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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伊川)의 아름다운 경치를 유람한 기록〔伊川諸勝遊覽記〕
이천은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다운 경승(景勝)이 많았으나 모두 우리 고을에 있다 하여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아서 해를 넘기도록 유람하지 않았었다. 금년 봄에 우연히 조원(調元)과 함께 산수(山水)를 이야기하다가 흥이 일어서 나란히 말을 타고 유람하는 길을 떠났다.
몇 걸음을 가면서 마을의 집들이 산골짝에 드문드문 붙어있는 것을 보니, 자못 상쾌하고 시원하였다. 진담(陳潭)을 건너는데, 못물은 맑아 바닥이 보이고 바위틈에서 쏟아지는 물이 여울져 튀어오르며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또다시 몇 걸음을 가자, 산세가 우뚝하게 높은데 줄지어 선 여러 봉우리들이 다투어 말 앞에 기이한 모습을 드러내니, 경치가 각별함을 깨달았다.
또다시 몇 걸음을 가자 와룡대(卧龍臺)가 나오니, 고을의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매끄럽게 빛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높이가 거의 30여 길〔丈〕인데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으며, 벼랑 가득히 철쭉꽃이 때마침 피어 대 아래에 있는 못 전체를 밝게 물들여서 그 경치가 더욱 기이하니, 내가 일찍 이곳에 와서 감상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못의 넓이는 거의 수십 묘(畒)에 가까웠는데, 깊은 곳은 시퍼렇고 얕은 곳은 모래톱을 이루고 있었다. 못 가운데에는 많은 돌들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못가에는 또 모두 흰 바위들이 있었다. 못가에 대(臺)가 있는데, 대 위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구불구불 서려 있어 늙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석(盤石)이 굽이져 물속으로 들어가서는 움푹 패여 골을 이루고 불룩 솟아 대를 이루었으며, 혹은 평평하게 펼쳐져 평상(平床)과 같고 혹은 흩어져서 바둑알과 같으며 혹은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뾰족하고 혹은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괴이하니, 각양각색의 모습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갈대와 억새풀이 바위 사이에 우거져 있는데 섣달에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았다. 나무하는 아이가 소를 냇가에 매어놓고 물속에 들어가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니, 호복(濠濮) 사이에 유유히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조원에게 이르기를,
“이 못이 만약 풍악산(楓岳山)의 만폭동(萬瀑洞)에 있었다면 화룡담(火龍潭)과 선담(船潭)과 구담(龜潭) 사이에서 우열을 다툴 만한데, 궁벽한 곳에 위치하여 그리 칭송받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라고 하니, 조원 또한 내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다시 보전천(甫田川)을 건너 고산(孤山)을 지났는데, 산 위에 수십 그루의 어린 소나무 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푸르고 연하여 사랑스러운 것이, 골짝에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 큰 소나무의 자태보다 도리어 나았다.
얼건담(嵲建潭)을 지나가노라니, 못에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데 콸콸대는 폭포 소리가 들을 만하였으며, 위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시야가 밝고 상쾌하였다. 또 그 위는 용연(龍淵)인데, 그 사이에 산마을이 그윽하고 외롭게 자리하고 있으니, 바로 초연히 진세 밖의 생각이 들었다. 용와암(龍卧巖)을 지나고 또다시 바위 하나를 지나가니, 도로 사이의 물소리와 산 빛 등 모든 것이 나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하였다.
소림사(小林寺)에 들어가니, 절벽과 산이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서 동구가 매우 깊었다. 사찰의 누대 이름은 강선루(講禪樓)이고, 십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또 새로 세운 비석이 있었다.
남천(南川)의 상류를 건너서 오송암(五松菴)에 들어가니, 이 암자는 바위에 걸쳐 지었는데, 정결하여 앉을 만하였다. 바위 위에 대가 있는데, 옛날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오송암이라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또 승려는 없으며 거사(巨師) 네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오송암은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하여 읍내를 굽어보고 있어서 어지러이 펼쳐진 밭두둑과 산봉우리와 여울물이 시야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비록 용암(龍巖)의 아름다운 경치에는 미치지 못하나 소소하게 아름다운 흥취는 있었다. 또다시 남천(南川)의 상류를 건너서 관아로 돌아오니, 경인년(1710, 숙종36) 2월 21일이었다.
이달 24일에 또다시 조원(調元)과 허환(許綄) 제경(濟卿)과 함께 배로 이수(伊水)를 건넜는데, 물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흰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 위는 바로 옛 성산(城山)인데, 옛날에 돌로 쌓은 성터가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지나간 자취를 두루 둘러보노라니, 절로 옛날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일었다.
옛 이주진(伊洲鎭)을 지나 사인암(舍人巖)에 이르니, 이곳은 또 용암과 기이함을 다투는 곳이었다. 푸른 절벽이 수려하게 솟아서 위로 일고여덟 개의 봉우리가 되었는데, 정교하고도 가파른 바위는 그 형세가 하늘을 능멸하듯 솟아 있고, 아래에는 반석이 층층이 쌓여 있고 앞에는 물이 흘러 어귀를 휘감아 돌고 있으며,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물 가운데에 흩어져 있었다.
