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감독(1) : 이장호와 배창호
1980년대의 영화를 정리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떠오르는 감독은 단연코 이장호와 배창호였다. 특히 배창호는 오로지 1980년대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은 대마초 파동으로 쫓겨났던 수많은 대중 예술인들을 다시 무대에 복귀시켰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신 자국민의 피를 댓가로 권력을 강탈한 또 다른 군부세력이 정권을 대체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초는 강력한 검열로 언론과 문화계는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정부의 논조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생존해야만 했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감독이 이장호와 배창호였다.
이장호의 감독 데뷔는 화려했다. 영화사 ‘신필림’ 보조 출신의 젊은 감독은 1974년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소위 70년대를 휩쓴 ‘청년 문화’에 대한 최고의 구현이었다. 이장호는 이 영화에서 감각적이고 천재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과거의 틀에 매이지 않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이 영화는 ‘청년 문화’를 상징했던 작가(최인호), 음악가(이장희), 감독의 기막힌 협력으로 완성된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어진 작품들의 성공은 이장호를 오만하게까지 만들었지만 1970년 말에 터진 ‘대마초 파동’은 오랜 침묵을 강요했다.
하지만 침묵의 시간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부정적 의미로만 변질되지 않았다. 권력에 의한 불이익은 그에게 사회적 의식과 정치적 모순에 눈을 뜨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1980년대의 이장호를 예비하는 시간이었다. 박정희 사망은 대중 예술인들의 활동을 재개시켰으며, 1980년 이장호는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영화계로 복귀했다. 5공의 검열 속에서도 영화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도시와 농촌의 갈등과 계급적 차별을 유쾌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엘리트 계층에게 조롱 섞인 평가를 받았던 국산 영화였지만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대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영화감독을 꿈꿨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찬양과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장호의 연출력은 안정된 편이 아니었다. 작품마다 작품의 질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준비와 계획을 바탕으로 한 연출이 아닌, 즉흥적인 감각과 현장 중심의 연출적 표현에 기댄 결과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영화의 깊이를 새롭게 만들어냈으며 시대적 상황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의 현상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바보선언>이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같은 수작을 완성하게 만들었다.
이장호의 조연출로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참여했던 배창호의 감독 데뷔는 매우 빨랐다. 감독 데뷔작 <꼬방 동네 사람들(1982)>은 배창호의 장점과 한계를 분명하게 예시한 작품이기도 하였다. 검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배창호는 사회 하층 계급 사람들의 생활을 통해 사회적 모순과 고통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하층계급이 지닌 삶의 어둠은 다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도구적 역할에 국한되었다. 오히려 배창호는 고난 속에서도 나타나는 인간적인 정과 이웃의 협력에 주목하였다. 결국 영화는 신파조의 멜로물로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영화의 스토리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야기 진행의 짜임새와 인물들 간의 생동감있는 관계 묘사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배창호가 추구했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의 문제나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인간상의 추구,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은 이후 작품을 통해 화려하게 표현된다.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룬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젊은이들의 방황과 도전을 그린 <고래사냥>에서도 중심되는 주제는 역사의 고통이나 현실의 아픔이 주는 사회적 문제보다는 자매의 사랑이나 젊은이의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세계관 표출이었다. 배창호에게 영화는 문제를 제기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에게 위로를 주는 공간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1980년대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시절, 사람들이 공감했고 얻으려 했던 정서였는지 모른다. “영화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것이었다. (...) 우리가 육체를 위해서 밥을 먹듯이, 예술이라는 것은 마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다.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영화의 검열이 완화되었고 제작이 자유화되었으며, 1987년 정치적 민주화는 영화 제작 환경을 전면적으로 변화시켜나갔다. 그리고 두 감독의 영화적 전성기도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중반을 주도했던 두 감독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뚜렷한 작가정신에 기초했다기 보다는 상황과 감각에 의존했던 이장호는 과거의 천재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범작을 생산했으며 결국 충무로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배창호는 새로운 예술적 시도가 독이 된 경우였다. 스토리에 강점을 둔 배창호의 영화세계는 어느 순간 진부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에 직면하였고, 이에 배창호는 미학적 형식미를 추구하면서 과감하게 새로운 영화적 세계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을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한 젊은 감독들의 신선한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영화계의 주류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5공시기(1980-1987)은 정치적 억압과 3S(sex. screen, sports)로 대표되는 우민화 정책이 사회를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영화 또한 통속적인 내용이나 에로물이 여전히 영화의 주류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때 이장호와 배창호는 젊은 영화인을 대표하며 영화에 새로운 힘과 분위기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이장호의 사회비판적 시각이 담긴 영화는 검열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모순을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며, 배창호의 영화는 사회적 문제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존중과 고귀함에 대한 애정을 전달하였다. 또한 황량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던졌다는 사실은 결코 현실의 은폐가 아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인간적 유대였다.
나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대의 관점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모든 판단은 문제가 발생하고 시작된 시대적 환경과 한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그 속에서 장점과 단점을 살핀 후에 현재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익숙한 자신의 논리에 맞춰 외부의 세계를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 자체의 독립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장호와 배창호의 영화세계는 1980년대를 밝혀준 따뜻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어둠속에서 스크린에 파묻힌 채, 혼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극복하는 힘을 기르게 해주었던 소중한 시간을 제공한 것이다. 그런 시간이 많든 적든, 위로를 주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장호와 배창호의 따뜻한 인간애는 분명 위로와 위안이었다.
첫댓글 문제가 발생하고 시작된 시대적 환경과 한계 속에서 바라보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