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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서문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린 자는 모두 사서史書가 있었으니, 요순堯舜 시대에는 요순의 사서가 있었고 하夏, 은殷, 주周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서가 있었습니다. 열국列國에 이르러서는 진晉나라의 승乘과 초楚나라의 도올檮杌과 노魯나라의 춘추春秋가 모두 그 나라의 국사國史였습니다.
우리 부자께서 요순 시대와 하, 은, 주 시대의 옛 사서를 바탕으로 산정하여 책을 만드시고, 또 노나라 역사를 인하여 춘추를 지으셨으니, 이것이 사가史家의 편년체 역사서의 시초입니다.
사마천이 처음으로 옛 제도를 바꾸어 사기를 지으면서 기紀, 전傳, 표表, 지志로 구분해서 체계를 세우니, 춘추의 체제가 비로소 무너졌습니다. 반고班固와 범엽范曄이 그 체제를 그대로 따라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를 지었고, 역대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자들이 사마천을 역사가로서 훌륭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면서 사기의 체제를 폐하지 않고 따르니, 춘추의 체제가 또다시 무너졌습니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순열荀悅의 한기漢紀를 바탕 삼아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으니 춘추의 옛 제도가 비로소 회복되었으며,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으니 성인께서 가필하고 산삭했던 은미한 뜻을 깊이 체득한 것이었습니다. 이 뒤로 이도李燾의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은 온공의 자치통감을 본받은 것이었고 진경陳桱의 통감속편通鑑續編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본받은 것이었고 탈탈脫脫의 전사全史는 반고의 한서를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아! 《춘추》의 필법으로 논하자면 사마천은 옛 역사서의 문체를 바꾸었으니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고, 후세의 일로 논하자면 전사의 역사서는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버리지 않고 근본과 지엽을 모두 갖추었으니 참으로 사가史家의 요령要領입니다. 그렇다면 전서全書만 있고 속자치통감장편과 자치통감강목이 없어서도 안 되고 속자치통감장편과 자치통감강목만 있고 전사가 없어도 또한 안 되니, 요컨대 세 가지는 모두 함께 행해져서 어그러지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운 일은 아득하여 알 수가 없고, 기자箕子가 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서는 팔조법금八條法禁으로 교화하여 존신存神의 오묘함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필시 역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있어서 언행을 기록했을 터인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탈취하고 기준箕準이 망명하자, 한漢나라가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설치하니, 나라의 형세가 중간에 단절되었습니다. 삼한三韓이 중간에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군신 상하의 분별이 없었으니 어찌 전할 만한 역사서가 있었겠습니까.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맨 처음 일어났고 그 20년 뒤에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웠으며 또 20년이 지나서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나라를 세워 각각 백성과 사직을 두니, 솥발 같은 형세가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그 세 나라가 선린善隣의 도리에 어두워 전쟁이 날마다 계속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나, 신라는 세 성씨가 서로 왕위를 전하면서 인후仁厚한 정치를 하여 누린 햇수가 거의 1천 년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웅거했는데 나라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성하여 모용慕容에 대적하고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를 막았으며 수隨나라와 당唐나라의 백만 대군에 대항하여 천하가 그 강성함을 일컬었고 누린 역사 또한 600년이 넘었습니다. 백제는 오로지 속임수와 무력을 숭상하여 전쟁을 좋아하고 재앙을 즐겼으므로 비록 앞의 두 나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500년이 넘도록 왕대를 누렸습니다.
그러니 남북조南北朝 시대나 오계五季 때에 참람하게 군주라 일컬으며 나라를 금방 얻었다가 금방 잃었다가 하던 나라들과는 견줄 바가 아닙니다. 다만 애석하게도 당시에 훌륭한 사관이 없었고 후세에는 사적史籍을 잘 지키지 못하여, 남아 있는 사적이 겨우 백에 한둘 정도일 뿐이니, 비록 사마천이나 반고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역사서를 저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그들보다 못한 사람이겠습니까.
