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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 선생 묘지〔晦齋李先生墓誌〕
아, 오래전의 일이다. 과거 숙황제(肅皇帝) 24년인 을사년(1545)에 하늘이 우리나라에 혹독한 재앙을 내려 인묘(仁廟)가 승하하니, 명묘(明廟)는 상중(喪中)에 있고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여 인정(人情)이 흉흉하였다. 이때 이기(李芑)라는 신하가 신인(神人)을 속이고 하늘의 밝음을 뒤집어, 두세 명의 원흉(元兇)과 함께 “임금이 어려서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궐로 나아가 상변(上變)하였다. 이날 양전(兩殿)이 함께 충순당(忠順堂)에 임어(臨御)한 자리에서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대역(大逆)으로 무고하려고 하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어린 망아지처럼 두려워하여 감히 용기 있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 당시에 좌찬성(左贊成) 회재 이언적 선생과 우찬성 권벌(權橃) 공 같은 분이 있어 대신(大臣)다운 말을 하였다가 끝내 이 일 때문에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이 선생이 병으로 별세하여 이듬해 경주(慶州)에 반장(返葬)하였다. 이에 벼슬아치들은 조정에서 서로 눈짓하며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 선비들은 태학(太學)에서 함께 탄식하면서 의지하여 학업을 상고할 곳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들판에서 서로 더불어 원망하면서 “훌륭한 인물이 사라졌으니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큰 내가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통탄스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 하늘의 해가 거듭 밝게 뜨고 정치가 새로워져, 간흉(奸兇)들을 내쫓고 훌륭한 인재들을 높이 등용하였으며, 선생의 관직과 품계를 예전대로 회복시키기를 명하였다. 이어서 우리 선종(宣宗)이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여 원로들을 불러들여 조정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으니, 선생의 도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밝아졌다. 이조에서는 관작을 추증하고, 예조에서는 치제(致祭)하고, 봉상시에서는 시호(諡號)를 의정한 다음 묘정(廟廷)에 배향하여 덕(德)을 수립한 데 대한 보답을 하였다. 그러자 지난날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며 감히 말을 하지 못하던 자들이 입을 열고 큰소리로 말하기를 “하늘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선비들은 믿을 곳이 있게 되고 백성들은 우러를 바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선생의 도가 이미 해처럼 환히 드러나고 별처럼 밝게 빛나는데, 지금 그 저술을 간행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을 짓지 못하고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들의 수치에 그치겠는가.” 하였다. 이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행장(行狀)을 짓고,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노 선생(盧先生)이 문집의 서문을 쓰고,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이 그 묘(墓)에 쓰기를 ‘증영의정문원공회재선생지묘(贈領議政文元公晦齋先生之墓)’라고 하였으니,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하겠다. 죽음을 슬퍼하고 높이 기리는 국가의 은전(恩典)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덕을 기록하여 길이 남김으로써 사람들이 그 모습을 상상하고 명성을 영예롭게 여기게 되었다.
