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의 바다 그리고 긴 명품 솔숲, 해파랑길 39
1. 일자: 2023. 12. 9 (토)
2. 장소: 해파랑길 39코스
3. 행로와 시간
[사천진항(10:07) ~ (사천해변/솔숲/순포해변) ~ 테라로사/순포습지(10:52~11:03) ~ (순포해변/순긋해수욕장) ~ 순개울 방파제(11:22~33) ~ (사근지해변) ~ 경포해변(11:58) ~ 경포대(12:20) ~ 허균·허난설헌기념관(12:52) ~ 강문솟대다리(13:25) ~ 식사(13:32~52) ~ (강문해변/솔숲/송정해변/솔숲/안목해변) ~ 커피거리(14:55~15:10) ~ 강릉항/솔바람다리(15:17) ~ 남항진주차장(13:25) / 17.7km]
< 해파랑길 39구간 트레킹을 준비하며 >
강릉, 아득한 먼 바다. 아득하다는 말에는 거리뿐 아니라 깊다는 의미도 있다. 강릉은 마음이 허전할 때 찾고픈 현실 저편의 땅이다. 강릉의 여름이 젊은과 활기의 바다라면, 겨울은 성숙과 적요의 바다이다. 그 고적함을 느끼고자 길을 나선다.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보인다 했다. 그간의 경험은 속초바다를 걷는 해파랑 45구간을 최고라 여겼다. 이번 39구간 안내 자료를 보니 솔바람다리~경포호~사천진해변 코스는 해파랑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길이라 한다. 부산, 울산, 포항, 삼척을 지나며 얼마나 좋은 '걷고 싶은 길'이 많겠는가?
오늘 39코스에는 수 많은 명소가 있다. 우선 해수욕장이다. 안목, 송정, 경포, 순포, 사천진 해변을 걷는 건 호사다. 경포호는 여러 번 걸어 보았지만, 경포대는 아직 올라보지 못했다. 그 첫 인연이 기대된다. 허난설헌 기념관도 들를 생각이다. 너무나 똑똑한, 시대를 앞서 간 여인을 만나보고 싶다. 키 큰 해송이 호위하는 숲도 지나고 커피거리에서 차 한 잔의 여유도 즐기고 싶다.
갈 길은 3등분 해 본다. 역으로 걷는다. 사천진~경포대 6.9km 2시간, 경포호 1시간, 이후 강릉항 부근 솔바람다리까지 6.9km 2시간, 총 16km 5시간의 트레킹을 예상한다. 토요일 날씨는 늦가을 같은 겨울날이 될 것 같다. 햇살이 좋은 날이라면 더 좋겠다.
< 강릉 가는 길에 >
새벽 집을 나서며 맞는 바람에는 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이 이래도 돼나 싶다.
사당역 주변은 정이 안 가는 동네다. 오늘은 보도에 물기까지 있어 더 어수선하다. 게다가 버스는 대항병원 위쪽에 정차해 있었다. 이 산악회는 서비스 정신이 제로다. 카페에 미리 공지라도 해 주면 좋을 껄. 대장도 버스 위치를 모른단다.
어렵게 버스에 오른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여행의 시작은 설렘이다. 편한 맘으로 길에 나서자.
< 사천진항 ~ 경포대 >
사천진, 낯선 포구에 선다. 줄지어 선 음식점, 어구를 손질하는 어민들, 출항을 앞둔 배가 뒤섞여 바닷가 풍경을 만들어낸다. 기대하던 바다. 바다 위에 솟은 바위에 새들이 앉아 있다. 모든 걸 다 받아 줄 것 같은 바다를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카라반 시설들과 캠핑장들이 산재해 있는 도로를 지난다. 작은 다리도 건넌다. 어수선한 항구 주변 도로를 지나자 비로소 해변이 보인다. 사천해변이 길게 이어진다. 이제부터 진짜 해파랑길에 들어선 기분이다. 한겨울에 이례적으로 날이 푸근하다. 햇살도 강하다. 걸음에 힘이 실린다.
도로 건너에 새로 지은 카페들이 꽤 있다. 조금 더 가니 그 유명하다는 테라로사 건물이 보인다. 길을 건넌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주변은 찾고픈 순포습지였다. 물가를 따라 걷는다. 조금 더 걷겠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쉽게 찾지 못할 곳이기에 저수지 주변을 돌아든다. 색바랜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강릉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름이 이쁜 순긋해수욕장 간판을 보고 사장 한 장 찍고는 해변으로 내려선다. 고운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탁 트여 시야가 멀리까지 이어진다. 참 좋다.
순개울해변에 들어서자 커다란 전망대와 색색의 테트라포드가 시선을 끈다. 파도가 지나간 해변에 나의 새 발자국을 내며 걷는다. 물새들이 한가로이 해변을 서성인다. 기대보다 훨씬 더 멋진 풍광에 넋을 잃는다. 지나는 이에게 사진을 부탁하고 찍어주고, 성이 차지 않아 삼각대를 세운다. 한동안 재미나게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는 전망대 위에 선다. 위에서 보니 테트라포드의 노랗고 붉고 푸른 색의 조화가 참 멋지다. 흉물이 될 구조물에 색을 입히니 풍경이 살아난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강릉 바다에 낭만을 더했다. 아이디어가 창조적 공간을 만든 것이다.
