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은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진짜로는 눈(雪)이고 가짜로는 비(雨)라 부르는 진눈깨비가 산막 아침에 내리고 있는 중이다. 겨울 산막은 제법 많은 눈이 내리는 곳이며 봄은 느리게 이어지고 가을은 살을 닮아 빠르게 진행된다. 산촌이라 그런 것이다. 지금 서울 곳곳에 생강나무 꽃, 산수유, 매화, 진달래 등등이 피었지만 산막은 영춘화가 고작이다. 산수유와 매화가 피려면은 아직도 먼 이야기다. 화단에 심어 놓은 수선화도 꽃대가 올라오고 있지만 꽃을 보려면 3월이 지나야 한다. 모든 작물은 때를 맞춰 심어야 하는데 4월을 넘길까 말까 하는 지점에서 심어야 탈이 없다. 진눈깨비가 설한(雪寒)에 부는 바람에 부딪기는 것처럼 무게의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휘몰려 떨어진다. 하긴 나의 기억으로는 4월 중순 진눈깨비가 한없이 내리다 한파에 온통 거리가 얼어붙어 위태롭게 걸은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산막은 유난히 꽃샘추위가 강한 곳이다. 상당한 담금질을 한 끝에 꽃 길을 열어준다. 단단한 길들임 끝에 핀 꽃이 참 아름답다. 꽃샘추위 과정을 거치지 않고 피는 꽃 시들시들 한 편이지만 꽃샘추위에 훈련된 꽃은 영롱하고 꽃빛도 맑은 편이다. 하긴 꽃이 좋아야 열매도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꽃이 좋아야 수정 매개체인 벌, 나비도 즐겨 찾는 것이다. 꽃이 화려한 이유는 유혹의 의미가 깊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지 못하는 꽃이 있다면 생명 이음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냉기가 많이 돈다. 구름 갇혀 태양의 빛이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빛이 좋으면 커튼을 활짝 열어둘 덴데 진눈깨비가 모질게 느껴져 닫아둔 후 책상에 앉아 일기예보를 체크해 보니 점심경부터 차차 날이 개고 내일은 쾌청하려는 모양이다. 밤새 참 많은 비가 내렸다. 봄비 답지 않은 소리가 꼭 초여름 비와 같았다. 꽃샘추위가 모질든 말든 기다리면 절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하며 자연을 변모시켜 갈 것이다. 때를 기다리면 지구환경오염의 영향에 의하여 길고 짧은 것은 있겠지만 절기는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산막의 봄은 이 작은 동산에서부터 봄꽃을 피우며 시작된다. 보통 4월 10일에서 15일 즈음이 되는 것 같다. 역시 봄기운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확장성이 있는 것 같다. 신비의 체험을 통해 우주의 섭리를 기억하며 봄에 걸맞은 자기 혁신을 계획하면서 꿈을 꾸며 걸음을 옮기던 시기도 봄이었다. 결심을 통해 목적으로 이어지는 일상, 시행착오도 생기고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개나리 울타리로 꽃이 개화하기 시작하였다. 관찰하다 군락 사이에 개나리 꽃과 다른 모양의 꽃이 보이기에 반색을 하며 다가 가 개나리 가지를 젖히고 살펴보았다. 내심 씨가 날아와 자생적으로 활착 하여 자란 것이라 짐작하며 반가워했었는데.. 실상은 이웃하며 두 그루의 성목, 매화나무에서 피는 매화꽃이었다. 아직 키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린 목을 조금 지난 중목정도라 판단하였는데 매년 키를 조절하는 가위질에 휩쓸려 키를 키우지 못하면서 그래도 꽃을 피웠으니 대충 나이가 짐작이 간다. 차후 가위질을 하면서 세세하게 살펴 싹둑 질을 피해주어 개나리 군락 위로 웃자라게 해주려고 한다. 매화나무에 달리는 가시는 억세기로 돗바늘 이상이다 가지를 정리하다 찔리며 피를 흘려야 한다. 열매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이라 짐작이 가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엄동 속에서도 피는 독함에 이해가 따른다.
개나리 하면 집 울타리로 사용하는 개나리가 떠오르지만 나에게는 산개나리가 봄의 잔상으로 남아 마음에 깃든 꽃이다. 중학교 때 직장에서 은퇴하신 아버지는 퇴직금으로 여러 사업을 시작하시다. 문안생활을 접으시고 새로운 주거타운이 형성된 북한산 동쪽자락으로 이주하셨다. 주택공사 전신 국영기업 영단주택에서 단독 문화주택을 분양할 때 즈음이었다. 목가적인 풍경이 가득한 산아래 마을은 많은 이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분양되면서 신도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생활터전이 바뀌면서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뒤따르게 된다. 우선 통학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오고 가던 길이 길어야 15분 정도 걸리던 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로 늘어났지만 자연에 매료되어 가면서 점차 산에 빠져들게 된다. 송림과 벚꽃 길, 백운대로 가는 길에 놓인 것들과 시작된 교류는 지금까지도 내 안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숲 길은 늘 감동의 대상이었다. 수유동, 우이동 곳곳에는 눈여겨볼 곳이 산재해 있었다. 천도교 봉황각과 최남선 별서, 아름다운 우아동계곡과 소귀천과 도선사계곡에 펼쳐진 풍광에 매료되어 도선사까지 오르게 만들었고 이어서 깔딱 고개를 넘어 백운대 정상에 나를 세운다.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의 낙조는 지금도 마음과 나의 시선에 살아 있다.