김부식金富軾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본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상 문적이 불완전하여 본말을 상고할 수 없는 문제가 있자, 중국의 여러 서적을 채집하여 보충하기도 하고 증거 삼기도 하였으니, 그것은 이미 실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빙문聘問, 침벌侵伐, 재이災異 등의 일은 하나의 일을 여기저기 거듭 적어서 자못 중복되는 폐단이 있으며, 더구나 옳고 그름을 취하고 버림에 가필하고 삭제한 범례도 또한 합당치 못하고 미진함이 많으니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권근權近이 자치통감강목을 본받아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었습니다. 삼국이 나란히 대치하여 중심으로 삼기에 적당한 나라가 없자,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하여 가장 나중에 망했다고 해서 신라를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신이 삼가 위魏나라, 오吳나라, 촉蜀나라 삼국의 경우를 살펴보건대, 사마 온공이 위나라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승수承授를 중시한 것이고, 주자가 촉나라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정통正統을 중시한 것입니다. 지금 가장 먼저 건국하고 가장 나중에 멸망한 것으로 중심을 삼은 것은, 이전의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근거가 없고 일의 이치로 따져 보아도 온당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국사략은 편년체 역사서인데, 한 사람의 일대기를 졸卒을 기록한 아래에다가 아울러 적고 한 가지 일의 전말을 부류대로 정리한 곳에다가 아울러 기록하여, 연월이 연결되지 않아 자못 기사記事의 체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잔폐한 가운데에서 주워 모아 전사全史를 지었고 권근은 너저분한 사료를 정리하여 동국사략을 지었으니, 공로가 또한 작지 않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세조 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성스러운 예지叡智를 몸에 지니고 문명文明의 정치를 펴셨습니다.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고 국가의 계책을 넓히셨습니다. 삼국 역사서의 체제가 미진함을 개탄하여 사국史局을 열고 문사文士를 모아 역사서를 편찬하게 하셨습니다. 그랬는데 편찬이 마무리되기 전에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그 큰 기초를 밝게 잇고 선왕의 뜻을 공경히 이어서, 영돈녕부사 노사신盧思愼, 이조 참판 이파李坡 및 거정에게 속히 편찬을 마무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신들이 본래 삼장三長의 재주가 부족하니, 어찌 우러러 주상의 뜻에 흡족하게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사舊史 및 동국사략을 취하고 아울러 삼국유사와 수이전殊異傳에서 채집하여 장편長編을 만들고, 범례는 한결같이 자치통감을 따랐습니다.
자치통감은 주나라에서 오계에 이르는 복잡하게 얽힌 수십 왕대의 사적事跡을 다뤘기 때문에 ‘통감通鑑’이라는 말을 썼지만, 지금 이 책은 삼국을 다루는 데에서 그쳤기 때문에 이름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치통감은 권수卷首에 반드시 모기某紀를 기록하였는데 지금 삼국사절요에서는 모기를 일컫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삼국은 형세가 비슷하고 국력이 대등하여 어느 한 나라를 중심으로 삼아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나라를 세움에 선후가 있고 나라를 잃음에 지속遲速이 있어서 또 일국一國이니 이국이니 삼국이니 하면서 그 명칭을 자꾸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용례를 따르고, 기紀를 쓰지 않았습니다.
신라만 있을 때에는 신라의 연기年紀를 써서 일을 기록하였고 삼국이 대치한 시기에는 주註로 나누어 나열해 적어서 그들이 대등하게 맞서는 나라들임을 밝혔습니다. 신라를 맨 앞에 두고 다음에 고구려, 그 다음에 백제를 둔 것은 건국의 순서를 따른 것이며, 매년마다 반드시 중국의 연기를 먼저 쓴 것은 천자를 높인 것입니다. 신라가 스스로 연호를 쓴 것이 있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 참람함을 배척한 것입니다. 삼국의 군주를 일컬을 때에 이름을 쓰기도 하고 호를 쓰기도 하고 시호를 쓰기도 한 것은 그 실제를 보존한 것입니다. 왕비는 부인夫人이라 일컫기도 하고 왕후라 일컫기도 하였으며, 세자는 태자라 일컫기도 하고 원자라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그 관직은 외람되이 중국 것을 모방하기도 하였고 그 명호名號는 우리나라의 옛 풍속을 그대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적어서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황당하고 괴이한 일이나 방언, 이어俚語 같은 것은 너무 심한 것만 버리고 그 대략은 보존하였으니, 옛 역사를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되고 또 그것으로 풍속과 세도의 순박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이 책은 혁거세 1년(기원전 57)에서 시작하여 경순왕 9년(935, 고려 태조18)에서 끝나는데, 모두 992년간이며 총 14권입니다. 본사本史가 소략하여 상세히 찬술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군주의 어리석음과 명철함, 국세의 강성함과 쇠약함, 국운의 길고 짧음을 또한 대략이나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일찍이 들으니, 반고는 사마천을 속였고 범엽은 반고를 속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로 어느 사가史家에게나 있는 병통입니다. 졸렬한 신들도 후세의 사가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마침 위임한다는 명을 주상께 받았는지라 어리석다고 하여 저술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하찮은 식견으로 망녕되이 산정하였으니 참람하여 그 죄를 면할 길이 없음을 매우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책의 문장은 사마 온공의 유법遺法을 따른 것이고, 그 담긴 뜻은 춘추와 자치통감강목의 유지遺旨를 따른 것이니, 위로 주상께서 을야乙夜에 열람하시는 데에 보탬이 되고 아래로 후학들의 강명講明을 맑게 하는 데에 또한 작은 도움이 전연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신년(1476, 성종7).