반면에 이기 등 네다섯 명의 원흉들은 세상에 사나운 위세를 떨치며 힘껏 백성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니 그 계획이 치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얼마 못 가서 이내 패배하여 대부분 뿌리가 잘리고 싹이 제거되어 모욕을 당하며 사람의 대열에 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후세 자손들에 이르기까지 비록 뻔뻔스럽게 사람의 면목을 갖추더라도 사람들이 금수(禽獸)처럼 보아 모두 침을 뱉으면서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할 것이니, 선악의 보응과 시비의 공정함이 당시와 후세에 어떻게 달라진다고 하겠는가. 아울러 후세에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으며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 자들에게도 조금은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선생이 작고한 지 60년이 지났는데, 그 손자 의활(宜活)과 의잠(宜潛)과 준(浚)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선대부(先大夫)를 칭술(稱述)하는 일은 사문(斯文)의 현회(顯晦)가 달린 것이므로 후손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묘소에 묘지(墓誌)가 없기에 감히 그대에게 부탁드리니, 그대는 힘써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더니, “사람이 어찌 스스로를 모르겠습니까. 그대가 보기에 지금 이 일에 대한 부탁을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렇게 세 번을 왕복하고도 끝내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봉의 풍부한 문장력으로도 퇴계가 지은 행장에 감히 말을 덧붙이지 않았으니, 지금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쓸데없이 행장에 덧붙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삼가 가장을 살펴보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선생은 남달리 총명하고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워서 속학(俗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강구하여 밝히고 체득하여 실천하면서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에 힘을 썼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평소 고상한 뜻을 품고 있었다. 여럿이 모여 공부할 적에 간혹 옆에서 장난을 치거나 떠들고 웃는 일이 있어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만년에 경주의 서북쪽에 있는 자옥산(紫玉山)에 집을 짓고 독락당(獨樂堂)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세상일을 사절하고 한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좌우의 도서를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사색하니, 고요한 가운데서 이룬 공부가 전보다 더욱 깊고 전일해졌다. 그런 뒤에야 그동안 듣고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환히 깨달아 친절하게 징험함이 있는 듯하였다. 화평하고 담박한 지취(志趣)를 기르며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성(性)과 이(理)를 연구하되 성현이 진덕 수업(進德修業)하였던 방도를 따르고, 고명(高明)한 천도(天道)를 탐구하되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묘리를 즐겼다. 신심(身心)과 성정(性情)에 근본하여 가정과 고을, 나라에 행하였으니, 이른바 체(體)와 용(用)을 겸비한 학문이었다.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듯하고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으나, 간사한 자를 배척하거나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두려워함이 없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을 법하였다. 그 정밀한 견해와 홀로 터득한 묘리는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에게 준 무극 태극(無極太極)에 관한 편지 네다섯 편에 가장 잘 드러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 유학의 본원을 밝히고 이단(異端)의 사설(邪說)을 물리친 것으로, 정미함을 꿰뚫고 상하를 관철한 뜻이 순수하게 모두 바른 도리에서 나왔다.
아, 우리 동국(東國)은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이 도에 뜻을 두고 세상에서도 도학(道學)으로 지칭한 호걸의 선비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를 상고해 보면 대부분 명성(明誠)의 실질을 다하지 못하였고, 후세에 와서 일컫는 데는 또 연원을 징험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학자들로 하여금 자취를 좇아 따를 바가 없게 함으로써 지금은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우리 선생의 경우에는 학문을 전수받은 곳이 없었지만 스스로 이 학문에 분발하여, 은은하면서도 날로 드러나는 덕이 행실과 부합되고, 훌륭한 저술을 남겨 말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러한 사람은 동방에서는 견줄 만한 이가 거의 드물다.”
내가 삼가 이 글을 두세 번 읽고 나서 말하기를 “충분하고도 극진하니, 도(道)를 지닌 분을 참으로 잘 형용하였다. 후세에 공에 대해서 알고 말하는 자가 어찌 감히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겠는가. 고봉이 참으로 기술을 잘하였다.” 하였다. 지금 나는 선사(先師)의 글에다가 세계(世系)와 이력(履歷)을 붙여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옛날 여주(驪州)에 진사(進士) 이세정(李世貞)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자손들이 영일(迎日)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다시 경주(慶州)로 옮겼다. 휘 권(權)은 부사직(副司直)인데, 휘 숭례(崇禮)를 낳았으니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수회(壽會)를 낳았으니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으로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번(蕃)을 낳았으니 성균관 생원으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계천군(雞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22)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자질이 남달랐고, 9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계유년(1513, 중종8)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고, 갑술년(1514)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교서관에 들어갔다가 신사년(1521)에 홍문관 박사가 되고, 시강원 설서,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외직을 청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 병술년(1526)에 조정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이조 정랑과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졌다. 