폭포수는 부딪쳐 소리를 내고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것이 마치 싸락눈이 어지러이 날리는 듯하며, 물의 형세는 맑은 물결이 부딪치며 빠른 속도로 사납게 달려가니, 참으로 볼만하였다.
회현(檜峴)을 넘으니, 그윽한 시냇물이 숲과 바위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 소리가 쟁쟁하여 몇 리를 가도록 끊이지 않았다. 석용담(石龍潭)을 따라가자 못 가운데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이름이 형제암(兄弟巖)이다.
군지포(軍池浦)에서 점심을 먹고 산도현(山道峴)을 넘어서 사도(蛇島), 용연(龍淵)을 따라 응탄애(鷹灘厓)를 넘었는데, 절벽이 매우 길게 이어져 있고 맑은 여울과 흰 조약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경거리였다. 여울물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콸콸 소리를 내며 내닫는데, 수십 리를 가도 물소리가 귓전에 남아 끊이지 않았다.
원현(院峴)을 넘으니, 옛날 광덕원(廣德院)의 터이다. 저녁에 추곡촌(楸谷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하였다. 산허리에 남기(嵐氣)와 안개가 반쯤 덮여 있었는데 아침 해가 떠서 비추자 서로 광채를 발산하니, 광경이 매우 기이하였다. 추곡천을 건너 구준애(九蹲厓)를 넘으니, 또다시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있고 맑은 시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완연히 사인암의 경치와 같았다.
왕봉담(王鳳潭)을 지나고 개연천(開蓮川)을 건너서 개연애(開蓮厓)를 넘었는데, 이후로부터는 암석과 여울과 폭포 등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아름다운 풍광이라 미처 다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대암(臺巖)을 지나니, 바위틈으로 폭포수가 나란히 떨어져서 그 아래에 또다시 여울과 폭포를 이루었다. 용암을 지났는데 모습이 용과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고 한다.
식송촌(植松村)을 지나자니 낙락장송(落落長松) 여덟 그루가 빽빽하게 늘어섰는데, 나옹(懶翁)과 무학(無學)이 종자를 구해서 심었다고 한다. 송대(松臺) 아래에서 잠시 쉬었다.
또다시 푸른 물과 절벽을 만났다. 몇 걸음 거리에 석대(石臺)가 있고 곁에는 마치 인공으로 쌓아 놓은 듯한 천연의 푸른 돌이 있는데 낚싯대를 드리우는 바위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소리가 매우 우렁차서 사람의 말소리도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대벽(臺壁)의 위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아니면 철쭉이 자라고 있어, 만약 꽃 필 때를 만난다면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곱절이 될 것이다.
갈봉(葛峰) 아래에 이르니, 승려들이 남여(籃輿)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기에 남여를 타고 길을 떠났다. 산허리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노라니, 산 밖의 여러 봉우리들이 시야에 펼쳐져 있었다.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는데 길가에는 국화가 활짝 피어 있으니, 또 하나의 기이한 풍경이었다.
옛 귀락사(歸樂寺) 터를 넘어서 보살사(菩薩寺)에 들어갔다. 이 사찰은 무학이 지정(至正) 연간에 창건하였고 홍무(洪武) 2년(1369, 공민왕18)에 중수(重修)하였으며 지금의 사찰은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거주하는 승려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대웅전(大雄殿)은 삼인봉(三印峰)과 마주 대하여 시야가 상쾌하니, 이른바 삼인봉은 또한 기록할 만한 고사가 있다. 앞에는 늙은 노송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데 푸르고 울창하였다.
이 사찰에는 고적이 많았다. 이름이 무애호(無碍瓠)라고 하는 굽은 병은 푸르고 붉은 비단으로 끈을 만들었으며, 무학이 양식을 구걸할 때 쓰던 물건이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표주박을 검게 칠한 것이었다.
푸른 종이에 은자(銀字)로 쓴 《화엄경(華嚴經)》 한 축(軸)과 《연생보명경(延生保命經)》 한 첩(帖)에는 상단에 그림이 그려 있는데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 명나라 서안 장공주(瑞安長公主)가 쓴 것으로, 둘 다 알록달록한 비단과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표지를 하였다.
《금광명경(金光明經)》 한 첩과 금자(金字)로 쓴 《연화경(蓮華經)》 일곱 첩에도 상단에 그림이 그려 있는데 신묘하고 빼어나 감상할 만하였다. 이 가운데 두 첩은 하단에 “홍무 6년(1373, 공민왕22) 11월 10일에 공경히 쓰다.〔洪武六年十一月十一日敬書〕”라고 쓰여 있고, 또 “나의 죽은 배우자인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는 공로(功勞)나 덕업(德業)으로 보면 생존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추수(追修)함에 유감(遺憾)이 없으므로 이 묘한 불경을 얻어서 금자로 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공민왕(恭愍王)의 필적인데, 필법이 기묘하였다. 끝에는 “증명사보제존자(證明師普濟尊者)”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 ‘나옹(懶翁)’ 두 글자를 새긴 도장이 찍혀 있었다.