[주1] 진(晉)나라의 …… 국사(國史)였습니다 : 《맹자》 〈이루 하〉에 “진나라의 《승(乘)》과 초(楚)나라의 《도올(檮杌)》과 노(魯)나라의 《춘추(春秋)》는 다 같은 역사서이다.” 하였다.
[주2] 한기(漢紀) : 후한 말에 순열(荀悅)이 《한서》의 내용을 《춘추》의 편년체 형식으로 재편하여 만든 역사서이다.
[주3]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 남송(南宋)의 이도(李燾)가 북송(北宋) 9조(朝)의 편년사를 정리하여 만든 역사서이다.
[주4] 통감속편(通鑑續篇) : 명(明)나라의 진경(陳桱)이 《자치통감》의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역사서이다.
[주5] 전사(全史) : 원(元)나라 우승상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송사(宋史)》 등을 가리킨다.
[주06] 존신(存神)의 오묘함 : 존신은 과화존신(過化存神)에서 온 말이다. 과화란 성인은 덕이 성대하여 지나가는 곳은 사람들이 모두 그에 감화된다는 뜻이고, 존신이란 성인이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주7] 사군(四郡) : 한 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그 지역에 설치했다고 하는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眞番), 현도(玄菟)를 말한다.
[주8] 이부(二府) :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사군(漢四郡)이 없어진 뒤에 그 자리에 설치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와 동부도위부(東部都慰府)를 말한다.
[주9] 모용(慕容) : 북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의 일파로, 중국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 연(燕)나라를 세웠다. 자주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주10] 남북조(南北朝) : 동진(東晉)이 망한 뒤 대략 420년에서 589년 사이에 중국 남부 지방에 세워졌던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을 남조라 하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 북부 지방에 세워졌던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을 북조라 하는데, 이들을 합쳐서 남북조라 한다. 이들은 나중에 수(隋)나라로 통일되었다.
[주11] 오계(五季) :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나기 전인 907년부터 959년까지 후량(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가 이어서 명멸하였는데, 이 오대(五代)를 오계라 한다.
[주12] 삼장(三長) : 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겸비해야 할 세 가지 특장인 재주[才], 학문[學], 식견[識]을 말한다.
[주13] 구사(舊史) : 《삼국사기》를 가리킨다.
[주14] 모기(某紀) : 《자치통감》에서는 권수(卷首)마다 왕조명을 기록하였는데, 이를테면 주기(周紀), 진기(秦紀), 한기(漢紀), 당기(唐紀) 같은 표기를 말한다.