기축년(1529)에 사성(司成)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아전들은 행동을 삼가고 백성들은 덕에 감복하였다. 경인년(1530)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정유년(1537)에 조정으로 들어와서 장악원(掌樂院), 종부시(宗簿寺) 등의 첨정(僉正)이 되고, 옥당에 들어가서 교리, 응교가 되었으며, 정부에 들어가서 검상(檢詳), 사인(舍人)이 되었다. 군기시 정(軍器寺正)으로 있다가 직제학으로 옮겨지고 병조 참지로 승진되었다.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백성들을 정성과 너그러움으로 다스려 편안하게 살고 고달픔이 없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전주에 있으면서 만여 글자로 된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렸다. 중묘(中廟)가 칭찬하고 감탄하며 “옛날의 진덕수(眞德秀)라도 이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즉시 동궁(東宮)에게 보여 주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병조 참판으로서 세자우부빈객을 겸임하게 하였다. 선생은 “말이 쓰인다면 다행이겠지만, 이것을 빌미로 관작을 받는 것은 크게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하며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서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36)에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라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이어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어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게 되었으나 간원(諫院)에서 유보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모친을 봉양하기 편하도록 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하자, 상이 관찰사로 하여금 모친에게 식물(食物)을 보내 주게 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이 외직으로 나가기를 더욱 힘껏 청하니, 조정에서 마지못해 본도(本道)의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갑진년(1544)에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임했다가, 마침 병이 있어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이해에 인묘(仁廟)가 즉위하여 맨 먼저 선생을 불러 의정부 우찬성으로 삼았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朴氏)로,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어 종제(從弟)인 군수(郡守) 통(通)의 아들 응인(應仁)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응인은 사옹원 판관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측실의 아들로 전인(全仁)이 있다. 판관은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모두 청렴한 덕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세마(洗馬) 장응기(張應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다. 의윤(宜潤)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고, 의징(宜澄)은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았으나 일찍 죽었으며, 의활(宜活)은 좌랑(佐郞)이고, 의잠(宜潛)은 진사이다. 서자(庶子)로 의택(宜澤)이 있다. 딸들은 진사 조단(趙端)과 참봉 조이함(曺以咸)에게 출가하였다. 의윤의 아들은 주(皗)이고, 의징의 아들은 교(皦)이며, 의활의 아들은 완(皖)이다. 의잠은 5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업(𤾧)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전인은 2남을 두었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준은 무과에 합격하여 현령이 되었다. 2남을 두었으니 굉(宏)과 용(容)이다. 용은 순의 후사가 되었고, 또한 무과에 합격하였다.
선생은 선조(先祖)를 받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어버이를 독실히 섬겼으며, 아우와 우애가 깊었고, 집안을 엄격하게 다스렸으며, 친척들과 화목하였고, 고을 사람들과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간원에 있을 적에는 내친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기용하자는 논의를 극력 저지하면서 그의 간악한 정상을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오자 선생은 파면되었다. 김안로가 뜻을 이룬 뒤에 한번은 경주(慶州) 사람이 뇌물을 바치며 벼슬을 구한 일이 있었는데, 김안로가 그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절대로 이모(李某)가 알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전주에 있을 때는 절일(節日)에 고을 사람들이 나희(儺戲)를 벌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관찰사였던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도 오히려 때때로 돌아보며 웃었지만 선생은 초연하여 마치 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다급하고 경황없는 때를 만나더라도 조용하고 바른 자세를 견지하여 말이 빨라지거나 허둥대는 기색이 없었다. 옥당에 재직할 때는 간혹 동료들과 함께하더라도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한마디 말도 없이 멍하니 있었으므로, 대면한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져 더욱 공경하였다. 이는 대개 그 지경(持敬) 공부가 깊은 데서 나온 것이지 꾸며서 한 것이 아니었다.
찬성으로 있을 때에 인묘(仁廟)의 병환이 위중하자 사적으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주상(主上)이 후사가 없으므로 조정에서 걱정이 많습니다. 공은 왜 건의하여 일찍 대군(大君)을 세제(世弟)로 삼아 국본(國本)을 정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러다가 명묘(明廟)가 즉위하게 되어 백관(百官)들이 모여서 수렴(垂簾)의 의절(儀節)을 논하였는데, 윤인경이 “지금 대왕대비(大王大妃)와 왕대비(王大妃)가 계시는데 국정(國政)을 어느 전(殿)에게 들어야 하겠소?” 하고 묻자, 좌우가 모두 침묵을 지켰다. 이에 선생이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의 옛 사례가 있는데 무슨 의문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어찌 형수와 시동생이 함께 정전(政殿)에 임어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하니, 뭇사람의 의논이 마침내 정하여졌다.
