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전과 빙계계곡 풍혈·빙혈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과 가음면 소재지를 지나 산구비를 지나 들어가면 수려한 산세의 계곡이 있습니다. 빙계계곡이라 부르는이곳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올라 있을 만큼 예로부터 알려진 곳으로, 경북 팔승지의 하나로 꼽혀왔습니다.
이 빙계계곡에는 팔경이 있는데, 빙혈(氷穴), 풍혈(風穴), 인암(仁岩), 의각(義閣), 수대(水碓), 석탑(石塔), 불정(佛頂), 용추(龍湫)가 바로 그것입니다. 얼음계곡이란 뜻을 가진 빙계(氷溪)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한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곳입니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는 이곳에 얼음구멍인 빙혈(氷穴)과 바람구멍인 풍혈(風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빙혈과 풍혈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바람구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름철이 되면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서늘해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빙계계곡은 입구 좌우로부터 기암괴석이 솟아있고 사철 맑은 물이 흘러 경치가 뛰어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엔 절이나 서원 하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해졌습니다.
신라시대에 영니사(盈尼寺)라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절은 빙산사(氷山寺)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태종 7년(1407년) 왕실에서 전국에 설치한 88개의 자복사찰(資福寺刹) 가운데 하나로 꼽혔는데, 이때 이미 빙산사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권응수(權應銖) 장군에게 쫓기던 왜군이 상주로 철수하면서 빙산사에 불을 질러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엔 오층석탑만이 남아 있습니다. 의성군 의성읍 장천(현 남대천 상류)에 있던 사액서원인 장천서원(長川書院)이 1600년(선조 33년)에 임진왜란으로 폐사된 빙산사터로 옮겨와 빙계서원(氷溪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이 서원은 훼철되었으며, 지금 빙계계곡 입구에 있는 빙계서원은 2006년에 경북북부권유교문화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빙계계곡에는 여름날 얼음이 어는 동굴인 빙혈이 있어 유명합니다. 이곳에는 빙혈뿐만 아니라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 겨울에는 훈훈한 바람이 나오는 바람구멍이 여러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빙혈 위에 있는 풍혈입니다. 폭 1m 높이 2,5m 길이 10m쯤으로 빙혈보다는 좁은 편입니다.빙혈은 해마다 입춘 무렵부터 찬 기운이 들기 시작하여 해가 가장 길어지는 하지 무렵에는 얼음이 얼어 영하 4℃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가을이 드는 입추부터는 다시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해가 가장 짧은 동지에는 영상 3℃의 훈훈한 기운이 감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곳은 바깥과는 서로 반대되는 기온을 나타내는 신기한 곳입니다.
빙계계곡의 이러한 특이한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조문국시대부터 잠종의 저장소로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1926년(대정15년) 12월1일 발행한 미광이란 책자에 나옵니다. 미광은 당시 산운주재소장이던 적도교웅이 금성면 일원 지역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편찬한 의성지역의 고대 역사를 다룬 자료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문국 왕성의 동남산체가 누에머리와 유사한 것을 왕이 발견하고 양잠을 장려하면 좋은 비단을 얻을 줄 생각하고 잠사를 초빙하여 뽕나무 동산을 설치하고 산명을 잠산이라 하고 상원을 상리하고 하였던바, 예상과 같이 좋은 비단을 수확하였다. 왕은 백성들에게 잠업을 장려하니 조문은 이로부터 잠업이 발달하여 이웃나라에서도 잠업의 시찰을 왔다고 전하며, 왕은 누에종자의 저장에 불편을 느꼈던 바, 거주하는 성 동방에 한 개소의 얼음구멍을 발견하니, 지금의 춘산면 빙계동이라 이리저리 험준한 암석밑에 움푹한 구멍이 있으니, 넓이는 일척이고 깊이는 굽고 굽어서 그 깊고 얕음을 알 수 없는 바람구멍이 있고 바람구멍의 오른편에는 얼음구멍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1425년) 7월 3일 세종대왕이 이조에 전지(傳旨)한 내용을 보면, "경상도 의성잠실 감고(監考) 전 부사정 장영계는 맡은 임무에 부지런하여 고치 생산량이 전보다 갑절이나 되니, 다시 복직시켜 뒷사람을 권장하도록 하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후로 잠실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1910년 11월 25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서원동에 있는 풍혈의 구조 개수공사와 시설이 완료되어 하추잠종(夏秋蠶種)을 저장키로 하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이 풍혈은 1908년 발견된 것으로 빙산(氷山) 풍혈(風穴)이라 이름 붙이고 잠종(누에씨)의 저장장소로 연구하여 왔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풍혈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찬 기운이 확 하니 밀려왔습니다.
