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6) - <변화하는 세계, 새로운 주체>
1. 창비 2022년 여름호의 특집 주제는 <변화하는 세계, 새로운 주체>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기세가 절정이던 이 시기에 주목받았던 문제는 ‘돌봄’과 ‘기후위기’ 그리고 ‘불평등’이었다. 창비 특집에 실린 논문에서는 어떤 문제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돌봄’과 ‘기후위기’에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중점을 이룬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인들을 ‘아동돌봄 도우미’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러한 정책적 시도에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려는 노력대신에 돌봄 부담을 외주화시킬 뿐 아니라 ‘이주와 인종적 위계’라는 제국주의적 방식의 활용이라는 매우 위험한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사회학자 백영경은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에서 현재 지구를 위협하는 기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성장’ 담론에는 여성주의적 시각이 개입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현재 북반구의 선진국에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자국의 부담을 저개발 국가들에게 전가하는 방법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 가끔 해외토픽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나라의 심각한 쓰레기 공해는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돌봄’의 문제를 개별적 국가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국 전지구적 차원의 불평등과 돌봄의 위계적 전가로 변모할 뿐이다. 즉 ‘돌봄의 사회화’에 대한 요구가 ‘돌봄의 상업화’ 경향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3.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초는 ‘돌봄’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동안 ‘돌봄’은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생산적인 노동보다 저평가되고 중요성도 낮게 인정되었다. 최근 ‘가사노동’의 가치를 법원에서 판결하고, ‘돌봄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지고 있는 것은 ‘돌봄’을 어떤 특정한 집단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자국의 불평등이나 불편함의 해소에 초점을 맞춘다면 최근 정부의 계획처럼 ‘돌봄’의 부담을 다른 곳으로 전가시키는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결정을 초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입주 도우미의 임금이 대략 200만원 정도 책정할 수 있다는 견해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 지나치게 높은 임금이라는 언론보도에서 볼 수 있듯이, ‘돌봄’을 중요한 사회적 가치라는 인식보다는 단지 상업적 거래의 수준으로 바라보게 하는 위험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4. 돌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불평등과 탈성장의 담론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백영경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돌봄의 문제로 확장해서 보면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비경제적인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평가절하하고, 돌봄을 값싼 저임금 노동으로 착취하며, 돌봄의 지구적 연쇄효과를 통해 글로벌 남반구로 그 부담을 전가하는 체제가 곧 자연을 착취하고 비용을 외주화하며 이윤을 극대화하면서 기후위기를 심화시키는 체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5. 돌봄, 불평등의 문제는 ‘기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후위기’의 절박함 때문에 모든 성장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개발을 진행 중인 국가들에겐 결코 ‘기후정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최근에는 ‘탈성장’이라는 용어보다는 ‘적당한 성장’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보다는 ‘(환경이) 지탱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기후위기’의 심각함은 더 확대되고 있다. ‘그린워싱’이라는 친환경적인 기업 행위는 위선적이고 표피적인 정책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모든 개인의 친환경적 실천은 화력발전소 한 곳의 탄소배출량보다도 적다는 점에서, 좀 더 급진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기후위기에 접근해야 한다고 이현정은 말한다. 이현정은 <기후정의의 정치적 주체되기>에서 기후위기의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생태적으로 불평등하고 병적인 교환을 ‘드러내고’, 문제를 지구시스템의 회복탄력성에 초점을 맞춰 ‘다시 평가하고’, 잠재적 재앙 앞에 좀 더 ‘엄혹한 제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다시 정의하기’를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가장 큰 책임과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세력은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들인 것이다.
6. 생태학자 유진 오덤은 인간의 수동성을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전에 상황이 아주 나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성향이 있고, 생존전략으로서 화를 냄으로써 가해지는 압박에 대응한다.” 생태과학자들은 현재 지구의 기후위기가 ‘티핑포인트’를 향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티핑포인트’는 현재의 자원과 힘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차원에서 벗어나는 지점으로 이때가 되면 문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제안처럼, 많은 생태학자들의 조언처럼, 윌리엄 모리스의 “교육하라, 선동하라, 조직하라”처럼, 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발언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에 돌입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은 결국 ‘자본주의적 시스템’과의 충돌일 수밖에 없다. 이윤과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적 목표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생긴 것이다.
7. 최근 논의되고 있는 지구적 문제의 핵심에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있다. ‘자본주의’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자본’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수많은 인간들이 기생하고 살아갈 뿐이다. ‘자본’이 가져다 준 이윤에 탐닉된 사람들은 마치 마약의 유혹처럼, 쉽게 자본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은 끊임없이 성장하라고 독려하며, 자본의 영역을 확대하라고 권고하며, 이익이 있는 곳에선 결코 멈추지 말라고 속삭인다. 물질적 삶의 편리성에 중독되면서 우리는 그러한 권고의 달콤함을 만끽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위기 속에서 ‘돌봄, 불평등,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대부분의 견해들은 문제를 드러내고 발언하고 행동하라고 권고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본주의’가 가져다 주었던 중독에서 벗어날 용기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의지나 결정은 항상 시스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변화에 대한 의지보다는 축소된 이익을 받아들일 용기가 우선되어야 할지 모른다. 추상적인 구호의 외침보다는 실질적인 불편에 대한 감내가 어쩌면 더 실천적이다. 내가 손해 볼 수 있다는, 현재의 물질적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각오없이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수동적 응시’라는 개념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목소리의 과잉보다는 변화를 수용하는 힘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 "현재의 물질적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각오없이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 지구촌 생태계 진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의 선택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