또 《연화경》 한 첩이 있으니 흰 바탕에 인쇄한 책으로, 필법이 또한 묘하였다. 끝에는 “시주인 봉익대부 전 덕령부 우사윤 이영원과 함께 발원한 선녀 조씨 묘청과 전 낭장 문석기〔施主奉翊大夫前德寧府右司尹李英遠同願善女趙氏妙淸前郞將門碩琦〕”라고 쓰여 있었다.
또 《연화경》 한 첩은 금자로 그림을 그리고 아래에 경문을 썼는데, 그 글씨 또한 금자인 듯하였으나 색깔이 자못 달라서 마음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아랫단에 ‘손을 찔러 피를 내어 썼다.’는 내용과 ‘지정 9년(1349, 충정왕1) 기축년 9월 일에 손을 찔러 피를 냈다.〔至正九年己丑九月日出血〕’ 등의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서야, 피를 섞어 썼기 때문에 그 색깔이 이와 같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불전(佛殿) 왼쪽에 길이가 십여 길〔丈〕이 되는 아름드리나무가 있는데, 승려는 계수나무라고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채진암(采眞菴)과 선주암(善住菴)의 옛터를 거쳐 부도령(浮圖嶺)을 지났는데, 네 기의 부도와 벽허(碧虗)ㆍ천곡(天谷)ㆍ취음(翠陰) 등의 비석이 있었다.
관음암(觀音菴)에 들어가서 만경루(萬景樓)에 오르니, 누대 아래에 또 맑은 샘이 있는데 돌방아가 저절로 방아를 찧고 푸른 노송나무가 울창하였으며, 운달산(雲達山)이 마치 손을 모으고 읍(揖)하는 것처럼 둘러서 있었다.
불전 위의 대에 영산전(靈山殿)이 있는데 붉은 색으로 단청을 입혀 휘황찬란하였다. 옥돌〔玉石〕로 만든 부처 25기가 있는데, 승려는 겨우 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작은 암자는 이름이 원명암(圓明庵)인데 바위산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푸른빛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였다. 안장을 벗겨놓고 잠시 쉬니, 혼과 뼛속까지 시원하여 나도 모르게 속세에 찌든 마음이 다 사라지는 듯하였다.
밤에 두 사리(闍梨)로 하여금 각각 범패를 노래하게 하고 이어서 가사(袈裟)를 입고 바라를 치고 법고(法鼓)를 두드리게 하였더니, 온갖 놀이가 일제히 펼쳐지는데 비록 어지럽고 떠들썩하여 법도가 없는 듯하였으나, 자세히 보니 나름대로 절도가 있었다. 평소에 익숙하게 익힌 자가 아니면 이렇게 잘할 수 없을 것이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름이 고달(高達)이란 사냥꾼이 산골짝으로 멧돼지를 쫓아갔는데, 멧돼지는 바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화신(化身)으로 화살을 맞고 동굴로 들어가서 본래의 모습인 관세음보살로 변신하였습니다. 고달은 이로 인하여 계율(戒律)과 선정(禪定)의 도를 닦아 부처가 되었으니, 동굴에는 아직까지도 화살과 화살촉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이 운달산(雲達山)이었는데 고달산(高達山)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라고 하니, 그 말이 허황하기는 하나 산문(山門)의 한 옛 이야기가 될 만하였다. 거주하는 승려는 30명인데 함께 말을 나눌 만큼 문자를 아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이날 밤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음 날까지도 개지 않으니, 구름이 산을 감싸고 있어서 산마루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산 전체가 안개 사이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이 경치는 진실로 그림으로 그릴 만하였다.
의상대(義相臺)가 절정에 있고 위에 보살암(菩薩菴)이 있는데, 벽곡승(辟穀僧)이 거처한다고 하나 길이 험하여 올라가지 못하였다. 제경(濟卿)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올라갔는데, 별다른 기이한 경관은 없었다고 하였다.
암자의 승려가 돼지털로 만든 붓을 올리며 암자의 편액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써 주었다. 비 때문에 그대로 머무노라니 무료하기에 늙은 승려인 계화(桂華)로 하여금 《능엄경(楞嚴經)》을 읽게 하고는 베개에 기대어 들었으며, 다시 승려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놀이를 하게 하여 구경하였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비가 잠깐 개었으므로 남여를 타고 출발하였다. 산꼭대기를 지날 적에 길이 매우 험하고 쌓인 눈이 허벅지까지 이르러서 거의 죽을 뻔하다가 겨우 편안해졌으니, 이 고개가 고달현(高達峴)이다.