지금 신작로가 되어버린 도선사 가는 길이지만 당시 그 길은 다람쥐가 다니던 아주 작은 오솔길이었다. 그 길 초입에 개나리 산장이 있어 산을 찾는 이들에게 쉼터가 되어 주고 음식도 사 먹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 개나리 산장 주변에 위 사진 산개나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북한산에서 자생하는 산개나리는 천연기념물 제388호로서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 특산식물이다. 세계자연보전 연맹(LUCN) 적색목록에 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있고 우리나라 산림청 지정 희귀 멸종위기 식물 제166호로도 등재된 식물이다. 현재로서는 국립산림과학원 복원기술에 의하여 산개나리가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전다양성 증대의 노력으로 증식의 길을 터 전국 각지에 식재가 가능해진 상태다. 북한산 산개나리가 멸종에 다다른 이유는 근친교배로 유전다양성이 매우 낮아 멸종 위험이 커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전적 약화현상은 종자결실 및 환경적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종을 소멸하게 한다. 또한 환경변화에 따른 원인도 있을 수 있다. 산개나리는 높은 곳에서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으로 자라는 특성을 지닌 식물이다.
산개나리의 멸종과 달리 산맥의 DNA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나에게 전달된 듯하다. 아버님께서 어머님과 결혼을 하신 후 친구분들과 백운대 등반을 하신 사진이다. 맨 우측에 픽켈을 들고 계신 모습이 바로 나의 아버님이시다. 나 역시 백운대에 오르적마다 아버님이 앉아 사진을 찍으셨던 장소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삼각산 동쪽 자락을 바라보며 우리 집을 찾아보던 기억이 많다. 당시 다락에서 발견한 이 사진을 들고 아버님이 찾으셨던 계절을 여쭙자 늦은 봄이라 하셨다. 목탄차를 타고 화개사 샛길을 지나 가오리를 경유하여 우이동 고목나무 곁에서 내리셔서 봉황각 곁을 지나 도선사에 오르신 후 용암계곡과 김상궁바위를 넘어 움막이 있던 백운산장 자리에서 쉬시며 물통을 채우셨고 이어서 백운대 정상을 오르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었다. 금강산을 비롯하여 설악산 등 전국 명산을 순례하신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지금도 백운대 모습은 변함이 없다. 바위 하나하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한 시대의 삶의 주인공이셨던 아버님은 우리 곁은 떠나신 것이다.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금년 봄 어느 날을 잡아 백운대에 오르려고 한다. 백운대에 올라서면 영면하고 계신 송추자락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 낡은 사진은 내가 생애 최초의 사진인 것 같다. 피난 중에 태어난 개인적으로는 귀중한 자료이다. 사진촬영일자가 사진에 적혀 있어 살펴보다 단기 4286년 4월 27일 봄날이다. 서기로 바꿔보니 1953년 4월 27일이다. 아래 줄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는 나의 셋째 형이다. 그리고 나를 안고 계신 분이 아버님이시다. 아버님께서 자신의 동기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나누신 후 찍은 사진이라는 이야기를 듣은 기억이 떠오른다. 우린 모두 7형제다. 부모님은 결혼하신 후 첫째 둘째 아들을 낳으신 후 아버님의 근무지가 바뀌어 10여 년 떨어져 지내시게 되셨다 한다. 다시 귀국하신 것은 해방과 함께 셨다. 다시 귀국하셔서 아래로 5형제를 출산하시게 된다. 이런 이유로 첫째 둘째 형들과 나이차이가 상당히 생기게 된다. 해방의 혼란기와 6.25 남침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면서도 가족들을 온전하게 이끌어 주셨던 것은 부모님의 치밀하신 계획 때문이었다. 단 친할머니께서 너무 노년이셔서 완강하게 피난을 스스로 거절하시며 집을 지키시겠다고 하셨는데 동란 중 돌아가신 일 빼놓고 인적 피해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어머니를 통해 듣은 기억이다. 새삼 이 사진을 통해 아버님의 사랑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부모님도 떠나셨지만 위로 두 형도 떠나셨고 아래로 두 동생도 나의 곁을 떠났다. 떠나시고 떠난 형제들의 뒤를 이어 자손들이 대를 잇고 살고 있고 현재는 3형제만 생존해 있다. 우리들의 세대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흑백 사진처럼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첫댓글 옛 추억에 잠기는
시간입니다
수유동. 우이동 계곡. 도선사. 도봉산. 백운대. 북한산
그옛날 다녔든 기억을
되새겨 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