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의 팀 전술 분석
- 월드컵 우승을 이끈 명장들의 신의 한 수 -
# 역대 월드컵 우승팀에는 공통점이 있다. 월드컵을 앞둔 어느 시점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승세 이면에는 항상 한 가지 특별한 전술 변화가 있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월드컵 우승을 주도한 명장들의 ‘신의 한 수’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3 1994 미국 월드컵 우승팀 브라질
공격적인 4-2-2-2로 연이어 실패를 경험한 브라질은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수비 강화를 위해 3-5-2 카드를 꺼내들었다. 4-2-2-2의 더블 볼란테를 싱글 볼란테로 바꾸고, 남은 자원 1명을 리베로로 대체하면서 3-5-2가 완성됐다. 그러나 리베로가 배후로 이동할 때 벌어지는 2선과 3선 사이의 넓은 공간은 기술 축구를 선호하는 브라질 선수들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결국 브라질은 체력 확보가 중요한 시스템 여건에서 특유의 정교함을 잃은 채 고전했다. 16강 탈락. 이는 66 잉글랜드 월드컵 이래 가장 좋지 못한 성적이었다( 그림 1 ).
( 그림 1 ) 4-2-2-2 → 3-5-2
하지만 대표팀은 실리 축구 노선을 버리지 않았다. 카를로스 페레이라 감독은 94 미국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난 세대의 3-5-2를 적극 수용했다. 측면 수비수의 공격성과 공격진의 중앙 밀집성이 강한 브라질 축구의 특성을 고려할 때, 3-5-2는 수비 강화 측면에서 나쁘지 않은 포맷이었다. 페레이라는 지난 세대의 실패를 거울삼아 3-5-2를 브라질식으로 적절히 변형하면 충분히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발상의 초점은 3-5-2에서 중앙 미드필더와 리베로 사이에 나타났던 공간을 커버하는 데 맞추었다. 이를 위해 페레이라는 스토퍼 체제를 센터 백 체제로 되돌리고, 리베로를 센터 백 앞 포지션에 배치하는 새로운 포진을 선보였다. 역삼각 형태였던 기존의 3백을 삼각 형태의 3백으로 바꾸면서 중앙 미드필더와 리베로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림 2 ).
( 그림 2 ) 3-5-2→변형 3-5-2(4-2-2-2)
페레이라호의 변형 3-5-2는 엄밀히 따져 수비적인 형태의 4-2-2-2였다. 기존 4-2-2-2와의 차이는 더블 볼란테 활용법에 있었다. 과거에는 테크니컬한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가 이 위치에서 공-수 운영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반면 페레이라 호에서는 수비가 강한 중앙 미드필더 1명과 4백 앞에 자리한 포어-리베로(홀딩 미드필더) 1명이 수비에 보다 더 치중했다. 볼란테 라인의 부족한 공격력은 공격형 미드필더 중 1명이 수시로 후방으로 내려가 채워주었다. 이 방식은 훗날 실리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운영체계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림 3 ).
( 그림 3 ) 94 미국 월드컵 당시 브라질 포메이션- 조별예선 -
수비 시, 더블 볼란테와 4백은 다음과 같이 움직였다. 먼저 중앙 미드필더 둥가가 상대 빌드 업의 패스 거점(2선의 중앙)을 강하게 압박하면, 포어-리베로 마우루 실바가 둥가의 등 뒤에 나타나는 공간을 차단했다. 이로써 상대 공격이 2선에서 지연되면, 반원 형태로 대열을 갖춘 4백이 빠르게 전진하여 압박 저지선을 지원했다( 그림 4 ).
이와 같은 수비 운영 방법은 2선과 3선의 간격을 좁게 유지하면서 파워풀한 유럽 공격수들의 활동 반경을 제한하는데 힘을 발휘했다. 나아가 높은 위치에서 밀도 있게 움집한 미드필드 진영은 빌드 업 과정에서 특유의 정교한 패스워크를 뽐냈다.
즉 수비 방식의 변화, 특히 리베로의 위치 변화를 통해 실리 축구(압박과 수비, 스피디한 역습)와 전통 축구의 주요 사항(창의적이고 섬세한 공격 운영) 중 일부를 정확히 조화시킨 것이다.
( 그림 4 ) 페레이라호의 수비 시스템 도면
<미드필드 라인에서 상대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포어-리베로가 센터백 라인으로 내려가 수비 위치를 잡았다. 포어-리베로의 위치 변화에 따라 팀의 전형은 4-2-2-2와 3-5-2(3-3-2-2. 5-1-2-2)를 유연하게 오갔다. 단 포어-리베로는 센터 백 뒤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수비라인의 후퇴 빈도를 낮추기 위해서였다. 수비력 확보에 힘을 집중하되, 중원과 전방에서의 경쟁력도 최대한 유지하려 했던 페레이라의 전술적인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부족했다. 미드필드 지역에 전문 측면 플레이어가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이는 팀이 압박을 진행할 때, 상대 빌드 업에 대한 견제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그림 5 ).
