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년에 태학(太學)의 제생(諸生)에게 고유(告諭)한 방문(榜文)
대사성(大司成)은 제생에게 통고하노라.
지난 5월 26일에 당직(當職)이 스스로를 탄핵하면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안의 한 조목에서 아뢰기를, “신이 양재(兩齋 성균관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살펴보건대, 단지 향유(鄕儒) 약간 명만이 거하고 있을 따름이고, 경유(京儒)는 완전히 종적을 감춘 채 겨우 한두 명 정도만이 보일 뿐이었으며, 재임(齋任 유생들 내부의 책임자)도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까닭을 따져 보건대, 어리석은 신이 특히 다사(多士)로부터 심복(心服)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요즘 들어 과거 제도가 크게 잘못된 탓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중(京中)에서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는 유생들을 보면, 원점(圓點)이나 경서(經書) 공부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문장 작법에만 힘을 기울이면서 별시(別試) 등의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은 문장을 보면 또 경서(經書)에 근본을 두지 않고 있으며,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 같은 근리(近理)한 글도 진부(陳腐)한 표현으로 여기고는, 오직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장자(莊子)》와 같은 글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희한하고 기이한 표현을 서로들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經傳)에 대해서는 배워서 암송할 겨를도 없기 때문에 아예 캄캄 절벽인 자들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향유의 경우에는 경유와 기예(技藝)를 경쟁하지 않는 관계로 손쉽게 정원(定員) 안에 들곤 합니다만, 문장의 작법을 전혀 익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간독(簡牘)과 같은 심상(尋常)한 글조차도 지어내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리하여 그 폐단이 장차 문학을 황량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요 인재들을 점차 고갈되게 하고 말 것이니,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떨릴 따름입니다. 신이 삼가 이러한 폐단의 발생 원인을 생각해 보건대, 고강(考講 경서의 강(講)을 시험하는 것)을 할 때 그저 하나의 장구(章句)를 입으로 잘 외우는 응시생만을 뽑고, 고문(考文 문장을 시험하는 것)을 할 때 허황된 표현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응시생만을 잘 뽑는 데에서 말미암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경서를 전공하는 자가 그 뜻을 제대로 발휘하여 운용하지 못하게 하고, 문장을 전공하는 자가 의리에 뿌리를 두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응시생들의 잘못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사람들이 잘못된 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고강을 할 때 경서를 외우는 방식을 관대하게 해 주고, 나아가 회시(會試)를 거행할 적에도 문장과 관련된 문제를 많이 출제한다면, 경유 가운데 경서에 뿌리를 두고 문장을 짓는 자들이 필시 많이들 등제(登第)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뛰어난 재질의 소유자들이 이를 본받아서 태도를 크게 바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본래 국조(國朝)에서 정기적으로 대과(大科)를 설행(設行)할 때의 상규(常規)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규정을 그대로 복원하기만 한다면, 문장을 짓는 자들도 반드시 경서에 뿌리를 두게 되고 경서를 전공하는 자들도 반드시 문장을 잘 짓게 되어 지금처럼 두 갈래 길로 판연히 나뉘어지지 않을 것이요, 반궁(泮宮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전교(傳敎)하기를, “이 상소문을 해조(該曹)에 내려 회계(回啓)하도록 하라.” 하니, 예조(禮曹)가 회계하기를, “삼가 상소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반궁은 많은 인재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곳인데, 양재에 향유 약간 명만 있을 뿐 경유는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하니, 사장(師長)된 입장에서는 마음속으로 온당치 못하게 느끼는 것이 형편상 당연하다고도 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잘못된 풍조가 형성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로서, 비단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고강을 할 때에 경서를 외우는 방식을 관대하게 해 주고, 회시를 거행할 적에도 문장과 관련된 문제를 많이 출제함으로써, 문장을 짓는 자들이 반드시 경서에 뿌리를 두게 하고, 경서를 전공하는 자들도 반드시 문장을 잘 짓게 해야 한다.’고 한 말은 실로 일리가 있는 의견으로서, 현재의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측면에서 타당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 등의 소견(所見)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앞으로 정기적으로 대과(大科)를 거행할 때 이에 따라 봉행(奉行)함으로써, 조종조(祖宗朝)의 옛 상규를 복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숭정(崇禎) 9년(1636, 인조 14) 5월 29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임광(任絖)이 차지(次知)로 명을 받들어 전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하니, 이 뜻을 과거(科擧)의 사목(事目)에 첨가하여 착실히 거행하라.” 하였다.
