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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깁니다. 책을 읽다보니 온갖 생각들이 자꾸 자꾸 기어나와 두서 없이 적다보니 기네요. ;;
1. 나는 누구인가? - 나는 균열, 불안정, 혼돈,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한다. 이 모든 것들, 그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들, 외부적인 것들, 나의 안정된 일상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것들로부터 나의 일상을, 나의 안정을 지켜야 한다. 나는 어떤 특별한 것, 개성적 인 것, 모난 것, 뾰족한 것, 송곳 같은 것, 혹은 칼날 같은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의 일상을, 이 안온하고 정돈된 일상을 상처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일상, 눈에 뜨지 않게 내가 관리해 오고, 통제해 온 이 일상이 파괴된다는 것을 나는 견딜 수 없다. 나는 평균적이고 균일한 존재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폭력인가? 우리는 이 나를 너무나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인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혹시 이런 '나'가 아닌가? 우리가 구축해 온 세계, 단란하고 안정되고 별일 없는 하루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그토록 지속해 오고 유지해 왔던 세계에 서서히 균열히 발생할 때 느끼는 공포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우리는 그 일상을, 안온하고, 별 일없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도구로, 노예를 사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새벽에 일어나 어떤 유령처럼 냉장고에 채곡채곡 쟁여진 고기 덩어리들을 꺼내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것은 너무나 공포스러운 장면일 것이다. 그 장면, 그 공포 앞에서 우리-나는 무엇을 보아야 했던가? 나의 무구한 일상이 무너지는 그 장면 앞에서 말이다.
우리가 꾸려 나가는 일상은 그 속에 자신도 모르게 공모했던 어떤 폭력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너무나 낯설며 기이한 행위에 대해 경계 지우고 빗금 치며 지우고자 하는 폭력 말이다. 우리의 가치, 제도, 질서, 도덕, 이것은 이 이질적이고 낯선, 우리의 일상에 갑자기 틈입하는 낯선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낯선 타자-아내에 대해, 이 불가해한 타자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를 <채식주의자>는 묻고 있지 않은가? 작가가 이 연작 소설의 처음을 '나'라는 일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시작한 이유가 아닐까?
2. 동박새의 비밀 - <채식주의자>는 다양한 폭력의 구조가 중첩되어 있다. 우선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남성적 가부장제에서 비롯되는 선명한 폭력이 있다. 이 폭력 앞에서 영혜와 인혜는 명백한 피해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이 폭력은 결혼 이후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리고 이 구조적 폭력의 밑바닥에는 근대 이성 중심의 세계 인식이라는 인식의 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정상/비정상이라는 울타리를 치며 자신과 다른 존재,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를 배제하고 가둬버림으로서 작동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성으로 포섭하면서 작동하는 폭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작 소설의 제목이 왜 <채식주의자>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영혜라는 불가해한 인물의 이해할 수 없음을 <채식주의자>로 호명함으로써 이성의 체계 안으로 포획하려는 근대적 사고의 폭력성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 회사 사장이 마련한 식사 자리에 초대된 영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로 호명함으로써 영혜를 자신들의 이해의 범위 안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이 근대적 인식의 폭력 이라는 구조속에서 어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남성중심적 가부장 질서속에서 피해자인 인혜는 이 구조속에서 가해자가 된다. 인혜는 영혜와 자신의 남편을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들로 규정하여 정신 병원에 가두고자 한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이런 구조적이고 인식론적인 폭력의 이면에 깔린 더 근원적인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폭력성은 생명을 지닌 존재가 지닌 근원적이고 필연적이며 존재론적인 폭력성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하며 확장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착취(搾取)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짜내어(搾) 취(取)해야 하는 것이다. 영혜가 식물-되기를 넘어 녹아 없어지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존재 그 자체의 폭력성에 대한 도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동박새의 비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영혜가 동박새를 물어 뜯은 것일까? 아니면 포식자에 의해 물어뜯긴 동박새를 영혜가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일까? 어찌보면 포식자에게 물어 뜯긴 동박새를 영혜가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왜냐하면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혜가 이 '작고 나약하며 연약한' 동박새를 물어 뜯었다는, 영혜의 이런 폭력성을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혜는 포식자에 의해 물어 뜯긴 동박새에게 자신을 이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채식주의자>의 세계를 포식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읽는다면 영혜야말로 포식자-아버지라는 이름의 질서와 가치-에 의해 물어 뜯긴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박새의 비밀을 이렇게만 읽는다면, 뭔가 읽어내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의 세계에서 포식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모호하지 않은가? 영혜는 포식자에 의해 상처입은 피해자이기만 한 존재인가? 그녀는 (남편의 말에 따르면) 고기를 잘 다루고 맛을 낼 줄 안다.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아버지가 잔인하게 죽여 고기로 내놓았을 때, 그것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다. 그녀도 이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포식자였다. 이는 동박새도 마찬가지다. 동박새는 포식자에게 물어 뜯긴 가련한 연약한 짐승인가? 동박새도 그들의 자연-먹이사슬내에서 또다른 포식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폭력적인 가해자로서의 포식자와 그 폭력의 가련하고 연약한 희생자, 그리하여 영혜와 동박새를 동일시하는 구도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얇은 읽기가 아닐까?
