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의 은사
(행 9:32-43)
본문은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리고 어떻게 온 세상에 퍼져나갔는가를 또 다른 면에서 보여주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에 선행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지만 역사하시는 방법은 심히 다양합니다.
오늘은 선행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행은 마음의 문을 여는 좋은 은사입니다. 본문에 애니아와 다비다가 나옵니다.
두 사람 모두 선행의 사람들입니다.
에니아가 선행의 사람인 것을 이름을 봐서 알 수 있습니다. 애니아라는 의미는 “칭찬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 다비다나 도르가 역시 “영양, 가젤”이라는 뜻입니다.
사슴을 말하는 건데 이 영양은 아가서에 신부를 모사할 때 나오듯 아주 사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이름만 보아도 얼마나 사랑 받고 존경 받는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에 이름에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33절에 “애니아라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그 이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36절에도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라고 소개하면서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고까지 덧붙입니다. 그냥 애니아나 다비다라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으로 일컫는 자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그들은 선행에 열심이었습니다.
애니아가 얼마나 선행을 잘했으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주께로 돌아올 만큼 유명했을까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룻다는 큰 도시에 비견할 만한 촌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도시만이 아니라 넓은 평야를 가진 샤론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드로의 기적도 기적이지만 그만큼 그들의 아름다운 선행이 컸던 것입니다. 악인이 회개하면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사실 악인이 병 낫고 복 받으면 세상 사람들은 역겨워합니다.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잘 될 사람이 잘 될 때 박수치지 잘 되서는 안 될 사람이 잘 되면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훼방합니다.
선인이 상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애니아와 다비다가 악인이었거나 무명의 사람이었다면 병 낫고 다시 사는 기적이 있었다 해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 중풍에 걸려 8년이나 병들어 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또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니 그 사랑을 받은 많은 과부들이 모여들어 울며불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장사하지 못하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눕혀놓고 베드로를 청합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선행의 위력과 아울러 이 두 성도의 선행이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 깊이 감동을 주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행이란 구원의 관계에서 볼 때 선행 자체로는 구원할 수 없으나 선행은 사람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좋은 은사가 됩니다.
전도할 때 종교적 색체는 줄일수록 좋습니다.
성경책 꼭 끼고 가야 전도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색체가 강하면 도리어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전도의 최선의 방법은 종교적 색체를 최대한 줄이면서 일차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호감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나가서 전도지 돌리는 것도 좋지만 같은 전도라면 그보다 노인들 안마도 해드리고 음식도 대접하고 이야기도 들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혹은 병원에 가서 전도할 때 전도보다는 기도가 더 좋습니다.
병들었을 땐 누구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해 주면 마음의 평안을 느낍니다.
또 초조한 보호자나 방문객들에게 차라도 대접한다면 예수 향기가 더 진하게 풍길 것입니다.
전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심지 않고 거두려고만 한 것이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심으면서 거둬야 합니다. 전도하시는 분들 간증을 들어보면 대접의 힘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노인정이나 사람 많이 모인 모임에 가서 대접하면서 “이제는 하나님 믿고 삽시다.”라고 전도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답니다.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분위기에 눌려 입조차 뻥끗 못합니다.
아무리 결과가 미미해도 그 중에 몇 사람은 꼭 교회에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 얼마나 큰 수확입니까?
그래서 목구멍이 열려야 귓구멍도 마음의 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리라가 성경의 말씀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심으면서 전도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부터 전도의 대상자로 정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손해 볼 일이 있더라도 전도를 위해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바쁘지만 “제가 무슨 도울 일 없어요?” 하시며 도와주세요.
실망시켜도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가 도우면 그들도 가만있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전도할 문이 열립니다.
이처럼 선행은 거부반응 줄이면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귀한 은사입니다.
2. 선행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로 크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뿐 아니라 나라의 여러 지방까지 순회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순회하다가 룻다에 내려갔더니 거기 애니아라 하는 사람이 중풍병으로 누운 지 팔 년이라 성도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하니까 곧 일어나 낫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룻다와 사론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마침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너무 일을 많이 한 나머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려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었는데, 룻다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청할 때 베드로가 와서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기도하고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하고 부르니 다비다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행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선행으로는 마음의 문을 연 다음에 복음으로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하면서 전도의 때를 기다려야합니다.
“전도해도 안 되더라, 혹은 선행해도 안 되더라”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하고 선행해도 안 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요, 기도의 행전입니다.
이 놀라운 열매의 이면에는 기도가 뒷받침 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후일에 베드로전서를 기록하던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2:12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하면서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15-16)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나라에 안티 기독교 즉 반기독교 운동이 불신자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 운동의 배후에는 이단이나 불교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독교 언론에 얼마나 이단과 타 종교인들이 교인임을 가장하고 극성을 부리는지 모릅니다.
북한의 사이버부대들도 우리나라 각 분야에 침투하여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숨어서 아무리 그런 일을 해도 기도하고 선행으로 무장하고 복음을 전도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그들의 말이 어리석을지라도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갈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행에 달렸습니다. 선행은 민심을 좌우합니다.
선행의 유무는 무식한 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당선된 국회의원 중에서 기독교인이 100명이 넘고 대통령도 기독교인이지만 다종교 국가인 우리나라이기에 항상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최대한 거부반응을 줄이면서 전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위함이 진하다고 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도 귀신들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이 일이 사역에 방해 줌을 아셨기에 막으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색적으로 기독교를 위한 발언을 한다고 다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본문에서 배워야 합니다.
전도의 방법이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의 중심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결실을 맺히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 배우고 본문의 두 제자에게서 배우십시다.
예수님께 몰려든 그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랑으로 전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마음의 문을 여는 귀한 은사입니다.
우리 모두 선행으로 닫힌 마음의 문들을 열고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힘차게 전하여 백배로 결실 맺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