당직(當職)도 물론 과거에 관한 일이 본래 교학(敎學)의 첫째가는 의리(義理)가 못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연히 스스로 탄핵하며 상소문을 올린 내용 가운데에서 잠깐 과거에 대한 폐단을 언급한 결과, 해조(該曹)가 복의(覆議)하여 성지(聖旨)가 판하(判下)되기에 이르렀으니, 앞으로는 유사(有司)가 마땅히 이에 따라 봉행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러 군자(君子)들이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서 강습(講習)을 하지 못한 나머지, 유사가 봉행하는 그 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되기에 감히 이렇게 게시(揭示)하는 바이다.
대저 경서를 연구하는 것은 이치를 밝히기 위함이요, 문장을 짓는 것은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뽑는 것은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기 위함이요, 인재가 과거에 응시하는 것 역시 그 도를 실천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교학의 첫째가는 의리라고 하겠는데, 선왕(先王)이 과거 제도를 마련하여 인재를 뽑도록 한 그 목적도 전적으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경서에 근본하여 문장을 짓도록 한 조치가 비록 근본을 힘쓰게 하는 논의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단(異端)의 학설이나 기괴한 표현을 가지고 세상을 현혹시키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여 근본과는 더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행이겠다.
[주1] 원점(圓點) : 성균관(成均館)에 거재(居齋)하는 유생의 출석 및 결석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유생이 조석(朝夕)으로 식당에 올 때마다 점호하여 식당의 도기(到記) 즉 출석부에 찍는 점을 말하는데, 아침과 저녁 두 끼를 1점으로 인정해 주었다.
丙子諭大學諸生榜
大司成爲知會事。去五月二十六日。當職自劾上疏內一款云。臣見兩齋。只有鄕儒若干人。而京儒則絶無而僅有。一二齋任。亦罕接面。詢究其故。則不但愚臣特爲多士所不服。亦由近來科擧大壞。京中才俊之流。則不事圓點治經。專務作文。以應別試等科。而其爲文。又不本於經書。如韓,歐近理之文。亦視以陳言。惟從事於馬史莊子等書。務以瑰奇相尙。故其於經傳。無暇學誦。至有昧然面墻者。鄕儒則以不與京儒較藝之故易於編額。而全不習作文。至有不能結撰簡牘尋常語者。其弊將使文學鹵莽。人材消耗。誠可寒心。臣竊念此弊之來。蓋因考講者。只取斷章快口。考文者。好取狂詞拗捏。遂使經者無所發用。文者不本義理。此非其材之罪。將其導迪者。非其方故也。今若於考講之時。寬其誦式。而至會試。又多出文等。則京儒之本經爲文者。必多參第。才俊之士。可以慕效一變。此本國朝大比常規。但擧而復之。則文者必經。經者必文。不至判爲兩道。而居泮之士。不患不多矣云。傳曰。此疏下該曹回啓。禮曹回啓內。竊詳疏內辭緣。泮宮乃是多士所居之地。而兩齋。只有鄕儒若干人。京儒則絶無而僅有云。身爲師長。心有所不安者。勢所當然。而謬習已久。非獨今日爲然。至於考講之時。寬其誦式。會試多出文等。使文者必經。經者必文等語。實有意見。其於矯弊之道。可謂得宜。臣等所見。亦不外此。此後大比之擧。依此奉行。以復祖宗朝舊規如何。崇禎九年五月二十九日。同副承旨臣任絖。次知啓。依允此意乙科擧事目中添入。着實擧行爲良如敎。當職極知科擧事。本非斆 學第一義理。而偶於自劾疏內。暫陳科法之弊。則該曹覆議。聖旨判下。前頭有司所當奉行。恐諸君子未及聞知講習。而失有司奉行之旨。故敢此揭示矣。夫治經所以明理。作文所以達義。取士要以圖治。應擧要以行道。此固第一義理。而先王所以設科取士之意。亶不出此。今欲本經爲文者。雖非務本之論。第猶勝於異學詭文。眩世取資。而去本逾遠矣。諸君子幸念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