영은암(靈隱菴)의 옛터를 지나고 나서 또 여러 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났다. 범패를 잘하는 승려 학문(學文)으로 하여금 여울 가에 앉아 노래하게 하였는데, 마치 여러 악대(樂隊)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는 것과 같아 바위 골짝이 모두 응하여 메아리가 숲 그늘 사이에서 나오니, 범패 소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무량곡(無量谷)에 이르니, 바위산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마치 고상한 사람이 우뚝 서 있는 듯하였고, 푸르고 밝아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사방의 산이 모여들어서 아홉 겹의 비단구름을 펼쳐놓은 듯하여 그윽하고 기이하며 넉넉하고 온화하니, 붓으로는 다 서술하기 어려웠다.
바위가 있는 곳을 다 지나가자 곧바로 확 트여 넓은 곳이 나타나니, 또 하나의 특별한 경치였다. 이곳에 이르면 곡산(谷山) 땅이니, 고달산의 남은 지맥(支脈)이다. 산수(山水)와 여울과 물굽이가 굽이굽이마다 더욱 아름다우니, 두 사람과 함께 한참 동안 시를 읊조리고 구경하느라, 시간이 지났는데도 차마 버리고 떠나가지 못하였다.
초촌(梢村)에서 점심을 먹고 어염현(魚鹽峴)을 넘으니, 이곳을 지나면 다시 본부(本府 이천)의 땅이다. 마탄(麻灘)의 다리를 건너서 갈산(葛山)의 탕정(湯井 온천)을 구경하고 감로사(甘露寺)에 들어갔다. 옛날에는 탕정이 여덟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섯 개가 막혔고 나머지 세 개만 대나무 홈통을 통해서 탕정으로 들어가는데, 누린 냄새가 독하게 나고 유황(硫黃) 기운이 있었으며 물은 뜨거웠으나 심하지는 않았다. 고질병이 있는 자가 이 물에서 목욕하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행궁(行宮)을 두셨는데 지금은 허물어졌으니, 지금의 사찰 터가 바로 행궁이 있던 곳이라 한다. 갈산(葛山)은 사찰 앞에 바로 마주하여 병풍으로 가려놓은 듯한데, 지세가 자못 높고 넓게 트였다.
이튿날 광복동(廣福洞)으로 가려고 다시 한 여울물을 건너서 전탄(箭灘)의 다리를 건넜는데, 푸른 돌과 흰 모래가 또 다른 아름다운 경치였다. 자작현(自作峴)을 넘어 벽서정(辟暑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마주 서있는 큰 소나무 아래로 세찬 여울물이 소리 내며 흘러가니, 문득 마음속이 탁 트여 후련해짐을 느꼈다.
또다시 작은 배로 현석진(玄石津)을 건넜는데, 큰 배들이 나루를 드나들고 있었다. 장인암(丈人巖)과 주암(酒巖)을 지나갔다. 주암에는 작은 구멍이 있고 구멍 가운데 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물을 떠서 마셔보니 그 맛이 술과 비슷하여 주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송애(松厓)를 넘어서 광복동으로 들어가니, 사면의 여러 산들이 빙 둘러 있어 마치 자물쇠로 잠가 놓은 듯하고 가운데에 큰 들이 열려 있었는데, 밭두둑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환하게 트여 넓어서 따로 한 굽이의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산마을이 듬성듬성 있고 개와 닭이 조용하니, 이곳에 오자 마음과 정신이 아늑하여 무릉도원(武陵桃源)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고 느껴졌다.
온 골짝의 가운데는 모두 깨끗한 물과 흰 돌이 있는데, 가장 기이한 것은 부담(釜潭)이었다. 부담은 큰 가마솥처럼 깊이 패여 있고 폭포수가 바위를 따라 내려와 부담에 떨어지는데 물이 치달리는 기세가 매우 웅장하였다. 못물이 안개를 이루어서 그 속에 음험한 짐승이 있는 듯하였고, 바위 위에는 학사(學士) 박사원(朴士元)이 직접 쓴 율시 한 수가 새겨 있었다.
나는 광복동이 이주(伊州 이천)의 절경(絶境)이라고 익히 들었는데, 지금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골짝이 매우 깊고 험하였으나 동구(洞口)로 들어온 뒤에는 비할 데 없이 탁 트이고 광활하였으며, 전원(田園)에는 또 귤주(橘洲)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충분히 세상을 피해 길이 은거할 만한 낙토(樂土)인데도, 일찍이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산 자가 없고 유람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한 자도 없으니, 이곳은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서 제대로 된 임자를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돌아와 수문(水門)에 이르니, 반석과 샘물이 흐르는 것이 부담과 비슷하나 조금 작았다. 물 가운데 있는 선암(船巖)이라는 돌 위에 연달아 7, 8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옛날에 만든 석문(石門)이라고 한다.