<채식주의자>는 우리 모두가 폭력의 구조 속에 층층이 얽혀 있는 존재임을, 포식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폭력의 구조이다. 이 세계속에서 동박새도, 영혜도 포식자일 수밖에 없다. 영혜가 꾸었다는 꿈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동박새를, '이 가련하고, 연약한 생명체'를 물어 뜯은 영혜의 행위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이 '작고 연약한' 생명마저도 이 필연적인 폭력의 세계에 몸닫고 있으며, 영혜가 동박새를 물어 뜯은 것은 우리 모두가 몸닫고 있는 이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물어 뜯음은 아니었을까?
3. 문제적 인물, 영혜 -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 편의 연작 소설을 영혜의 변신을 모티프로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편 <채식주의자>, 생명체가 몸 담고 있는 폭력의 기반/구조에 대한 드러남과 그것에 대한 영혜의 존재론적 거부. 2편 <몽고 반점>, 꽃과 꽃, 식물과 식물의 교합이라는 상징을 통한 능동적인 동물성의 세계에 대한 거부와 식물성의 세계로의 이행. 3편 <나무 불꽃>, 동물성과 식물성의 세계, 그 모든 능동과 수동에 대한 거부와 - 왜냐하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우리는 먹어서 사는 존재이고, 먹는다는 것은 착취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물질 그 자체, 심층, 모든 죄 없는 세계로의 사라짐이라는 구도로 말이다.
모든 생명체가 놓여 있는 존재적 곤경을 벗어날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대지 자체, 그 심층으로 사라지거나, 하늘로 상승하여 초월하는 도리밖에 없다. 영혜는 물구나무 서서 대지 그 자체로 녹아 사라지고 싶어 한다.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간 것 뿐이야.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거기 서서 기다린 것 뿐이야. ... 비에 녹아서, 전부 다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거든." 그것은 인칭, 개체, 자아가 붕괴된 세계다.
영혜가 겪고 있는 것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무구한 생명 - 고기로서의 동물에 대한 동정과 연민에서 비롯된 인간이 겪고 있는 윤리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행위를 우리는 어떤 윤리적 선언으로 읽을 수 있을까? 회사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에 초대된 낯선 타자, 영혜에 대해 '채식주의자'로 호명하는 것은 정당한가? 우리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주칠 때, 그것을 이성의 논리로 분류하고 통합하고자 한다. 영혜의 행위에 대해 '채식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행위는 곤혹스러운 어떤 타자에 대한 우리의 방어 기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호명 행위는 분류이며 위계질서화이며 폭력일 수밖에 없다.
영혜의 행위는 어쩌면 윤리적 행위 이전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에 끊임없이 틈입하는 어떤 낯선 존재, 어떤 물질성 그 그 자체에 대한 존재적 통증인지도 모른다. 영혜가 고기를 거부하는 것은 동물의 고통에 대한 연민, 동정에서 비롯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밑바닥에서 밀려 올라오는 어떤 것과의 마주침의 순간이다. 그것은 어떤 선택이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의 목소리, 얼굴들, 그 웅성거림, 소음들, 신음들, 비명들이 영혜의 신체를 통해 비어져 나오고 밀려 나온다. 그것들은 무자비하며 잔혹한 존재들이다. '그것' -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얼굴들, 목소리들, 웅성거림, 소음들, 신음들, 비명들의 정체를 어떤 개체, 혹은 인칭으로 특정할 수 없다. 그것들은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것, 그것들의 아우성이기 때문이다.
영혜는 그 모든 것들의 아우성을 실어나르는 영매(靈媒)인지도 모른다. 영매는 신의 목소리를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들, 낯선 타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혜가 실어 나르는 그것들의 목소리, 아우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것들은 인간의 문명, 문화, 이성, 아버지, 질서, 제도, 언어에 의해 배제되고 밀려나고 저 어둠의 깊은 동굴 속으로 추방된 것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영혜는 그 목소리를 식물들의 목소리, 웅성거림, 비명으로 들었으나 그것들은 영혜의 신체 안에서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웅성거림, 비명으로 들끓는다. 영혜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결국 식물성의 세계가 이닌, 인칭도 개체도 자아도 사라진 피와 뼈, 뭉개진 얼굴, 조각난 신체들이 우굴거리고 웅성거리는 세계가 아닐까?