三國史節要序
自古有天下國家者皆有史。唐虞有唐虞之史。三代有三代之史。至於列國。晉之乘。楚之擣杌。魯之春秋。皆其國史也。吾夫子因唐虞三代舊史。删定爲書。又因魯史。作春秋。此史家編年之權輿也。司馬遷始變古作史記。立紀傳表志。春秋之法始壞。班范因之作漢書。歷代撰史者。謂遷有良史之才。踵而不廢。春秋之法再壞矣。司馬公。推本筍悅漢紀。作資治通鑑。始復春秋之舊。朱子作綱目。深得聖人筆削之微旨。自此以後。李燾之長編。溫公之資治也。陳桱之續編。朱子之綱目也。脫脫之全史。班固之漢書也。嗚呼。以春秋之法論之。馬氏變古之體。不得辭其責。以後世論之。全史之作。小大不損。本末該備。誠史家之要領也。然則有全書。而無長編綱目。不可也。有長編綱目。而無全史。亦不可也。要皆三者並行而不悖矣。吾東方檀君立國。鴻荒莫追。箕子受周封。八條之敎。有存神之妙。當時必有掌故之官。記動記言矣。而今無所存。良可嘆 已。衛滿盜竊。箕準奔竄。漢置四郡,二府。國勢中絶矣。三韓間起。然無君臣上下之分。安有載籍之可傳者乎。新羅始祖赫居世始興。越二十年。而高句麗始祖朱蒙立。又二十年。而百濟始祖溫祚立。各有民社。鼎足之勢成矣。雖其昧於善隣之道。干戈日尋。生靈塗炭。然新羅三姓相傳。仁厚爲政。歷年幾一千。高句麗雄據遼東。國富兵強。敵慕容。拒齊梁。抗隋唐百萬之師。天下稱其雄強。歷年又踰六百。百濟專尙詐力。好兵樂禍。雖傳世不及二國。而尙餘五百年。非南北朝五季僭君僞主旋得旋失之比也。獨惜乎當時無良史。後世不善守。史籍之存。僅百中之一二。雖使遷,固復生。亦難於著述矣。 况其下者乎。金富軾法陳壽三國志。撰三國史。患其文籍殘缺。本末無稽。則採摭中國諸書。或補或證之。已非實錄矣。至聘問侵伐災異等事。以一事而疊書於彼此。頗傷重複。况取舍是非。筆削凡例。亦未盡合宜。識者病之。權近法綱目作史略。患其三國並峙。莫適爲主。則以新羅先起後滅而爲主。臣竊攷魏,吳,蜀三國之例。溫公之以魏爲主。重承授也。朱子之以蜀爲主。尊正統也。今以先起後滅爲主。考之前史而無據。揆之事理而不順。且史略。編年之書也。乃以一人之終始。而幷書於書卒之下。一事之顚末。而幷錄於類附之間。年月無繫。頗失記事之體。然富軾作全史於掇拾斷爛之中。權近作史略於繁冗瑣屑之餘。功亦不細矣。恭帷 世祖惠莊大王。躬睿智之聖。敷文明之治。留神經史。恢弘大猷。慨念三國之史未盡得體。開史局。集文士撰之。編摩未訖。遽違羣臣。今我殿下光紹丕基。欽承先志。命領敦寧府事臣盧思愼,吏曹參判臣李坡曁臣居正。趣令撰畢。臣等本乏三長之才。何能仰稱睿旨。第取舊史及史略。兼採遺事殊異傳作長編。凡例一依資治通鑑。但資治起周迄五季。轇輵數十代行事之跡。故謂之通鑑。今是編。止於三國。故名曰三國史節要。且資治卷首。必稱某紀。今節要。不稱紀者。三國勢均力敵。不可主一而名之。立國有先後。亡國有遲速。又不可以一國二國三國。而屢更其名。是以法朱子綱目之例。而不稱紀也。新羅獨存。則用其年紀事。三國並峙。則分註以列書。明其爲敵國也。先新羅。次麗次濟。從立國先後也。每年。必先書中國。尊天子也。新羅自用年號。抑而不書。黜其僭也。三國稱君。或名或號或諡。存其實也。王妃。或稱夫人。或稱王后。世予。或稱太子。或稱元子。其官職。或冒擬中國。其名號。或因循舊俗。皆據事直書。而美惡自見。至如荒怪之事。方言俚語。去其太甚。存其太略者。不可輕改舊史。而且以著風俗世道之淳厖爾。盖是編。起自赫居世元年。終於敬順王九年。凡九百九十二年。勤成一十四卷。雖其本史踈漏。撰述未盡詳悉。然於其間。君主之昏明。國勢之強弱。運祚之長短。亦可槩見矣。臣又嘗聞班固欺司馬。范曄欺班固。此實史家之通患。以臣等蕪拙。非不知貽笑於後史也。適承隆委。不可闇無著述。僅用管見。妄加删定。極知狂僭無所逃罪。然其文則溫公之遺法。其意則春秋綱目之遺旨。其於上裨乙夜之覽觀。下淑來學之講明。亦未必無少補云。蒼龍丙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