또 사동(寺洞)에 이르러서 광덕사(廣德寺)의 옛터를 보았는데, 두 탑과 깨진 부도(浮圖)와 돌계단이 있고 돌들이 매우 많이 쌓여 있으니, 이 절이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음산(陽陰山)을 올려다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있었는데, 조금 뒤에 산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날리는 눈발이 얼굴을 때리므로 급히 마을 집으로 들어가 피하였다. 다시 배가 드나드는 나루를 건너 가리주촌(加里州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사군암(使君巖) 아래를 지나가니 푸른 절벽이 있는데 그 앞으로 물이 감돌아 흐르고, 광현(廣峴)을 넘으니 고개 아래 바위 사이에 또 두 개의 폭포가 흘러내리는데 마치 흰 명주를 드리운 것과 같았다.
견탄애(犬灘厓)ㆍ문암(門巖)ㆍ원현(院峴)ㆍ응탄애(鷹灘厓)ㆍ산도현(山道峴)을 넘었다. 한지막촌(漢池幕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회현(檜峴)을 넘고 이수(伊水)를 건너서 관아로 돌아왔다.
중대사(中臺寺)는 학봉산(鶴峰山)에 있는데, 이천부와의 거리가 20리로 여기에도 볼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다. 3월 초하루에 배를 타고 부단진(釜端津)을 건너서 중대사로 들어가 복흥루(福興樓)에 오르니, 아래로는 그윽한 시냇물을 굽어보고 위로는 비취빛 봉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멀리 안협(安峽)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니 강물은 좌우에 서로 비쳐 띠처럼 둘러 있고, 복흥루는 지극히 높고 밝고 환하여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서 사람을 엄습하였다. 옛날에는 무주암(無住菴)이 이 사찰의 꼭대기에 있어 무학(無學)이 거주하였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쑥대밭이 되었다.
동구(洞口)에는 산석(山石)이 즐비하고 지나는 길이 구불구불하여 자못 그윽하고 깊은 정취가 있었다. 새로 만든 금부처를 별당에 모셨는데 아직 선실(禪室)에 봉안하지는 못하였다.
조원(調元)과 제경(濟卿)이 뒤쫓아와서 승려들로 하여금 법고를 두드리고 바라를 치면서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게 하니 회포를 풀기에 충분하였으나, 한스러운 것은 승려의 수가 너무 적고 사찰의 규모가 경치와 서로 걸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1] 금년 봄 : 경인년(1710, 숙종36) 봄을 이른다. 도곡은 41세 되던 기축년(1709) 5월 26일에 이천 부사(伊川府使)에 제수되어 약 8개월간 근무하였다.
[주2] 조원(調元) : 도곡의 생질인 권섭(權燮, 1671~1759)의 자로, 호는 옥소(玉所), 본관은 안동이며 권상명(權尙明)의 아들이다. 14세에 아버지와 사별하였기 때문에 백부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각별한 보살핌과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에 19세로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하는 등 한때 시사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으나, 우암 송시열 등이 사사되는 참극을 겪은 뒤로는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일생을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간행본 《옥소집》이 있다.
[주3] 호복(濠濮) …… 느낌 :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세속을 벗어난 무위 자적(無爲自適)의 심경이 우러나온다는 말이다. 호복은 호량(濠梁)과 복수(濮水)의 병칭으로 《장자》 〈추수(秋水)〉에 보이는데, 호량은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한 곳이고, 복수는 장자가 초왕(楚王)의 초빙을 거절하고 낚시를 하던 곳으로, 모두 속세에서 벗어난 곳을 이른다. 진(晉)나라의 간문제(簡文帝)가 화림원(華林園)에 들어가서 좌우를 돌아보며 “마음에 맞는 곳을 찾으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이 수목 사이에 들어서니, 호량과 복수 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會心處不必在遠, 峠然林木, 便自有濠濮間想也.〕”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주4] 거사(巨師) : 불교에서 계를 받은 남자 신도에 대한 존칭어로, 속가에 머물고 있지만 도를 이룬 큰 선생님이란 의미이다. 여자 신도를 높여서 보살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주5] 허환(許綄) 제경(濟卿) : 1674~? 본관은 김해, 자는 제경(濟卿)이다. 도곡의 증조부 이후천(李後天, 1591~1664)의 사위인 허승(許昇)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3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6] 나옹(懶翁)과 무학(無學) : 나옹(1320~1376)은 고려 말 선종(禪宗)의 고승이며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로 나옹은 법호이고 법명은 혜근(惠勤)이다. 21세 때 출가하여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원나라 연경의 지공대사를 찾아가서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이어받고 1361년(공민왕10)부터 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왕명에 의해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조선조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학(1327~1405)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승으로 무학은 법호(法號)이고 법명(法名)은 자초(自超)이다. 18세에 출가하여 묘향산(妙香山)에서 수도하였다. 공민왕 때 원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지공대사(指空大師)를 찾아 불법(佛法)을 구하고, 이어서 법천사(法天寺)에 가서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제자가 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太祖)의 부름을 받아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연경에 다녀온 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머물다가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주7] 지정(至正) 연간 : 지정은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연호로, 1341년부터 1367년까지의 27년간을 이른다.