4. 몽고반점 - 예술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환각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잔혹한 실재, 그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결여일 수 밖에 없는 욕망을 가리는 장막이며, 밤의 우울, 소음, 공포, 그 끔찍한 고통을 차단하는 커튼이다 .- 개츠비가 밤마다 벌이던 그 화려한 가면 무도회를 생각해 보라. 그가 가리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삶의 고통이었다. 인간은 '실재의 사막'을 결여로서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그 실재에의 욕구에 노출된 자는 눈 멀 수밖에 없고 붕괴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진리에의 욕구는 상처받는다. 진리에의 욕구는 법의 한계, 아버지-신의 한계를 초과하고자 하기에, 그리하여 예술을 추구하는 자는 어떤 장막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오월의 신부'라고 불리던 그(인혜의 남편)가 느꼈던 결핍은 무엇일까? 그가 찾고자 했던 진리는 무엇일까? 그는 왜 영혜의 몸에 남아있던 몽고 반점, -" 약간 멍이 든 듯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p.100)"-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와 영혜의 교합 - 그와 영혜가 벌였던 행위를 우리는 섹스라고 호명할 수 없다. 그것은 환각과 환각의 결합, 꽃과 꽃, 식물과 식물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식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성적 욕망의 실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적 결합은 그 안에 필연적으로 어떤 폭력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영혜의 '교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허구적인 성적 결합이라는 상상을 무너뜨릴 정도로 폭력적이만, 또 그만큼 우리는 붕괴시킨다. 그와 영혜는 교합을 통해 어떤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는 정말 영혜의 신체,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의 신체,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영혜의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의 목소리, 영혜의 신체 속에서 우굴거리는 그것들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심층으로, 존재의 바닥으로 미끄러져가는 영혜가 달리, 상승하고자 하는, 초월하고자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영혜가 분열증을 앓고 있다면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와의 교접을 통해 그는 캠코더의 전원을 끄며 "이제 끝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절정도 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반복되어야 한다. 침묵 속에서 그 열락 속에서 영원히, 그러니까 촬영은 여기에서 마쳐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영원한 반복, 이 열락이 지옥임을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영혜가 꽃과 꽃, 식물과 식물의 교합을 통해 저 심층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그는 한마리의 새가 되어 상승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5.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났다.(The time is out of joint/햄릿) - 문제적 인물은 영혜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쩌면 인혜일 것이다. 편집증적 환자인 나(영혜의 남편)와 분열증자인 영혜, 그리고 우울증자인 자신의 남편의 세계를 모두 겪고 있는 인혜야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가? 우리는 <나무불꽃>에서 '시간은 흐른다.'라는 기묘한 문장과 만난다. 이 문장은 마치 음악의 리토르넬로처럼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인혜에게 시간은 어긋나 버렸고 이음매가 탈구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그 성실의 관성으로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했던" 인혜에게 영혜의 시간은 영원히 정지되어 버렸고 남편의 시간은 새처럼 저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겪은 인혜에게 시간은 무심하고 무참하게 흐른다. "그녀는 계속 살아갔다. 등 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 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대지의 시간과 초월의 시간 사이에서 인혜의 시간- 인내와 성실, 책임으로 꾸려온 시간의 이음매가 탈구되고 그 틈을 비집고 억압된 것들이 들어온다.
인혜의 시간은 복구될 수 있을까? 인혜가 고뇌했던 그 수많은 "~할 수 없었을까?"라는 가정법의 시간, 그 과거의 시간들, 그리하여 꿈이었으면 하는 시간들은 복구될 수 없다. 그러나 인혜의 시간은 영혜와 남편의 시간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의 고통과 슬픔, 덧없음, 잔혹함을 모두 겪어 낸 인혜의 시간, 인혜가 감내한 '인내'가 시간의 형식이라면, 그녀가 매순간 그 굴욕과 슬픔, 고통에 맞선 '성실과 책임'이야말로 인혜의 시간의 내용이다. 어쩌면 그녀는 그 무수한 추문과 굴욕을 견뎌낼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해 성실과 책임을 다해낼 것이다.
영혜는 모든 인간적 가치, 제도, 질서가 붕괴된 세계, 영원히 정지된 시간 속으로 진입했다. 남편은 인간적 가치, 제도, 질서의 경계를 벗어나 그 질서, 가치를 구현하는 근원적 일자의 세계로 초월하고 상승해 버렸다. 남편과 영혜의 세계에서 시간은 무의미하며 덧없다. 그것은 어떤 고정점을 찍을 수 없다. 그곳에는 어떤 윤리적 고뇌, 윤리적 선택이 자리잡을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끄~을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윤리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저 심층으로의 사라짐도, 상층으로의 초월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적 고뇌가 아닐까? 인혜의 고뇌야말로 '윤리적 고뇌'가 아닐까?
자신을 잠식해 들어오는 그 무섭고 어둡고 무자비한 숲을 노려보며, 인혜는 죽음, 사라짐, 초월, 대지로의 녹아 내림에 맞서 '피흘리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끄~을고 살아갈 것이다. 인혜는 영혜를 구급차에 태우고 정신 병원을 나서며, 한때 자신을 잠식하고 자는 숲을 끈질기게 응시한다. 그 고통, 그 아픔, 그 곤혹스러운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항의하듯, 쏘아보며, 끈질기게 응시하는 시간이야말로 인혜의 시간이며, 우리의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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