그해 8월에 대왕대비가 윤원형(尹元衡)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윤임(尹任)을 제거하려고 도모하였는데, 이기(李芑)가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과 함께 밀지의 뜻을 받들어 따름으로써 충순당(忠順堂)의 입대(入對)가 있게 되었다. 이때 네 원흉이 옆에서 으르렁거려 온 좌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선생이 나서서 맞서 말하기를,
“일은 모름지기 공명정대하게 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사화(士禍)가 생길까 염려됩니다. 지금 나라 전체가 한마음이 되어 감히 허튼 생각을 하는 자가 없으니, 윤임 하나를 죄주는 것은 어미 잃은 새끼 새를 잡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내지(內旨)를 정원(政院)이 아닌 다른 곳에 내렸으니, 이것이 이른바 ‘일을 비밀스럽게 처리하여 인심의 불안을 초래한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일 처리를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하는 의당 섬기는 대상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지난날 마음을 다해 대행왕(大行王)을 섬겼던 사람에게 지금 어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왕대비와 주상은 관계로 따지면 형수와 시동생 사이이고 의리로 보면 어머니와 아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혹 일에 온당하지 않은 점이라도 있다면 왕대비에게 어떤 죄를 짓는 것이 되겠습니까. 신들 또한 죄가 있을 것이니, 후세에 경계 삼을 거리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자들은 두려워서 고개를 움츠렸으나, 선생은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때 이기 등은 옆에서 씩씩거리며 선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급기야 선생이 옥당에서 헌납 백인걸(白仁傑) 등과 함께 번갈아 상소하여 밀지(密旨)의 부당함을 논하자, 내전에서 이기 등을 불러서 이르기를,
“화란이 종사(宗社)에 닥쳤는데 어찌 밀지를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도리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을 바르지 못하다고 하며 논박하기를 중단하지 않으니, 다른 의견을 막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 꼴이 될 수 있겠는가. 백인걸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여러 대간을 삭직하라.”
하였다. 이때 정순붕이 병이 있어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자, 사관(史官)을 보내 비밀히 의논하여 아뢰게 명하였다. 전교(傳敎)가 내리자 좌우 신하들이 모두 침묵하였는데, 선생이 권벌(權橃), 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여러 대신(大臣)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좌우 신하들이 선생에게 의견을 초안하도록 맡겼는데, 그 말이 매우 적절하고 절실하였기 때문에 일의 형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이기 등이 이미 상의 노여움을 충동질해 놓은 상태에서 정순붕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모(李某)가 경연(經筵)에서 물러나 주상이 영명(英明)하다고 말했을 때, 유인숙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었습니다.” 하니, 내전에서 이로 인하여 전교하기를 “유인숙이 기뻐하지 않은 기색이었다는 것을 이모가 말했다.” 하였는데, 이는 장차 선생을 증인으로 삼아서 전교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선생이 즉시 해명하기를,
“그날 신이 물러 나와 실록청에서 유인숙을 만났을 때 성상의 자질이 고명(高明)하고 학문도 진전이 있다고 말했을 뿐, 실로 유인숙의 기색이 어떠했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지척(咫尺)의 자리에서 신은 감히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여 일이 조금 저지되었다. 그러다가 유관 등이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러서는 조정에 있는 뭇 흉도(兇徒)들 중에 간혹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온 좌중이 떠들썩하게 웃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유독 선생은 두세 명의 재신(宰臣)과 함께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들이 끝내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짐작하였다. 그해 9월에 녹훈(錄勳)하고 상을 내렸는데, 선생이 또 상소하여 극력 사양함으로써 마침내 흉도들의 뜻을 거슬러 날마다 배척을 당하였다. 이듬해 3월 근친(覲親)하기 위해 귀향했다가 마침내 그대로 눌러앉아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 이기가 상에게 아뢰기를,
“이모는 세자(世子)에게 아부하고 중종(中宗)을 배반하였으며, 10조(條)의 서계(書啓)를 써 올려서 임금의 수족(手足)을 꼼짝 못하게 묶었으며, 또 유인숙과 교분을 맺어 역신(逆臣)을 변호하려 하였습니다.”