[주8] 삼인봉은 …… 있다 : 삼인봉은 세 개의 관인(官印)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로, 이에 관한 고사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정도(開國定都)〉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태조가 즉위한 뒤 팔도(八道) 방백(方伯)에게 하교하여 무학을 찾게 하였다. 경기ㆍ황해ㆍ평안 3도의 방백이 함께 길을 나섰는데, 황해도 곡산(谷山) 고달산(高達山)에 고승이 홀로 거처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곳으로 가 세 방백의 인끈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고 짚신을 신고 걸어서 초암(草菴)에 당도하니, 한 늙은 중이 쇠코잠방이를 입고 몸소 남새밭을 매고 있었다. 3도 방백이 앞으로 나아가 ‘이 암자는 누가 처음 세웠습니까?’ 하고 물으니, ‘내가 손수 세운 것이오.’ 하였다. ‘무엇을 보신 바가 있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하니, ‘저 삼인봉 때문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삼인봉이라 합니까?’ 하니, ‘세 개의 봉우리가 앞에 있으므로 삼인이라 합니다. 만일 이곳에 집을 짓게 되면, 3도의 방백이 골짜기 가운데 있는 나무 위에 세 개의 인(印)을 걸어 놓을 때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그 응험(應驗)입니다.’ 하였다. 3도의 방백이 ‘이분이 무학임에 틀림없다.’ 하고, 그와 함께 돌아와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무학을 스승의 예로써 대우하고, 이내 도읍을 정할 땅을 물었다.” 방백은 관찰사를 이른다.
[주9] 추수(追修) : 추선(追善)과 같은 말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행하는 불사를 이른다. 보통 49일까지는 매 7일마다, 그 뒤에는 1백 일과 기일(忌日)에 불사를 시행한다.
[주10] 증명사 : 승려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 입회하여 증명해주는 고승(高僧)을 이르는데, 전하여 증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주11] 흰 …… 책 : 저본에 ‘왈질인본(曰質印本)’으로 되어 있는 것을 문맥에 비추어 전사의 오류로 보고 ‘왈(曰)’ 자를 ‘백(白)’ 자로 수정하였다.
[주12] 손을 …… 썼다 : 원문의 ‘자혈(刺血)’은 손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자기 몸의 피를 뽑아 경문을 베껴 쓰는 것을 이른다.
[주13] 벽허(碧虗)ㆍ천곡(天谷)ㆍ취음(翠陰) : 승려의 이름으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주14] 푸른 노송나무 : 저본에 ‘창회(倉檜)’로 되어 있는 것을 문맥에 비추어 전사의 오류로 보고 ‘창(倉)’ 자를 ‘창(蒼)’ 자로 수정하였다.
[주15] 사리(闍梨) : 범어(梵語)인 ‘아사리(阿闍梨)’의 약칭으로 승려를 이른다.
[주16] 범패 : 인도(印度)의 소리라는 의미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의식을 진행할 적에 사용하는 염불을 포함한 모든 불가(佛家)의 노래를 이른다.
[주17] 벽곡승(辟穀僧) : 곡식을 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생식하며 수도에 전념하는 승려를 이른다.
[주18] 무릉도원(武陵桃源) :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園記)〉에 나오는 말로, 이상향이나 별천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한 동구에서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곳이 하도 살기 좋아 그동안 바깥세상의 변천과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주19] 음험한 짐승 : 일반적으로 여우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용 또는 이무기를 이른 것으로 보인다.
[주20] 박사원(朴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로 사원은 그의 자이고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3)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홍문관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여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별세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서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주21] 귤주(橘洲) :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서쪽 상강(湘江) 가운데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귤이 많이 생산되었고 또 풍경이 아름다워 송(宋)대에는 8경 중 하나로 꼽혔다. 두보(杜甫)의 〈악록산도림이사행(嶽麓山道林二寺行)〉 시에 “무릉도원 인가는 그 구조가 단순하고 귤주 지역 전토는 변함없이 기름지네.〔桃源人家易制度, 橘洲田土仍膏腴.〕”라고 보인다.
