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송씨파보 서 礪山宋氏派譜序
흥양(興陽)의 고을 모습은 다리미 모양처럼 남해로 들어갔으니 대저 대륙의 여러 산이 따르지 못하는 곳이다. 여산(礪山) 충강(忠剛) 송공(宋公)이 그곳에 처음 집터를 잡아 살았다. 공은 일찍이 서울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높은 관직에 올랐으니 만일 물러나고자 하였다면 중토(中土)의 오지로써 머물러 살만한 곳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나 반드시 흥양을 취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가 있고 그 마음은 참으로 슬프다. 대개 이 세상에서 소리와 자취를 감추려고 오히려 땅의 끝이 더 멀리 하늘가에 있지 않음을 꺼려했던 것이다. 이에 옛사람이 황하를 넘고 바다로 들어갔던 것이 진실한 말이었음을 알았지만, 후예가 번성하고 창대해짐은 또 어찌 공이 처음에 예상한 것이었겠는가. 400년 동안 형제와 후손들이 처음에는 흥양에만 거주하였고 지금은 현의 땅이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근방의 여러 고을에 넘쳐난다. 석과(碩果)의 보답은 그 그윽한 이치를 속일 수 없다. 하물며 충양(忠襄) 이하 십수 공의 충효(忠孝)와 지절(志節)은 혹 부자가 미덕을 이었고 혹 형제가 나란히 아름다워서 의를 취함을 다반사로 하고 목숨을 깃털처럼 내던지기를 편안히 여겼으니 다른 성씨도 이런 경우가 있었는가. 아, 충효에도 종자(種子)가 있는 것인가. 참으로 존경할 일이다. 국가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나라 안에 닭이나 개의 놀람이 없었다. 이후로 송씨는 지절(志節)이 드러난 자가 없었다. 그러나 봉추(鳳雛)에는 범상한 새가 없으니 훗날의 의로운 명성이 송씨에게서 나오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바라건대 충강의 자손들은 중단하지 않고 길이 이어나가도록 하라.
송씨들에게 바야흐로 수보(修譜)하는 일이 있어 그 종인(宗人) 낙호(樂浩)로 하여금 나에게 서문을 청하게 하였다. 나는 평소 질박하고 비루한데다가 더욱이 연로하고 혼미하여 감당하지 못한다. 다만 생각건대 이 충무공(李忠武公)이 해상의 군대를 거느릴 때에 송씨 수사공(水使公) 형제가 실로 막하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을 보존한 공이 있었다. 사체(事體)가 큰 것은 굳이 논할 것이 없거니와 모든 호남의 생명들이 의지하여 울타리로 삼았으니 지금 송씨의 일에 대하여 어찌 감히 “집에 있으면서 모른다.”라고 하겠는가. 마침내 소감을 이와 같이 대략 적는다. 그 족보의 규모와 의례 같은 경우는 송씨의 여러 장로들이 있으니 스스로 응당 충분히 정당(停當)하게 할 것이다.
[주1] 흥양(興陽) : 흥양현(興陽縣)은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의 옛 이름이다.
[주2] 여산(礪山) :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이다. 일명 여량현(礪良縣)이다.
[주3] 송공(宋公) : 송간(宋侃)으로, 조선 전기의 충신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서재(西齋), 할아버지는 고려 중랑장 인충(仁忠)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455년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려는데,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삼년상을 마치고, 흥양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냈다. 10여 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한다. 1793년(정조17)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주4] 황하를 …… 것 : 《논어》 〈미자(微子)〉에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가고,……북을 치는 방숙은 하내(河內)로 들어가고, 소고를 흔드는 무는 한중(漢中)으로 들어가고, 소사 양(陽)과 경쇠를 치는 양(襄)은 해도(海島)로 들어갔다.[大師摯適齊,……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小師陽擊磬襄入於海.]”라고 하였다. 집주에 “노나라가 더욱 쇠하여 삼환이 참람하고 망녕된 짓을 행하게 되자, 태사로부터 이하의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가서 황하를 건너고 바다를 건너 어지러운 나라를 떠날 줄 알았다.[魯益衰, 三桓僭妄, 自大師以下, 皆之散之四方, 逾河蹈海以去亂.]”라고 하였다.
[주5] 석과(碩果)의 보답 :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석과는 큰 과실로,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 큰 덕을 지닌 군자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집을 허물리라.[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라고 하였다.
[주6] 충양(忠襄) : 송순례(宋純禮)의 시호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문백(文伯)이다. 송간의 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16) 아산진(阿山鎭)을 지킬 때 여진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이해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물리쳐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악비(岳飛)의 《정충록(精忠錄)》을 하사받고 이산 군수가 되었다. 흥양(興陽)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주7] 의를 취함 : 원문의 ‘취웅(取熊)’은 의를 취한다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는 내가 바라는 바요, 곰발바닥도 내가 바라는 바이다.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으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주8] 봉추(鳳雛) : 봉황 새끼로, 준걸(俊傑)을 비유한다.
[주9] 송씨 수사공(水使公) : 송건(宋建)으로, 충강공 송간의 5세손이다. 1588년(선조21) 무과에 급제해 북방의 경비를 맡았다. 효자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복무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곧 귀향해 삼년상을 치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 양사준(梁士俊)의 청으로 좌막(佐幕)이 되어 참전했다. 전투 때마다 선봉에 서 공이 많아 성주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다. 함창(咸昌)에서 적과 만나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죽었다. 전투 중에 화살이 떨어지고 군진이 붕괴하자 북쪽을 보고 절한 뒤 죽었다고 전한다. 세충사(世忠祠)에 제향 되었다.
[주10] 집에 있으면서 모른다 : 《서경》 〈군석(君奭)〉에 “우리 후사의 자손에 있어 크게 상하를 공경하지 못하여 전인의 빛나는 업적을 끊고 실추하면 집에 있으면서 모른다고 하겠는가.[在我後嗣子孫, 大弗克恭上下, 遏佚前人光, 在家不知?]”라고 하였다.
礪山宋氏派譜序
興陽爲邑。熨斗入南海。蓋大陸羣山所不能從焉。礪山忠剛宋公始家焉。公蓋嘗近京輦致通顯。設欲斂退則非無中土奧區可以棲息。而必興陽之取焉。其意可知。其心誠可悲也。蓋沉響滅跡於斯世。猶嫌地盡頭之不在天涯也。乃知古人之踰河蹈海。是眞實語。而後裔之蕃衍碩大。亦豈公初料之所及哉。四百年來。椒聊花萼。始也惟興陽之居焉。而今焉縣土不能容。溢出于傍近數邑矣。碩果之報。冥理不誣。况忠襄以下十數公忠孝志節。或父子趾美。或兄弟聯懿。以取熊爲茶飯。以擲鴻爲衽席。他人姓氏有之乎。嗚呼。忠義亦有種子歟。可敬也夫。國家昇平久。方內無鷄犬之警。自後宋氏無志節著者。鳳雛無凡毛。異日義聲。安知不出於宋氏也。願爲忠剛子孫者。勿替引之。宋氏方有修譜之役。使其宗樂浩問弁卷於正鎭。正鎭素樸鄙。重以耄聵。不敢當。第念李忠武海上之師。宋氏水使公兄弟。實居幕下。功存宗祊。體大姑無論。全湖生命。賴爲藩蔽。今於宋氏事。其敢曰在家不知。遂畧誌所感如右。若其譜之規模義例。宋氏諸長老在焉。自應十分停當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