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낮고 은밀한 소리
최문희
해마다 이른 봄이면 집 근처 대법원 담을 에워싼 산수유꽃 무리와 마주치게 된다. 그럴 때면 꽃들이 전해 주는 낮고 비밀한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최고 권력의 상징인 담장 안쪽 대법원 건물의 위용과는 사뭇 다른, 소박한 몸짓 속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품은 산수유. 그 꽃들이 전해 주는 낮고 묵직한 소리가 무뎌진 나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 같다.
산수유꽃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빛깔의 유려함도 없다. 노랑이지만 지극히 수수하고 순한 빛을 띠고 있다. 꽃잎의 모양새 또한 또렷하지 않다. 가녀린 실 끝에 작은 몽우리를 맺어 그 실꽃들이 모여 꽃술을 이룬다. 꽃잎이라 하기에도 그 형태가 빈약하고 허술하다. 그 엉성하고 가녀린 꽃술들이 송이를 이루고 잎이 피기 전 작은 나뭇가지에 촘촘히 달린다. 그 송이의 무리가 모여 비로소 은은한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무심한 듯 무리 지어진 산수유꽃 앞에 걸음을 멈출 때면 그 겸양의 자태에 이끌려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십여 년 전, 정치인 남편을 둔 친구를 따라 지방의 산수유꽃 축제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현장에 이르렀을 때 정치인은 물론 그들과 연을 맺고자 하는 정치지망생들과 지방공무원, 때맞춰 한몫을 보려고 달려온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흥청거림과 소란으로 북적이는 축제와 유리된 채 나는 고즈넉한 마을의 정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산과 산의 능선이 만나는 골짜기에 소담스레 자리한 작은 마을. 그 안의 몇 채 되지 않는 집들. 사이사이 몇몇 작은 밭들이 끼어 있는 그 마을은 온통 산수유꽃 천지였다.
축제 현장이 떠들썩하게 달아오를수록 나는 그들과 동떨어져 골짜기를 온통 뒤덮은 산수유꽃에 마음을 빼앗겼다. 꽃이라면 자랑하고 뽐낼 화려함이 있으련만 산수유꽃 천지에는 그런 눈부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 나직한 음성을 들려주고 있었다. 산수유꽃이 들려주는 그 은밀한 소리! 그 소리가 나를 내밀하고 고요한 공간으로 인도하였다.
중학교 영어교사와 공무원을 거쳤던 나는 70년대 말 국책연구소에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 성적 덕德으로 최고 책임자인 연구원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평연구원으로 입사한 지 1년 만에 선임연구원으로 승진하며 거침없는 성장을 이어 갔다. 해외조사담당 과장이었던 내 임무 중 하나가 국가미래성장 핵심 과제의 하나인 해외과학기술인력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연구소는 미국, 독일, 네덜란드, 일본 등에 다섯 개의 지사를 두고 있었다. 나는 해외지사를 통하여 여러 나라에 흩어진 우리나라 과학자들을 연구원으로 유치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업무와 관련되어 자주 접촉하게 되었던 그들은 한결같이 정갈하고 예의 바른 매너와 탄탄한 실력과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훌륭한 품성까지 겸비한 그들이었기에 모두의 시선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무렵 교만에 젖어 있었던 나는 곧잘 ‘당신들은 여건이 허락하여 유학 갈 수 있었을 뿐, 특별히 우수하여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야. 나도 유학할 형편만 되었다면 당신들을 얼마든지 능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그들을 내심 과소평가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연구소에는 일정한 자격시험을 거쳐 해외연수 기회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해외 수학의 기회를 좀처럼 얻기가 어려웠던 그즈음, 운 좋게도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연구소 내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자만으로 우쭐대고 있던 나는 그렇게 잔뜩 달뜬 마음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대학에서의 강의는 타원형 라운드 테이블에 교수와 10여 명의 학생들이 빙 둘러앉아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첫 강의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고,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낭패가……. 첫 강의에서의 불통이 두려움이 되었다. 이후에도 머릿속이 하얘져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암울한 수렁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꽤 여러 달 동안 쩔쩔매며 혼신의 땀으로 불통의 강의를 겪어 내야 했다. 영어 잘한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꽤 잘난 체하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런 절망의 나날 속에서 묘하게도 지난날 과소평가했던 유치 과학자들의 얼굴이 한 사람 한 사람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들을 향한 때늦은 존경의 념念이 솟구쳤다. 지난한 언어의 불통 속에서 수없는 절망과 좌절을 헤쳐 나와 학위를 받고 미국 주류대학과 기업에 교수로, 또 중견 간부로 당당히 진입한 그들의 진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연구원의 비서실에 근무했던 D양의 이야기다.