하니, 대사헌 윤원형, 지평 진복창(陳復昌)이 뒤따라 부화뇌동하여 훈작(勳爵)을 삭탈하였다. 얼마 있다가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를 올리자 이기 등이 이를 이용해서 인사들을 일망타진하였으니, 송인수(宋麟壽), 이약빙(李若氷), 노수신(盧守愼), 정황(丁璜), 유희춘(柳希春), 김난상(金鸞祥), 권벌(權橃) 등 한 시대의 정인(正人) 30여 인이 모두 화를 입었고, 선생 역시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간관(諫官)이 되어 조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선생에게 들러서 “이기가 장차 정승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므로, 선생이 “내가 보기에 이기는 사람됨이 음험하여 국정을 다스리는 정승감으로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기가 정승으로 임명되자 양사(兩司)가 과연 탄핵하였으므로, 이기가 항상 보복하려는 생각을 잊지 않고서 칼날을 감추고 날개를 움츠린 채 이쪽의 틈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윤원형이 교제를 청했을 때에 선생이 그의 간사함을 알아서 끊어 버리고 허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원형도 선생에게 대단히 앙심을 품고 있었다. 또 충순당에 입대(入對)하였을 때에는 윤인경이 거짓으로 아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물러 나와 그 사실을 해명하여 밝혔다. 이때에 와서 이들이 전날의 흔단에 집착하여 따라다니며 해치고 꺾으려 하였으니, 세 사람의 원한이 한데 모인 것이었다. 천도(天道)가 혹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악인(惡人)이 많아서 천도를 이겨서 그런 것인가.
처음 유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이 통곡을 하였으나, 선생은 마시고 먹고 말하고 웃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유배지에 있을 적에 일찍이 책상 옆에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놓기를 “하늘을 섬기는 데 미진함이 있지는 않았는가. 임금과 부모를 위하는 데 정성이 부족하지는 않았는가. 마음가짐에 바르지 못한 점이 있지는 않았는가.” 하였으니, 험한 운수를 만나고 곤궁한 처지에 놓여서도 온종일 삼가는 공부를 느슨히 하지 않은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생이 일찍이 《봉선잡의(奉先雜儀)》를 지어 집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예로 삼았고, 유배지에서 또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구인록(求仁錄)》,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으니, 그 학문을 조금이라도 엿보아 흥기하고자 하는 후세의 군자가 여기에서 징험한다면 또한 대강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묘(宣廟) 초년에 유술(儒術)을 크게 숭상하여 문교(文敎)가 성대히 일어나자, 태학의 유생들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 및 우리 회재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니,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오현(五賢)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선왕께서는 이를 신중히 여겨 윤허하지 않으셨다. 금상(今上 광해군)이 즉위한 뒤 유생들이 더욱 힘껏 청하니, 2년 경술년(1610)에 이르러 이를 윤허하였다.
아, 고도(古道)를 들을 수 없으므로 어두운 자는 밝은 데에 가서 찾고, 고인(古人)을 알 수 없으므로 선배(先輩)가 후생(後生)에게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다. 지금 선배로서 존경하고 믿어 의심하지 않을 만한 분으로는 퇴계만 한 이가 없을 것인데, 퇴계가 이미 그 도를 존경하고 그 학문을 믿어서 후학들에게 교훈을 남겼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이것을 명(銘)으로 삼는 바이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삼가 묘지를 쓴다.
