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원제스님이 법회하시는 걸 보았는데 제목이 忽然 이었다. 홀연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그것을 주제어로 강의하는 것은 처음 보는것 같다 .홀연-아상 과 대상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스님은 설명하셨는데 국어사전에는 부사로 되있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여서 열심히 법회하시는 걸 들었다.
7월 2일인가 부터 매일 108배를 해왔다.날씨가 너무 더워서 한번에 연속으로 절을 하기가 힘들어 다섯번 하고 잠시 부채질하고 열번 절한 후 부채질하며 땀을 식히고 쉬엄쉬엄 절했다.너무 무리한 걸까 8월 들어서부터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고 드디어 오늘은 108배를 포기했다. 진통제를 먹고 절에 갔는데도 계속 몸이 아프니 걱정이 된다 .
법당에 들어가기 전 나는 용화사 마당에 있는 소나무,돌탑,돌부처님 등에 합장하고 소나무님! 돌부처님! 하고 부른다.
지금 23년 8월에 나에게 가장 나의 제1의 멘토로 떠오른 분 돌부처님이다. 돌부처님 근처에는 눈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귀를 가리고 있는 원숭이 ,입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석상이 있다. 늘 별 관심이 없이 지나치던 원숭이들인데 지금 8월에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제서 死物이 아닌 生物처럼 관심이 가고있다.
왜 돌부처님인가, 돌부처가 나의 나의 멘토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無 에서 부터 왔다.
나는 내가 전생에 누구였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내가 전생에 누구였는지 짐작 가는 인물이 있다.
.전생에 내가 저지른 업보로 인해 지금 生이 있고 지금의 現生에 한 행동들로 인해 내생에 받을 업이 어떤것인지 짐작이 간다.
우리는 전생에 지은 업보를 현생에서 받고 있으며 현생에 지은 업을 다음 생에 받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내생에서는 다시는 하면 안될 행동을 이생에서 끊고 가야 하는데 하며 조급해진다
효봉스님께선 입적하시는 그 날까지도 "無"라 "無!" 라 하며 무라는 말을 되뇌이셨다고 한다.왜 無 라는 단어를 평생 뇌이셨을까
그것이 궁금했다.그 궁금증은 내 전생의 업과 현생의 업을 생각하면서 홀연히 깨닫게 되었다.
법정스님이 쓰신 글에 보면 효봉스님 前記가 있다. 효봉스님은 판사였고 죄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셨는데 그 사형수는 일제시대에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스님은 판사를 그만두고 엿장수가 되어서 전국을 누비며 참회하셨다.효봉스님께서 엿장수 하시다가 스님이 되어 금강산의 절에서 참선하실 때 참선하다가 벼란간 돌아앉으셨다. 그때 스님의 아들이 법당앞에 오는걸 보고 돌아앉으셨다고 한다. 그 아들은 나중에 집에 달았던 연등에 불이 붙어 사망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떤 업을 지으신걸까. 내가 스님이라면 다음 생에는 절대 결혼하지말것 ,두번째로 판검사같은 직업도 갖지말고 일찍 부터 스님이 될것 이두가지 원을 세울 것 같다. 전생부터 지어진 업으로 인해 결혼했던 것을 가장 후회하실 것 같다 다음으로 일찍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을것을 어찌하여 판사가 되었나 하고 그 업을 후회하시고 다음생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無라 無라 하고 운명하시는 순간 까지 無를 뇌이셨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전생의 업을 짐작하고 있다. 전생의 업으로 인해 이번 생에 지은 업을 알기에 다음 생에 또 똑같은 실수를 할까봐 늘 무섭다 .
나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개 당부하셨던 말씀이 있다
"네가 죽거든 가사 장삼을 입혀서 관에 넣어다구 "
그런데 그 유언을 시킨대로 하지못했다. 경황이 없었다. 머리도 밀고 가사장삼을 입혀드릴걸 하고 항상 후회된다.來生에는 꼭 스님이 되고싶으셨나본데,,,
나는 아이들한테 그런 부탁을 할 수 없다 .전생과 이생의 내 업을 보건대 나는 절대로 스님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스님이 될 업은 쌓지못했다 전생에도 나는 불교 서적을 보며 불교공부를 했고 그업으로 인해 이번 生에도 불교공부를 했다. 어머니 따라 십여세 무렵부터 절에 따라 다녔고 ,,
이십세 안팎에 일찍 스님이 되신 분들을 보면 전생부터 몇 생인지는 몰라도 스님이셨구나 하는 감이 온다 작은 오빠는 나보다 8세 위고 그위에 언니는 오빠보다 2세 위였다. 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급할 때 오빠도 같이 중학교에 진학했다.오빠가 4학년일 때 6,25가 나서 우리 가족은 경기도에서 전라도 이리까지 피난을 갔다.네살이던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을 갔다. 아버지께서 경찰이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인민군한테 잡히지 않기 위해 멀리 전라도까지 피난을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