 운동(運動)을 멈출 뿐이다. 잠자는 동안에도 그 이빨은 자라나고 발톱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어느 계곡(溪谷)엔가 바위틈에 숨어 있는 가재의 집게처럼, 잎사귀에서 나방이의 꿈을 꾸고 있는 유충(幼蟲)의 음모처럼, 땅속을 포복하는 두더지처럼, 아니다 서서히 자라나고 있는 얌종(癌腫)처럼 전쟁은 보이지 않는 풍경(風景)뒤에서 은밀히 야간행진(夜間行進)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많이 둔 우리들의 어머니는 오뉴월 밝은 태양(太陽) 빛 속에서도 근심의 주름살을 펴지 못한다. 두고두고 그때의 이야기를 하신다. 십년이 넘고 이십 년이 넘어도 포탄(蒲團)에 찢긴 살구나무 가지를 이야기하신다. 죽은 자식의 나이를 세듯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들을 다시 손꼽아보신다. 입어보지 못한 혼수와 잘 가라고 인사말도 없이 나가버린 아버지의 뒷모습과 신방에 촛불도 켜지 못한 채 먼 나라로 출가해버린 어린 딸의 옷고름을 이야기하신다.
오늘도 이야기하신다. 지뢰(地雷) 덮인 길을 걸어가듯이 조심스럽게 기억(記憶)을 보다듬는다. 그러기에 전투(戰鬪)가 멈춘 지금, 하늘을 향한 포신(砲身)은 구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먼 지평(地平)을 향해 열려 있는 참호의 총구는 6월의 꽃과 푸른 잔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팠던 기억(記憶)을 겨냥하면서 잠을 깨고 일어나려는 전쟁(戰爭)의 그 하품소리를 듣는다.
6월의 시인(詩人)이여 , 전쟁을 잠들게 하라. 엉겅퀴에 피는 꽃과도 같은 그런 언어로 피와 눈물을 매장 하거라. 다시는 대홍수(大洪水)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神의 약속처럼 무지개를 그려라. 그리고 우리들 어머니를 편안하게 하라. 포성(砲聲)만큼이나 컸던 6월의 오열(嗚咽)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딱한 어머니를 위해 등을 쳐드리듯이 詩를 써라. 詩人이여, 밤마다 가위에 눌려 일어서는 6월의 어머니들을 위해서 초원(草原)에 묻힌 녹슨 지뢰(地雷)의 꼭지를 뽑아 내거라. 그렇게 詩를 써라.
戰爭은 너의 노래가 시작되는 데서 비로소 끝난다.
이어령, 『문학사상』 1974. 6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을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