[주1] 고봉이 …… 잘하였다 : 기대승(奇大升)이 이언적의 묘지명에서 이황이 지은 행장 내용을 두고 “이것은 공의 도를 깊이 알고 잘 말하였다고 이를 만하다.〔此其於公之道, 可謂深知而善言之也.〕”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주2] 본도(本道)의 …… 길 : 이천계(李天啓)가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갈 때의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회재집》 〈문원공 회재 선생 연보(文元公晦齋先生年譜)〉에 보인다.
晦齋李先生墓誌[李恒福]
嗚呼遠哉。在昔穆皇帝二十四年之乙巳。天毒降割于我邦。仁廟禮陟。明廟亮陰。母后垂簾。人情洶洶。維時有臣曰芑。矯誣神人。反易天明。乃與二三元兇。謂君沖人不及知。叩闕上變。是日。兩殿同御忠順堂。將尹任,柳灌,柳仁淑等誣以大逆。群臣在庭者。咸惴惴轅駒。無敢出一氣以言。時則有若左贊成臣晦齋李先生彥迪,右贊成臣權公撥。有大臣之言。竟坐是竄江界七年。李先生疾卒。明年。返葬于慶州。於是。大夫相與目於朝。睽睽而不敢語。士相與嗟於庠。無所資而考業。民相與怨於野曰。哲人萎矣。其何能淑。人心之鬱湮痛抑。若壅大川焉。有不可得而已者。後十三年而天日重明。政化更新。放逐姦兇。登崇俊良。命復先生官秩如舊。曁我宣宗卽位。克述先志。收召黃髮。曜列於朝。先生之道。由是大明。天官贈爵。宗伯致祭。太常議諡。用配廟庭。立
德食報。向之睽睽而不敢語者。乃發口而長言曰。惟天不可欺。士有所恃而民有所仰。咸一口言曰。先生之道。已日揭而星曜之無餘矣。今述作未刊。家狀未輯。墓道無顯刻。斯豈惟士之羞也。於是退溪李先生敍其狀。蘇齋盧先生序其文。高峯奇先生題其墓曰。 贈領議政文元公晦齋先生之墓。猗歟備矣。隱卒崇終。蔑以加焉。載德垂永。人貌榮名。而芑等四五元兇。鴟張一世。務壅民口。計非不密。敗不旋踵。率皆根鋤苗耨。僇辱不齒。至後子孫。雖靦然而人面哉。視猶禽犢也。無不喙唾而恐浼我也。善惡之報。是非之公。在當時與後世爲何如也。而後之事君不忠。賊賢敗國者。亦可以少戒哉。今去先生歿六十年。其孫宜活,宜潛及浚屬余曰。先大夫稱述之典。係斯文顯晦。非後子孫所得以私者。惟是幽堂闕埋辭。敢以是托諸子。子其勉之。余瞿然辭以匪人則曰。人豈不自知。子視之當今。茲事之託。非子其誰宜爲。凡三往返而終不得辭焉則余曰。以高峯之文之富。於退溪之狀。不敢有加辭。今自出新語而弁髦其狀。余何敢焉。謹按狀。略曰。先生英悟出人。天資近道。乃於俗學之外。知有所謂爲己之學而欲求之。於是講明體履。用力於致知誠意之地。爲人安重端詳。雅有高趣。群居隷業。或有嬉戲喧呶於其側。若無聞焉。晩年卜地於州西北紫玉山中。名其堂曰獨樂。謝絶世故。端坐一室。左右圖書。硏精覃思。靜中下功夫。比之前時。尤深且專一。然後向來有聞而未深契者。始若心融而神會。親切而有驗焉。養以沖恬之趣。積以歲月之久。潛神性理。遵聖賢進修之方。玩心高明。樂鳶魚流行之妙。