이처럼 빙계계곡의 신기한 자연현상을 기록한 글로는 현종 8년(1667년) 허목(許穆)의 기언(記言) 제28권 원집(原集) 하편 산천(山川)의 빙산기(氷山記)가 있습니다.
빙산기(氷山記)
빙산(氷山)은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고호(古號) 남쪽 47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 산에 쌓인 돌은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많아서, 마치 낙숫물 그릇과도 같고 사립문과도 같고 규호(圭戶, 홀(笏) 모양으로 된 방문)와도 같고 부엌과도 같고 방과도 같은 것이 자못 헤아릴 수가 없다.
이 산은 입춘(立春) 때 찬 기운이 처음 생겨 입하(立夏)에 얼음이 얼고, 하지(夏至)의 막바지에 이르면 얼음이 더욱 단단하고 찬 기운이 더욱 매섭다. 그래서 아무리 성덕(盛德)이 화(火)에 있어(사철 중에 화(火)가 가장 왕성한 절후, 곧 여름을 말한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성한 대서(大暑)라도 공기가 차고 땅이 얼어서 초목이 나지 못한다.
입추(立秋)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입동(立冬)에 찬 기운이 다하고 동지(冬至)의 막바지에 이르면 구멍이 모두 비게 된다. 얼음이 없을 시기에 얼음을 보기 때문에 기이함을 적어서 산을 빙산(氷山), 시내를 빙계(氷溪)라 한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천지의 기운이 봄과 여름에는 따뜻한 기운을 내어 발육하기 때문에 응결된 음기(陰氣)가 안에 있고, 가을과 겨울에는 거두어 간직하기 때문에 온후(溫厚)한 것이 안에 있다고 한다. 이는 바위 구멍이 땅바닥까지 뚫려서 땅속에 잠복한 음기가 이를 통하여 스며나오는 것이리라.그러므로 입춘에 춥기 시작하여 입하에 얼음이 얼고 하지에 얼음이 굳으며, 입추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입동에 얼음이 다 녹고 동지에 구멍이 비는 것이니,
이는 곧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의 소장(消長)과 왕래(往來)하는 기운을 징험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개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기(地氣)의 충만함이 동남 지역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 뜨고 성기어서 새 나오는 것이 이와 같다. 그 서쪽으로 백 수십 리쯤 떨어진 주흘산(主屹山) 아래에 조석천(潮汐泉)이 있는데, 바다와의 거리가 4백여 리나 되는데도 그 찼다 줄었다 하는 것이 바다의 조수와 같다' 한다.
氷山。在聞韶南四十七里。山積石磊磈。多竅穴。若霤若扉若圭戶若竈若房。殆不可數記。立春寒氣始生。立夏氷始凝。至夏至之極。氷益壯。寒氣益洌。雖大暑盛德在火。爩燠方盛。寒洌地凍。草木不生。立秋氷始消。立冬寒氣盡。至冬至之極。竅穴皆虛。以見氷於無氷之節。志異。故山謂之氷山。溪謂之氷溪。嘗聞天地之氣。春夏則呴噓發育。沍陰在內。秋冬則闔歙閉藏。溫厚在內。此蓋巖竇竅穴。疏通無底。地中伏陰之氣。於是焉泄矣。故立春而始寒。立夏而始氷。夏至而氷壯。立秋而氷消。立冬而氷盡。冬至而竅穴虛。則一陰一陽。消長往來之氣。驗矣。然槩論地氣之磅礴。東南爲不足。故其浮疏泄漏者如此。其西百數十里主屹下。有潮汐泉。去海上四百餘里。其盈涸。與海爲消息云。 <미수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