나의 업무는 해외사무소 실적 분석, 사업 및 운영비 전도, 해외정보 수집, 우리나라 전자・기계 공업을 홍보하는 영문잡지 발간으로 연구원장의 결재를 직접 받아야 하는 일이 잦았다. 연구원장 비서로 일하는 D양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천여 명의 연구원 중 여성으로는 단 둘뿐인 학부 출신이었다. 어느 날, D양으로부터 자신과 여동생을 데리고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사이에 또 다른 여동생이 있다는 내밀한 가정사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암울하고 불행한 현실을 유학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도움을 청했다. 유학을 도약의 기회로 삼으려는 의도였으리라.
나는 ‘남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되어 버리는 고질적인 성향 탓으로 그녀를 돕기 위한 온갖 네트워크를 다 가동하였다. 미국 산호세 한인회장으로 있는 고향 사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입사 동기 등등 연줄이 닿는 곳이면 모두 매달렸으나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스칼라십을 받을 정도의 토플 성적도 아니었고, 재정적 지원을 받을 어느 한 곳도 없는 여건에서 더 이상의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최후 수단을 강행하게 되었다. 연구원의 지사인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독일 프랑크푸르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일본 도쿄사무소 중의 한 곳에 현지 채용인으로 자리를 먼저 잡고 유학의 기회를 모색한다는 전략이었다. 고심 끝에 연구원장과의 면담을 시도했다. 평소 나에게 과분한 신임과 지원을 해 주셨던 분이었기에 웬만하면 청을 들어주리라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D양은 바로 곁에서 일하는 비서가 아닌가. D양의 불우한 환경과 사정을 호소하면 현지 채용 정도는 수용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충격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최 과장, 그런 사람은 도와줄 필요가 없어요. 교만하기 이를 데 없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은 손잡아 줄 가치가 없습니다.”
기성세대의 어른으로 웬만하면 젊은 20대의 꿈을 키워 줄 법도 하건만……,
그때의 냉엄하고도 단호한 그분의 반응은 예리한 일침이 되어 내 삶의 길목에서 강한 울림으로 남게 되었다. 냉정하고 교만한 태도와 극도의 이기적인 성격이 그녀의 걸림돌이 되어 막아설 줄이야.
D양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녀가 유학을 떠나고 10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보사부 국장을 역임한 후 ○○개발원 원장을 하고 있던 E대 출신의 S씨가 ‘참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학부 은사님을 찾아뵈었는데, 그 은사님이 제자인 S씨에게 편지 한 장을 꺼내 보이며,
“이런 애는 도와줄 가치가 없어. 박사학위를 마쳤으니 교수 또는 기관에 취업을 도와 달라는 편지인데, 내가 왜 이런 버릇없고 이기적인 인간을 도와줘야 하나?”
라며 S씨 눈앞에서 편지를 죽죽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던 나는 연배가 S씨와 비슷하고 학부와 전공이 같은 D양이 언뜻 떠올랐다. 놀랍게도 그 ‘도와줄 가치가 없고 버릇없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지칭된 사람이 D양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몇 년이 더 흘렀을 즈음, 귀국한 D양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긴 시련의 터널을 뚫고 나온 그녀의 인간적 성숙을 기대했던 나는 또 한 번의 실망을 겪어야 했다.
“여고 다닐 때 모든 선생님이 친구들한테 저처럼 되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들이 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여 다 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선택한 뒤라야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그녀의 어이없는 교만을 보며 씁쓸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본질과 특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지나온 세월 동안 어떤 상황 속에서도, 또 어떤 대상에게도 ‘나로서 돌파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교만으로 비칠 만큼 자기 방어적 모습이 드러나곤 했다.
무상으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일까, 마음의 바탕과 인격을 닦아 성숙한 자아를 키우는 것이 아니던가.
그 표현 방식으로 겸손과 겸양, 예의 같은 덕목이 될 것이다. 이 평범한 지혜를 내 것으로 삼지 못하는 우愚를 거듭하며 살아왔다. 그럴 때마다 영락없이 쓰디쓴 대가를 치르기도 하면서.
꽃들은 온 세상에 그 아름다움을 떨치며 피어난다.
산수유꽃은 수줍은 듯 겸양의 모습으로 피어, 두 계절 동안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며 가을의 열매를 맺는다. 수수한 빛깔로, 겸허의 몸짓으로, 낮은 곳을 향하여 핀다. 그 꽃은 알알이 내면의 성숙을 다져 유난히 투명한 붉은빛으로 실実한 열매를 맺는다.
나는 그 붉은 열매 속 성숙을 갈망한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산수유꽃이 인도하는 침잠과 성찰의 공간에 나를 누이며 자아 정렬의 의례儀禮를 치른다.
최문희 | 2018년 『문예바다』 신인상 수필 당선. 한국기계연구원 및 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 겸 교수 역임. 현재 서초구 문화센터 영어강사.