( 그림 5 ) 압박 시, 4-2-2-2의 구조적인 한계성
4-2-2-2는 측면을 막기 힘든 구조의 특성상, 상대 빌드 업을 완벽하게 견제하기 어렵다. 만일 경기 중 이러한 약점이 부각될 경우, 수비 불안과 풀백의 활동성 저하로 자칫 팀의 경기 운영 전체가 정체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방지하려면 미드필드 전방에 위치하는 선수들이 수비적으로 공헌해야 한다. 10번 플레이메이커에게 요구되는 전술 사항이 ‘창의성’과 ‘공격성’이 아닌, ‘수비’와 ‘태클’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공격형 미드필더 진의 역할 설정이 화두로 떠올랐다. 당시 브라질의 미드필드 전방은 10번 플레이메이커 하이와 수비 기여도가 높은 공격형 미드필더(10번 조력자) 지뉴가 맡았는데, 이 중 하이는 가진 기량에 비해 팀 전술과 능히 융화되지 못했다. 압박 블록 형성, 전진 수비, 신속한 역습을 중요시하는 페레이라의 전술 운영에서 10번은 스타일상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미드필드진의 유일한 찬스 메이커인 10번은 1선과 2선의 원활한 연결을 위해 결코 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사진_상파울루FC의 레전드이자 소크라테스의 친동생으로 유명했던 하이>
물론 페레이라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중앙 미드필더 둥가와 포어-리베로 마우루 실바의 수비력을 앞세워 위의 문제를 어느 정도 커버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10번 하이를 굳이 제외하여 공격 균형에 흠을 내려하지 않았다. 하이는 팀의 10번 플레이메이커로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 월드컵 대표팀의 주장으로 선임되는 등 페레이라 감독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본선이 시작되자 하이의 컨디션 난조가 두드러졌다. 이는 시스템 구조의 불안 요인들을 더욱 들쑤셨다. 갑작스럽게 고민에 빠진 페레이라 감독은 토너먼트 전을 앞두고 그를 베스트 11에서 과감히 제외했다. 대신 수비력과 체력이 뛰어난 멀티 플레이어 마지뉴를 그의 대체자로 선발 기용했다. 또한 새로운 캡틴으로 중앙 미드필더 카를로스 둥가를 임명했다. 공격성을 배제하고 전술 포인트를 ‘압박’에 집약시킨 조치였다( 그림 6 ).
( 그림 6 ) 94 미국 월드컵 브라질 포메이션 - 토너먼트 -
결과적으로 페레이라의 이 선택은 좋은 방향으로 팀을 이끌었다. 마지뉴가 가세하여 수비화된 공격형 미드필더 라인이 2선의 측면을 꼼꼼하게 커버해주면서, 중앙 미드필더-포어 리베로를 축으로 한 압박 전술은 완전체가 되었다. 견고한 수비 블록, 빈틈없는 중원 압박, 2선에서의 정교한 패스워크, 순도 높은 역습 전개 등 수비 운영과 빌드 업 구성에 있어서는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아가 10번의 부재로 비상이 걸렸던 공격진 운영 역시 처진 포워드 호마리우의 대활약을 앞세워 별 탈 없이 메웠다. 수비와 공격 모두 ‘완벽’ 그 자체였다.
브라질은 토너먼트에서 네덜란드, 스웨덴, 이탈리아 등 우승후보들을 차례로 꺾으며 24년 만에 월드컵 트로피를 차지했다. 과거와 같이 화려한 면모는 없었지만, 대신 기복 없이 ‘지지 않는 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선보인 막강한 조직력에 외신들은 ‘24년 만의 드림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_94 미국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
하지만 자국의 전문가들과 팬들은 오히려 수비적인 페레이라의 전술 운영을 비판했다. 윙이 없는 4-2-2-2에서 10번 플레이메이커마저 뺀 것은 무리수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 팀의 우승은 페레이라의 전술적 판단이 아닌, 두 명의 전방 공격수(호마리우-베베투)가 펼쳐 보인 놀라운 활약에 의한 것이라고 평했다.
물론 틀린 시각은 아니었다. 4-2-2-2에서 10번은 압박 균형을 저해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공격의 균형을 지탱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4-2-2-2의 No.10 딜레마. 이는 차기 주자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제 4편에서는 50 브라질 월드컵 당시 우루과이의 우승을 이끈 후안 로페즈 감독의 전술 변화에 대하여 알아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