< 경포대와 경포호 >
다시 긴 해변이 이어진다. 푸른 하늘, 더 푸른 바다, 그 속에 불쑥 솟은 작은 바위섬, 물주름 진 고운 노란빛 해변 그리고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 이 겨울이 주는 선물이라 여기며 걷고 또 걸었다.
낯익은 호텔 건물이 보이고 사람들이 많아진다. 경포해변에 들어선다. 솔 숲을 잠시 걷다가 곧바로 경포호로 이동한다. 쏟아지는 햇살이 감당이 안된다. 모자를 두고 온 후회 일었다. 몇 번 와 본 곳이라 익숙하게 호수를 걷는다. 처음으로 경포대에도 올라본다. 경포대 현판 밑 '山江一第' 이란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온다. 최고의 풍광이란 말이리라. 걷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앉아본다. 굽어보는 호수는 잔잔하고 한가로웠다. 옛 추억들이 스쳐간다.
경포호를 반 쯤 돈 후, 예전에 가지 않았던 샛길로 들어선다. 한참을 더 가니 허난설헌기념관으로 이어진다. 초입 솔숲이 명품이었다. 키 큰 소나무는 굽어서 더욱 운치 있다. 기념관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늘 그렇듯이 옛 건물만으로는 그 시대와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툇마루에 잠시 앉아본다.
씨마크호텔 가는 길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한적한 오솔길을 돌아들자 골목이 나타나고 대숲이 이어진다. 경포호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화려하고 시선을 끄는 물가 풍경도 좋지만 은은한 멋이 있는 골목 모습도 감동을 준다.
강문해변에 도착했다. 눈에 익은 건물들이 많다. 씨마크호텔은 최고였다.
해변을 따라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몇 년 전보다 상점들이 더 활기를 띠고 있다. 그 중 한 곳에 끌리듯 들어선다. 순부두막국수를 주문했다. 희고 고운 색 만큼이나 맛도 담백했다. 콩물의 부드러움이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이다. 음식점에는 외국인도 있다. 그들이 막국수와 보쌈을 익숙한 듯 먹는 모습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다. 남자 하나 여자 둘,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 강문해변 ~ 솔바람다리 >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어수선한 상가지역을 벗어나자 솔숲이 시작된다. 그리 길지 않겠지 했던 해송길은 강릉항까지 4km 가량 이어졌고, 그 품격 높은 고요함에 반해 버렸다. 경포대와 해수욕장도 좋지만 경포의 진정한 자랑은 솔숲이라 할 만하다. 그 길은 강문해변, 송정해변, 안목해변을 품고 있다. 새로운 발견이자 최고를 경험했다. 그 좋다는 산사 소나무 숲도 진짜는 길어야 1km 남짓인데 이곳은 그 길이와 품격이 남다르다. 게다가 눈을 돌리면 바다가 보이지 않는가.
강문해변~송정해변~안목해변을 잇는 솔숲은 해변과 나란히 이어진다. 좌측으로 푸른 동해가 펼쳐지고, 우측으로 호텔 음식점 카페들이 볼거리를 선물한다. 소위말하는 이벤트 밀도가 높아 눈이 쉴 새가 없다. 그 속에 굽은 해송과 소음과 바람을 막아주는 그윽한 숲이 길게 이어진다. 가다 지쳐 해변으로 나오면 벤치와 데크가 있고, 작은 음악회도 열린다. 평화롭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분 좋은 꿈 같은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저 앞으로 강릉항이 보인다. 해변에 사람들이 많아진다. 커피거리란 말에 어울리게 각기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커피가게가 줄을 잇는다. 그 중 한 곳에 들른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다. 아쉽다. 오늘 사진 기록은 끝이다.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
대장이 버스 대기 장소를 헷갈리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진다. 강릉항은 구경도 못 하고 부리나케 솔바람다리를 건넌다. 남항진주차장은 넓고 버스는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초해지면 시간이 빨리도 간다.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는 세상은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사리 버스를 발견하고 안도한다. 워치를 끄고 트랭글이 다시 연결한다. 각기 시작과 끝 시간이 달라 기록도 제각각이다.
< 에필로그 >
새벽에 일어나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노트북을 켠다. 사진에 어제 길에서의 일들이 살아난다.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당분간 멀리 가는 산행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자고 나니 생각이 달라진다. 영상앨범산에 이번 주 편에 안나프르나 틸리초호수 4,919m에 오르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제 내가 걸은 강릉 해변과 솔숲이 최고라 여겼는데 희말라야 설산의 풍경은 이를 능가했다. 세상 모든 것에는 그보다 더 나은 고수가 있게 마련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내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먼 그대보다 '실현할 수 있는 산과 길'이 우선이다.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이어진다. 내친김에 마음이 동한 김에 강릉 해파랑길을 조금 더 걸어야겠다. 다음 트래킹은 해파랑길 38구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