本之於身心性情而行之於家鄕邦國。所謂有體有用之學。言若不出口。體若不勝衣。至於斥姦邪定危疑。直前無畏。雖賁育莫之奪也。其精詣之見。獨得之妙。最在於與曺忘機漢輔論無極太極書四五篇也。其書之言。闡吾道之本源。闢異端之邪說。貫精微徹上下。粹然一出於正。嗚呼。我東國古被仁賢之化。而其學無傳焉。麗氏之末以及本朝。非無豪傑之士有志此道。而世亦以此名歸之者。然考之當時則率未盡明誠之實。稱之後世則又罔有淵源之徵。使後之學者。無所尋逐。以至于今泯泯也。若吾先生。無授受之處。而自奮於斯學。闇然日章而德符於行。炳然筆出而言垂於後者。求之東方。鮮有其倫矣。余伏讀再三曰。多矣哉。盡之矣。寔善形容有道者矣。後之知言者。曷敢有加焉。高峯眞善述矣。今余謹因先師之說。附以世系履歷而敍之曰。若稽往古。驪州有進士李世貞者。子孫移居迎日。復遷慶州。有諱權。副司直。生諱崇禮。贈兵曹參判。生諱壽會。訓鍊院參軍。贈吏曹判書。生諱蕃。成均生員。贈左贊成。娶鷄川君孫昭女。以弘治辛亥年生先生。有異質。九歲而孤。癸酉。陞上庠。甲戌登第。時年二十四。入芸閣。辛巳。爲弘文館博士。侍講院說書,吏曹佐郞。俄乞外爲仁同縣監。丙戌。入爲司憲府持平。遷吏曹正郞。司憲府掌令。己丑。由司成出爲密陽府使。吏戢民懷。庚寅。爲司諫院司諫。坐罷。丁酉。入爲掌樂,宗簿等僉正。入玉堂爲校理,應敎。入政府爲檢詳,舍人。由軍器正遷直提學。陞兵曹參知。出尹全州。忱裕于民。有逸無罷。民建碑紀德。在全上一綱十條疏萬餘言。中廟奬歎曰。古之眞德秀。無以過也。卽命傳示東宮。特陞嘉善。爲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先生以爲言而有用幸矣。以是媒爵。所大恥也。力辭不許。歷禮曹參判,成均館大司成,司憲府大司憲,弘文館副提學。辛丑。陞秩爲資憲。判京兆。尋加正憲。爲議政府右參贊。出爲安東府使。諫院請留。先生懇乞便養。上令地主致餽于母。先生請外益力。朝廷不得已拜本道觀察使。甲辰。復判京兆。兼左副賓客。會病辭遞。是年。 仁廟卽祚。首召爲議政府右贊成。其配曰。貞敬夫人朴氏。宣務郞崇阜之女。無嗣。以從弟郡守通之子應仁後。卒官司饔院判官。側室子曰全仁。判官。歷官三邑。皆有淸德。邑人立碑頌其德。娶洗馬張應機女。生四男二女。曰宜潤。隱德不仕。曰宜澄。業儒早卒。曰宜活。佐郞。曰宜潛。進士。庶子曰宜澤。女。進士趙端,參奉曺以咸。宜潤之子皗。宜澄之子皦。宜活之子皖。宜潛之子五人。長𤾧。餘幼。全仁有二子。曰浚曰淳。浚武科。官爲縣令。有二子。曰宏曰容。容爲淳後。亦武科。先生誠於奉先。篤於事親。友於待弟。嚴於治家。睦於宗戚。宜於鄕黨。其在諫院。力沮金安老起廢之議。狠其姦狀。安老入而先生罷。及安老得志。嘗有慶州人行賂求官。安老私語曰。絶勿使李某知也。其在全州。嘗遇節日。府人張儺戲。觀察使金思齋正國猶時顧而色笑之。先生超然若無見也。造次倉卒。靜正自持。無疾言遽色。其在玉堂。或與同僚。淸坐終日。嗒然無語。對者無不肅然起敬。蓋其持敬功深。非矯而爲之者。其爲贊成也。仁廟違豫。私謂尹領相仁鏡曰。主上無嗣。朝多隱慮。公何不建白。早以大君爲世弟。以定國本。及明廟嗣服。百官會議垂簾儀。仁鏡曰。今大王大妃,王大妃在。國政於何所聽。左右默然。先生言自有宋哲宗時故事。何疑問耶。世豈有嫂叔同御殿者乎。衆議遂定。是年八月。大王大妃密諭尹元衡謀去尹任。芑與鄭順朋,林百齡,許磁等承望旨意。致有忠順之對。四兇傍狺。一座盡懾。先生乃出而抗言曰。事須明正。不然。恐士禍作矣。今一國一心。罔敢邪念。罪一尹任。特孤雛耳。內旨之下。不于政院而于他。其無乃謂事機黯昧。而致人心不靖乎。