伊川諸勝遊覽記
伊川故多水石之勝。以其皆爲吾府藏心不競。經年而未之遊也。今年春。偶與調元談山水。仍起興。並轡而出。行過數步。見村居歷落寄巖谷間。頗蕭爽。涉陳潭。潭水淸澈。湍瀑濺出石罅。决决有聲。又行數步。山勢隆起。諸峰之羅立者。爭效奇於馬前。覺景色自別。又數步而爲卧龍臺。邑中勝觀也。削壁磋砑。高幾三十餘丈。虬松森列。滿厓皆躑躅花。時照映一潭。其景益奇。恨我早來不及賞也。潭廣幾數十畒。深處黛綠。淺處渚灘。潭中衆石錯峙。潭邊又皆白石。潭上有臺。臺上雙松偃蹇。作老龍形。盤石屈曲。揷入水心。渦而成谷。又突而爲臺。或平鋪而若床。或散擲而若碁。或峭如人立。或詭如獸伏。殊形異態。不可名狀。蘆葦離 披於巖石間。臘雪猶未盡消。樵童繫牛川上。入水叉魚。見此。悠然有濠濮間想。余謂調元曰。是潭若在楓岳之萬瀑。則足可甲乙於火龍船龜之間。而恨其處僻而不甚見賞也。調元亦以爲然。又涉甫田川。過孤山。山上穉松數十。丰茸始生。翠嫰可愛。反勝於聳壑昂霄之姿矣。涉嵲建潭。潭瀑激射。颼颼可聽。上有三松。眼界明爽。又其上爲龍淵。山村在其間。幽敻逈孤。便有蕭然出塵之意。過龍卧巖。又過一巖。道途之間。泉聲山色。無非可以助我興者。入小林寺。厓轉山回。洞口深邃。寺樓名講禪。有僧十餘人。又有新竪碑。涉南川上流。入五松菴。架巖爲屋。精洒可坐。巖上有臺。舊有五松故名。今只有二。又無僧。巨師四人棲止焉。是菴處地極高。俯瞰邑居。畦壠錯落。山巒泉灘。隱見於望裏。雖不及龍巖之勝。亦有小小佳致。又涉南川上流還衙。是庚寅二月二十一日也。是月二十四日。又與調元及許綄濟卿。舟渡伊水。水之左右。白石頹積。羣巖騈立。其上卽古城山。古者石築城址。今尙宛然。循覽往跡。自有懷古之感。過古伊洲鎭。至舍人巖。此又與龍巖埒奇者也。蒼壁秀拔。上爲七八峰。瓌巧巉巖。勢凌霄漢。盤石層峙於下。水通 浦環廻於前。奇巖怪石。錯落於水中。瀑流觸撥作聲。噴薄乘騰。如霰雪亂洒。水勢淸激奔猛。甚可觀也。踰檜峴。幽澗瀉出於林石間。其聲鏘然。數里不絶。沿石龍潭而行。潭中有二巖相對。號兄弟巖。午炊軍池浦。踰山道峴。傍蛇島龍淵。踰鷹灘厓。厓極長遠。淸灘白礫。步步可賞。灘流遇石。汩㶁颼飀。行數十里。猶在耳不歇。踰院峴。古廣德院之基也。夕抵楸谷村宿。翌日早發。山腰嵐霧半羃。朝日來照。相與發輝。光景絶奇。涉楸谷川。踰九蹲厓。又有絶壁削立。淸溪廻環。宛似舍人巖境像。過王鳳潭。涉開蓮川。踰開蓮厓。自此以 後。巖石灘瀑觸目。皆是令人應接不暇。過臺巖。巖罅飛流逬落。其下又成灘瀑。過龍巖。形如龍故名。過植松村。長松八株森列。無學,懶翁取種以植者云。暫憇松臺下。又得淸流絶壁至數步。有石臺。其傍有蒼石天成如築。便作釣磯。瀑流噴射。聲極壯。至不辨人語。臺壁之上。非松杉則躑躅也。若値花時。其勝必倍矣。至葛峰下。僧輩以籃輿來待。遂乘而行。至山腰蹔休。山外羣峰。森羅於望裏。山頭積雪尙存。而道上黃花爛開。亦一奇也。踰古歸樂寺基。入菩薩寺。此寺。無學於至正年間始創。洪武二年重修。今其改構者云。居僧只二十餘。大雄殿正對三印峰。眼界快爽。所謂三印者。亦有故事之可記者云。前有老檜列立。蒼翠蔚然。寺多古跡。有一曲甁名無碍瓠。以靑紅段爲纓。無學乞粮時物云。木瓢之黑漆者也。靑紙銀字書華嚴經一軸,延生保命經一帖。上端有畵。萬曆丁酉。 大明瑞安長公主書。並以斑錦紋紗爲衣。金光明經一帖,金字書蓮華經七帖。上端有畵。妙絶可玩。其中兩帖末端。書洪武六年十一月十一日敬書。且曰。我亡耦徽懿魯國大長公主。以功以德。如生如存。故厥追修。靡有遺憾。得此妙經。以金書之。必是恭愍 王筆也。筆法奇妙。末書證明師普濟尊者。下着懶翁二字圖書。又有蓮華經一帖。曰質印本。筆法亦妙。末書施主奉翊大未前德寧府右司尹李英遠,同願善女趙氏妙淸,前郞將門碩琦。又蓮華經一帖。