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일시: 2024년 12월 15일 (일)
o 날씨: 맑음
o 경로: 망월사 - 동문지 - 북문지 - 서문지 - 남문지 - 병영1동 행정복지센터 (남외성)
o 거리: 3.4km
o 소요시간: 1시간
o 걷기정보 및 여행포인트: 울산 병영성
o 지역: 울산시 북구
o 일행: 나홀로
o 트랙:
o 지도
[울산 병영성] 1417년(태종 17)에 쌓은 울산 병영성은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쌓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으로 경상좌도 병마도 절제 사영의 주둔지였다. 전체의 평면 모양은 타원형이며, 성의 크기는 둘레 약 1.2㎞, 높이 약 3.7m 정도 된다.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여장(墻: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과 같은 구조물) 등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었다가 세종·문종대에 와서 옹성(甕城)·적대(敵臺:雉城)·해자(垓字) 등 여러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내부시설로 우물·도랑·창고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과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 위치를 기박 산성 자리로 옮기기 위해 그 둘레에 붉은 기를 꽂아두었는데 별안간 동해 쪽에서 일진의 광풍이 거세게 몰아쳤다고 한다. 이때 기 하나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갔는데, 그 방향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병영성 위치였다고 한다. 성을 풍수지리적 길지에 지어 외적의 침략을 막고 고을을 지키려는 백성들의 바람이 투영된 설화라 하겠다. 오랫동안 나라의 동남쪽 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부근에 주둔하던 왜군이 이곳의 돌을 가져다 울산왜성을 쌓으면서 훼손되었다. 현대에 들어 도시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성터만 남았다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지금은 많은 부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산병영 남문지] 울산 중구는 2024년 11월 6일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서남구간 일원 발굴조사' 현장 공개 행사를 열고, 발굴 과정에서 남문지(남쪽 문의 터 혹은 흔적)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울산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 왜적 침입 견제 등 동남 해안권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성(城)으로, 경상좌도 육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곳이다. 중구는 병영성 성벽의 선형과 구조를 확인하고자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아 2022년부터 재단법인 울산연구원에 의뢰해 병영성 서남구간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왔다. 조사 결과, 중구 서동 519 일원에 병영성 초축(初築) 당시 성문 시설인 옹성과 문지도리석(문짝과 문설주를 잇는 문지도리를 꽂는 돌), 원산(여닫이 문짝이 안쪽으로 밀려들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턱)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발굴 조사단은 이번에 확인된 성문 시설을 병영성 남문으로 보고 있다. 중구는 이번에 초축 당시 남문지를 발견하면서 그동안 알려졌던 병영성 위치와 구조가 실제와 다르다는 점, 15세기 남문에서 18세기 서장대로 시설의 기능적 변화가 확인된 점, 기존 병영성에서 확인됐던 성문 축조 방식과는 다른 남문만의 특징들이 확인된 점 등을 학술 가치로 분석했다. 중구는 내년에 관련 자료 보완과 고증 등을 위한 '서남구간 일원 보수 정비 기본 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앞서 중구는 올해 초 북문지, 동문지 정비 공사를 시작한 데 이어 내년에는 서문 복원 공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언론기사)
[울산의 성곽]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한다면 울산은 성곽의 도시다.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해서 고대 사회부터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해양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검단리 환호 유적과 화봉동 환호 유적 등이 확인된다. 삼한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 축조된 성곽 유적은 도처에 많이 남아 있다. 관문성(關門城)[사적 제48호]은 경주 외곽을 방어하고, 울산항으로 상륙해서 왕경으로 출입하는 외국 사신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 축조되었다. 반구동의 대규모 목책성과 토성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초까지 울산 포구를 직접 통제하던 성곽이다. 신정동 남산의 은월산성, 문수산성, 대운산성 등 수 많은 산성은 대부분 당시의 소규모 치소거나 큰 마을 단위의 피난성으로 보인다. 이들 성곽의 입지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해안선, 태화강, 동천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고려시대가 되면 차츰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울산이 가지고 있던 왕경 외항으로서의 특권도 사라지면서, 1011년 지금의 중구 반구동에 울주 고을 치소성이 축조된다. 여타의 성곽은 기록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차츰 버려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말이 되면 왜구 침탈에 대응해서 울산 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성곽 정비가 추진된다. 울산 지역은 1385년에 왜구의 피해를 입은 울주 치소성을 일부 석성으로 새로 정비하고, 1390년에는 언양읍성(彦陽邑城)[사적 제153호]이 토성으로 축조된다. 1415년부터는 울산 지역에서 다양한 성곽 축조가 시작된다. 가장 먼저 1415년부터 1417년까지는 옛 치소성을 대신해서 조선식의 새로운 울산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병영성(兵營城)[사적 제320호]이다. 이외에 1452년에는 북구 정자마을 뒤에 유포석보(柳浦石堡)가 설치되고 수년 후에는 북구 염포동 중리마을에 염포영성(鹽浦營城)이 축조되었다. 1459년에는 수군만호가 지키던 개운포에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 설치로 읍성이 없던 울산 고을에 1477년 새로운 읍성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중구 북정동, 교동, 성남동, 옥교동 일대다. 이로써 울산은 경상좌도의 병영과 수영이 모두 자리잡은, 그야말로 군사 요새 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이 지역 성곽에도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먼저 병영성과 울산읍성, 언양읍성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울산읍성은 완전히 허물어져서 그 석재로 울산왜성을 쌓았다. 조선 초기부터 있던 서생포 수군만호진성(水軍萬戶鎭城)도 서생포왜성을 쌓으면서 파괴되었지만, 임진왜란 후에는 왜성을 우리 수군첨절제사진성(水軍僉節制使鎭城)으로 썼다. 전란 후에 병영성과 언양읍성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차츰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여러 기록과 고지도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솔기념관] 은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킨 독립운동가이자 평생 한글 보급과 정보화를 위해 한길을 걸은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삶과 한글에 대한 정신을 기리고자 개관하였다. 외솔 최현배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고 표준말 정립, 우리말 사전 편찬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 국장을 맡으며 초중등 교과서의 문법 체계, 가로쓰기 체계 확립 등 대한민국의 국어정책의 초석을 다지고 한글전용 운동에 헌신하는 등 훈민정음이 오늘날의 한글이 되기까지 외솔 최현배의 갖은 노력이 있었다. 외솔기념관은 평생 한글을 지킨 외솔 최현배의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된 상설전시실을 비롯하여 다양한 한글 서적들을 열람할 수 있는 한글실,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한글 놀이와 체험이 준비된 체험실, 교육 운영 공간인 모둠실, 영상실 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상설전시실은 2023년 3월 새롭게 개편되어 개관 당시보다 훨씬 쾌적한 공간으로 거듭났으며 다양한 자료를 통해 누구나 쉽게 외솔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다. 전시실 내 체험공간에서 [전자 타자기로 나만의 방문증 만들기] 체험도 가능하다. 기념관 2층 야외 공간에는 외솔 최현배가 나고 자란 생가가 함께 있어 그의 삶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산병영순교성지성당]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울산 병영 장대벌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기리는 성당이다.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이고, 장대는 군사 지휘관이 올라가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돌로 쌓은 대를 말한다. 울산 병영 장대는 울산 경상좌도병영성(蔚山慶尙左道兵營城)[사적 제320호]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에 군사 훈련 및 중죄인 처형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울산 병영 장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성당 건립 장소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울산 병영 장대벌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허인백[야고보] 등이며,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o)에 의해 복자품(福者品)에 올랐다. 복자품은 특정한 지역의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공경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지위를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