將焉用是也。且人臣當專於所事。異時專於大行者。到今豈宜深罪。今上於王大妃。親則嫂叔。義則母子。事有未安。其若王大妃何。亦臣等與有罪焉。懼爲後世載。因涕泣橫流。聞者縮頸。而先生無懼色。芑等在傍喑嘻。視先生固已耽耽矣。及玉堂與獻納白仁傑等。交章論密旨之非。內殿召芑等曰。禍迫宗社。密旨之下。庸得已乎。今反以循國者爲不正。論之不已。異議不塞。其何以爲國。其以仁傑詔獄。削諸臺諫職。時順朋病未赴召。命遣史官密議以聞。敎下。左右默然。先生與權撥,申光漢等解說於諸大臣。左右屬先生草議。辭語剴切。事得少弛。芑等旣激上怒。順朋乃生之言曰。李某退自經筵。言主上英明則仁淑默然不答。不悅之色。見於面目。內殿因是敎曰。仁淑不悅之色。李某言之。將以先生爲證而傳敎之。先生卽辨曰。其日臣退見仁淑于實錄廳。只言聖質高明。學問亦達矣。實未見仁淑辭色如何。今咫尺之地。臣不敢隱也。事得少沮。及灌等賜死。群兇在庭。或有得色者。一座喧笑。無異平時。獨先生與二三宰臣。慘然不語。見者已知其爲不終矣。九月。策勳行賞。先生又上章力辭。遂忤兇徒。日見齮齕。明 年三月。因覲歸鄕。遂臥不起。九月。芑白上曰。李某諂附世子。背叛中宗。書上十條。縶人主手足。且與仁淑結友。營護逆臣。大司憲尹元衡,持平陳復昌從而和附。削其勳爵。無何。副提學鄭彥愨上良才驛壁書。芑等因而網打之。一時正人如宋麟壽,李若氷,盧守愼,丁璜,柳希春,金鸞祥,權撥等三十餘人皆及於難。先生亦不免。先是。本道都事以諫官入朝。道過先生言。聞芑將入相。如何。先生曰。以吾觀於芑。爲人陰險。遠於得政矣。及芑相。兩司果劾之。芑之不忘射影於其心也。已嘗韜鋒斂翼。以伺吾間矣。元衡請交。 生知其姦。絶不與。元衡之銜先生亦又甚焉。及忠順之對。仁鏡嘗有誣啓。先生退而辨之。至是執前釁。隨而惎撓之。三憾集矣。天或未定歟。抑人以衆勝耶。初聞責命。擧家號泣。先生飮食言笑如平時。其處栫棘。嘗於案上書自戒之辭。有曰事天有未盡歟。爲君親有未誠歟。持心有未正歟。其遇屯處困。不弛夕惕之功類此。先生嘗著奉先雜儀。以爲一家日用之禮。在謫。又著大學章句補遺,續或問,求仁錄,中庸九經衍義等書行于世。後之君子欲窺斑而興焉者。有徵於斯。亦可以槩之矣。宣廟初年。敦尙儒術。 文敎蔚興。大學生等。請以寒暄金先生宏弼,一蠹鄭先生汝昌,靜菴趙先生光祖曁我先生與退溪李先生滉從祀文廟。世謂之五賢。先王難愼未敢許也。今上卽祚。諸生請之益力。至二年庚戌乃許之。嗚呼。古道不可聞。暗者求於明。古人不可知。先輩詔後生。今之先輩可尊信而無疑者。宜莫如退溪。而退溪旣尊其道。又信其學。以詔來學。吾是以云。是爲銘。鼇城府院君李恒福。謹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