以金字圖畵。而下書經文。其書似亦金字而色頗異。心怪之。見下端。有刺血書及至正九年己丑九月日出血等字。乃知和血故其色如許也。佛殿左。有樹盈抱。長十餘丈。僧云桂樹而未可詳也。過采眞,善住兩菴廢基。踰浮圖嶺。有浮圖四軀。又有碧虗,天谷,翠陰等碑。入觀音菴。上萬景樓樓下又有淸泉。石碓自舂。倉檜鬱 跂。雲達山圍繞。如拱揖狀。佛殿上臺。有靈山殿。施朱炫熀。有玉石佛廿五軀。居僧只有八人。其上小菴名圓明。巖巒奇秀。翠色若滴。稅鞍歇定。魂骨泠然。不覺塵心盡消矣。夜使兩闍梨。各作梵唄聲。仍使各服袈裟。打鑼伐鼓。雜戱齊發。雖似亂聒無章。細看。亦自有節奏。非閒習於平素。不能矣。僧言山虞名高達者。逐猪山谷。猪是觀音變身。帶箭入窟。化其本形。高達因此戒定。修道成佛。今窟中尙有箭鏃。此山本名雲達。而改稱高達者以此云。其言誕甚。而亦足爲山門一古談也。居僧三十人。頗有識字。可與語者。是夜雨作。翌日猶不止。雲氣籠罩。山頂幾藏。全面隱見於煙靄之間。此景眞堪作畵圖也。義相臺在絶頂。上有菩薩菴。辟穀僧居之。路險不得上。濟卿强策登覽。而別無異觀云矣。菴僧進猪毛筆。請書菴額。書與之。留滯無聊。使老僧桂華讀楞嚴經。倚枕而聽。復使僧輩陳雜戱而觀之。天明雨乍歇。遂登輿而行。穿過山頂。路極險截。積雪沒脛。幾危而安。是爲高達峴。過靈隱菴廢址。自此又屢得佳處。使善唄僧學文坐灘上作唄。如數部鼔吹。巖谷皆應。聲出林樾間。更覺奇絶。至無量谷。巖巒聳秀戌削。如高人特立。而翠嫰明麗。姿媚橫生。四山合沓。如張九疊雲錦。幽奇蘊藉。筆難盡述。巖盡。卽曠然開豁。又是別一境界也。到此爲谷山地。而高達山餘支也。泉石灘灣。曲曲愈佳。與二君吟眺移時。不忍捨去。午炊梢村。踰魚鹽峴。過此還爲本府地。橋渡麻灘。觀葛山湯井。入甘露寺。井舊有八。其五塞。其三通筧。入井。臭羶而烈。有硫黃氣。溫熱則不甚焉。有痼疾者浴之。頗有效。世祖嘗臨幸。有行宮今毁。今之寺基卽其處云。葛山直對寺前。如屛障之遮。地勢頗高闊矣。翌日。將往廣福。復涉一灘。橋渡箭灘。翠石白沙。亦自有佳勝。踰自作峴。少憇辟暑亭。長松離立。鳴灘流於其下。心境頓覺疎暢。又舟渡玄石津,船出入津。過丈人巖,酒巖。巖有小穴。穴中有水。人取飮之。味似酒故名云。踰松厓。入廣福洞。四面羣山環擁如鎖。中開大野。田疇綺錯。晃朗夷曠。別作一曲洞天。山村滴瀝。雞犬靜寂。入此。心神窅然。覺武陵桃源不是過也。一洞之中。盡是淸泉白石。而最奇者釜潭也。窪深若釜。瀑流從巖石而下。落於潭。奔掣甚壯。潭水霮䨴。疑有陰嘼。石上。刻朴學士士元手書一律。余慣聞廣福爲伊州之絶勝。今見良然。洞府極其深阻。而旣入之後。爽豁無比。田園又有橘洲之美。足爲遯世長往之樂土。而曾未有來卜者。亦無遊覽而記其勝者。無乃天慳地秘。以待其人歟。回到水門。盤石泉流。似釜潭而小。水中有石。號船巖。巖上。連穿七八穴。古所作門者云。又至寺洞。觀古廣德寺舊址。有雙㙮及破浮圖階砌衆石堆積甚多。可知其爲巨刹也。仰見陽陰山。雲霧罨羃。俄而山雨霏霏。飛雪撲面。急入村舍以避之。復渡船出入津。到加里州村宿。翌朝。過使君巖下。有蒼壁。水廻其前。踰廣峴。峴底巖間。又有雙瀑下垂如匹練。踰犬灘厓,門巖,院峴,鷹灘厓,山道峴。午炊漢池幕村。復踰檜峴。涉伊水還衙。中臺寺在鶴峰山。距本府二十里。亦有勝致可賞。三月初一日。舟渡釜端津。遂入寺。登福興樓。下臨幽澗。上對翠巘。遠瞻安峽諸山。江水映帶。左右樓極軒敞爽朗。淸風自來襲人。古有無住菴在寺顚。無學所住也。今毁爲蓬田洞口。山石犖确。行逕屈折。頗有幽邃之趣。新造金佛。置在別堂。姑未安禪室矣。調元,濟卿追到。使僧輩伐鼓打鑼。陳雜戱。足可暢懷。所恨僧太少寺大小。不與景相稱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